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라집의 계율관과 율전(律典) 번역
다섯 광율(廣律) 중에서도 라집이 가장 가까이 했던 율전은 십송율이었다.
385년 여광이 구자국을 점령하고 나서 라집에게는 뼈아픈 시련이 찾아왔다. 여광은 강제로 구자국 왕녀를 취하게 하여 파계하도록 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 율전은 라집에 있어서 마음속에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후 장안에 왔을 때에도
요흥은 라집법사에게, “대사의 총명함과 뛰어난 깨달음은 천하에 으뜸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고 불법(佛法)의 종자에 후사가 없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라고 말했다.결국 요흥이 억지로 권해서 기녀 10인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때문에 라집법사는 계율에 다소 부담스런 생활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요흥은 라집에게 깊이 존중하고 숭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라집법사에게 여자를 취하도록 요구하였다. 요흥이 라집에 대해서 행한 처우는 부인이 남편을 취하는 저들 강족(羌族)의 샤마니즘관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이 일이 있고난 후로 라집은 승방(僧坊)에 거주하지 않고 해사(廨舍: 관사)에 거주했다고 전한다. 수계의 옛스승 비마라차(卑摩羅叉)가 중국에 오자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한 스승은 라집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중국땅에 깊고 큰 인연이 있다. 법을 받은 제자가 몇 사람이나 되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라집은 “이 사람은 업장(業障)에 깊이 얽매어 있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의 가르침을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고뇌에 찬 대답을 하였다고 한다('출삼장기집' 라집전). 법사로는 있다 해도 율사(律師)라고는 할 수 없었다는 통절한 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법사로서 불전을 강술할 때에도 몇 번인가 “예를 들면 진흙 속에서 연꽃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연꽃을 취할 뿐 진흙을 취하지 마시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는 일이 불타의 가르침을 등진 생활을 하고 있다는 자책의 심중을 드러낸 것이다. 스스로 삼천의 문도를 거느린 대중들의 스승으로서 임하고 있었던 라집으로서도 생을 마칠때까지 이러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번역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은 당시의 장안 승려들이 율전번역을 매우 열심히 바랐던 것과 여산 혜원(慧遠)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으나, 무엇보다도 불야다라(弗若多羅)가 내조(來朝)할 기회를 얻게 되었던 것이 큰 계기가 되었다. 불야다라는 405년 가을에 중국으로 왔는데 그가 계율에 밝았으므로 여산 혜원의 청을 받고 구마라집과 함께 「십송율'을 번역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경법전(經法傳)을 나누어도 율장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었다. 다라(多羅)의 그 율부를 이미 잘 듣고 모두 사모했다”라 하는 것은 그간의 사정을 말해주는 것이다. 장안 불교계는 광율의 장래 번역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橫超慧日著 '中國佛敎の硏究' 第1 廣律 傳來以前の中國に於ける戒律).
그래서 라집은 의학(義學)의 승려 수백명과 함께 장안의 중사(中寺)에 맞아들여 번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래서 '십송율'은 라집법사와 불야다라가 405년부터 409년에 걸쳐 번역했다. 승예는 남방의 유유민(劉遺民)에 보낸 편지의 일부에 “삼장법사(불야다라)가 중사에 있으면서 율부를 역출하는데 본말을 다 정통하게 알고 있어 처음 제정할 때를 보는 듯 하다”라고 했다.('고승전' 승예전) 처음 제정할 때를 보는 듯하다란 부처님이 처음 율을 제정했을 때를 방불케한다는 것으로, 여기에는 불야다라를 통해서 율문의 깊은 의미와 율을 지키는 엄격함을 잘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장안의 중사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 삼분의 이가 완성되었을 때 불야다라가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노령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번역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505년에 담마유지(曇摩流支)에 의해서 재개되었다. 그의 번역이 58권을 일단 완성한 것은 라집 만년의 일이다(지금 보이는 '십송율' 61권이 된 것은 라집법사 입멸후 비마라차가 전력을 다했던 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대해서는 平川彰, '戒律の硏究' 123항 이하를 참조할 것).
중국에서 역출된 오부율전은 다음과 같다.
① 십송율 61권(유부): 弗若多羅 羅什공역(404∼409),
② 사분율 60권(법장부): 佛陀耶舍 竺佛念공역(410∼412),
③ 마하승지율 40권(대중부): 佛馱跋陀羅 法顯공역(416∼418),
④ 미사새부 오분율 30권(화지부): 佛陀什 竺道生공역(422∼423),
⑤ 음광부 解脫戒經 1권: 瞿曇般若流支(543역)
[팔리율(남방 상좌부): 팔리어, 오분율(화지부): 한문, 사분율(법장부): 한문, 마하승지율(대중부): 한문 산
다섯 광율(廣律) 중에서도 라집이 가장 가까이 했던 율전은 십송율이었다.
