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가르주나의 시대적 배경
마우리야 왕조가 기원전 180년경 멸망해가고, 슝가왕조(기원전187∼75)의 퓨사미트라왕이 파탈리푸트라를 중심으로 중인도를 통치 불교를 배척하고 바라문교를 신봉 보호하였다. 파탈리푸트라는 마우리아왕조의 군사령관이었는데 아쇼카왕 사후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기원후 187년무렵 정권을 탈취하고 슝가왕조를 세웠다. 거의 같은 시기 데칸고원에 새로이 비다르바국이 세워져 슝가왕조에 대적하였다. 한편 서북 인도에는 그리스계왕이 지배하여 슝가왕조에 대항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특히 서북인도에 그리스문화 영향을 크게 나타나게 시작하였다. 불상의 탄생은 그 하나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외에도 동서 사상적 교류도 보이게 되어 '밀란다왕의 질문(나선비구경)'(동진 317∼420년 한역) 그러한 확실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마우리야 왕조가 쇠약해짐과 함께 남인도에 있던 안드라왕조(싸타바하나왕조)의 세력이 급격히 증대하게 되었다. 원래 미미하던 세력에 불과했었으나, 기원전 200년경부터 급격히 발전하여 기원후 3세기 까지 존속하였다. 그 세력은 나루마다강을 넘어서 마루우에 이르고, 기원후 2세기에는 그의 영역이 데칸고원 전체에 확대되어 서해안에까지 도달하였다.
안드라왕조는 대남인도에 대왕국을 건설하였으나, 그 발상지에 관해서는 이설이 많아서 확정할 수 없다. 수도는 크리슈나강 언덕 다니아카다카(아마라바테이)였다고 한다. 본래의 고향은 현재 마도라스주의 벳라리였다는 추측이 유력한데, 놀랍게도 서인도에서 남인도로 진출했다고 한다. 이 왕조는 기원후 2세기에 전성기에 도달했다. 그때의 왕은 가우다미 푸트라샤 다카루니였다. 인도의 불교학자 V∙라마난 박사는 나가르주나와 친교가 있었던 것은 이 왕이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확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왕조의 왕은 모두 샤타카루니(싸타카루니)라고 불리고 있으나 이것은 제3대 및 제6왕의 이름이었는데 후에 이 왕조 전체의 이름이 되었다. 왕가는 바라문이었으며, 나가족의 피가 조금 섞여 있었다.
가우다미 푸트라샤 다카루니는 푸라나 문헌의 전승에 의하면 제23대 왕으로 비문에 “싸타바하나가의 명성을 회복했다.”는 용감한 무사였다고 한다. 또한 “대왕”이라 불렸으며, 보통 데칸고원 전체를 지배하였다. 그는 이상적인 정치를 행했다고 칭찬받았으며 용감한 무사와 바라문 문화가 그의 인격을 지배하는 2대 지주였다. 왕의 어머니는 경건한 불교신앙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비문에서 알 수 있다. 곧 불교교단에 굴원(屈原)을 기진하고 현주부(賢胄部) 소유였다고 한다. 중촌원 박사는 당시의 국가와 종교와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의 두 가지 점으로 요약해서 그 특질을 밝히고 있다. ('中村元撰集 제6권 인도 古代史 하' 춘추사 1966년, p. 222)
1. 안드라 왕조는 바라문교를 국교로 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종교를 핍박하는 일은 없었다. 왕실의 부인이 개인적으로 불교에 귀의 하는 것은 왕실 전체가 조금도 방해하지는 않았으며, 적극적으로 승인하고 지원하였다.
2. 바라문교적인 비문의 문구가 불교의 굴원에 새겨져 있다. 바라문교를 찬미하는 문구가 불교 사원 속에 새겨져 있다는 것은 불교교단이 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또 불교교단이 국가 권력에 대해서 항쟁적이지 않았다.
남인도에 있어서 불교의 성격이 매우 관대하게 보여서 매우 흥미 깊은 점이 있으나, 이 점에 대해서는 후에 국왕에게 교훈이 되는 글을 써 주었다는 서간체의 저작 '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 '권계왕송(勸誡王頌)'의 내용을 소개 해설할 때 다시 언급할 것이다. 이 저술은 불교에서 정치윤리와 세속윤리에 대하여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그 방법을 모색하는데 있어서 유익한 시사를 주기 때문이다.
인도불교사는 북방에서는 이곳보다 조금 먼저 세워진 쿠샤나 왕조에 의해 제국시대를 맞이하였다. 중국문헌에서는 쿠샤나족(貴想)의 일을 월씨(月氏) 또는 대하(大夏)라고 하여 전해지고 있다. 인도에 있어서는 쿠샤나라고 불리는 지배자들은 두 가지 계통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카드후이세스 1세와 2세 3세를 배출하였고, 다른 하나는 카니시카왕을 시작으로 거의 1세기에 걸쳐서 인도의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그런데 양쪽 카드후이세스를 제1왕조 카니시카왕 이후를 제2왕조라고 부르고 있다. 월씨는 유목민이었으나 대하를 정복하고 정착하면서 부를 누리게 되었다. 강력한 힘으로 주변 국가를 정복하고 인도에 침입하였다.
서북인도를 지배하던 시대가 되자 로마와 교통이 활발하게 되고 상업 활동도 크게 성하게 되었다. 당시 수로의 여행도 성행하였다.
