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승불교의 사상

 제1부 모두에서 보았던 것처럼 나가르주나는 대승불교에 이르러 강조되었던 '반야경'의 공의 사상 이른바, 공관을 이론적인 기초로 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대승불교는 '반야경'의 사상을 계승하여 대승불교에 철학적 기초를 제공하였고 그 사상을 확립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대승불교와는 어떻게 성립 전개 되었을까 이하에서 나가르주나 사상론에 들어가기 전에 그 사상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대승불교의 흥기
 기원100년 전 후 불교계에서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경향의 불교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사회적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 민중 및 그 지도자들이었던 설교사(說敎師)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종교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대승불교운동이다. 이에 대해서 이전의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불교는 일반에서 소승불교라고 부르고 있으나 그것은 대승불교 측에서 폄하하여 부르던 이름으로, 구래(舊來)의 불교 제파에서는 이와 같이 부르지 않았다. 구래의 제파는 자신들의 불교를 정통파로 여기고 대승불교를 무시하였다.  
우선 첫째 구래의 제파는 변용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역사적 인물로서 고타마의 직접적인 교시에 가까운 성전을 전하고 전통적인 교리를 그대로 충실히 보전하고 있다. 이에 반해서 대승불교도는 전연 새로이 경전을 창작했다. 거기에 나타난 석존은 역사적인 인물이라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상적인 존재로써 묘사되고 있다.
 둘째 구래의 불교제파는 국왕 제후 호족 등의 정치적 경제적 원조를 받고 광대한 장원(莊園)을 소유하여 그의 사회적 기반위에 존립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에 반해서 대승불교는 적었지만 초기에는 민중들 사이에서부터 일어났던 종교운동이었고 장원을 소유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왕 대신들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여 권력자들 아첨하는 것을 경계하고 그 신앙이 순수하고 청정하다는 것을 과시하였다. 또한 부자가 사탑을 건립하고 막대한 부를 보시하는 것을 매우 공덕이 많다고 하지만, 그러나 경전을 독송하고 서사하고 믿어 지니는 편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공덕이 많다고 하면서 경전의 독송을 권하고 있다.
 정통적인 불교 제파는 이상과 같은 사회적 세력을 가지고 있고, 막대한 재산을 의지하여 오직 자신 만을 고귀하게 유지하고 자신을 청결하게 하기 위해서 그의 태도는 매우 독선적이고 고답적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와 떨어진 지역에 있는 거대한 승원 안에 거주하면서 고요히 명상하고 좌선을 닦고 번쇄한 교리연구에 종사하였다.

  2) 이타행의 실천과 제불 보살에의 신앙
 대승불교는 전통적인 교단의 생활태도를 들어서 공격했다. 그들의 태도는 이기적 독선적인 이라고 하여 멸시하고 그들에게 “소승”이라고 폄하하여 부르고 자신들에게는 이타행을 강조하였다. 대승불교에서는 자비정신에 입각해서 태어나므로 생기는 중생들 모두를 고(苦)에서 구하기를 희망하였다. 자신이 피안에 도달하기 전에 또한 다른 사람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이타행을 실천하는 사람을 보살(bodhisattva 大士 開士)이라 불렀다. 출가한 비구(수행자)라 해도 재가의 국왕 상인 직장인 들이라 해도 중생제도의 서원(비원)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모두 보살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비에 기초한 보살행은 이상으로서는 어떤 사람도 행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일반 범부에게는 상당히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타방에 있는 제불 제보살에 귀의해서 그 힘에 의해서 구원받고 그 힘에 도움을 받아서 실천을 행하도록 설하고 있다. 따라서 신앙에 순수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신앙의 대상으로서는 붇다가 무엇보다도 초인적인 것으로 표상되었다.  
대승불교에 있어서는 삼세시방에 걸쳐서 무수히 많은 제불의 출세 및 존재를 밝히기에 이르렀다. 제불 가운데서도 아촉불 아미타불 약사여래 등이 특히 열렬한 신앙을 받았다. 또한 보살도 초인화되어 그 구제력이 강조되었다. 미륵보살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등은 특히 눈에 띄는 보살들이다. 그들은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는 갖가지 몸을 나투어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래서 중생에 대한 자비 때문에 스스로는 니르바나(깨달음의 경지, 열반)에 들어가지 않는다.
 제불 보살에 대한 신앙이 높아짐에 따라 그들의 신체를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현해서 그것을 숭배하고자 하는 열망이 일어나 다수의 불상 및 보살상이 제작되었다. 중앙아시아 마투라시와 서북인도의 간다라 지방 등지가 불상제작의 중심지가 되었다. 전자는 아쇼카왕 이래의 인도 국수주의 미술 전통을 따르고 있으나, 후자는 그리스 미술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진다.
 대승불교의 교화방법은 당시의 민중의 정신적 소질 혹은 그런 경향에 적합한 모습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불보살을 신앙하고 귀의한다면 많은 부와 행복을 얻으며 질병이 없고 재난도 그치게 된다고 설하고 있다. 특히 주목해야할 만한 것으로는 교화의 중요한 하나의 수단으로 주(呪)의 구절(다라니)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교화책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동시에 대승불교가 후에 타락에 이르렀던 원인을 여기에서 제공하였다고 한다.
 초기 대승불교도는 일찍이 정했던 교단의 조직을 확정하고 세밀한 철학적 논구를 선호하였다. 오히려 자신의 확고한 신념과 타오르는 신앙을 화려하고 거대한 표현을 가지고 쉬지 않고 차례차례 표명하여 그 결과 성립한 것이 대승경전이다. 대승경전은 그 이전에 민중 사이에 애호되었던 불교설화에 준거하고 혹은 불전에서 취재하여 희곡적 구성을 가져다가 그 깊은 철학적 의의를 빌어오고 게다가 일반민중의 마음에 들어맞도록 제작되었던 종교적 문예작품이었다.

