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형성작용에 대한 고찰

1. 망령되게 집착한 것은 허망하다고 세존은 설해주셨다. 그래서 모든 형성된 것(행)은 허망하게 취한 법이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로 형성되었던 것은 허망한 것이다.

2. 만일 이렇게 망령되이 취한 것이 허망하다고 한다면 이 가운데서는 무엇이 허망하게 취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런 일이 존사(붓다)에 의해 설해 주신 것으로 공을 밝혀주고자 하였다.

3. 여러 가지 것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것 자체가 없이 (무자성)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변화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 자체(자성)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로 이루어진 것은 공하기 때문이다.

4. 만약 그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변화한다는 성질이 있겠는가. 만약 그것 자체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변화한다는 성질이 있겠는가.

5. 그것(앞의 상태에 있던 것)은 변화한 성질이 없다. 또한 다른 것(그 가운데 다른 상태에 도달한 것)에도 변화한다고 하는 성질은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청년은 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늙은 자는 늙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일체 존재가 그 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늙어 변화하겠는가. 존재는 바로 그것(=동일한 것)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며 다른 것(이 변화 한다는 것)도 역시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젊은이가 늙어지지 못하고 늙은이도 늙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6. 만일 그렇다면 그것이 변화하는 성질이 있다면 우유 그것 자체가 (우유라는 것으로 있는 상태를 버리지 않고) 낙소가 된다고 하리라. 또한 우유는 다른 무엇(예를 들어 물)에 낙소의 상태가 일어나는 것이 되리라(그러나 그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다른 어떤 것이 낙소라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만일 같은 존재가 변하는 것이라면 우유는 마땅히 낙소이어야 하리라. 또한 우유를 떠나서 그 어떤 존재가 있어서 낙소가 되겠는가.  

7. 만약 무엇인가 공하지 않은 것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공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리라. 그런데 공하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공한 것이 존재하겠는가.

8. 일체의 집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승자(붓다)에 의해서 공이 설해졌다. 그런데 사람들이 만약 공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들은 “어떤 것도 하려고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제14장 집합의 고찰

1. 이는 대상과 보는 작용과 보는 주체와 이러한 세 가지는 이러저러한 두 가지로 있게 된다(보이는 대상과 보는 작용, 보는 작용과 보는 주체,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 그러나 그것은 상호에 전면적으로 집합으로는 이르지 않는다.  
*보는 작용은 식(識)이라 하고, 보이는 대상을 경(境)이라 하며, 보는 주체를 근(根)이라 한다. 이 세(두) 가지는 서로 다른 곳에 존재하여 서로 합하지 않는다. 이들은 셋이 합쳐서 보는 것이 존재하는가 합치지 않고 존재하느냐의 문제가 제기되는데 만일 합쳐서 존재한다면 대상이 존재하는 곳에 감각기관도 존재하고 나도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는 될 수 없다. 합치지 않고 존재한다면 감각주체와 대상과 작용이 다른 곳에 존재하면 보는 것 내지 의식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지각의 문제를 통해서 보면, 우리가 대상을 아는 것(지각)은 이들 둘 셋이 합해져야 이루어진다. 그런데 지각이 생기는 이치를 살펴보면 사물을 보고나서 생기든지 아직 보지 않은 상태에서 생기거나 동시에 생기게 된다. 만일 보고나서 지각이 생기는 것이라면 인지하는 지각작용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만일 보지 않았는데 지각이 이루어졌다면 이때는 합쳐지지도 않았는데 지각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 또 동시에 지각이 생긴다면 서로 의존하지 않는 것이 된다. 곧 지각은 대상을 만나서 인식이 이루어지는 선후관계에 의지하는데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 경 식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2. 탐욕에 물듦과 탐욕에 물들은 주체와 탐욕에 물들은 대상도 또한 그와 같이 보일 수밖에 없다. 그 외에 번뇌도 또한 그 외의 한 가지 두 가지 영역(십이처)도 이 3가지에 의해서 설명된다.

3. 갑과 을이 (서로 다른 것) 집합한다(예를 들면 우유와 물). 그러나 보이는 대상 등은 서로 다른 개별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합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존재라면 응당 집합하는 것이 이루어지겠지만 보는 주체와 보는 작용과 보이는 대상 등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상이 성립하지 않는데 보는 주체 등 세 가지가 어떻게 합해지겠느냐는 것이다.