쿠샤나제국의 상인은 로마와의 교역을 열어 명주 향료 보석 염료 등을 판매
마우리야 왕조가 기원전 180년경 멸망해가고, 슝가왕조(기원전187∼75)의 퓨사미트라왕이 파탈리푸트라를 중심으로 중인도를 통치 불교를 배척하고 바라문교를 신봉 보호하였다. 파탈리푸트라는 마우리아왕조의 군사령관이었는데 아쇼카왕 사후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기원후 187년무렵 정권을 탈취하고 슝가왕조를 세웠다. 거의 같은 시기 데칸고원에 새로이 비다르바국이 세워져 슝가왕조에 대적하였다. 한편 서북 인도에는 그리스계왕이 지배하여 슝가왕조에 대항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특히 서북인도에 그리스문화 영향을 크게 나타나게 시작하였다. 불상의 탄생은 그 하나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외에도 동서 사상적 교류도 보이게 되어 '밀란다왕의 질문(나선비구경)'(동진 317∼420년 한역) 그러한 확실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마우리야 왕조가 쇠약해짐과 함께 남인도에 있던 안드라왕조(싸타바하나왕조)의 세력이 급격히 증대하게 되었다. 원래 미미하던 세력에 불과했었으나, 기원전 200년경부터 급격히 발전하여 기원후 3세기 까지 존속하였다. 그 세력은 나루마다강을 넘어서 마루우에 이르고, 기원후 2세기에는 그의 영역이 데칸고원 전체에 확대되어 서해안에까지 도달하였다.
안드라왕조는 대남인도에 대왕국을 건설하였으나, 그 발상지에 관해서는 이설이 많아서 확정할 수 없다. 수도는 크리슈나강 언덕 다니아카다카(아마라바테이)였다고 한다. 본래의 고향은 현재 마도라스주의 벳라리였다는 추측이 유력한데, 놀랍게도 서인도에서 남인도로 진출했다고 한다. 이 왕조는 기원후 2세기에 전성기에 도달했다. 그때의 왕은 가우다미 푸트라샤 다카루니였다. 인도의 불교학자 V∙라마난 박사는 나가르주나와 친교가 있었던 것은 이 왕이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확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왕조의 왕은 모두 샤타카루니(싸타카루니)라고 불리고 있으나 이것은 제3대 및 제6왕의 이름이었는데 후에 이 왕조 전체의 이름이 되었다. 왕가는 바라문이었으며, 나가족의 피가 조금 섞여 있었다.
가우다미 푸트라샤 다카루니는 푸라나 문헌의 전승에 의하면 제23대 왕으로 비문에 “싸타바하나가의 명성을 회복했다.”는 용감한 무사였다고 한다. 또한 “대왕”이라 불렸으며, 보통 데칸고원 전체를 지배하였다. 그는 이상적인 정치를 행했다고 칭찬받았으며 용감한 무사와 바라문 문화가 그의 인격을 지배하는 2대 지주였다. 왕의 어머니는 경건한 불교신앙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비문에서 알 수 있다. 곧 불교교단에 굴원(屈原)을 기진하고 현주부(賢胄部) 소유였다고 한다. 중촌원 박사는 당시의 국가와 종교와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의 두 가지 점으로 요약해서 그 특질을 밝히고 있다. ('中村元撰集 제6권 인도 古代史 하' 춘추사 1966년, p. 222)
1. 안드라 왕조는 바라문교를 국교로 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종교를 핍박하는 일은 없었다. 왕실의 부인이 개인적으로 불교에 귀의 하는 것은 왕실 전체가 조금도 방해하지는 않았으며, 적극적으로 승인하고 지원하였다.
2. 바라문교적인 비문의 문구가 불교의 굴원에 새겨져 있다. 바라문교를 찬미하는 문구가 불교 사원 속에 새겨져 있다는 것은 불교교단이 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또 불교교단이 국가 권력에 대해서 항쟁적이지 않았다.
남인도에 있어서 불교의 성격이 매우 관대하게 보여서 매우 흥미 깊은 점이 있으나, 이 점에 대해서는 후에 국왕에게 교훈이 되는 글을 써 주었다는 서간체의 저작 '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 '권계왕송(勸誡王頌)'의 내용을 소개 해설할 때 다시 언급할 것이다. 이 저술은 불교에서 정치윤리와 세속윤리에 대하여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그 방법을 모색하는데 있어서 유익한 시사를 주기 때문이다.
인도불교사는 북방에서는 이곳보다 조금 먼저 세워진 쿠샤나 왕조에 의해 제국시대를 맞이하였다. 중국문헌에서는 쿠샤나족(貴想)의 일을 월씨(月氏) 또는 대하(大夏)라고 하여 전해지고 있다. 인도에 있어서는 쿠샤나라고 불리는 지배자들은 두 가지 계통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카드후이세스 1세와 2세 3세를 배출하였고, 다른 하나는 카니시카왕을 시작으로 거의 1세기에 걸쳐서 인도의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그런데 양쪽 카드후이세스를 제1왕조 카니시카왕 이후를 제2왕조라고 부르고 있다. 월씨는 유목민이었으나 대하를 정복하고 정착하면서 부를 누리게 되었다. 강력한 힘으로 주변 국가를 정복하고 인도에 침입하였다.
서북인도를 지배하던 시대가 되자 로마와 교통이 활발하게 되고 상업 활동도 크게 성하게 되었다. 당시 수로의 여행도 성행하였다.
쿠샤나제국의 상인은 로마와의 교역을 열어 명주 향료 보석 염료 등을 판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