  3) 반야경전에 있어서 공관
 공관이란 일체제법(혹은 사물)이 공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저러한 것이 고정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관하는 사상이다. 이미 원시불교에 있어서 세간은 공하다고 설하였다(예를 들면, “항상 마음에 염하여 무엇인가를 아는 아트만(아)이 있다고 집착하는 견해를 파하고 세간을 공하다고 관찰하라. 그렇게 한다면 죽음을 건널 수 있으리라” '숫타니빠다' 1119)
 대승불교의 초기에 만들어진 반야경전에는 공관 사상을 받아서 다시 발전시켜서, 대승불교의 기본적인 교설이 되었다. 반야경전으로는 '대반야바라밀경'(600권 현장역)은 일대집성서 이지만 '반야심경' '금강(반야)경' '이취경'등은 특히 유명하다.  
당시 설일체유부 등의 이른바 소승제파가 법의 실유(實有)를 제창한데 대하여 이를 공격하기 위해 특히 부정적인 뜻으로 통하는 공이라고 하는 말을 반야경전은 반복하여 사용하였다.(법에 대하여는 p.83이하, 또한 “법의 실유”에 대해서는 p.95이하 참조)
 여기에 의하면 우리는 고정적인 법이라고 하는 관념을 품지 않으면 안 된다.('금강경' 6절) 일체 제법은 공하다 왜냐하면 일체 제법은 다른 법에 조건 지어서 성립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고정적 실체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무자성에 있기 때문에 본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공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제법이 공하다고 한다면 본래 공한데 있다고 하는 번뇌 등을 단멸한다고 하는 것도 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금강경' 27절) 이러한 이법(理法)을 체득하는 일이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깨달음)이다. 그 외에는 어느 것도 무상정등각이라고 구별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천은 이러한 공관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예를 들면 '금강반야경'의 제10절에는 “진실로 주(住)하는 것은 없이 그 마음을 낸다(應無所住而生其心)”고 설하고 있다. 보살은 무량무수무변의 중생을 제도하지만 그러나 자신이 중생을 제도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진실한 보살이 아니라고 한다. 여기에 의하면 구하는 자도 공하고 구해지는 중생도 공하고, 구원에 도달하는 경지도 공하다. 또한 신상(身相, 신체적인 특징)을 가진 부처님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른바 상(相)은 모두 허망하다. 모든 상은 상이 아니다 라고 본다면 곧 여래를 보리라 이와 같이 여래를 설한 가르침도 없다. 가르침은 뗏목과 같아서 중생을 인도한다고 하는 목적에 도달했다면 뗏목은 버리라고 한다.
 이러한 실천적 인식을 지혜의 완성(반야바라밀다)이라고 부른다. 바라밀에는 베풀어주고(보시), 금하는 것을 지키고(지계), 참고 견디는(인욕), 부지런히 노력하는(정진), 조용히 명상하는(선정) 이상의 다섯 가지의 완성과 아우르는 여섯의 완성(六度 육바라밀다)이라고 부른다.

