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행품 제14
이 품이 설해진 인연
앞의 「견보탑품」에서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 이 세상에서 이 경전을 펼 사람을 구하셨는데, 그동안 수기받은 대중들이 부처님의 뜻을 따르기로 하였다. 그러나 오탁악세의 험난한 세상에서 감히 법을 펴기를 꺼려 다른 국토에서 가르침을 펴려고 하므로, 이에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약왕보살과 대요설보살 등이 부처님께 법을 펴겠다고 「권지품」에서 발원했다. 이제 경을 펴는 데에는 확고한 인내가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이곳에서 상수보살인 문수사리보살이 부처님께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묘법연화경'을 펴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청하게 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후세 악하고 혼탁한 세상에서 수행할 네 가지 안락행(四安樂行)을 설하시어 안락행이 구족해야 고난을 극복하고 비로소 깨달음을 지킬 힘이 얻어져 경전을 수지하고 펼 수 있게 된다고 밝히시는 것이다.
안락행품의 뜻에 대해서 천태대사는 세 가지로 해석한다. 첫째는 수행상태에 의거하면, 몸에 생사고의 위험이 없으므로 안(安), 마음에 우비고뇌가 없으므로 낙(樂), 몸이 편안하여 마음이 즐거우므로 행(行)이라 한다. 둘째 경문에 의거해서 해석하면, 인욕의 경지에 머물러 있어서 몸이 편안하며, 마음이 조급하지 않아서 즐거우며, 제법실상을 관하므로 수행이 나아가게 된다. 셋째 법문에 의한 해석이란, 안은 육도의 생사와 이승의 열반도 움직일 수 없는 부동에 안주하는 법문이다. 낙은 범부 내지 원교에도 감수하지 않으니 집착하지 않으므로 고도 낙도 없는 대락(大樂)을 말한다. 행은 집착함이 없어서 범부 내지 현성(賢聖)의 행도 행하지 않는 무행(無行)을 말한다.
○ 이 품은 법화경 적문(迹門)의 유통분으로서, 악세에서 어떻게 이 경을 설해야하는 지를 설하신다. 먼저 문수보살이 부처님께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법화경을 잘 펴려면 어떻게 설해야 좋은 지를 여쭙자, 부처님께서 사안락행(四安樂行)으로 답하셨다. 전체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안락행품의 구조>
--문수보살의 청--------총괄하여 사안락행을 표함
----신안락행
--부처님의 답-----------수행의 방법 ----구안락행
(사안락행) ----의안락행
----서원안락행
------총괄하여 사안락행의 모습을 밝힘
안락행품 제십사安樂行品 第十四
[경] 그 때 문수사리법왕자 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말씀하되,
세존이시여, 이 모든 보살은 심히 있기 어렵나이다. 부처님께 공경하고 순종하는 고로 크게 서원을 일으키어 후의 악한 세상에서 이 법화경을 받들어 가져 읽고 외우고 설하오리이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후의 악한 세상에서
어떻게 하여 능히 이 경을 설하겠나이까.
이시문수사리법왕자 보살마하살 백불언 세존 시제보살 심위난유 경순불고
爾時文殊師利法王子 菩薩摩訶薩 白佛言 世尊 是諸菩薩 甚爲難有 敬順佛故
발대서원 어후악세 호지독설시법화경 세존 보살마하살 어후악세
發大誓願 於後惡世 護持讀說是法華經 世尊 菩薩摩訶薩 於後惡世
운하능설시경
云何能說是經
[강의] 앞의 품에서 수행이 깊은 약왕보살 대요살보살 등이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공경하고 후세에 경을 수지하여 펴겠다고 서원하였는데, 문수보살이 이 사실을 찬탄하고, 이제 수행이 낮은 보살들을 위해 악세에서 어떻게 경을 펼 것인지를 부처님께 청하여 이들 보살들로 하여금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닦아서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려는 것이다.
