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으로 의정(義淨)의 『남해기귀내법전』 제4권에는 『권계왕송(勸誡王頌)』의 일에 관련하여 그 요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권계왕송'에 대해서는 제5장에서 자세히 서술하고 여기서는 의역해서 보기로 한다.
용수보살은 시구(詩句)로 지어서 서적에 대신하고 있다. 이것이 『스후릿레카』인데 ‘벗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번역한다. 옛날 불교신자 남인도 대국왕 싸다바하나라고 이름하고 제타카(?)라고 부른 왕에 해당한다. 뛰어난 문장력을 가지고 친절하게 삼가도록 가르치고, 바르게 중도를 보여, 절친한 친척들의 청탁을 뛰어 넘어 정치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이런 취지는 의미하는 것이 많다.
삼존(三尊)을 공경하고, 부모님을 섬기며, 계를 잘 지켜 악을 물리치고, 사람을 잘 골라서 사귀고, 재물과 음욕에 빠지지 않고, 가족을 잘 생각해서 무상(無常)을 마음속에 깊이 지니며, 널리 아귀 축생의 일을 말하고 또한 그 보다 나은 인 천이나 지옥의 일을 만나면 머리에서 타내려오는 불을 꺼 없애는 것처럼 쉬지 않고 연기의 도리에 대해 마음을 다해 해탈을 구하며, 문(聞) 사(思) 수(修)의 삼혜의 실천에 힘써 팔정도를 밝힌다. 사제(四諦)의 가르침을 배워 완전히 확고한 자리이타의 깨달음을 얻는 것처럼 이라 권하고 있는 것은 마치 관자재보살이 적과 아군을 나누지 않고 또한 아미타불이 항상 정토에 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4. 중인도에 있어서 조탑 전설
『법원주림』 100권에도 얼마 되지는 않으나 나가르주나에 대해서 전승을 싣고 있다. 본서는 당의 도세(道世 ?〜683년)가 668년에 편집한 것이다. 여러 경론 등에서 풍부하게 인용하면서, 불교에 있어서 사상, 술어를 비롯해서 여러 항목에 걸쳐 해설하고 있어서, 말하자면 백과전서라고도 말할 수 있는 저술로, 항목은 백편 668부, 인용하고 있는 경론이 실로 400 수십 종에 이르고 있다. 이 가운데 제38권과 53권에 나가르주나에 대해서 전승을 게재하고 있다.
전자(제38권)에는 「경탑편(經塔篇)」 속에 있다. 여기에는 왕현책(王玄策)의 『서역지』가 인용되고 있다. 왕현책은 현장과 같은 시대에 인도에 두 번이나 사절로 부임하여, 그 때 견문을 기록하고 있다. 후자(제53권)는 「기변편(機弁篇)」가운데 「보살부」에 나오는 해설로 마명과 나가르주나의 전기를 수록하고 있다. 곧 나가르주나전은 『용수보살전』과 『부법장인연전』에 의해서 정리되어 있으므로 생략한다.
『서역지』에 말하기를, “파사익왕의 도성 동쪽에 백리의 대해 부근에 대탑이 있다. 대탑 속에 소탑이 있다. 높이가 1장 2척이고, 갖가지 보배로 이를 장식하고 있다. 밤중에도 빛이 나서 큰 불이 난 것과 같다. 말하기를 부처님이 열반에 들어간 지 오백년 후 용수보살은 큰 바다에 들어가 용왕을 교화시켰다. 용왕은 이 보탑을 가지고 용수에게 받들어 바쳤다. 용수는 이를 받은 후에 이 나라에 희사하였다. 왕은 곧 대탑을 세우고, 그 위에 놓았다. 옛날부터 사람들이 바라는 바가 있는 자는 모두 머리를 땅에 대고 향을 피우며 꽃다발을 봉헌한다. 그 꽃다발은 지면에서 저절로 일어나 돌고 서서히 위로 올라 마침내 탑의 바로 위 공중에 이르고, 거기서 하루를 지나서 없어지고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서역지』에 말하기를, “용수보살은 바라나국(波羅奈國)에 있는데 탑을 700개소 지었다. 그 외에도 범부와 성인으로서 탑을 조성한 자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바로 니련선하 위에 있으며, 탑 천여개소를 건립했다. 5년에 한번 무차대회를 베풀었다.
이것은 나가르주나가 탑을 조성한 일에 대한 전설을 기록한 것이다. 그 말들은 매우 특이하여 도저히 그대로는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속에는 나가르주나의 행적의 일단을 전해준다고 생각되는 점이 있다. 그 점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파사익왕의 도성은 사위성에 있었는데, 용수보살이 용왕에게서 받아 가져왔다고 하는 보탑은 사위성의 동쪽 물가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인도를 여행했던 왕현책(王玄策) 이를 보았다고 한다. 또한 바라나는 바라나시로 중인도에 있으며, 이 주위에도 많은 고탑들이 있다. 이들은 용수보살의 건립하거나 전부터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유적들은 인도의 도처에 그의 행화가 미쳤다는 그의 행적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주 1)당나라 의정(義淨, 635〜713 )의 저술로 모두 4권으로 되어 있다. 671년 인도로 간 의정이 주로 인도 Nalanda寺에 거주하고, 691년 남해광동성 광주로 돌아오는 길에 남해의 슈리비자야(지금의 수마트라 섬)에 머무는 동안 저술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인도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불교교단과 승려들의 계율 승려 생활의식 예법 등 일상적인 계율에 대해 쓴 책으로 『
십송율』과 그 내
용수보살은 시구(詩句)로 지어서 서적에 대신하고 있다. 이것이 『스후릿레카』인데 ‘벗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번역한다. 옛날 불교신자 남인도 대국왕 싸다바하나라고 이름하고 제타카(?)라고 부른 왕에 해당한다. 뛰어난 문장력을 가지고 친절하게 삼가도록 가르치고, 바르게 중도를 보여, 절친한 친척들의 청탁을 뛰어 넘어 정치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이런 취지는 의미하는 것이 많다.
