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경』은 천태학에서는 방등경전으로 불제자인 사리불 등이 재가 불자인 유마거사에게 논파당하는 내용으로 소승에서 대승의 말씀으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한 경이다. 세친의 『유마경론』이 있었다고 하지만 전해지지 않는다. 『유마경』은 오(吳)의 지겸이 『유마힐경』으로 번역한 바 있고, 축법란 축법호의 『유마경』이 있어서 중국에 알려졌다. 이후 라집법사가 『유마힐소설경' 3권으로 역출한 것이다.
라집법사의 번역은 경이 성립된 인도의 풍토와 관점을 잘 한어로 역출했다고 평가되고 도생(道生) 등의 관점은 중국의 사상 풍토에 입각하면서도 불교의 진의를 잘 드러내려하고 있다고 평하기도 한다.』
『반야경』에서 공(空)의 사상과 그 의의를 잘 설했다면, 『유마경』은 반야경 중요한 근본사상인 공을 실천한다는 의미에서 특별히 중시된다.
이러한 의미를 잘 들어낸 것이 구마라집 법사의 『불가사의 해탈의 법문'이라 할 수 있다. 이 역장에 참여했던 승조(僧肇)도 『출삼장기집』 「유마힐경서」에서 다음과 같이 역출 당시를 회상한다.
“홍시 8년(406) 세상이 순화(鶉火)에 있던 때 대장군 상산공 좌장군 안성후에게 명을 내려 의학에 밝은 사문 천이백 명과 함께 상안(장안) 대사(大寺)에 모여 라집법사를 청하여 정본(正本)을 다시 역출하게 했다.
라집법사는 세속을 높이 초월한 도량으로 마음이 진실한 경지에 밝게 합하고 이미 시비를 초월한 환중(還中)에 이르렀고 또 이 지방 한자말에도 뛰어났다. 이때(라집이) 손으로 호본(범어본) 경문을 들고 입으로는 스스로 선창해서 번역해냈다. 승려와 일반인들이 모두 경건하게 한 구절에 세 번씩 반복하면서 그 뜻을 새기고 정밀하게 구하면서 성인의 뜻을 이루는데 힘썼다. 그 문장은 간략하게 잘 말하고 있고, 종지는 그윽하면서도 온전히 잘 나타냈으니 미묘하고 심원한 말씀이 이에 환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들은 바를 따라서 주해를 붙이고 간략하게 기록해서 완성하였으며, 서술하기만 하고 지어 붙이지 않았다.”
라집이 범어본을 들고 입으로 역출해내고 도속의 사람들이 그 원 번역문을 경건하게 몇 번이나 반복해서 암송하여 음미하면서 번역해 갔다고 한다. 이때에는 간정 윤문은 하지 않았고 그 번역을 그대로 정하여 경문화한 것으로 보인다. 승예도 「유마힐제경의소서」에서 “경의 취지는 미묘하고 그 언사는 풍부하면서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라집 법사에게 들은 대로 필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있다.
그리하여 완성한 라집역 '유마경'에 대해서 “그 문장은 간략하게 잘 말하고 있고, 종지는 그윽하면서도 온전히 잘 나타냈으니 미묘하고 심원한 말씀이 이에 환하게 나타나게 되었다.”라고 승조는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확실히 승조의 이런 표현은 크게 틀린 것이 아니다. 그들이 역출한『유마경』은 오늘날에도 대승불교 문학의 백미로 추앙되고 있다. 다만 그의 역문은 구역의 잘못을 들고 있으면서도, 그 경문의 뜻에 있어서 지겸역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근래에 라집역을 지겸과 현장역 다시 티벹트역에 대비해서 라집법역의 특이성을 검토하고 있다.
이 역장에 참여했던 승조는 라집의 언설을 기록하는 것을 마치고, 얼마 안 되어 그의 스승의 설을 도생(道生) 도융(道融)의 설, 그리고 자신의 설을 더하여 유명한 저술을 세상에 내놓았다. 곧 『유마힐소설경주』 10권(대정장 38) 이른바 『주유마(註維摩)』10권으로, 이것은 『유마경)』을 이해하는데 기본적인 주석서이다. 이후 다수의 역출된 유마경소중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특히 중국 노장학의 입장에서 경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하다고 한다.
2) 『묘법연화경'의 역출
『유마경』과 함께 중요한 대승경전의 하나인 『묘법연화경』 7권(대정장 9)도 이해 여름 같은 장안 대사(大寺)에서 역출되었다. 이미 축법호의 『정법화경」 이 중국에 전해져 있으나 라집의 아름다운 번역에 의해 이후 중국불교계에 알려져 강설 연구되었다. 당시 역장에 참여했던 승예는 『법화경후서)』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경전이 이 땅에 유포된 지 비록 백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경을 번역하는 사람이 텅 빈 나루에 있는 사람처럼 어두워서 신령스러운 관문에 계합하거나 다가가지도 못하며, 담론하는 사람은 강령에 어긋나서 그윽한 자취를 밟는 사람이 드물게 되었다. 부질없이 백발이 될 때까지 찾고 연구해도 아직도 그 문을 엿본 사람이 없다.
