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제4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면적으로도 외면적으로도 “이것은 우리들 것이다”라든가 “이것은 우리들에 있다”라고 하는 관념이 없어져 버릴 때 집착은 멈추어 버리고 그것이 멸해버리기 때문에 생이 멸해버리게 된다.

라고 한다. 핑카라의 주석에서는 “지금 성인은 아(我)와 아소(我所, 나의 것)도 없기 때문에 모든 번뇌도 또한 없어져 버린다. 모든 번뇌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능히 제법실상을 본다( 대장정  30, p.24하)”라고 하는 설명이 보인다. 그러므로  중론 이 무아(無我) 무아소(無我所)를 설한 것도 위에서 말한 여러 주석의 문장으로 보아도 결국 제법실상을 밝히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대지도론  제74권에도 제법실상이란 아(我) 및 아소(我所)라는 정해진 특질을 얻을 수 없다고 설명되어 공(空)과 동일시하고 있다.
또한 무아(無我)란 무자성(無自性)과 동의어로 해석되기에 이르렀다. 찬드라키르티(월칭)에 의하면 무아의 아(我)와 자체(自體: 본체 본질)의 의미라고 한다. 따라서 무아란 무자성의 의미라고 하고 있다( 뿌라산나빠다  ,p.437)

 2) 무아(無我)와 연기(緣起)
 이와 같이 무아가 제법실상 공 무자성과 같은 의미라고 한다면 당연히 무아는 연기의 의미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중론 (제22장 제3시 전반)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사물에 의존해서 생긴다는 것은 무아라고 하는 것이 성립된다”라고 하는 것에서 연기 곧 무아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핑카라의 주석을 보면 한층 더 명확해진다.
“만약 법(사물)으로서 여러 가지 연(緣)으로 인하여 생긴다면 곧 아(我)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섯 손가락으로 인해서 주먹이 있다고 하다면 이 주먹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다”( 대장정30, p.30상 ). 이 문장으로 보면 아와 자체는 같은 뜻으로 생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대지도론 의 설명을 보면 더욱 확실해 진다.

 “여러가지 사물은 아소(나의 것)를 떠나있기 때문에 공(空)하다. (여러 가지 사물은)인연에 의해서 화합해서 생기기 때문에 공하다. 무상 고 공 무아이기 때문에 공이라 이름한다.…무상 고 공하기 때문에 무아이다. 자재가 아니기 때문에 무아이다. 주체가 없기 때문에 무아라고 이름한다. 제법(여러 가지 사물)은 인연에 의해서 생기기 때문에 무아이다. 무상(無常) 무작(無作)이기 때문에 무아이다. 임시로 이름 한 것이기 때문에  무아이다…( 대지도론  31권,  대정장 25, p.293하)”
 
라고 말하고 다시 같은 곳에 의하면,

 “보살은 이런 생각을 한다. 제법은 공해서 아(我)가 없고 중생도 없다. 그런데 인연에 따르기 때문에 존재한다(  대정장  25, p.584중)”라고도 한다. 따라서 무아(無我)라고 하는 것도 적지 않지만 나가르주나의 경우에는 연기의 의미이고  중론  여러 장에서 아(아트만)를 부정하는 것도 결국은 연기를 천명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몇몇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최초기의 불교에서 제법실상이라고 하는 설명은 결국 연기설과 같은 취지였다고 설명되고 있다.(宇井伯壽,  印度哲學硏究 제2권 p.224 이하, p.325이하) 이 점에 대해서는 더욱 연구할 필요가 있지만, 적어도 나가르주나로부터 시작하는 중관파에 대해서는 그와 같이 이해해도 지장이 없을 것이다.

 3) 사법인(四法印)의 기초와 연기(緣起)
  불교에서는 고래로 삼법인(三法印)을 설해왔다. 삼법인이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말하고,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넣어서 사법인이 된다. 그런데 중관파는 다른 2항목 곧 제행무상과 일체개고 등과 같이 해석할 수 있을까. 중관파는 무상을 공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무상을 관하면 곧 공을 관하는 인연이 된다.” ( 대지도론  22권  대정장 25권 p.222)
“무상은 곧 공의 첫 관문이다. 무상을 진리로 요달한다면 제법은 곧 공(空)이 된다”(동 31권  대정장  25권, p.290하)

 또한 다른 논서( 일수로가론壹輸盧迦論 )는 이런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로부터 무상도 연기의 의미로 해석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제  중론 에 대해서 보면,

 “연기하지 않고 괴로움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무상은 괴로움이 있다고 설해지고 있다. 그러한 무상성은 자성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제24장 제21시)

라고 하고. 찬드라키르티의 주석을 보아도,
 “어떤 자성(본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연해서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연기해서 일어난 것이 아닌 사물은 무상하지 않다. 왜냐하면 지금 존재하지 않는 ‘허공의 꽃’은 무상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제사물이 본체(자성)를 가진 것이 승인된다면 여러 사물에는 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뿌라상가빠다 , p.506)

라고 한다. 그러므로  중론 에 의하면 무상한 것은 반드시 연기해서 있고, 또한 연기해서 있는 것이 아닌 것은 무상하지 않다고 한다. 따라서  중론 은 제행무상을 연기에 의해서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명료해 졌다.
또한 삼법인 가운데 다른 한 가지 일체개고(一切皆苦)도 연기에 의해서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서술한 게송에서도 “연기해서 생기지 않은 괴로움은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라고 말하고 주석을 보아도,

