5. 논쟁의 의의
1. 유(有)의 주장에 대한 비판
1) 파사(破邪)의 의미의 고찰
『중론』은 논쟁의 서적이다. 동아시아 전통적인 표현으로는 파사(破邪)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중론』의 파사 곧 부정의 논리는 나타난 개념의 모순을 지적하고, 사실에 반해서 까지도 개념을 부정했다고 서양학자에 의해서 일반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중론』은 “개념의 모순”을 지적했다고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중론』은 결국 프랑스의 E ‧ 뷰레스후가 말했던 것처럼 회의론을 설한 것으로 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일방적 단정적인 주장은 어떤 것도 서술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공관에서 출발하는 대자대비의 이타행은 어떻게 성립할까. 그 의의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고 하지 않는 것일까. 『중론』의 이른바 파사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고찰해보기로 한다.
2) 『중론』의 논리 -푸라상가
대저 기본적인 태도로써 “공(空)의 철학은 정해진 교의(敎義)가 되는 것을 갖고 있지 않다. 중관파는 결코 자신의 주장을 세우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일은 그대로 나가르주나의 설명 중에 있다고 말했다.
“만약 우리에게 무언가 주장이 있다면 그러면 마땅히 그와 같이 우리는 이론적인 결함이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주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땅히 그와 같이 우리들에게는 이론적 결함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그의 저서 속에서 “이론의 배척”에서 설하고 있다. 나가르주나 제자였던 아리야데바도 같은 취지라고 한다.
“만약 사물이 있다고 하든가 없다고 하든가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하다든가 라고 하는 주장의 존재하지 않는 사람. 이 문제에 대해 오랜 시간을 허비해도 그것을 결론짓는 것은 불가능하다.(『사백론』제16장 25)
나가르주나가 자주 사용하여 상대를 논파한 논리를 푸라상가라 한다. 용수는 상대와 논쟁을 벌여 상대의 논리의 허점을 지적하여 상대방의 질문자체가 모순이 되게 하는 논리방법을 선택하였다. 프라상가논법에 대해서 중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논쟁자가 용수에게 질문하였다. “만약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공이라고 한다면 부처님도 공이고 부처님이 설하신 교법도 공이요, 부처님의 진리를 믿고 따르는 승단도 공이 된다. 이렇듯 끝까지 공을 주장한다면 불보 법보 승보를 다 파괴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당신의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이렇게 논박하자, 용수는 그것이 공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지 않고 상대의 논리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당신은 내가 불보‧법보‧승보를 공이라고 말한 것 때문에 불법을 파괴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당신의 주장대로 본다면 부처님은 불공(佛空)이 되어야 하고, 부처님의 진리에 대한 가르침은 법공(法空)이 되어야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승단은 승공(僧空)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불공‧법공‧승공이 되어야 삼보를 파괴하지 않는 것이 된다는 것이 된다. 당신의 주장대로 불공이라고 한다면 부처님이 지금 여기에 있어야 할 것이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영원히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이 세상 제법이 영원히 존재한다면 부처님은 결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무상(無常)하다든지, 모든 존재가 무아라든지 하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공으로서 삼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하기 때문에 비로소 삼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중론'에서는 반대자의 견해를 먼저 든 뒤, 용수 자신의 비판적 입장을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다른 저술인 『회정론(廻諍論)'에서는 인도의 많은 학파들 중에서 일체 존재가 실재한다는 주장을 펴는 니야야(Nyaya)학파를 비판하고, 불교내 학파로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aastivaadin)의 견해를 비판하고 있다. 