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법유(法有)가 성립하는 이론적 근거
 법이란 자연적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본래 상태, 자세히 말하면 “…에 있는 모습”이다. 예를 들면 수(受)란 “수촉(隨觸, 외계로부터의 인상)을 받아들임(감수)”라고 말하고, “감수되어 있는 것들 일반”이다. 하나하나의 꽃과 나무 등의 자연적 사물이 법은 아니지만, 그 “있는 모습”으로서, 예를 들면 “감수되어 존재하는 것”은 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개개의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멸하는데 그러한 존재모습으로서의 “감수되는 존재하는 것들 일반”이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을까. 곧 법으로서의 수(受)는 보다 고차의 영역에 있는 존재이다. 존재는 항상 시간적으로 존재하지만 법은 “그 자신의 본질(자상)을 가지고 있는”것으로서 보다 고차적인 영역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초시간적이 타당하다. 이렇게 해서 법은 있는 곧 실재한다고 한다. 따라서 “일체유(一切有)”라고 하는 경우에 “있음”은 확실히 한자의 “유(有)”라고 하고 있듯이 “무엇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요약한다면 초기불교에 있어서 “…에 있는 존재모습”으로서의 법은 유부에 의해서 “…에 있는 존재 형체가 있는” 이라고 써서 부르고 있다. “…에 있는”에서부터 “…가 있는”으로, essentia에서 existentia로 논리적인 변화하고 있는데, 유(有)의 입장을 성립하는 이론적 근거가 된다. 물론 이와 같이 말하는 요약의 방법은 상당히 엉성하게 들릴 수 있고, 복잡한 사상사적 변천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논리적인 맥락을 크게 잡아본다면 이와 같이 보는 것도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7) 법과 본성
법(法)은 √--dhṛ “유지하다”라고 하는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후기의 주석에 의한다면 “그러한 자신의 본질(自相)을 가진 것에서 법이다”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대해서 대승불교에서는 반대로 “그런 자신의 본질을 유지하는 것을 빠뜨린 것은 법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이 “그런 자신의 본질”을 유부는 “사물”로 보았던 것이다
 유부는 “사물”의 실재를 주장했다고 할 수 있으나, 그런 사물이란 그러한 자신의 본질(자상)의 의미에 있다는 것은 『구사론』의 주석자로 되어있는 야세미트라(칭우稱友, Yasomitra)가 자주 말하는 것으로, 따라서 경험적 사물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사물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도 “그런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존재한다고 하는 의미이고, 자연적 존재로 실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자신의 본질(자상)이라고 하는 것, 본성(자성)이라고 하는 것도 결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지만, 그 외에 그의 “그것 자신의 본질” 또는 “본성”도 법과 다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법과 다르지 않은 본성(자성)이라고 하는 개념을 유부는 들고 나온 것일까.
여기에 대한 답을 주지는 못하지만 해결할 방법은 가르쳐주고 있다. 예를 들면 식(識:식별 작용)이나 수(受:감수 작용)에 대해서 말한다면 식이라든가 수라든가 하는 “존재양상”으로서의 법의 essentia는 각자 “각각 요별(각각을 구별해서 인식하는 것)”,  “수촉(隨觸)을 받아들임(감수)”에 있으나 그것을 existentia로 보았던 경우에 본성 본질이라고 불린다.
“…존재하고 있는 모습”으로써의 법은 하나의 실재로 보이는 “존재 모습”이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경우에 그것이 본성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곧 찬드라끼르티(Candrakīrti 월칭月稱)에 의하면 본성이란 “…가(에)있는 것”이외가 아니면 안 된다. “…에 있는 것”은 실재라고 하는 것이다. 저것은 또한 “본성”이란 “그런 자신으로부터의 ‘…·에 있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주: 1)유부에서는 제법의 분류를 유위법(有爲法) 무위법(無爲法)으로 나누고, 무루지에서 인식되는 법을 무위법이라 한다. 여기에는 삼무위가 있다. 곧 허공무위(虛空無爲), 택멸무위(擇滅無爲),  비택멸무위(非擇滅無爲) 가 있다.

   (8) 법과 존재
 이와 같이 법과 본성, 본질과는 다른 것이 없기 때문에 본성과 본질이 존재로 여겨지는 이상, 법도 존재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곧 법은 vastu, bhāva(존재)등의 말로 써서 불리고 있다. 『중론』에는 법(dharma)보다도 원래 “존재”(bhāva)라고 하는 편이 사용되고 있으나, 그것은 『중론』에서 불교 외의 제파를 포함해서 배척했던 것에서 “존재”(bhāva)라 하는 말을 사용하였고 의미는 법과 똑같다.
