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라집법사의 업적

구마라집의 성대한 업적은 유구하고 위대하여 지금에도 모두 우러러 보고 있다. 용광사(龍光寺)의 석도생(釋道生)은 지혜로운 앎이 미묘한 경지에 들었고 현묘한 뜻은 문자 밖에까지 풍길 정도였다. 하지만 항상 자신의 언어가 본뜻을 어그러뜨릴까 염려하여, 관중(關中)에 들어가 구마라집에게 결정해 주도록 청하였다.
여산(廬山)의 석혜원(釋慧遠)은 많은 경전들을 배워 그 뜻을 꿰뚫어서, 부처님의 유교(遺敎)를 펴는데 동량과 같은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당시는 성인께서 가신 지가 아득히 멀고 오래되어, 의문스러운 내용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편지를 보내 구마라집에게 자문했다는 말들이 「혜원전(慧遠傳)」에 보인다.
초기에 사문 승예(僧叡)는 재능과 식견이 고명하였는데, 항상 구마라집을 따라다니며 옮겨 베끼기를 담당하였다. 이에 구마라집은 매번 승예(僧叡)를 위하여 서방의 문제를 논하고, 한자(漢字)와의 같고 다름을 대략 살피고 분별하여 말하였다.

“천축국의 풍속은 문장의 체제를 대단히 중시한다. 그 궁상체(宮商體, 五音)의 운율(韻律)이 현악기와 잘 어울리듯이, 문체와 운율이 좋아야 한다. 국왕을 뵙고자 할때는 왕의 덕을 찬미하는 의식이 있듯이, 부처님을 뵙는 의식은 부처님 덕을 노래로 찬탄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경전 속의 게송들은 모두 이러한 형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범문(梵文)을 중국어(秦나라말)로 바꾸면 그 훌륭한 글의 양식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큰 뜻을 터득하더라도 문체(文體)가 아주 동떨어지기 때문에, 마치 밥을 씹어서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다만 맛을 잃어버릴 뿐만이 아니라, 남으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게 하는 것이다.”

구마라집은 예전에 사문 법화(法和: 전진때 고승 도안과 동학 불도징에 사사)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준 적이 있다.

마음의 산(山)에서 밝은 덕을 길러
그 향내 일만 유연(由延: 유순)까지 퍼지고,
애처로운 난새 외로이 오동나무위에서
청아한 울음소리로 구천(九天)에 울리네.
心山育明德 流薰萬由延
哀鸞孤桐上 淸音徹九天

라집법사는 대충잡아 10게송을 지었는데, 게송에서의 언사와 비유가 모두 이러했다.
구마라집은 평소 대승(大乘)을 좋아하여, 대승(大乘)을 널리 펴는 데에 뜻을 두었다. 그는 항상 한탄하기를,
“내가 붓을 들어 대승아비담(大乘阿毘曇)을 짓는다면 가전연자(迦旃延子)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지금 이 중국 땅에는 학식이 깊은 사람이 없어 여기에서 날개가 부러졌으니 무엇을 더 논하겠는가.”
  이와 같이 한탄하면서 쓸쓸히 그만두었다. 오직 요흥(姚興)을 위하여 『실상론(實相論)』 2권을 지었을 뿐이요, 아울러 『유마경(維摩經)』에 주를 달았다. 말을 꺼내어 문장을 이룬 것[出言成章]은 깎아 내어 고칠 것이 없었다. 문장의 비유는 완곡하고 간명(簡明)하여, 그윽하고 오묘하지 않음이 없었다.
구마라집의 사람됨은 맑은 정신이 밝고 투철(透徹)하며, 남에게 굽히지 않는 성품이 남달랐다. 또한 임기응변하여 깨달아 아는 것이 대중중에서 견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또 돈독한 성격으로 인자하고 후덕하며 사람들을 차별 없이 두루 사랑하였다. 자신을 비우고 사람들을 잘 가르치며 하루 종일 게으름을 피우는 일이 없었다.


10. 번역에 잘못이 없다면, 내 혀만은 불에 타지 않으리

요(姚)의 왕 요흥(姚興)이 항상 구마라집에게 말하였다.
“대사는 총명하고 깨달음이 뛰어나 천하에 둘도 없습니다. 만일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시어 법의 씨앗이 될 후사가 없어서야 어찌 되겠습니까?”
마침내 왕은 기녀(妓女) 열 명을 받아들이도록 핍박 하였다.
이일 이후로 라집법사는 승방(僧坊)에 머물지 않았으며, 따로이 관사를 짓고 모든 물자가 풍부하여 넘칠 정도로 공급받았다. 매번 강설(講說)할 때 마다 항상 먼저 스스로 설하였다.
“비유하면 더러운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다. 오직 연꽃만을 취하고 더러운 진흙은 취하지 말라.”
처음에 구마라집이 구자국(龜玆國)에 있을 때, 비마라차(卑摩羅叉) 율사(律師)에게 계율을 배웠다. 뒤에 비마라차가 관중(關中)에 들어왔다. 구마라집은 그가 왔다는 것을 듣고 기쁘게 맞이하여 스승을 공경하는 예를 극진히 하였다. 비마라차는 구마라집이 핍박당한 사실(파계한 사실)을 아직 몰랐다.
어느 날, 구마라집에게 물었다.
“그대는 중국 땅에 대단히 깊은 인연이 있네. 법을 전수 받은 제자는 몇 명이나 되는가?”
구마라집은 대답하였다.
“중국 땅에는 아직 경장과 율장이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경과 여러 논(論)들은 대다수 라집이 제가 번역해냈습니다. 3천 명의 문도들이 라집에게 법을 배웁니다. 그렇지만 저는 누대의 업장(業障)이 매우 깊은지라, 스승으로서의 존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