삼존(三尊)을 공경하고, 부모님을 섬기며, 계를 잘 지켜 악을 물리치고, 사람을 잘 골라서 사귀고, 재물과 음욕에 빠지지 않고, 가족을 잘 생각해서 무상(無常)을 마음속에 깊이 지니며, 널리 아귀 축생의 일을 말하고 또한 그 보다 나은 인 천이나 지옥의 일을 만나면 머리에서 타내려오는 불을 꺼 없애는 것처럼 쉬지 않고 연기의 도리에 대해 마음을 다해 해탈을 구하며, 문(聞) 사(思) 수(修)의 삼혜의 실천에 힘써 팔정도를 밝힌다. 사제(四諦)의 가르침을 배워 완전히 확고한 자리이타의 깨달음을 얻는 것처럼 이라 권하고 있는 것은 마치 관자재보살이 적과 아군을 나누지 않고 또한 아미타불이 항상 정토에 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4. 중인도에 있어서 조탑 전설
『법원주림』 100권에도 얼마 되지는 않으나 나가르주나에 대해서 전승을 싣고 있다. 본서는 당의 도세(道世 ?〜683년)가 668년에 편집한 것이다. 여러 경론 등에서 풍부하게 인용하면서, 불교에 있어서 사상, 술어를 비롯해서 여러 항목에 걸쳐 해설하고 있어서, 말하자면 백과전서라고도 말할 수 있는 저술로, 항목은 백편 668부, 인용하고 있는 경론이 실로 400 수십 종에 이르고 있다. 이 가운데 제38권과 53권에 나가르주나에 대해서 전승을 게재하고 있다.
전자(제38권)에는 「경탑편(經塔篇)」 속에 있다. 여기에는 왕현책(王玄策)의 『서역지』가 인용되고 있다. 왕현책은 현장과 같은 시대에 인도에 두 번이나 사절로 부임하여, 그 때 견문을 기록하고 있다. 후자(제53권)는 「기변편(機弁篇)」가운데 「보살부」에 나오는 해설로 마명과 나가르주나의 전기를 수록하고 있다. 곧 나가르주나전은 『용수보살전』과 『부법장인연전』에 의해서 정리되어 있으므로 생략한다.
『서역지』에 말하기를, “파사익왕의 도성 동쪽에 백리의 대해 부근에 대탑이 있다. 대탑 속에 소탑이 있다. 높이가 1장 2척이고, 갖가지 보배로 이를 장식하고 있다. 밤중에도 빛이 나서 큰 불이 난 것과 같다. 말하기를 부처님이 열반에 들어간 지 오백년 후 용수보살은 큰 바다에 들어가 용왕을 교화시켰다. 용왕은 이 보탑을 가지고 용수에게 받들어 바쳤다. 용수는 이를 받은 후에 이 나라에 희사하였다. 왕은 곧 대탑을 세우고, 그 위에 놓았다. 옛날부터 사람들이 바라는 바가 있는 자는 모두 머리를 땅에 대고 향을 피우며 꽃다발을 봉헌한다. 그 꽃다발은 지면에서 저절로 일어나 돌고 서서히 위로 올라 마침내 탑의 바로 위 공중에 이르고, 거기서 하루를 지나서 없어지고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서역지』에 말하기를, “용수보살은 바라나국(波羅奈國)에 있는데 탑을 700개소 지었다. 그 외에도 범부와 성인으로서 탑을 조성한 자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바로 니련선하 위에 있으며, 탑 천여개소를 건립했다. 5년에 한번 무차대회를 베풀었다.
이것은 나가르주나가 탑을 조성한 일에 대한 전설을 기록한 것이다. 그 말들은 매우 특이하여 도저히 그대로는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속에는 나가르주나의 행적의 일단을 전해준다고 생각되는 점이 있다. 그 점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파사익왕의 도성은 사위성에 있었는데, 용수보살이 용왕에게서 받아 가져왔다고 하는 보탑은 사위성의 동쪽 물가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인도를 여행했던 왕현책(王玄策) 이를 보았다고 한다. 또한 바라나는 바라나시로 중인도에 있으며, 이 주위에도 많은 고탑들이 있다. 이들은 용수보살의 건립하거나 전부터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유적들은 인도의 도처에 그의 행화가 미쳤다는 그의 행적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주 1)당나라 의정(義淨, 635〜713 )의 저술로 모두 4권으로 되어 있다. 671년 인도로 간 의정이 주로 인도 Nalanda寺에 거주하고, 691년 남해광동성 광주로 돌아오는 길에 남해의 슈리비자야(지금의 수마트라 섬)에 머무는 동안 저술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인도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불교교단과 승려들의 계율 승려 생활의식 예법 등 일상적인 계율에 대해 쓴 책으로 『
십송율』과 그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