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입장
 전통적인 보수불교(혹은 소승불교) 제파 가운데 가장 큰 사회적 세력을 가지고 있던 ✽설일체유부는 “일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해 왔다. 일체가 존재한다고 하는 주장은 그대로 경장 중에 나타나 있고(「잡아함경」 제13권, 대정장 2권, p.91중), 다시 남방에 전해져 세일론 상좌부의 '논사'가운데에도 소개되어 비판받고 있다. 그 가운데 유부는 불교 가운데서 상당히 유력한 일파가 되어 후세까지 존속하였고, 많은 문헌을 남기고 있다
 한역 대장경 가운데 전해지고 있는 소승불교의 논서는 대부분 유부의 것이다. 불교교단의 제파에 대해서 기부의 취지를 기록한 금석문이 현재 많이 남아 있으나 유부에 대한 것이 가장 많다. 따라서 사회적으로도 가장 유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유부의 근본사상은 옛날부터 일본에서는 보통 “삼세실유(三世實有) 법체항유(法體恒有)”라고 불러 왔다. “일체가 존재한다”고 하는 구절과 상대되는 말로는 “일체가 실유하고 법체는 삼세에 걸쳐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 구절의 의의를 천명한다면 유부의 근본사상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이제 이것을 셋으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제1 “법” 및 “법체(法體)”를 유부에서는 어떻게 해석하나.
 제2 “실유(實有)”란 어떤 의미일까.
 제3 “일체”는 어떤 의미일까.
 제4 “삼세에 걸쳐 항상 존재한다”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주:✽소승 부파의 이름. 불멸 후 300년경에 근본상좌부에서 분파된 학파. 다시 또 수많은 부파들이 갈라져 나왔기 때문에 근본이라 한다. 근본살바다부(根本薩婆多部), 근본설일체유부파(根本說一切有部派). 이 파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모든 것이 있다’는 설을 주장하였다. 제법실유론(諸法實有論) 삼세실유론(三世實有論) 찰나멸론(刹那滅論)이다. 제법실유론은 모든 법(75법)들이 실재한다는 이론이다. 삼세실유설은 현재 뿐만 아니라 과거 미래도 실재한다고 하는 이론이다. 찰나멸론은 생겨난 법들은 찰나 동안 주(住)하고, 쇠퇴하고[異], 멸(滅)한다고 하는 이론이다.

 (1) 유부에 있어서 법의 개념
 불교철학이 ‘법’의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제학자들이 인정한 바이다. 그리고 불교사상은 항상 법에 관한 사색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여기에 대해서 대승불교 예를 들면 '중론' 법의 존재에 대해 법공(法空)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법(dharma)이라고 하는 말을 어원적으로 설명한다면 어원은 dhr이고, 여기에서 법이란 규칙 규범 이법(理法)이라고 하는 것이 원의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인도 일반에 통하는 용례이다. 이것을 근본으로 하여 다시 여러 가지 의의가 이 말에 부가되어 있다.
 팔리어 성전에 있어서 사용되고 있는 법의 의의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가운데 순수하게 불교적인 용법은 단지 하나이고, 다른 용법은 인도 일반에 공통으로 있는 것이라 한다. 곧 팔리어 주석에서 말하는 nissatta 혹은 nissattanijjivatark 이곳저곳에 있다. 독일의 W.가이게루는 이것을 ‘어떤 것’(Unbelebtes, Dings, sache)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법의 원의는 ‘깨달음’, 법칙, 궤범으로 되어 있는데 어째서 후세에 전통적인 물건으로 해석되기에 이르렀을까. 이법(理法)이 그대로 물건이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가이게루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만나더라도 어떤 해결을 보여주지 못한다. 이법이라는 의미에서 생긴 일견 전연 별개의 물건이라고 하는 해석에 이른 것은 철학적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일반에 법의 원위에서 법의 존재에 대한 주장을 도출하는 경과를 고찰하고 싶다.