“문수사리법왕자(文殊師利法王子)”란 부처님께서는 법왕이시고, 보살은 도를 전하므로 법왕자(法王子)라 한 것이다.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 boddhisattva-mahāsattva)”이란 보살이 원이 크고, 행이 크고, 중생을 제도함이 커서 마하살(摩訶薩)이라 한다. 문수보살이 이와 같이 큰 도심(大道心)으로 중생을 성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 공경하고 순종함[敬順佛]이란 부처님을 존중하고 순종함.
[경]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이르시되,
만일 보살마하살이 후의 악한 세상에서 이 경을 설하고자 하면 마땅히 네 가지 법에 편안히 머물러야 하느니라.
불고문수사리 약보살마하살 어후악세 욕설시경 당안주사법
佛告文殊師利 若菩薩摩訶薩 於後惡世 欲說是經 當安住四法
[강의] 법화경을 잘 설하기 위한 수행 방법에는 네 가지 안락행이 있음을 총체적으로 밝혔다. 네 가지 안락행 중에 먼저 신안락행이란 몸을 바르게 하는 것(正身)을 말하고, 구안락행은 말을 바르게 하는 것을 가리키고(正語), 의안락행은 생각을 바르게 하는 것이며(正義), 서원안락행은 자비로 일체중생을 제도하기를 서원함(誓願)이다.
“네 가지 법[四法]”이란 사안락행(四安樂行)을 말한다. 곧 정신행(正身行) 정어행(正語行) 정의행(正意行) 대비행(大悲行)이다. 사안락행은 교법이 행해지는 곳과 친근할 곳이니 신안락행(身安樂行)이라 하고, 입을 경계하여 법을 잘 설하도록 하는 것이니 구안락행(口安樂行)이라 하며, 마음을 깨끗이 하여 탐 진 치를 떠나는 것을 의안락행(意安樂行)이라 하고, 자비심을 일으켜 일체 중생을 제도하길 서원하는 것을 서원안락행(誓願安樂行)이라 한다.
※ 사안락행은 법화경 수행의 중요한 행법으로서 많은 수행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천태대사 이전에는 사안락행에 대해서 첫째는 가유와 실유의 둘이 공함을 체로 하고, 둘째는 설법을 체로 하며, 셋째는 과실을 떠남을 체로 하고, 넷째는 자비를 체로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 혜기(慧基, 412∼496)는 첫째는 공이고, 둘째는 교만을 떠남, 셋째는 질투를 제거함, 넷째는 자비라고 했다. 여산 혜룡(慧龍)은 첫째는 몸이 온갖 악을 멀리하여 점차 공에 가까이 감이고, 둘째는 구업의 과실을 제거함, 셋째는 의업의 질투를 제거함, 넷째는 자비를 일으킴이라 했다.
여기서는 법화경 해석이 표준이 되는 천태삼조(天台三祖) 혜사스님의 '법화경안락행의'와 천태대사의 '법화문구' 해석을 알아보기로 한다.
1) 남악혜사(南岳慧思: 514∼577)는 20여 년간 '묘법연화경'을 독송하여 수년 동안 천여 편을 독송했다고 하는데 이후 스승 혜문(慧文)을 만나 법화삼매(法華三昧)를 깨달은 바 있다. 이후 법화삼매를 닦는 수행법으로 '법화경안락행의(法華經安樂行義)'를 저술하였는데, 여기에서는 무상안락행(無相安樂行)과 유상안락행(有相安樂行)의 둘로 나누어 수행한다.
첫째, 무상안락행이란 법화경 「안락행품」의 안락행에 기초하여 항상 깊은 선정을 닦고 일체법에 마음의 상이 적멸함을 얻는 행법이다. 행자는 선정속에서 육근(六根)을 관찰하여 중생이 본래 청정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 법신 여래장을 얻음으로써 불타와 함께 함을 체득하니 이승(二乘)의 길이나 차제 행(次第行)을 거치지 않는 수행법이다.