특히 설일체유부에 대한 비판은 '중론' 대부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용수는 유부의 사상적 특성을 법유(法有)라고 보고 그 사상의 근저를 이루는 自性(svabhava)의 개념을 철저히 비판하였다. 용수에 의하면 이 자성이란 연기(緣起) ․ 공(空)과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유부는 일체 현상의 근본인 법이 자성으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용수는 이 세상의 제법은 인연에 의해 생김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러 가지 인연으로 생긴 법 衆因緣生法
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하네. 我說卽是無(空)
또한 이를 가명이라 하고 亦爲是假名
또한 이를 중도의 뜻이라고 하네. 亦是中道義
일직이 어떠한 한 법도 未曾有一法
인연으로 생기지 않음이 없네. 不從因緣生
용수는 이 세상 어떠한 존재도 인연에 의하여 존재하지 않음이 없으며 일체존재는 실체적 자성이 없다고 하였다. 그 어떤 자성도 가명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자성의 개념은 연기의 입장과 위배되는 것이며 공의 개념과도 배치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성의 개념을 용수는 '중론' 전체에서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다. 곧 설일체유부에서는 일체현장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근본 실체로서 법의 자성을 주장한 것에 대하여, 용수는 모든 존재에 그러한 실체적 자성이 있을 수 없다 논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일체 존재 현상이 실체적 자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연기하고 있는 것으로 곧 자성이 없는 것 공하기 때문에 연유하는 것이라 한다. 따라서 연기와 공의 입장에서 자성의 개념을 비판하였다. 용수는 『중론'에서 일체사물이 연기이고, 공성(空性)의 존재임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3) 아리야데바의 논쟁
『반야경』의 공(空)사상에 정통하여 대승불교를 크게 일으켜 제2의 석가로 일컬어지는 나가르쥬나(Nagarjuna 龍樹, 150~250)는 8종의 조사로 일컬어지고, 그의 철학은 중관파를 성립시켰다. 용수의 제자로 그의 사상을 크게 편 사람으로 아리야데바(聖提婆 Aryadeva, 170-270)와 라훌라발타라(羅侯羅跋陀羅 Rahulabhadra, 200-300)가 있다. 아리야데바는 용수의 공사상을 선양하고 특히 외도와의 쟁론을 벌여 상대를 논파하였다. 그는 외도를 심하게 비판하여 결국 논적의 원한을 사서 암살되었다고 전한다. 아리야데바는 『百論』을 지었는데, 이 『백론』은 나가르주나의 『中論』 『十二門論』과 함께 중국 삼론종의 근본 논서로 추앙되고 있다. 아리야데바의 생애는 매우 극적인 삶이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자만심이 매우 강하였던 모양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진리가 아닌 삿된 교의에 대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논파하였다. 이 과정에서 다소 과격한 논조로 외도들을 비판하였다. 전기에는 그가 어느 날 논적을 따라 힌두의 신전에 들어가 외도를 논파하고 신상(神像)의 눈알을 뽑았다. 그는 신(神)과의 대결에서 자신도 그 대가로 한쪽 눈을 잃게 되어 애꾸눈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러한 행적은 많은 외도들의 두려움과 원망을 샀고 마침내 수많은 적을 만들게 되었다. 그의 말년은 이런 원망을 산 외도에 의해 살해되었다. 어느 날 숲속에 홀로 선정에 들어 있을 때 한 암살자가 침입하였다. 그는 무방비 상태로 선정 속에 있는 아리야데바를 노려 살해하였다. 그런데 아리야데바는 저항하지 않고 외도의 칼을 맞으면서도 그 사람을 용서하고 도망가도록 했다고 한다. 이를 안 제자들이 분개해 하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 모든 존재들의 궁극의 법칙은 공(空)하다. 그런데 어떤 이가 친구이며 어떤 이가 적이란 말인가. 어떤 사람이 죽이고 어떤 이가 죽임을 당한다는 것인가. 세상 모든 존재들의 궁극의 법칙은 공(空)하다. 해침을 받는 자도 없고, 또한 해치는 자도 없다. 지금 그대들은 어리석음의 독약에 취해 있다. 그대들은 지금 부질없는 견해에 집착하여 울부짖으면서 갖가지 업을 짓고 있다. 그대들은 깊이 생각하여 그를 추적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라고 하였다.