 (2) 법의 체계에 기초를 쌓음
 최초기 불교 곧 불교성립 당초에 있어서는 자연적인 존재의 영역을 기초로 하여 이를 가능하게 하는 장소의 법의 영역을 자연적 존재의 영역에서 구별하여 설정하고, 불교는 오로지 이 법의 영역을 문제로 삼았다. 물론 원시불교 성전 자체 중에는 이와 같은 구별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원시불교는 자연인식의 문제를 고려대상의 밖에 두었다. 만약 자연적 존재영역 만을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라면 여기서 논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그러한 정도의 난해한 것은 아니고 불교도가 아닌 사람들도 용이하게 그 논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는 실천적 종교자의 관심사를 반영한 ‘법’을 받아들이고 있다. 법이란 일체의 존재의 규범이 되어, 존재를 그의 특수성에 두고, 성립시키는 장소의 형태에 있고, 법 그 존재는 초시간적으로 타당하다. 따라서 그 해석은 이법 규범이라는 어원적 해석도 일치한다. 법은 자연적인 존재의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연적 사물과 동일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래서 그의 법체계로서 다섯 종류의 법의 영역에 있는 개체를 구성하는 다섯의 모임(오온), 인식 및 행동을 성립시키는 영역으로서 여섯 가지의 장(場) 육입 등을 고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의 체계를 어떻게 기초할 것인가. 곧 법의 체계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라고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이제 연구의 여지를 남겨 놓았다. 원시불교 성전의 초기에 속하는 자료에서 보아도 이것을 기초로 삼기 위해서 연기설이 궁구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법의 체계를 연기에 의해서 성립시킨 것이다. 연기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계열이 궁구되어 뒤에 가서는 십이지의 계열의 것(십이인연)이 결정적으로 우세한 지위를 점하게 되었다.

 (3) 연기를 경시했던 유부(有部)
 그런데 원시경전의 말기에서 연기설은 통속적인 해석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생하는 것(유정)의 생사 유전하는 상태에 적용시켜서 해석하게 되어 연기설이 법의 체계를 기초하게 하는 의의가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곧 연기설에 의해서 법의 통일관계가 문제로 등장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연기설은 법의 통일의 문제를 떠나 별도의 통속적인 해석에 지배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유부시대가 되어 연기설은 전적으로 교학의 중심적 위치를 잃어버리고 단지 부가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유뷰의 강요서에 있어서 연기는 「수다라품」(또는 계경품) 속에서 언급하고 있으나, 수다라품에서는 경 속에서 설하고 있는 항목을 설명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환언해서 말하면 특히 중요시할 필요가 없으나 다만 경 가운데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 설명하는데 그치고 있고, 유부에서는 어떤 연기에 특별한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구사론'에서는 세간품 제3에서(상가바드라-중현 400년 경-의 '아비달마현종론' 및 '아비달마순정리론'에는 연기품이 있다.) 설명하고 있으나 세간품은 유정이 과거의 업에 의해서 현재의 어떠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지 설하고 있다. 여기에 부설(附說)해서 연기가 설해지고 있다. 그래도 주로 태생학적인 분위연기(分位緣起, 뒤에 설명)를 설해서, 법의 통일의 문제를 서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4) 왜 유부는 법의 실유(實有)를 주장하는가.
 유부는 연기에 의해서 법의 체계에 기초를 세우는 입장을 버렸다. 그 대신에 법을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입장에 의해 기초를 세웠다.
 그러면 어째서 유부의 학자들은 법의 존재를 주장했을까. 그대로 경장 속에 유와 무의 두 가지의 극단설(이변)을 비판했던 경이 있다.('잡아함경' 1·2권 p.85하) 유부 학자는 명료하게 이 일을 알고 있다고 한다.(유부의 문헌에 있는 '대비바사론'이 위의 경을 인용하고 있다) 어째서 불설을 등지고 법의 존재를 주장한 것일까. 그 이유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고따마붓다는 많은 존재가 생멸변천하는 것을 보고 “모든 만들어진 것들은 무상하다”(제행무상)고 설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들 생존의 모습을 관찰하니 일체의 존재는 찰나찰나에 생멸변천하는 것이고, 무엇이든 생멸변화하지 않고 상주하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당시 불교 외에 여러 가지 사상은 절대로 상주불변하는 형이상학적실체를 예상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이 설을 배척해서 특별히 모든 만들어진 것들의 무상을 설했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제행무상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무상하지 않은 것을 필요로 하였다. 만약 전혀 무상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한다면 “무상하다”고 하는 주장도 성립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물론 불교에 있는 이상 무상에 대해서 상주하는 존재를 주장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고 하지만, 무상한 존재를 무상한 것으로 순응시키고, 내지 고차적인원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일반에 자연적인 존재의 생멸변천을 강조하는 철학은 반드시 그 반면에 있어서 불변하는 원리를 상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한 점은 예를 들면 고대 그리스의 ✽엘레아파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고, 반대파인 ✽헤라클레이트스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때문에 고따마붓다가 유·무의 두 가지 극단설을 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부가 “유”를 주장하여 분명히 형이상학적 입장을 견지했던 이유도 대강 고찰할 것이 있으나, 어째서 특별히 법의 “존재하는 것”을 주장했던 것일까.