둘째, 유상안락행이란 「보현권발품」을 중심으로 닦는 수행법인데, 여기서는 특별히 선정을 닦거나 삼매에 들어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경문의 뜻에 일심으로 전념하여, 육아백상을 탄 보현보살을 친견하고 이 보살의 인도로 시방제불을 뵙는 동안 진심으로 참회하여 도를 장애하는 죄를 파하여 육근이 청정해지며 세 가지 다라니를 얻는다. 총지다라니 백천만억다라니 법음방편다라니의 세 다라니를 얻으면 일체 삼세 불법을 갖추게 되는 수행법이다. 이 수행법은 법화경을 독송하고 참회행을 닦으며, 보현보살을 뵙고 인도를 받는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천태대사께서 대소산(大蘇山)으로 혜사스님을 찾아가 보현도량(普賢道場)과 사안락행을 받고 법화삼매의 전방편을 깨달은 것이 바로 이 유상안락행법이라 할 수 있다. 이리하여 천태대사는 유상안락행의 법화삼매수행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의식화하여 누구나 쉽게 수행할 수 있도록 꾸며서 '법화삼매참의(法華三昧懺儀)'라는 저술을 남겼다. 이 저술 속에서는 법화경을 독송하고 선정을 닦으며 예참을 통해 보현보살과 일체제불을 뵙고 깨달음에 이르는 일련의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다.
한편, 혜사의 네 가지 安樂行이란, 『法華經』 「安樂行品」의 四安樂行인 身 口 意 誓願安樂行을 기초하여 이루어진 수행법이지만, 여기에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바른 지혜로 집착을 여의는 安樂行(正慧離著安樂行)
둘째, 남을 업신여기지 않고 비난하지 않는 安樂行(無輕讚毁安樂行)
또는 성문들이 佛智를 얻게 하는 安樂行(轉諸聲聞令得佛智安樂行)
셋째, 번뇌가 없는 평등한 安樂行(無惱平等安樂行)
또는 선지식을 공경하는 安樂行(敬善知識安樂行)
넷째, 자비로 이끌어 들이는 安樂行(慈悲接引安樂行)
또는 꿈 중에서 神通力 智慧를 갖추어 佛道 涅槃을 이루는 安樂行(夢中具足成就神通智慧佛道涅槃安樂行)
慧思는 ‘무상안락행이 곧 이 안락행’이라고 하여 네 가지 안락행을 무상행으로 보고 있는데 '법화경안락행의'는 이 무상안락행에 중점을 둔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혜사는 '법화경안락행의'의 네 안락행중, 첫째의 정혜로 집착을 여의는 안락행에 대해서만 중생인(衆生忍) 법성인(法性忍) 대인(大忍, 神通忍)의 삼인혜(三忍慧)로써 설명하고, 그 외의 삼종안락행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없다. 보살은 곧 일체법(三毒 四大 五陰 十二入 十八界 十二因緣)에 삼인혜를 써서 관하는데 이 삼인혜가 곧 바른 지혜로 집착을 여의는 안락행(正慧離著安樂行)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이 안락행을 사안락행의 근본으로 보고, 일체법 중에서 깊고 묘한 선정에 뒷받침되었던 삼인혜(三忍慧)를 실천하는 것이 안락행의 궁극이며, 곧 무상행의 중심 관법으로 보고 있다.
삼인혜란 첫째는 중생인(生忍), 둘째는 법성인, 셋째는 법계해신통인(法界海神通忍, 大忍)이다. 이중 중생인과 법성인은 무명 번뇌를 파하는 인(忍)으로, 범부들이 성인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성스런 행이라고 한다. 셋째의 대인은 오신통과 육신통을 구족하고 사여의족을 갖추어 시방제불 제천에 대하여 함께 이야기하고서 일념에 일체 범성을 깨달을 수 있다.
2) 네 가지 안락행의 수행에 대해서 천태대사(天台大師: 538∼597)는 지행(止行) 관행(觀行) 자비행(慈悲行)으로 네 가지 안락행을 인도한다고 했다.
