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세제(世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

 그렇다면 '중론'에 있어서는 어째서 십이유지를 설명하는 제26장이 부가되어 있는 것일까.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제26장은 “성문법(소승불교)을 설해서 제일의제의 도에 들어가는 것”을 (청목-핑갈라-역, '대정장 30권, p.36중) 설하고 있으나, 나가르주나는 완전히 이것을 배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생사유전 상태를 보여주는 설명으로써 용인하고 있다. 후기기의 주석 언어를 빌어서 말한다면 “세제연기(世諦緣起)”를 설하고 있는 것이다. '반야등론석(般若燈論釋)'제26장을 “세제연기품”이라고 명명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해석해서 말한다. 지금의 품(장)은 또한 공으로 대치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수행에 의하여 고쳐질 수밖에 없는 것) 세제의 연기를 설하고 있는 것이다.”('대정장'4권, p.1310중)

 '대승중관론석'에도 이 장은 ‘세속의 연생을 설한다고 말한다. 또한 핑갈라의 주석에도 십이유지의 설명은 “부처가 세제로써 설한다”('대정장'30권, p18상)라고 말한다. 또한 찬드라키르티의 주에도 십이지의 설명은 “세속이고 그 외 실상은 아니다”('뿌라산나빠다, p.54)라고 한다.
 또한 '중관소' 를 보더라도, “십이지의 (항목에) 상생(순차적으로 생하는)을 설명하고 있다. 곧 이것이 세제이다”라고 하던가, 혹은 “부처의 의도는 십이지를 설해서 십이지가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이지가 아닌 것을 십이지라고 하는 것을 세제가 된다. 십이지가 십이지 아닌 것으로 하는 것을 제일의제라고 부른다”라고 말한다. 혹은 “이미 십이인연의 상생을 이름해서 세제라고 부른다. 십이인연의 공한 것을 안다. 곧 이것을 제일의제가 된다'('뿌라산나빠다', p.861하)라고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찬드라끼르티(월칭)는 '중론' 독자의 연기를 “가장 깊은 연기”('뿌라산나빠다', p.167)라고 명명하고 있으나, 또한 “상의성의 연기를 특질로 하는 제일의 진리”(동서, p. 159)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붓다팔리타의 주석에는 “연기라고 하는 가장 뛰어나고 가장 깊은 제일의 진리”라고 하는 설명도 나타나고 있다. 종래 소승 일반의 연기가 “세제의 연기”라고 부르고 있는데 대하여 '중론'에서 주장하는 상의성의 연기를 “제일의제”(최고의 진리)라고 불렀던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중국의 삼론종에서는 '중론'이 주장하는 연기도 세속제로 간주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인연생(因緣生)은 세제이다. 적멸은 진제이다”('중론소'p. 612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아마도 구마라집이 연기를 인연생 등의 역어로 번역했기 때문에 연기를 “인과 연에 의해서 생하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생각된다. 이 점에 관해서 인도의 특히 뿌라상기카(귀류논증파)의 해석과 중국의 삼론종 해석은 정반대이다.
 또 '대지도론'을 보아도 세 가지 연기를 분별하고 있다.('대지도론'80, '대정장'25권, p.622상-중 및 하)
 제1의 연기는 “범부의 육안으로 보이는 것”이 되고, 생사유전하는 “범부인”에 비친 연기이다. 곧 범부가 미혹한 상태를 가리키고 있다.
 제2의 연기는 “이승(부처의 가르침을 듣는 성문, 혼자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연각승)의 사람들 및 마직 무생법인(공한 진리를 깨닫고 마음을 안정하는 것)을 얻지 못한 보살을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법안으로 제법을 분별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세제연기에 해당할 것이다.
 제3연기란 “여러 보살마하살 대지혜인”의 날카로운 근기의 사람들이 관하는 연기이고, 무생법인을 얻는 수행자와 도량에 앉은 보살을 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곧 제법은 “정해진 자상을 가지지 않으며” “필경공”이 되며 “허망한 가명으로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관하는 깊고 깊은 연기이다. 그러므로 제3의 연기는 '중론'이 주장하는 연기에 상당하는 것이 아닐까.