아리야데바와 외도였던 마명(馬鳴)과 논쟁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마명이 불교에 귀의하기 전 한때 유명한 외도로 불교계와 자주 논쟁하여 불교를 논파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아카데미의 상징이었던 날란다에 찾아와 논쟁을 청하였지만 그의 명성 때문에 감히 나서는 자가 없었다. 이에 날란다 대학의 마하깔라라고 하는 일종의 호법신이 당시 남인도에 있던 용수보살에게 도움을 청하였다고 한다. 용수가 대중에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도를 물었다. 그때 아리야데바가 자진해서 날란다대학에 가겠다고 하였다. 용수보살은 아리야데바가 안심되지 않았던지 논쟁의 리허설을 하였다. 곧 용수가 외도인 것처럼 꾸미고 논리를 펼치며 아리야데바에게 미리 논쟁을 하여 어떻게 할지를 가르쳐 주었다. 아리야데바는 날란다에 가서 마명과 대론하여 마침내 그를 설복시키게 된다. 아리야데바는 약속대로 논쟁에 진 마명을 서고에 가두었다. 서고에 갇힌 마명은 화가 치밀어 서고의 경전들을 흩트려버렸다. 이때 마명의 눈에 확 들어오는 경전 구절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이런 일을 미리 예견해 놓은 부처님 말씀이었다. 이에 마명보살은 크게 참회하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쳐 참회문을 짓게 된다. 이것이 마명보살의 “참회문”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아! 위없는 스승 금강지불 등 시방에 계신 모든 불보살님과 청정 승가이시여, 저희들을 굽어 살피옵소서.
저희 000는 시작 없는 전생부터 지금까지 번뇌인 탐욕과 분노와 무지의 힘으로 인하여 신업과 구업과 의업을 통해 지은 선하지 못한 열 가지 업, 무간죄 다섯 가지, 이것과 가까운 죄 다섯 가지와 별해탈계(악업에서 해탈하는 하나하나의 계목)를 어긴 것, 보살의 배워야 할 것을 어긴 것, 비밀의 가르침의 맹세를 어긴 것, 부모를 공경하지 않은 것, 전승사와 아사리를 공경하지 않은 것, 해탈을 추구하는 도반들을 공경하지 않은 것, 삼보께 해를 끼친 업, 승가를 비난한 업, 중생에게 해를 끼친 업 등, 내가 스스로 짓거나, 남에게 짓게 했거나, 남이 짓는 것을 따라서 기뻐했던 일, 선하지 못한 죄의 무더기들이 삼선도와 해탈의 장애가 되고, 윤회와 삼악도의 원인이 됩니다. 모든 죄업을 위없는 스승이신 금강지불 등 시방에 계신 모든 불보살님과 청정 승가 앞에 드러내 보입니다. 또한 이미 지은 죄업 감추지 않고 깊이 참회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업을 짓지 않겠습니다. 저희들로 하여금 저희가 지은 죄업을 감추고 참회하지 않아서 고통을 받는 바,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 드러내고 깊이 참회하여 진정한 안락에 머물게 하시옵소서.”
4) 중관파의 논쟁
용수와 아리야 데바의 논쟁법은 후대 중관파에 전승되면서 중관파의 학맥을 형성하였다.
용수 제바 이후 200여 년 불호(佛護) 논사는 중론송의 사상을 계승, 부흥시켰다. 그는 용수보살이 자주 구사했던 논증형식인 귀류법을 사용하여, 상대 논쟁자의 주장이나 학설이 모순을 내포하고 불합리에 빠지게 됨을 지적하는 논증방법으로, 중론송의 본질을 간접적으로 밝혀내고자 했다. 이를 귀류논증방법 또는 귀류법(歸謬法)이라 한다.