신안락행을 보면 첫째, 몸으로 짓는 업(身業)에 지행(止行: 몸과 마음을 단속해서 마음의 움직임을 그치게 함)이 있으므로 인욕의 옷을 입으며, 관행(觀行: 지혜로 사물의 진실을 관하는 것)이 있으므로 몸에 대해 집착이 없고, 이와 같이 신업에 대한 집착이 없어지므로 범부에 떨어지지 않는다. 또 자비행으로 신업을 부지런히 닦아서 널리 일체중생을 이롭게 하니 이승에 떨어지지 않는다.
둘째, 지행이 있으므로 인욕의 옷을 입고, 관행이 있으므로 여래의 자리에 앉으며, 자비가 있으므로 여래의 방에 들게 된다.
셋째, 지행도 과실을 떠나면 번뇌를 끊는 단덕(斷德)을 이루고, 관행도 집착이 없어지면 반야지혜로 실상을 여실히 보는 지덕(智德)을 이루며, 자비로 남을 이롭게 하면 중생을 교화하여 은혜를 베푸는 은덕(恩德)을 이룬다. 은덕이 지덕을 도와 성취시키고 지덕이 다시 단덕에 통달하니 이를 신업안락행이라 한다. 나머지 구안락행 의안락행 서원안락행도 마찬가지이다.
[경] 첫째는 보살이 행할 바와 친근할 바에
편안히 머물러서 능히 중생을 위하여 이 경을 설할지니라.
일자 안주보살행처 급친근처 능위중생 연설시경
一者 安住菩薩行處 及親近處 能爲衆生 演說是經
[강의] 신안락행을 설한다. 보살이 행할 바와 친근할 바를 설하니 몸을 바로 하는 행(正身行)이다. “보살이 행할 바(行處, ācāra)”란 진리를 깨달아 실천하는 것. 행동범위.
“친근할 바(親近處, gocara)”란 교제의 범위. 나쁜 사람을 멀리하고 착한 이를 가까이 함.
[경] 문수사리야, 무엇을 보살마하살의 행할 바라 하느뇨. 만일 보살마하살이 인욕지(忍辱地)에 머물러 부드러이 화하고, 선(善)에 순종해서 거칠지 아니하고 마음에 놀라지 말 것이며, 또 다시 법에 행하는 바가 없이 하며, 모든 법을 실상과 같이 관(觀)하고 또한 행하지도 말며 분별하지도 말 것이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행할 바라 하느니라.
문수사리 운하명보살마하살행처 약보살마하살 주인욕지 유화선순 이부
文殊師利 云何名菩薩摩訶薩行處 若菩薩摩訶薩 住忍辱地 柔和善順 而不
졸폭 심역불경 우부어법무소행 이관제법여실상 역불행불분별 시명보살
卒暴 心亦不驚 又復於法無所行 而觀諸法如實相 亦不行不分別 是名菩薩
마하살행처
摩訶薩行處
[강의] 정신행중 보살이 행할 바이다. 보살이 행할 바(菩薩行處)를 혜사선사의 '법화경안락행의(法華經安樂行義)'와 천태대사의 '법화문구(法華文句)'의 설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혜사선사의 설명이다.
“인욕지에 머무름”이란 일체불도의 공덕을 내는 경지이다. 중생인 법성인 대인이 있는 데 이 세 가지로 관하는 것이다. 중생인(衆生忍)이란 중생들의 욕설 경멸 등을 듣고 인욕하여 참고 나아가서는 그러한 중생을 조복 받으며 선심으로 돌리게 함을 말한다. 법성인(法性忍)이란 보살이 일체법을 마음의 움직임이 없이 잘 닦아 자재하게 중생을 조복하는 것까지를 가리킨다. 신통인(神通忍)이란 제불의 색신을 보게 하는 삼매를 가리킨다.