⑴ 이제에 대한 '대지도론'의 입장

 용수의 '대지도론'의 이제는 “세제(世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가 서로 위배되지 않는 교묘하고 특출하다”라고 한다. 교묘하고 특출하다는 것은 이제가 서로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세제(世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가 그것이다. 이것은 지혜로운 이도 파괴할 수 없고 어리석은 이도 다툼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변(二邊)을 여의니 5욕의 즐거움과 고행의 이변을 말하며, 항상함[常]과 단절됨[斷], 나[我]와 나 없음[無我], 존재함[有]과 존재하지 않음[無] 등의 이러한 두 가지 치우침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을 교묘하고 특출하다 한다. 세상에서 과보를 얻는다는 것은 애욕의 인연인 세간의 갖가지 괴로움을 여의고 삿된 소견의 인연인 갖가지 논의(論議)와 다툼을 여의어 몸과 마음에 안락함을 얻는 것이라 한다.
 이에 비해 계율을 지키는 이는 편안하고 즐거우며 몸과 마음에는 들끓는 괴로움 없고 누워도 편안하고 깨어나도 편안하며 명성도 또한 멀리 들린다. 또 이 불법 가운데에서 인연(因緣)은 차츰차츰 그 결과를 내나니, 이른바 계율을 지님이 청정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뉘우치지 않고 마음으로 뉘우치지 않기 때문에 법에 기쁨이 생기며, 법에 기쁨이 생기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즐겁고 몸과 마음이 즐겁기 때문에 능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마음을 가다듬기 때문에 여실히 알게 된다. 여실히 알기 때문에 싫어하게 되고 싫어하게 되기 때문에 탐욕을 여의며, 탐욕을 여의기 때문에 해탈을 얻고 해탈의 과보를 얻기 때문에 열반을 얻으니, 이것을 지금 세상의 과보를 얻는다고 한다.

⑵ '중론'의 이제(二諦)

용수는 이제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모든 부처님은            諸佛衣二諦
이제에 의지해 설법한다.  爲衆生說法
하나는 속제이고          一以世俗諦
둘은 진제이다.           二第一義諦. - MK. 24-8

만약 이제의 구별을       若人不能知
모르는 사람들은          分別於二諦
부처님의 깊은 법에 담긴  則於深佛法
진실한 뜻을 알 수가 없다. 不知眞實義. - MK. 24-9