 “괴로움이 연에 의해서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곧 괴로움은 없다”(청목석,  대정장 30권 , p33중)
“연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괴로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외론 )

라고 하기 때문에 괴로움은 반드시 연기하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제12장(괴로움의 고찰, 관고품)에서는 ‘괴로움이 그러한 자체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물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며, 자체와 다른 사물의 양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또한 원인 없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라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괴로움이 연기해서 나타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중론 은 삼법인을 모두 연기에 의해서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초기 불교에서는 삼법인을 의미하는 곳에서는 연기설과 같은 취지라고 말해지지만(宇井伯壽,  印度哲學硏究  제2권, p.327), 지금 「중론 은 독자의 방법으로 이 도리를 밝혀서 보여주고 있다.

8. 공(空)의 고찰
  1) 공과 무자성
    (1) 공과 무자성의 의의
  중론 이 공을 설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중관파는 공성론자(空性論者)라고 스스로 부르고 있다.(뿌라상가빠다  30, p.503, p.521) 여기에는 이 공의 의의를 추가해서 논하고자 한다. 고래로 공은 무(無) 또는 허무(虛無)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었다. 중관파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공과 무를 동일시하고(동서 p.475, p.490), 중관파는 일체를 부정해서 그의 허무를 설하고 있기 때문에 허무론자라고 논하고 있다. 이와 같이 공을 무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중관파는 불교를 파괴하는 무서운 사설(邪說)로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24장(「네 가지 성스런 진리의 고찰, 관사제품」)의 첫머리에는 반대론자의 주장이 서술되어 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하면, 생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생도 멸도 없기 때문에] 성스런 네 가지 진리(사제)도 없다고 하는 것이 수반해서 발생한다(제1시).

 “성스런 네 가지 진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히 아는 것[知], 번뇌를 끊는 것[斷], 도를 수습하는 것[修], 니르와나를 직접 체득하는 것[證]은 존재하지 않는다”(제2시)

 “그러한 지(知) ‧ 단(斷)‧ 수(修)
․ 증(證)이 없기 때문에 네 가지 과보(사성과: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가 없기 때문에 결과로서의 상태의 위(位)도 없고, 또한 목표에 향해서 나아가는 향(向)도 없다.” (제3시)

 “만약 그러한 사향사과의 성자(팔현성八賢聖)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수행자들의 단체 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성스런 네 가지 진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바른 가르침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제4시).

 “법(보)과 승(보)이 없다면 어떻게 불(보)이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이 공을 설한다면 삼보(불 법 승)도 파괴된다.”(제5시)

 “공을 설하는 것은 과보의 실유(實有) 비법(非法) 법(法)과 세속의 일체 관용법도 파괴된다.”(제6시)

 이러한 문구를 보면 당시 중관학파가 허무론자라고 타 학파로부터 빈번한 공격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찬드라키르티의 주석을 보아도 중관파는 ‘절대적인 허무론자’( 뿌라상가빠다 , p.32), ‘일체를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 동서 , p.159), ‘주된 허무론자’( 동서 , p.32)로 결정해서 비판받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중관파는 인도 일반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근대서양의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도 허무론자라고 비판받았다.

    (2) 중관파의 반론
 이와 같은 비난에 대하여 나가르주나는 다음과 같은 반론을 펴고 있다.

 “여기서 우리들은 대답하고자 한다. 그대는 공에 있어서 효용(동기) 공(공한 것)과 공의 의의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와 같이 논쟁하는 것이다(제7시)

 찬드라키르티의 주석에 의하면, 여러 사물의 존재에 고유한 실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유자성론자(有自性論者)는 공의 의의를 없다고 해석하여 이와 같은 비난을 무릅쓰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동서 p.490)

 "그런데 그대는 무(無)를 공의 의미라고 망령되이 집착하고 희론의 그물을 넓히고 있기 때문에 '공에 있어서 작용'을 알지 못한다"(동서, p.491)

 "무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공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아니다. 그런데 그대는 무라고 하는 의미를 공의 의미로 망령되이 실재시[增益] 해서 우리들을 비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는 공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다."(위와 동)

라고 주석하고 있다.  중론 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들의(제법) 없음을 천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을 천명하기 위한 것이다.(동서, p.239) 찬드라키르티는 공과 무로 해석하는 생각을 사견이라고 해서 ( 중관에의 입문 ) 공관을 단견 또는 무의 견해와 동일시해서는 안된다고 논하고 있다.( 뿌라상가빠다 , p.27) 그리고 중관학파는 허무론자라고 하는 반대파의 비난에 대해서,

 “우리는 허무론자가 아니다. 유(有)와 무(無)의 두 가지 설을 배척하므로써 우리들의 니르와나(열반)의 성에 이르는 둘도 없는 길을 밝히고 있다.”(동서, p.329)

라고 답하고 있다. 또한 가상대사 길장(吉藏)도 공관이 노자의 허무의 사상과 혼동하는 것을 극력 경계하고 있다( 삼론현의 9枚좌, 12매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