“부드러이 화하고 선에 순종해서”란 동사섭(同事攝)으로 중생을 조복하는 행이다. 온화함은 법인이고, 착하고 순함은 대인(신통인)이다.
“거칠지 아니하고 마음에 놀라지 아니하고”란 공한 법을 알아서 어떠한 나쁜 상황에서도 놀라고 조급하게 성질내지 않으니 중생을 교화할 때 이와 같이 한다는 것이다.
“다시 법에 행하는 바 없이 하며”란 오온 십팔계 십이인연 등 모든 번뇌의 법이 결국 공하므로 마음도 처소도 없으며 선정 해탈법 가운데서도 마음도 행할 바도 없다는 것이다.
“모든 법을 실상과 같이 관하며”란 오음 십팔계 십이인연법이 모두 진여의 진실한 성품이어서 근본과 현상의 나고 멸함이 없으며 번뇌도 해탈도 없다고 관한다.
“행하지도 말며 분별하지도 말 것이니”란 생사와 열반은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며, 범부와 부처는 두 법계가 아니므로 분별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 천태대사는 보살 행처를 한 법(一法)의 실상에서 해석하고, 이법(二法)에 입각해 해석하며, 삼제(三諦)의 입장에서 해석했다.
첫째, 한 법에서 행처를 해석하면 온갖 차별상의 모습이 평등한 하나의 실상으로 돌아감이니 온갖 것의 근본을 가리킨다. 이것은 모든 작용이 그치고 중도에 돌아가 ‘인욕의 경지에 머무름’을 말한다. 여기서 경지란 곧 중도로서 모든 사물이 여기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작용하면서도 작용하지 않는 마음의 작용(行不行之行)이고 작용하지 않으면서도 작용하는 마음의 작용(不行行之行)이며, 마음의 작용도 아니요 작용 아님도 아니다(非行非不行). 이와 같은 세 가지 행이 있으므로 행(行)이라 하고 동일한 구경의 진리이므로 처(處)라 한다. 행처로 위의 경문과 합하면 마음의 작용을 그치는 것은 여래의(如來衣)이고, 공덕을 일으키는 것은 여래실(如來室)이며, 두루 분별하지 않는 것은 여래좌(如來座)이다.
둘째, 두 법에 입각해 보면 생인(生忍) 법인(法忍)의 두 가지이다. 진제와 속제 가와 실에 입각해 이공(二空) 이인(二忍)을 밝혀 중도를 보므로 이승과 같지 않다. 이 행으로 행하는 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공(二空)의 도리를 가지고 제법을 참으니 곧 여래의 옷을 입음이고, 이공의 도리에 안주함은 여래의 자리에 앉음이며, 모든 중생을 가엾이 여기므로 여래의 방에 드는 일이다.
셋째, 세 가지 법에 입각해 해석함이니 부사의삼제(不思議三諦)이다.
“인욕지에 머무름”은 삼제를 논한 것이다.
“부드러이 화하고 선에 순종해서”란 진제를 따르는 것으로 거짓된 견애(見愛: 견혹과 사혹) 한열(추위와 더위 곧 법인) 등을 참음이다.
“거칠지 아니하고” 란 속제(俗諦)에 안주하여 여러 근기와 환경에 따라 알맞게 들어맞음을 말한다.
“마음에 놀라지 아니하고”란 어긋나고 따름을 달관해서 마음이 놀라지 않음이다.
“다시 법에 행하는 바 없이 하며”란 중제(中諦)에 머물러 이 변을 참음이다.
“모든 법을 실상과 같이 관하며”란 중도(中道)를 관함이다.
“행하지도 말며 분별하지도 말 것이니”란 중도라는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님을 말한다.
삼제의 경지에 의거함을 처(處)라 하고, 오주의 욕을 참는 것을 행(行)이라 한다. 행을 셋으로 나눌 수 있으니 지행은 행불행(行不行)이고, 관행은 비행비불행(非行非不行)이며, 자비행은 행불행(行不行)임을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