  4) 재가 불교운동
 공관에서의 논리의 필연적인 결론으로서 윤회와 니르바나는 그것 자체로는 어떤 다른 것도 없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현실 일상생활이 그대로 이상적인 경지로서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상의 경계는 우리들이 미혹하고 있는 생존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공의 실천으로서 자비행은 현실의 인간생활을 통하여 실현된다. 이런 입장을 철저히 하고 곧 출가생활을 부정하고 재가의 세속생활 중에 불교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는 종교운동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상의 소산으로서 대표적인 경전이 '유마힐소설경'이다. 여기에 있어서 유마힐이라고 하는 재가의 자산가(거사)가 주인공으로 되어 있고, 출가자로는 석존의 고족제자들의 사상 혹은 실천수행을 완비할 때까지 논란 추급해서 그들을 외축(畏縮)시키고, 그 후에 진실의 진리를 밝혀서 그들을 지도한다고 하는 이야기로 되어 있다. 그 구극의 경지는 말로는 표시할 수 없는 “불이(不二)의 법문”이다. 유마는 그것을 침묵에 의해서 표현하였다고 한다.
 재가불교운동의 이상은 얼마 지난 후대에 나타난 '승만경'의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석존의 면전에서 국왕의 비인 승만부인이 제 문제에 대해서 대승의 법을 설하고 석존은 자주 칭탄의 말을 하고, 그의 설법을 시인한다고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5) 『화엄경』에 있어서 보살행의 강조
 화엄경의 취지는 현상계의 모든 현상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 이른바 사사무애의 법계연기설에 근거해서 보살행을 설한다. 보살수행에는 자리와 이타라고 하는 두 가지 방면이 있으나, 보살이 있어서는 중생제도라고 하는 것이 자리에 있기 때문에 자리즉이타이다.
 이 경의 십지품에는 보살의 수행이 진행함에 따라 마음의 향상하는 과정을 십지(10가지 단계)로 나누어 설한다. 또한 입법계품 속에서는 선재동자의 구도라고 하는 중심의 내용이 주목된다. 여기에는 보살심을 일으켜 보살행을 완전히 알기 위해서 남방에 유행하며 53인(또는 44인)의 근본을 방문해서 가르침을 구하고 최후에는 보현보살의 가르침을 받고 구극의 경지에 도달한다.

  6) 정토교
 일부의 대승교도들은 현세를 예토(穢土)로 여기고, 피안의 세계에 있는 정토(淨土)를 구하였다. 아촉불의 정토에는 동방의 묘희국 미륵보살의 정토에 있는 상방의 도솔천 등이 생각되는데, 이러한 제불을 신앙함으로써 내세에는 그곳에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데 후세에 더욱더 영향을 크게 끼친 것은 아미타불의 정토에 있는 극락세계의 관념이다. 아미타불의 신앙은 당시 민중들 사이에 행해지던 여러 대승경전 중에 나타나지만 특히 주요한 것은 정토삼부경이다.

 『불설무량수경』 2권 조위(曹魏) 강승개(康僧鎧) AD 252년 낙양 백마사에서 번역.
 『불설관무량수경』 1권 송(宋) 강양야사(畺良耶舍) 원가 4년 AD 433년 번역.
 『불설아미타경』 1권 후진 구마라집(鳩摩羅什)역 홍시4년 AD 402년 번역

 정토경전은 오탁악세의 중생들을 위해서 석존이 아미타불에 의해 구원하는 것을 설한 경전이라는 것을 표방하고 있다. 아미타불이란 원어 음역을 생략으로 그 의의를 번역하면 무량수불(Amitāyus) 또는 무량광불(Amitābha)라고 한다. 아미타불은 과거세에 법장비구라고 하는 수행자였으나 중생제도의 서원(48원)을 세우고 장자 거사 국왕 제천 등이 되어 무수한 중생을 교화하여 제불을 공양하고 마침내 깨달음을 열었다.
 이 세계에서 서방에 향하여 십만억 불국토를 지난 곳에 극락세계가 있고, 그 부처님이 나타내어 그곳에 법을 설하고 있다. 그곳에는 마음에 괴로움이 없고 칠보로 이루어진 연못이 있어서 아름다운 새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천상의 음악이 연주되고 있다. 아미타불께 마음으로 귀의하는 자는 그 극락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 이 부처님이 과거세에 수행자였을 때 세웠던 48원 속에 제48원에 “만약 내가 (미래세에) 부처가 될 수 있다면 시방의 중생이 진심으로 믿고 이 나라에 태어나고자 하면, 내지 열 번 염한다면, 만약 이 나라에 태어나고자 한다면, 나는 정각을 취하겠다”고 서원하고서 지금은 부처님이 되었기 때문에 부처를 염하는 자는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고 하고 있다. 선남자들 혹은 선여인이 무량수불의 명호를 듣고 마음으로 염한다면 그 사람이 임종할 때를 당해서는 무량수불이 성문 및 보살 성중을 데리고 앞에 서 있다(내왕하여 영접). 그래서 현세의 의의가 후대의 정토교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만, 이미 경전 가운데서 육바라밀의 실천의 의의가 강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