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일승사상과 구원의 본불(本佛)의 관념

 대승불교도들은 소승불교도들을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있지만, 사상사적인 현실에서 말한다면 불교내의 갖가지 교설은 어느 것이나 그의 존재의의(存在意義)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도리를 희곡적 구성과 문예적 형식을 빌려서 명료하게 표현한 경전이 『법화경』이다.
 『법화경』에는 특히 구마라집역 '묘법연화경』8권에 의해 유명해졌는데 그 전반부 14품(적문)에 있어서는 다만 성문승(석존의 가르침을 듣고 충실히 실천하는 것) ․ 연각승(혼자서 깨달음을 여는 실천) ․ 보살승(자리이타를 추구하는 대승의 실천)의 삼승이 일승에 귀의한다고 하는 것을 매우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종래에 이러한 삼승은 일반에 특별한 가르침으로 부각되지 않고 그것은 피상적인 견해였으나 모두 불타가 중생을 인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설했다는 것으로 진실은 일승법에 있다고 본다. 또한 하나의 시구(詩句, 하나의 게송)를 듣고 수지(受持)하는 자, 탑이나 부처님 사리(유골)나 불상을 예배하는 자, 혹은 장난으로라도 모래로 탑을 만들거나 손톱으로 벽에 불상을 그리는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부처님의 자비로 구제된다. 부처님의 자비는 절대의 자비라고 한다.
 그런데 갖가지의 가르침이 어느 것이나 존재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육신(肉身)의 석존의 설법이 아니다. 그것을 성립시킨 근원은 시간적 공간적 한정을 뛰어넘어 있는 그 속에서 개현해 온 절대자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이치 다름 아니다. 이것이 구원(久遠)의 본불(本佛)이다. 세간의 일체 천 인은 석존이 샤카족(석가)에서 출가하여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고 80세에 입멸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석존은 영원의 옛날에 깨달음을 열어 중생을 교화해 왔다. 곧 상주불멸이다. 인간으로서 석존은 단지 방편의 모습이 아니면 안 된다(이후 후반부 14품은 본문). 부처님의 본성에 관한 사색을 계기로 해서 그 후 불신론(佛身論)이 급속히 전개되기에 이른다. 또한 '법화경』의 유화적(宥和的) 태도는 다시 발전해서, 『
대살차니건자소설경』이나 『대반열반경』에 있어서는, 불교 외에 이단설에도 그 존재의의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2. 공관은 니힐리즘인가.
 공의 논리는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공의 사상은 전통적인 용어로는 공관(空觀)이라고 부른다. 공관을 이론적으로 기초했던 나가르주나는 제Ⅲ부의 ‘저작개관’에서 보듯이 여러 가지 저서를 남기고 있으나, 그것들 속에 가장 유명하고 또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중론(中論)』으로 불리는 저술이다. 그의 다른 저술인 『대지도론』 『십주비바사론』등은 그 이전에 『중론』의 성립을 예상하고 있고 또한 이론적으로도 이들의 저술은 『중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중론』은 나가르주나의 대표적 저작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는 『중론』을 중심으로 해서 공관의 의의를 밝혀보고자 한다(『중론』의 주석서에 대해서는 제Ⅱ부의 제4장 제1절과 제Ⅲ부의 ‘저작개관’을, 또한 중관파의 전개에 대해서는 제Ⅳ부 제1장을 참조)