4. 그래서 보이는 대상 등이 서로 다른 것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것이라 하더라도 다른 별개의 것은 있을 수 없다.
*보이는 대상 등에 있어서 서로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사물 역시 다른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

5. 서로가 다른 것은 다른 것으로 있는 갑이 을에 연(緣)해서 다른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서로가 다른 것이 없다면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 갑에 연해서 을이 있다면 을이 갑과 다른 별개라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을 연(緣)하여 다른 것이다. 다른 것이 다른 것을 떠나서 다른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이 또 어떤 것을 연(緣)할 때 그것과 그것이 다름은 성립하지 않는다.(만일 어떤 존재가 어떤 원인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이 존재는 그 원인과 다르지 않다)

6. 만일 갑이 을과 다르다고 한다면 다른 것을 떠나서 없다 해도 다른 것으로 성립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갑은 을이 없이는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런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갑과 을이 서로 다르다면 상대방 없이도 그러하다. 그 어느 한 쪽과 다른 한 쪽은 서로 상대방 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7.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은 다른 것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르지 않은 것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것으로 있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도 역시 존재하지 않으며 동일의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르다는 성품은 다른 것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다르지 않은 것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르다는 성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른 것이건 같은 것이건 존재하지 않는다.

8. 갑이 을과 집합하는 것은 없다. 서로 다른 두 가지 것(갑과 을)이 집합한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현재 지금 집합하고 있는 것도 이미 집합한 것도 집합하는 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과 결합하는 것도, 또 다른 것이 다른 것과 결합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또 지금 결합되고 있는 중인 것, 이미 결합된 것, 결합하는 것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제15장 자체의 자성(自性)에 대한 고찰

1. 그러한 자체 자성이 연과 인에 의해서 생긴다는 것은 가능성이 없다고 하리라. 인연으로 생긴 그런 자체는 만들어져 나온 것[위작법爲作法]이리라.
*자성이 여러 가지 인과 연으로 생긴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인과 연이 모여서 생기는 자성은 지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또한 어째서 그것 자체가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되어 있겠는가. 왜냐하면 그것 자체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 것(무소작의 것)이요, 또한 다른 것에 의존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연으로 만들어진 것 속에 자성이 생겼다면 어떻게 자성(自性)이 만들어진 것이겠느냐는 질문이다. 자성(自性)이란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또 다른 것에 의존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 만약 그것 자체가 없다면 어떻게 다른 것의 성품이 있다고 하겠는가. 왜냐하면 다른 것에 있는 것의 그것 자체는 다른 것에 있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그것 자체라고 하는 것은 그 점에 대해서도 성립하지 않는다] 
*존재가 그 자체성품이 없다면 어떻게 다른 것의 자체성품이 있겠는가. 다른 것의 자체성품에 있어서 자성은 역시 타성(他性)이라고 불려지기 때문이다.

4. 다시 그것 자체와 다른 것의 자체를 떠나서 어디에도 존재라는 것이 성립하겠는가. 왜냐하면 그것 자체와 다른 것 자체가 존재한다면 사물은 성립할 수 있으리라.
*다시 자성(自性)과 타성(他性)을 떠나서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왜냐하면 자성이나 타성이 존재할 때에 사물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5. 유(有: 존재하는 것)가 만일 성립하지 않는다면 무(無)도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有)의 변화하는 것[이상異相]을 사람들은 무(無: 비존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6. 그것의 자체와 다른 것의 자체와 有나 無를 보는 사람들은 붓다의 가르침에 있는 진실을 보지 못한다.
*自性이나 他性, 존재나 비존재를 있다고 보는 이런 사람들은 붓다의 진실을 모르는 사람이다.

7. 까뜨야야나(가전연)에게 가르침을 준 경전에서는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양자를 밝혀주시어, 존재와 비존재를 구분해 보여줌으로써 세존에 의해 논파되었다.

8. 만일 본성상에서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有]의 無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왜냐하면 본성이 변화한다는 것은 결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성은 다시 변하지는 않아야 한다. 만일 自性이 달라지는 모습을 나타낸다면 이것은 맞지 않다.

9. 만일 사물의 본성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떤 사물의 변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또한 본성이 있을 때 어떠한 사물이 변화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10.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상주(常住)에 대한 집착하는 편견이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단멸(斷滅)에 집착하는 편견이다. 그러므로 현자(賢者)는 있다고 하는 것이나 없다고 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11. 그 본성상에서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상주(常住)를 집착하는 편견이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없다고 하는 것은 단멸(斷滅)에 집착하는 편견이라고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