그 후 바바비베카Bhavaviveka(청변淸辯, 500∼570)가 디그나가의 논리학을 채용하여 공의 사상을 추론식에 의해 논증하고자 하였다. 청변은 불호(佛護)를 비판했다. 불호가 “중론송의 공성(空性)은 적극 표출되지 않고, 상대의 주장이나 견해를 파척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본 반면, 청변은 “공을 적절한 논리로 적극적으로 밝혀 낼 수 있다”는 입장에서, 당시 진나(陳那 Dign ga)가 정립했던 신인명론(新因明論)에 의한 정언적(定言的) 추리형식의 논증법을 구사하였다. 이를 자립논증이라 하고, 청변계통을 자립논증파(自立論證派 Sv tantrika)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뒤 월칭은 청변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스승이었던 불호의 주장을 옹호했다. 그는 귀류논증법의 교묘한 부정 논리를 종횡으로 구사하여 기존 학설을 사견이라 하면서 청변계통 학파를 논박하였다. 찬드라키르티 Candrakrti(月稱, 600∼650 무렵)는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하는 중관(中觀)의 진리는 논리를 초월한 것이며, 따라서 오직 반론자의 주장을 모순으로 유도하는 귀류만이 중관자에게 있어 유효한 논증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논리학의 중관철학에의 적용을 반대하여 붓다팔리타를 변호하고 바바비베카를 비판하였는데, 이러한 학문적 계통을 귀류론증파(歸謬論證派, Pr asagika) 라고 한다. 중관학파 역시 이렇게 자립논중파와 귀류논증파로 분열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리하여 중관학파는 불호·월칭 계통의 귀류논증파(Pr sangika)와 청변 계통의 자립론증파(Svatantrika)로 분열되었다고 한다.
귀류논증파는 필과공성파(必過空性派)라고도 하며, 자립논증파는 자의입종파(自意立宗派)라고도 불린다. 그 후에는 적천(寂天) 등이 귀류논증파의 계통을 이었고, 관서(觀誓)등은 자립논증파 계통을 이었다.
1. 유(有)의 주장에 대한 비판
1) 파사(破邪)의 의미의 고찰
『중론』은 논쟁의 서적이다. 동아시아 전통적인 표현으로는 파사(破邪)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중론』의 파사 곧 부정의 논리는 나타난 개념의 모순을 지적하고, 사실에 반해서 까지도 개념을 부정했다고 서양학자에 의해서 일반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중론』은 “개념의 모순”을 지적했다고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중론』은 결국 프랑스의 E ‧ 뷰레스후가 말했던 것처럼 회의론을 설한 것으로 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일방적 단정적인 주장은 어떤 것도 서술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공관에서 출발하는 대자대비의 이타행은 어떻게 성립할까. 그 의의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고 하지 않는 것일까. 『중론』의 이른바 파사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고찰해보기로 한다.
2) 『중론』의 논리 -푸라상가
대저 기본적인 태도로써 “공(空)의 철학은 정해진 교의(敎義)가 되는 것을 갖고 있지 않다. 중관파는 결코 자신의 주장을 세우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일은 그대로 나가르주나의 설명 중에 있다고 말했다.
“만약 우리에게 무언가 주장이 있다면 그러면 마땅히 그와 같이 우리는 이론적인 결함이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주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땅히 그와 같이 우리들에게는 이론적 결함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그의 저서 속에서 “이론의 배척”에서 설하고 있다. 나가르주나 제자였던 아리야데바도 같은 취지라고 한다.