 1)허무론자로 이해되었던 중관파
 『중론』의 사상은 인도인의 깊은 철학적 사색의 소산가운데 가장 난해한 것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의 사상의 해석에 관해서 근대의 많은 학자들은 혼미에 빠져 갖가지 비평을 내놓고 있다. 도대체 나가르주나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이런 주장을 서술하고 있을까하는 것도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중관파를 평해서 벨기에의 L․토우․라․바루․뿌산, 도이치의 P․도이센, 인도의 S․다스크뿌다 등의 학자는 허무주의(Nihilism)에 있다고 하고, 인도의 M․우루사, 이탈리아의 A․B․키스 등은 부정주의(Nagativism)에 있다고 하며, 인도의 푸랑케는 다시 최초기의 불교를 포함해서 부정주의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해석에 대해서 러시아의 TH․스제루파기는 오히려 상대주의(Relativism)에 있다고 비평하고, 프랑스의 R․게루세가 여기에 찬성의 뜻을 표시하고 있다. 또한 개발도상의 기호논리학에 큰 흥미를 가지고 있던 폴란드의 S․샤이에루는 “중관파는 철학사상 가장 철저했던 유명론자唯名論者(der radikalste Nominalist)이다”라고 비평하였다. 다시 중관파를 환영설幻影說(docetism)로 치부해 버렸던 학자(예를 들면, 자기정치박사姉崎正治博士)도 있고, 전체적으로는 여러 설이 분분해서 하나로 통일시켜 알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인도학자의 일반의 태도를 보면 중관파를 허무주의에 있다고 보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중관파는 아무것도 없는 기분 나쁜 파괴적인 의론(議論)을 하는 허무론자이다, 라고 하는 설은 근대가 되어 처음으로 제창한 것은 아니다. 고대 인도 일반에 알려져 있었고, 여기에 관해서는 스체루바키가 그 사실을 지적하여 집록해 놓았기 때문에(불교에 있어서 니르바나의 관념), pp.35〜39) 다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2) 불교내의 평가

 불교외의 제파가 이와같이 해석한 것을 살펴보았고, 불교내에 있어서 조차도 중관파는 허무론자로 보고 있다. 고대 인도에 있어서 전통적인 보수적 불교(이른바 소승불교)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철학파였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약해서 유부라고 한다)는 중관파를 가리켜 모두 무론자[都無論者](일체가 모두 없다고 주장하는 논자)로 평하고 있다. 또한 이와 나란히 유력한 학파였던 경부(經部)에서도 바수반두(세친, 320년경〜400년경)의 저서로 되어 있고 소승불교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서술해 놓은 『구사론』이나, 그리고 여기에 대한 산스크리트문 주석에서 보면, “중(中)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일체의 법체가 모두 없다고 폐하는” 사람이 있어서 “일체는 없다”고 하는 집착에 빠져 있기 때문에 윤회의 개인적인 주체(보특가라)를 인정하는 독자부(犢子部)라고 하는 학파와 나란히 하는 등, 불교내에 있어서 두 가지의 이단설 속에 한 가지에 있다고 책망하고 있다(바스반두가 『구사론』을 저술한 진의에 대해서는 고래로 여러 가지로 논의되었으나 산스크릿트문 주석을 남긴 야세미트라[称友]에 의하면, ‘우리 경부의 학자들이다’라고 말하고, 또한 바수반두는 경부에 대해 자기편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경부의 입장에서 보기로 한다. 그래서 이하 경부의 설을 참조해서 대비할 경우, 연대는 뒤에 가고 편의상 『구사론』에 의해서 고치려고 생각한다).

<전통 보수적 불교(이른바 소승불교)의 부파>

                                          일설부(一說部)
                    설출세간부(說出世間部)
                    계륜부(鷄胤部)
                    다문부(多聞部)
 대중부                           대중부
 (大衆部)                 제다산부(制多山部)
                         서산주부(西山住部)
                         북산주부(北山住部)
                       설가부(說假部)
근본상좌부(根本上座部)-설산부(雪山部)
화지부(化地部) 법장부(法藏部)

상좌부      
(上座部)                   음광부(飮光部-선세부善歲部)  
                             경량부(經量部-설전부說轉部)
說一切有部
(설일체유부)    犢子部(독자부)
                                                                            법상부(法上部)
                                                                            현주부(賢冑部)
                                                                             정량부(正量部)
         (※『이부종율론』에서)                               밀림산주부(密林山住部)