 (5) 존재의 논리적 구조
 이것은 앞에서 서술한 법의 정의에서 도출된다고 생각된다. 법이란 자연적인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것이 있고, 존재를 그의 존재로 여기게 하는 근본적인 것이 있다. 이 존재라고 하는 개념의 논리적 구조에 주목한다면 법유(法有)의 주장을 성립시킨 이유를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원래 존재라고 하는 개념은 두 가지로 분화될 수밖에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이다”, “∼이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 있다”라는 것이다(“∼이다”, “∼가 있다”라는 말은 설명의 편의상 화십철랑(和辻哲郞)박사 '人間のとしての倫理學', p.33이하에서 차용하였다. 박사는 다시 '續日本精神史硏究' 중에서도 논하고 있다). 서양의 언어에서는 분명히 분화되어 있지 않으나 일본어에서는 명료하게 분화되어 있다. 중세 이래의 전통적인 서양철학의 용어로 한정한다면 전자는 essentia이고, 후자는 existentia이다. 대략 말한다면 전자를 다루었던 것은 형식논리학이고, 후자를 취급했던 것은 존재론 혹은 ✽유론(Ontologie)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것은 A이다”라고 할 경우 “∼라 있는 것” essentia가 가능하다. 이것과 동시에 “A 가 있다”고 하는 것으로도 말할 수 있다. 곧 A의 “∼가 있는 것” existentia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다. 라고 하는 것”은 “∼가 있는 것”으로 쉽게 변화한다.
 다시 “∼가 있다”는 것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시간적 공간적인 규정을 받고 있는 A가 있다고 하는 의미의 existentia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적 공간적 규정을 초월하고 있는 보편적 개념으로서 A가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가 있다는 것” 속에는 먼저의 경우를 취급한다면 자연인식에 있고, 철학의 문제 외에 있는 것이다. 둘째의 “∼가 있다”는 것을 취급한다면 이것은 철학 내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문제로 하면 “있는 형상”을 기초로 하는 철학자를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플라톤의 이데아, 중세의 실념논자(實念論者)의 보편개념(普遍槪念 Universalia), 보르챠노의 ✽표상자체(表象自體 Vorstellung an sich), 훗설의 본질(本質 Wessn) 등은 모두 이러한 선을 따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미 로젠베르크 스체루바-키 그밖에 우이하쿠주(宇井伯壽)박사 등의 학자가 언급한 것과 같이 법의 존재[法有]의 입장도 이 선을 따라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주:✽엘레아학파 BC 5세기 이탈리아 남부 엘레아 지방에서 번성했던 이 학파의 특징은 극단적 일원론이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 자체로 충만하며 존재와 대립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따라서 분화·운동·변화는 모두 환상일 뿐이라고 보았다
✽헤라클레이토스(Ήράκλειτος, Heraclitus, 기원전 6세기 초 - ?)는 고대 그리스의 이른바 전소크라테스 철학자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사물은 변화하고 변화만이 유일한 실체(實體)이며 물질세계는 과거 현재 미래에 항상 변화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물질세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물질적 질료로서의 실체를 강력히 부정하였다.
✽원래 존재론(存在論 / ontologie)이라는 말은 무엇이 "있다(onta)"라는 것과 "학문(logia)"이라는 두 용어가 결합된 합성어이며 이때 "존재"라는 것은 흔히 인식론적으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대상(코키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논리적이든 감각적이든 혹은 인식적이든 비 인식적이든 여하간 이 세상은 마치 우주의 무한한 별들의 존재들처럼 무엇으로 채워져 있다는 개념이다.
✽볼르챠노(Bernard Placidus Johann Nepomuk Bolzano, 1781년생. 체코의 수학자 및 철학자, 논리학자이다. 그는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주저인 '지식학(知識學)'(1837)으로 '명제 자체(命題自體)' '표상(表象) 자체' '진리 자체'라는 세 개의 개념을 주장했다. 명제 자체는 사고나 판단의 내용이지만 결코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의미이다. 표상 자체는 그 요소이며, 진리 자체는 객관적인 진리로 명제 자체의 일종이다. 이 논리주의는 후설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수학에서 무한(無限)의 역설(逆說)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