“만약 사물이 있다고 하든가 없다고 하든가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하다든가 라고 하는 주장의 존재하지 않는 사람. 이 문제에 대해 오랜 시간을 허비해도 그것을 결론짓는 것은 불가능하다.(『사백론』제16장 25)
나가르주나가 자주 사용하여 상대를 논파한 논리를 푸라상가라 한다. 용수는 상대와 논쟁을 벌여 상대의 논리의 허점을 지적하여 상대방의 질문자체가 모순이 되게 하는 논리방법을 선택하였다. 프라상가논법에 대해서 중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논쟁자가 용수에게 질문하였다. “만약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공이라고 한다면 부처님도 공이고 부처님이 설하신 교법도 공이요, 부처님의 진리를 믿고 따르는 승단도 공이 된다. 이렇듯 끝까지 공을 주장한다면 불보 법보 승보를 다 파괴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당신의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이렇게 논박하자, 용수는 그것이 공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지 않고 상대의 논리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당신은 내가 불보‧법보‧승보를 공이라고 말한 것 때문에 불법을 파괴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당신의 주장대로 본다면 부처님은 불공(佛空)이 되어야 하고, 부처님의 진리에 대한 가르침은 법공(法空)이 되어야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승단은 승공(僧空)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불공‧법공‧승공이 되어야 삼보를 파괴하지 않는 것이 된다는 것이 된다. 당신의 주장대로 불공이라고 한다면 부처님이 지금 여기에 있어야 할 것이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영원히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이 세상 제법이 영원히 존재한다면 부처님은 결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무상(無常)하다든지, 모든 존재가 무아라든지 하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공으로서 삼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하기 때문에 비로소 삼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중론'에서는 반대자의 견해를 먼저 든 뒤, 용수 자신의 비판적 입장을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다른 저술인 『회정론(廻諍論)'에서는 인도의 많은 학파들 중에서 일체 존재가 실재한다는 주장을 펴는 니야야(Nyaya)학파를 비판하고, 불교내 학파로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aastivaadin)의 견해를 비판하고 있다. 특히 설일체유부에 대한 비판은 '중론' 대부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용수는 유부의 사상적 특성을 법유(法有)라고 보고 그 사상의 근저를 이루는 自性(svabhava)의 개념을 철저히 비판하였다. 용수에 의하면 이 자성이란 연기(緣起) ․ 공(空)과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유부는 일체 현상의 근본인 법이 자성으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용수는 이 세상의 제법은 인연에 의해 생김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러 가지 인연으로 생긴 법 衆因緣生法
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하네. 我說卽是無(空)
또한 이를 가명이라 하고 亦爲是假名
또한 이를 중도의 뜻이라고 하네. 亦是中道義
일직이 어떠한 한 법도 未曾有一法
인연으로 생기지 않음이 없네. 不從因緣生