 다음으로 중관파와 같은 대승불교에 속한 다른 일파에 있는 요가행파에서도 비난이 적지 않다. 어떤 극단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설하는 중관파가 요가행파의 스티라마티(안혜安慧,  470〜550년경)에 의하면, 하나의 극단에 고집하는 극단론에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그 가르침은 일본에 전해져 다르마파라(호법護法, 530〜561)에 의하면, “유식의 이치에 미혹하는 자”라 하고 있고, “비유(非有)를 집착하고 있다”고 비평하며, 지나푸트라(최승자最勝子, 550〜600년경)의 저술인 『유가사지론석』에 의하면, “공견(空見)에 붙잡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후기의 요가행파로부터는 적지않게 공격받았다.
 중관파는 무를 설해서 각 학파로부터 배척받았기 때문에, 근대의 제 학자들이 중관학파는 허무론자들이라고 비평하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유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3) 유(有)․무(無)를 배척하는 『중론』    

 그런데 이와 같은 해석은 곤란한 문제를 만나게 된다. 『중론』은 결코 무를 설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의 하나로는 『중론』의 본문에 있는 시구 중에서 ‘유’라고 하거나 ‘무’라고 하는 두 가지 양극단(二邊)을 배척한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예를 들면, 제5장 제8시詩, 제9장 제13시, 제15장 제6시, 제7시, 제10시, 제23장 제3시, 제24시, 제25시).
나가르주나는 ‘유’를 부정하고 것과 함께 ‘유’가 없는 이상 당연히 ‘유’와 상관관계에 있는 ‘무’도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예를 들면, 제5장 제6시, 제15장 제5시). 다시 ‘유’와 ‘무’의 두 가지를 부정하는 이상, 당연 사물의 항상성을 주장하는 견해(상견)와 사물의 단멸을 주장하는 견해(단견)를 배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예를 들면, 제15장 제10시, 제11시, 제17장 제20시, 제18장 제10시, 제11시, 제21장 제14시, 이와 관련하여 제17장 제20시를 이들 쪽으로 세는 것은 청목靑目의 주석에 따를 것이다. 여기에 관해서는 『교본방계박사환력기념논문집橋本芳契博士還曆紀念論文集』의 속에 논문을 참조).
 『중론』에 있어서 배척되고 있는 ‘단견(斷見)’ 쪽이 오히려 허무론(虛無論, Nihilism)으로 불릴 수밖에 없고, 현재 그와 같이 의역하고 있는 학자도(S․다스구뿌다 『인도철학사』제1권 p.143) 있다. 같은 책에 의하면 단견이 니힐리즘에 있고, 이것을 배척하는 중관파도 니힐리즘에 있다고 하기 때문에 이 2종류의 니힐리즘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중론』 자신은 허무론을 배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론』의 사상은 허무론을 설하고 있다고 비평하는 것은 과연 바른 것일까. 반대하고 대립하는 제학파로부터 이와 같은 비평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으나 저자로 있는 나가르주나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명백하게 오해가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중론』은 ‘무’나 ‘상견’을 배척하고 있기 때문에 『중론』은 단순한 ‘무(Nihil)’를 설하고 있는 것이 아님은 추찰된다.
 다시 후대의 중관파 학자 찬드라키르티(월칭月称, 600〜650년경)가 『중론』에 대해서 썼던 주석서 뿌라산나빠다Prasannapadā』에 대해서 살펴보면 일층 명료해 진다. “중관파는 허무론에 있다”고 비평하는 반대파에 대해서, “허무론자들과 중관파라고 하는 사이에는 구별이 존재할 것이라고 옛날 스승께서 설하셨다. 때문에 상대의 주장에 대해서 귀류논법(歸謬論法)에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더욱 잘못된 짓이다 ”(p.369)라고 답하고 있다.  
그러면 무슨 까닭으로 중관파는 허무론자가 아니라고 할까. 또 『중론』은 대체로 무엇을 설하고 있는가.
 우선 첫째로 『중론』의 중심사상을 밝히고, 그것에 관련하여 『중론』에 있어서 중요사상을 천명하고자 하는 것이 제Ⅱ부의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