진나라 사예교위인 좌장군 안성후 요숭(姚嵩)은 현묘한 문(門)에 뜻을 두고 세간을 넘어선 곳에 마음이 깃들게 하여 진실로 이 경전에 뜻을 기울였고 신심은 더욱 깊어 갔다. 그는 그 문장을 생각하
라집법사의 번역은 경이 성립된 인도의 풍토와 관점을 잘 한어로 역출했다고 평가되고 도생(道生) 등의 관점은 중국의 사상 풍토에 입각하면서도 불교의 진의를 잘 드러내려하고 있다고 평하기도 한다.』
『반야경』에서 공(空)의 사상과 그 의의를 잘 설했다면, 『유마경』은 반야경 중요한 근본사상인 공을 실천한다는 의미에서 특별히 중시된다.
이러한 의미를 잘 들어낸 것이 구마라집 법사의 『불가사의 해탈의 법문'이라 할 수 있다. 이 역장에 참여했던 승조(僧肇)도 『출삼장기집』 「유마힐경서」에서 다음과 같이 역출 당시를 회상한다.
“홍시 8년(406) 세상이 순화(鶉火)에 있던 때 대장군 상산공 좌장군 안성후에게 명을 내려 의학에 밝은 사문 천이백 명과 함께 상안(장안) 대사(大寺)에 모여 라집법사를 청하여 정본(正本)을 다시 역출하게 했다.
라집법사는 세속을 높이 초월한 도량으로 마음이 진실한 경지에 밝게 합하고 이미 시비를 초월한 환중(還中)에 이르렀고 또 이 지방 한자말에도 뛰어났다. 이때(라집이) 손으로 호본(범어본) 경문을 들고 입으로는 스스로 선창해서 번역해냈다. 승려와 일반인들이 모두 경건하게 한 구절에 세 번씩 반복하면서 그 뜻을 새기고 정밀하게 구하면서 성인의 뜻을 이루는데 힘썼다. 그 문장은 간략하게 잘 말하고 있고, 종지는 그윽하면서도 온전히 잘 나타냈으니 미묘하고 심원한 말씀이 이에 환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들은 바를 따라서 주해를 붙이고 간략하게 기록해서 완성하였으며, 서술하기만 하고 지어 붙이지 않았다.”
라집이 범어본을 들고 입으로 역출해내고 도속의 사람들이 그 원 번역문을 경건하게 몇 번이나 반복해서 암송하여 음미하면서 번역해 갔다고 한다. 이때에는 간정 윤문은 하지 않았고 그 번역을 그대로 정하여 경문화한 것으로 보인다. 승예도 「유마힐제경의소서」에서 “경의 취지는 미묘하고 그 언사는 풍부하면서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라집 법사에게 들은 대로 필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있다.
그리하여 완성한 라집역 '유마경'에 대해서 “그 문장은 간략하게 잘 말하고 있고, 종지는 그윽하면서도 온전히 잘 나타냈으니 미묘하고 심원한 말씀이 이에 환하게 나타나게 되었다.”라고 승조는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확실히 승조의 이런 표현은 크게 틀린 것이 아니다. 그들이 역출한『유마경』은 오늘날에도 대승불교 문학의 백미로 추앙되고 있다. 다만 그의 역문은 구역의 잘못을 들고 있으면서도, 그 경문의 뜻에 있어서 지겸역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근래에 라집역을 지겸과 현장역 다시 티벹트역에 대비해서 라집법역의 특이성을 검토하고 있다.
이 역장에 참여했던 승조는 라집의 언설을 기록하는 것을 마치고, 얼마 안 되어 그의 스승의 설을 도생(道生) 도융(道融)의 설, 그리고 자신의 설을 더하여 유명한 저술을 세상에 내놓았다. 곧 『유마힐소설경주』 10권(대정장 38) 이른바 『주유마(註維摩)』10권으로, 이것은 『유마경)』을 이해하는데 기본적인 주석서이다. 이후 다수의 역출된 유마경소중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특히 중국 노장학의 입장에서 경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하다고 한다.
2) 『묘법연화경'의 역출
『유마경』과 함께 중요한 대승경전의 하나인 『묘법연화경』 7권(대정장 9)도 이해 여름 같은 장안 대사(大寺)에서 역출되었다. 이미 축법호의 『정법화경」 이 중국에 전해져 있으나 라집의 아름다운 번역에 의해 이후 중국불교계에 알려져 강설 연구되었다. 당시 역장에 참여했던 승예는 『법화경후서)』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경전이 이 땅에 유포된 지 비록 백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경을 번역하는 사람이 텅 빈 나루에 있는 사람처럼 어두워서 신령스러운 관문에 계합하거나 다가가지도 못하며, 담론하는 사람은 강령에 어긋나서 그윽한 자취를 밟는 사람이 드물게 되었다. 부질없이 백발이 될 때까지 찾고 연구해도 아직도 그 문을 엿본 사람이 없다.
진나라 사예교위인 좌장군 안성후 요숭(姚嵩)은 현묘한 문(門)에 뜻을 두고 세간을 넘어선 곳에 마음이 깃들게 하여 진실로 이 경전에 뜻을 기울였고 신심은 더욱 깊어 갔다. 그는 그 문장을 생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