용수는 이 세상 어떠한 존재도 인연에 의하여 존재하지 않음이 없으며 일체존재는 실체적 자성이 없다고 하였다. 그 어떤 자성도 가명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자성의 개념은 연기의 입장과 위배되는 것이며 공의 개념과도 배치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성의 개념을 용수는 '중론' 전체에서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다. 곧 설일체유부에서는 일체현장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근본 실체로서 법의 자성을 주장한 것에 대하여, 용수는 모든 존재에 그러한 실체적 자성이 있을 수 없다 논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일체 존재 현상이 실체적 자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연기하고 있는 것으로 곧 자성이 없는 것 공하기 때문에 연유하는 것이라 한다. 따라서 연기와 공의 입장에서 자성의 개념을 비판하였다. 용수는 『중론'에서 일체사물이 연기이고, 공성(空性)의 존재임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3) 아리야데바의 논쟁
『반야경』의 공(空)사상에 정통하여 대승불교를 크게 일으켜 제2의 석가로 일컬어지는 나가르쥬나(Nagarjuna 龍樹, 150~250)는 8종의 조사로 일컬어지고, 그의 철학은 중관파를 성립시켰다. 용수의 제자로 그의 사상을 크게 편 사람으로 아리야데바(聖提婆 Aryadeva, 170-270)와 라훌라발타라(羅侯羅跋陀羅 Rahulabhadra, 200-300)가 있다. 아리야데바는 용수의 공사상을 선양하고 특히 외도와의 쟁론을 벌여 상대를 논파하였다. 그는 외도를 심하게 비판하여 결국 논적의 원한을 사서 암살되었다고 전한다. 아리야데바는 『百論』을 지었는데, 이 『백론』은 나가르주나의 『中論』 『十二門論』과 함께 중국 삼론종의 근본 논서로 추앙되고 있다. 아리야데바의 생애는 매우 극적인 삶이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자만심이 매우 강하였던 모양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진리가 아닌 삿된 교의에 대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논파하였다. 이 과정에서 다소 과격한 논조로 외도들을 비판하였다. 전기에는 그가 어느 날 논적을 따라 힌두의 신전에 들어가 외도를 논파하고 신상(神像)의 눈알을 뽑았다. 그는 신(神)과의 대결에서 자신도 그 대가로 한쪽 눈을 잃게 되어 애꾸눈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러한 행적은 많은 외도들의 두려움과 원망을 샀고 마침내 수많은 적을 만들게 되었다. 그의 말년은 이런 원망을 산 외도에 의해 살해되었다. 어느 날 숲속에 홀로 선정에 들어 있을 때 한 암살자가 침입하였다. 그는 무방비 상태로 선정 속에 있는 아리야데바를 노려 살해하였다. 그런데 아리야데바는 저항하지 않고 외도의 칼을 맞으면서도 그 사람을 용서하고 도망가도록 했다고 한다. 이를 안 제자들이 분개해 하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 모든 존재들의 궁극의 법칙은 공(空)하다. 그런데 어떤 이가 친구이며 어떤 이가 적이란 말인가. 어떤 사람이 죽이고 어떤 이가 죽임을 당한다는 것인가. 세상 모든 존재들의 궁극의 법칙은 공(空)하다. 해침을 받는 자도 없고, 또한 해치는 자도 없다. 지금 그대들은 어리석음의 독약에 취해 있다. 그대들은 지금 부질없는 견해에 집착하여 울부짖으면서 갖가지 업을 짓고 있다. 그대들은 깊이 생각하여 그를 추적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라고 하였다.
아리야데바와 외도였던 마명(馬鳴)과 논쟁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마명이 불교에 귀의하기 전 한때 유명한 외도로 불교계와 자주 논쟁하여 불교를 논파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아카데미의 상징이었던 날란다에 찾아와 논쟁을 청하였지만 그의 명성 때문에 감히 나서는 자가 없었다. 이에 날란다 대학의 마하깔라라고 하는 일종의 호법신이 당시 남인도에 있던 용수보살에게 도움을 청하였다고 한다. 용수가 대중에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도를 물었다. 그때 아리야데바가 자진해서 날란다대학에 가겠다고 하였다. 용수보살은 아리야데바가 안심되지 않았던지 논쟁의 리허설을 하였다. 곧 용수가 외도인 것처럼 꾸미고 논리를 펼치며 아리야데바에게 미리 논쟁을 하여 어떻게 할지를 가르쳐 주었다. 아리야데바는 날란다에 가서 마명과 대론하여 마침내 그를 설복시키게 된다. 아리야데바는 약속대로 논쟁에 진 마명을 서고에 가두었다. 서고에 갇힌 마명은 화가 치밀어 서고의 경전들을 흩트려버렸다. 이때 마명의 눈에 확 들어오는 경전 구절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이런 일을 미리 예견해 놓은 부처님 말씀이었다. 이에 마명보살은 크게 참회하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쳐 참회문을 짓게 된다. 이것이 마명보살의 “참회문”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아! 위없는 스승 금강지불 등 시방에 계신 모든 불보살님과 청정 승가이시여, 저희들을 굽어 살피옵소서.