385년 여광이 구자국을 점령하고 나서 라집에게는 뼈아픈 시련이 찾아왔다. 여광은 강제로 구자국 왕녀를 취하게 하여 파계하도록 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 율전은 라집에 있어서 마음속에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후 장안에 왔을 때에도
요흥은 라집법사에게, “대사의 총명함과 뛰어난 깨달음은 천하에 으뜸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고 불법(佛法)의 종자에 후사가 없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라고 말했다.결국 요흥이 억지로 권해서 기녀 10인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때문에 라집법사는 계율에 다소 부담스런 생활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요흥은 라집에게 깊이 존중하고 숭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라집법사에게 여자를 취하도록 요구하였다. 요흥이 라집에 대해서 행한 처우는 부인이 남편을 취하는 저들 강족(羌族)의 샤마니즘관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이 일이 있고난 후로 라집은 승방(僧坊)에 거주하지 않고 해사(廨舍: 관사)에 거주했다고 전한다. 수계의 옛스승 비마라차(卑摩羅叉)가 중국에 오자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한 스승은 라집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중국땅에 깊고 큰 인연이 있다. 법을 받은 제자가 몇 사람이나 되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라집은 “이 사람은 업장(業障)에 깊이 얽매어 있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의 가르침을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고뇌에 찬 대답을 하였다고 한다('출삼장기집' 라집전). 법사로는 있다 해도 율사(律師)라고는 할 수 없었다는 통절한 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법사로서 불전을 강술할 때에도 몇 번인가 “예를 들면 진흙 속에서 연꽃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연꽃을 취할 뿐 진흙을 취하지 마시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는 일이 불타의 가르침을 등진 생활을 하고 있다는 자책의 심중을 드러낸 것이다. 스스로 삼천의 문도를 거느린 대중들의 스승으로서 임하고 있었던 라집으로서도 생을 마칠때까지 이러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번역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은 당시의 장안 승려들이 율전번역을 매우 열심히 바랐던 것과 여산 혜원(慧遠)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으나, 무엇보다도 불야다라(弗若多羅)가 내조(來朝)할 기회를 얻게 되었던 것이 큰 계기가 되었다. 불야다라는 405년 가을에 중국으로 왔는데 그가 계율에 밝았으므로 여산 혜원의 청을 받고 구마라집과 함께 「십송율'을 번역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경법전(經法傳)을 나누어도 율장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었다. 다라(多羅)의 그 율부를 이미 잘 듣고 모두 사모했다”라 하는 것은 그간의 사정을 말해주는 것이다. 장안 불교계는 광율의 장래 번역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橫超慧日著 '中國佛敎の硏究' 第1 廣律 傳來以前の中國に於ける戒律).
그래서 라집은 의학(義學)의 승려 수백명과 함께 장안의 중사(中寺)에 맞아들여 번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래서 '십송율'은 라집법사와 불야다라가 405년부터 409년에 걸쳐 번역했다. 승예는 남방의 유유민(劉遺民)에 보낸 편지의 일부에 “삼장법사(불야다라)가 중사에 있으면서 율부를 역출하는데 본말을 다 정통하게 알고 있어 처음 제정할 때를 보는 듯 하다”라고 했다.('고승전' 승예전) 처음 제정할 때를 보는 듯하다란 부처님이 처음 율을 제정했을 때를 방불케한다는 것으로, 여기에는 불야다라를 통해서 율문의 깊은 의미와 율을 지키는 엄격함을 잘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장안의 중사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 삼분의 이가 완성되었을 때 불야다라가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노령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번역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505년에 담마유지(曇摩流支)에 의해서 재개되었다. 그의 번역이 58권을 일단 완성한 것은 라집 만년의 일이다(지금 보이는 '십송율' 61권이 된 것은 라집법사 입멸후 비마라차가 전력을 다했던 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대해서는 平川彰, '戒律の硏究' 123항 이하를 참조할 것).
중국에서 역출된 오부율전은 다음과 같다.
① 십송율 61권(유부): 弗若多羅 羅什공역(404∼409),
② 사분율 60권(법장부): 佛陀耶舍 竺佛念공역(410∼412),
③ 마하승지율 40권(대중부): 佛馱跋陀羅 法顯공역(416∼418),
④ 미사새부 오분율 30권(화지부): 佛陀什 竺道生공역(422∼423),
⑤ 음광부 解脫戒經 1권: 瞿曇般若流支(543역)
[팔리율(남방 상좌부): 팔리어, 오분율(화지부): 한문, 사분율(법장부): 한문, 마하승지율(대중부): 한문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