그러한 까닭에 “대개 제법은 체(자체), 성(본질), 법, 물질(실체의 본성), 일(실체), 존재(有), 이들은 이름은 다르지만 뜻(의미)은 같다. 이 때문에 혹은 체로 말하고, 혹은 성으로 말하고, 혹은 법으로 말하고, 혹은 존재로 말하고, 혹은 물질로 말한다. 모두 이것은 존재의 차별 양상일 뿐이다. 정음은 사파파(私婆婆 svabhāva 자성이라고 말한다)” (「일륜노가론(壱輪盧迦論)」 대정장 30권 p.253이하)
 이와 같은 의미에서 법은 “존재”에 있다고 하는 해석이 성립하기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이 “존재”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경험적인 사물은 아니고, 자연적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 양상”으로서의 “존재”에 있다고 하는 것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예로서 허공에 대해서 논한다면 “공은 걸림이 없다”(「구사론」 제1품 제5시) 라고 하는 것도, 허공이라고 하는 자연적 존재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걸림 없는 것 일반”이라고 하는 “존재 양상”이 법의 영역에 있어서 “사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허공은 다만 걸림이 없는 것으로 성품을 삼는다”(「구사론」 제1권 3매)에 있기 때문에 걸림 없다[無礙]고 하는 existentia를 법의 영역에 있는 existentia로서 이것을 허공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여기에서 말하는 허공은 자연계의 하나의 구성요소로서의 허공계와는 다른 것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눈을 떠서 바라보는 큰 허공은 “허공계”에 있어서 만들어지지 않는 불변의 세 가지 원리[三無爲]1)의 하나로서의 허공은 아니다.
따라서 유부는 일체의 “존재”의 실재를 주장했다고 하는데 만약 법 혹은 그의 본질(자성 자상)이 “존재”라고 하는 말로 써서 바꾸었다고 해도 유부는 결코 자연적 존재로서의 “존재”의 실재를 주장했다는 것은 아니다. 존재를 나타내는 “존재양상”을 “존재”로 보고, 곧 “존재”의 본질을 실체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법유(法有)”의 “유(有)”란 “경험세계에 있어서 존재하는”이라고 하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법은 자연적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앞의 와츠지 데츠로(和辻哲郞)박사나 독일의 H ․ 베크 로젠베르크들의 학자가 지적했던 일이 있으나, 앞에서와 같이 이해한다면 법의 체계를 설했던 초기의 불교에서 법유(法有)의 주장이 이끌어져 나왔다고 하는 것은 무언가 불가사의 한 것은 아니다. 법의 개념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이끌어져 나온 것이다.

  (9) 명제(命題)와 실재(實在)
 이상은 “존재양상”으로서의 법을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면 대부분의 개념 속에 포함되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와 다른 법유의 입장의 주목할 만한 특징을 알게 되었다.
유부는 개념뿐만 아니라 판단 내용 곧 명제가 그것 자신의 실재하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루어진 것(제행)은 무상하다. 그렇지만 “제행은 무상하다”고 하는 명제 자신은 바뀌지 않는다. 만약 그 명제 자신이 바뀐다면 이루어진 모든 것은 무상하다. 라고 하는 것은 말할 수 없게 된다. 때문에 명제 자신 곧 “구(句)”도 실유하고 있다고 하고, 오위칠십오법(五位七十五法) 의 분류 속에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속에 들어 있다.
 명제 자체의 문제는 서양에서는 근대 현상학의 선구 볼차노2)에 의해 특히 논해진 것이지만  고대 인도에 있어서 유부의 제 학자들이 이것을 주창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래서 유부의 학자가 개념과 명제를 두 가지 다른 부문으로 구별하지 않았던 것은 반드시 비난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형식 논리학의 사고 방법에서 주어지는 비평이 있어 만약에 최근대의 기호 윤리학에서 보아도 동일 기호표현이 개념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명제로 이해되기도 할 가능성이 있다. 단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으로서의 법으로서 취해야할 생각하는 방식은 충분히 의미를 한층 더 생각하게 한다.

  2) 실유(實有)의 의의
   (1) 유(有)의 분류
 실유란 『구사론』을 보면, “이런 자신의 본질로서 있다”라는 의미이다. 실유라고 하는 의미는 결코 유(sat)와 똑같은 것은 아니다. 가득하게 철학적 내용이 많이 한정된 유(有)이다. 곧 유라고 하는 부류 개념 중의 하나의 종(種 species)이 실유이다. 유부의 논서를 보아도 유를 몇 번이나 분류하고 있다.