저희 000는 시작 없는 전생부터 지금까지 번뇌인 탐욕과 분노와 무지의 힘으로 인하여 신업과 구업과 의업을 통해 지은 선하지 못한 열 가지 업, 무간죄 다섯 가지, 이것과 가까운 죄 다섯 가지와 별해탈계(악업에서 해탈하는 하나하나의 계목)를 어긴 것, 보살의 배워야 할 것을 어긴 것, 비밀의 가르침의 맹세를 어긴 것, 부모를 공경하지 않은 것, 전승사와 아사리를 공경하지 않은 것, 해탈을 추구하는 도반들을 공경하지 않은 것, 삼보께 해를 끼친 업, 승가를 비난한 업, 중생에게 해를 끼친 업 등, 내가 스스로 짓거나, 남에게 짓게 했거나, 남이 짓는 것을 따라서 기뻐했던 일, 선하지 못한 죄의 무더기들이 삼선도와 해탈의 장애가 되고, 윤회와 삼악도의 원인이 됩니다. 모든 죄업을 위없는 스승이신 금강지불 등 시방에 계신 모든 불보살님과 청정 승가 앞에 드러내 보입니다. 또한 이미 지은 죄업 감추지 않고 깊이 참회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업을 짓지 않겠습니다. 저희들로 하여금 저희가 지은 죄업을 감추고 참회하지 않아서 고통을 받는 바,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 드러내고 깊이 참회하여 진정한 안락에 머물게 하시옵소서.”
4) 중관파의 논쟁
용수와 아리야 데바의 논쟁법은 후대 중관파에 전승되면서 중관파의 학맥을 형성하였다.
용수 제바 이후 200여 년 불호(佛護) 논사는 중론송의 사상을 계승, 부흥시켰다. 그는 용수보살이 자주 구사했던 논증형식인 귀류법을 사용하여, 상대 논쟁자의 주장이나 학설이 모순을 내포하고 불합리에 빠지게 됨을 지적하는 논증방법으로, 중론송의 본질을 간접적으로 밝혀내고자 했다. 이를 귀류논증방법 또는 귀류법(歸謬法)이라 한다.
그 후 바바비베카Bhavaviveka(청변淸辯, 500∼570)가 디그나가의 논리학을 채용하여 공의 사상을 추론식에 의해 논증하고자 하였다. 청변은 불호(佛護)를 비판했다. 불호가 “중론송의 공성(空性)은 적극 표출되지 않고, 상대의 주장이나 견해를 파척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본 반면, 청변은 “공을 적절한 논리로 적극적으로 밝혀 낼 수 있다”는 입장에서, 당시 진나(陳那 Dign ga)가 정립했던 신인명론(新因明論)에 의한 정언적(定言的) 추리형식의 논증법을 구사하였다. 이를 자립논증이라 하고, 청변계통을 자립논증파(自立論證派 Sv tantrika)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뒤 월칭은 청변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스승이었던 불호의 주장을 옹호했다. 그는 귀류논증법의 교묘한 부정 논리를 종횡으로 구사하여 기존 학설을 사견이라 하면서 청변계통 학파를 논박하였다. 찬드라키르티 Candrakrti(月稱, 600∼650 무렵)는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하는 중관(中觀)의 진리는 논리를 초월한 것이며, 따라서 오직 반론자의 주장을 모순으로 유도하는 귀류만이 중관자에게 있어 유효한 논증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논리학의 중관철학에의 적용을 반대하여 붓다팔리타를 변호하고 바바비베카를 비판하였는데, 이러한 학문적 계통을 귀류론증파(歸謬論證派, Pr asagika) 라고 한다. 중관학파 역시 이렇게 자립논중파와 귀류논증파로 분열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리하여 중관학파는 불호·월칭 계통의 귀류논증파(Pr sangika)와 청변 계통의 자립론증파(Svatantrika)로 분열되었다고 한다.
귀류논증파는 필과공성파(必過空性派)라고도 하며, 자립논증파는 자의입종파(自意立宗派)라고도 불린다. 그 후에는 적천(寂天) 등이 귀류논증파의 계통을 이었고, 관서(觀誓)등은 자립논증파 계통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