 이제란 '두 가지 진리' 란 의미로 '있는 그대로의 참된 진리' 를 의미하는 '진제' 와 '상식에 부합하는 진리' 를 의미하는 '속제' 를 말한다. 상대는 '모든 것이 공하다고 볼 경우 삼보와 사성제가 파괴된다' 고 비판하지만, 용수는 이와 반대로 '모든 것이 공하지 않다고 볼 경우 삼보와 사성제가 파괴된다' 고 말하며 그 이유에 대해 하나하나 논증하였다.
 용수는 어떤 사람이 '모든 것이 공하다면 사성제가 부정되고, 사향사과의 성인이 부정되고, 삼보가 부정된다' 고 비판하였다. 겉보기에 '모든 것이 공하다' 는 가르침과 '사성제 · 사향사과 · 삼보' 의 가르침은 상반된 것처럼 보인다. 前者는 모든 것의 실체를 해체하는 가르침이고 後者는 분별에 토대를 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두 가지 가르침이 같은 차원에서 베풀어졌다면 '불교의 가르침에 모순이 있다' 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가르침은 '진제' 의 가르침이고, 후자의 가르침은 '속제' 의 가르침이다. 전자의 가르침은 '분별을 떠나 있는 그대로 본 참된 가르침' 이고, 후자의 가르침은 '일반인들의 분별적 사고방식에 맞추어 베풀어진 가르침' 이다. 두 가르침 모두 소중한 불교의 가르침이다. 진제의 가르침에서는 우리의 모든 분별적 사고를 해체시킨다. 그러나 속제의 가르침은 분별적 사고에 입각한 체계적 가르침이다.
 '중론'의 이제설은 '대품반야경' 권25에는 "보살은 이제에 안주하여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한다. 세제(世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가 바로 그것이다" 라는 가르침을 계승한다. '대품반야경' 권22에는 세제의 '여(如)'와 제일의제의 '여(如)'는 같다고 한다. 즉 세제와 제일의제로 나타나는 진리는 동일하지만, 방법이 다른 것이다. 본래 중생이라는 실체는 없다. "2제 중에서는 중생은 불가득이지만,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방편력을 갖는 고로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한다"고 말해지는 것처럼, 2제에는 방편의 지혜가 있으며, 이 방편에 입각하여 세속제가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편은 반야바라밀의 실천에서 생긴다. 이것이 제일의제이다. '중론'에서는 제24품에서 "제불은 2제에 의거하여 법을 설하신다. 세속제와 제일의제가 바로 그것이다"라고 설하는 등이 '반야경'의 설을 계승하고 있다.
 세간의 존재는 모두 무상하며 변화해간다. 따라서 어떠한 것도 '이것'으로 파악할 수 없다. 파악하는 순간 상태가 바뀌어버리기 때문이다. 존재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다른 말로 일체개공(皆空)이라고 한다. 이 공의 입장에서 '존재' 즉 법 dharma을 이해하는 것이 제일의제의 입장이다. 따라서 존재는 그 본성에 있어서는 유라든가 무라든가 하는 형태로 파악되지 않는다. 이것이 모든 시간적 존재자의 진실된 모습인 것이다. 이처럼 제법은 공이지만, 현상은 천차만별로 현현하고 있으며, 이로써 시간적 세계가 형성되어간다. 공이라는 것도 진실이지만, 동시에 나와 너의 상대적 세계가 성립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이 연기의 상대적 관계에서 성립하는 '법이 본래 모습이다. 이러한 상대적으로 성립하고 있는 개체를 인정하는 입장이 세속제이다. 이것은 개개의 존재를 상대성에 입각해 바르게 이해하는 입장이다. 그것은 연기를 바르게 앎으로써 '연기에 의해 성립하는 법 을 바르게 아는 입장이다. 여기서 나와 너, 선과 악, 고와 락 등에 의거한 세속의 세계가 바르게 알려진다.
 곧 세속의 명언(名言) 개념을 통하여 획득하는 것, 인식내용들은 모두 희론의 범위에 속하여 이른바 속제라 칭한다. 오직 불법의 이치에 의하여 바로 직관하고 증득한 제법실상을 진제라 한다. 속제(俗諦)에 따라 말하여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이 되고 일체는 모두 있다고 한다. 진제에 의해 말하되 일체는 모두 그 실체의 자성이 없으며[一切皆無自性] 모두 마침내 공하다[畢竟空]고 한다. 그리하여 世俗의 있음은 필경 공하다. 필경공한 즉 세속에 존재할 수 있다. 만일 속제에 의하지 않는다면 제일의를 얻지 못하고 열반을 얻지 못한다.
 중관파에 의하면, 시간적 존재자·연기에 의해 성립하는 존재자는 한편으로는 유한한 면을 갖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영원한 성격, 전체적 성격을 갖는다. 이 양면성을 갖는 현상을 유한이라는 쪽에서 이해하면 세속제의 입장이 되고, 무한 ·전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면 제일의제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중론'에서는 주로 진제의 가르침만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過去도 없고, 現在도 없고, 未來도 없다' 고 말하며 시간의 존재를 부정하는 가르침은 진제의 가르침이고, '修行者는 오후에 식사해서는 안 된다' 고 말하며 시간의 존재를 인정하는 가르침은 속제의 가르침이다. '善도 惡도 없다' 고 말하는 가르침은 진제이고, '惡을 행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 는 윤리적 가르침은 속제이다.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아의 가르침은 진제이고, 자아의 존재를 설정하는 윤회와 인과응보의 가르침은 속제이다. 진제와 속제 두 가지 모두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할 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