『대비바사론』에 의하면 유(有)를 분류하는데 있어서 세 가지 설을 소개하고 있다. 제1설은 실물유(實物有)와 시설유(施設有)3)를 인정하고, 제2설은 상대유(相待有)와 화합유(和合有)4)와 시분유(時分有)를 설하고, 제3설은 명유(名有) 실유(實有) 가유(假有) 화합유(和合有) 상대유(相待有)라고 하는 다섯 종류의 유를 인정하고 있다. 『대비바사론』은 다만 이와 같은 설을 소개하고 있을 뿐 어떠한 비평을 가하고 있지 않다.(제 9권, 대정장 27, p.42상〜중)
 또한 '아비달마순정리론』에 의하면 세 가지 설이 서술되고 있다. 제1설은 실유와 가유 만을 인정하는 것으로, 상가바트라5) 자신의 설이다. 제2설은 그 두 가지 외에 상대유를 인정하고 있으나 상가바트라는 이것을 배척하고 있다. 제3설에서는 실물유(實物有) 연합유(緣合有) 성취유(成就有) 인성유(因性有)의 네 가지를 헤아리고 있다.(제 50권, 대정장 29권, 621하〜622상)
 다음은 유부의 책은 아니지만 『대지도론』에도 유(有)에 세 종류가 있는데, 상대유와 가명유와 법유를 인정하고 있다(12권 대정장 25권, p.147하). 이 설은 천태대사 지의(智顗)의『마하지관』5하에 인용되어 논하고 있으나6), 이 이론을 세우는 방법은 『아비달마순정리론』 가운데 상가바트라가 배척하고 있는 제2설에 상당하는 것은 아닐까. 상대유 가명유에 관한 설명은 『순정리론』에 있는 그것과 전부 일치하고 있으나, 법유(法有)에 대한 설명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법유가 실유 혹은 실물유와 똑같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와 같이 실유란 유(sat)라고 하는 부류(genus) 가운데 있는 한 가지 종(specise)이고, 유(有)보다도 외연(外延)이 좁지만 내포(內包)는 풍부하다. 이 부류에 있는 유라고 하는 개념은 범주의 범주에 상당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다른 개념에 의해서 해석하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정의하는 것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성질의 것이다. 그러므로 실유의 의미는 실(dravya)의 분석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이 실(實)의 의미는 이미 한번 서술했으나 실유가 유(有)의 다른 종류와 대립해 있다고 하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다시 상당히 많은 규정을 얻을 수 있다. 유(有)의 다른 종류 모두 내용의 부정, 곧 다른 유(有)와의 종류의 차이가 실유의 내용이다.
 이제 위에 인용한 적이 있는 유에 관한 여러 가지 설을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주:2)갖춘 이름은 베르나르트 플라키두스 요한 네포무크 볼차노(Bernard Placidus Johann Nepomuk Bolzano, 1781년 10월 5일 ~ 1848년 12월 18일). 체코의 수학자 및 철학자 논리학자이다. 그는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그는 볼차노 정리로 유명하며, 카를 바이어슈트라스와 함께 볼차노-바이어슈트라스 정리를 발견했다 현상학의 선구를 이루는 것으로서는 베른하르트 볼차노의 논리학과 프란츠 브렌타노의 심리학을 들 수가 있다. 볼차노는, 명제가 나타내는 의미는 그 진위에 상관없이 주관에서 독립하여, 그 자체에 있어서 성립한다고 생각하였다.
3)시설유란 임시로 시설된 것. 예를 들면 남 여 등은 임시로 상정된 것으로 가유(假有)와 같다.
4)화합유란 개인의 존재를 가리키는데, 개인은 오온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존재. 존재가 여러 가지 법의 집합으로 인하여 구성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5) 상가바드라(Samghabhadra, 衆賢중현)는 설일체 유부의 논사. 『아비달마구사론』에 대한 저술로 『아비달마순정리론』과 『아비달마장현종론』이 있다. 세친이 『구사론』을 지어 비바사의 잘못을 바로잡고 유부의 학설을 정리하자, 중현논사는 구사론을 통파하여 우박이 초목을 꺾는다는 뜻으로 『구사박론俱舍雹論』을 지었다. 이를 본 세친보살은 이 논이 오히려 우리 종파를 더욱 발명하게 될 것이라고 칭찬하고『순정리론 順正理論』이라 고쳐 불렀다.
6)『마하지관』 제5하(대정장 46, p.상 27)에 나온다. 『대지도론』을 인용한 문장으로,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대지도론』에는 세 가지 유[三種有]가 있으니 상대유 가명유 법유이다. 상대유(相待有)란 긴 것은 짧은 것에 말미암고, 짧은 것은 긴 것에 말미암는 것과 같고, 물건이 동쪽에 있으면 바로 이것으로 원인하여 서쪽이 생기듯이 상대적이어서 이름은 있으나 실(實)이 없는 유를 말한다. 가명유란 낙(酪)이 색 향 미 촉의 네 가지의 인연 화합하므로 가명이 낙이다. 법유(法有)란 색 성 향미 촉의 사미(四味)가 화합하여 있음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