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여러 주석들의 해석의 차이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들 제 주석가운데 『무외론』, 핑가라(청목)의 주석과 찬드라키르티의 주석을 중심으로 하더라도 이들 사이에 다시 해석의 차이가 있을 때에는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해석의 차이는 실제로 인정된다. 이러한 눈에 띄는 예로는 동일한 식의 문구에 대한 제주석에서 정반대의 해석이 나오는 곳이 있다. 곧 이런 주석은 하나의 시구를 중관파의 주장으로 해석하고 있는 한편 다른 주석은 그와 동일한 시구를 반대파(예를 들면, 유부 독자부 정량부)의 주장으로 보이고 있다(이런 사실은 하시모토호케이 박사橋本芳契博士 「還曆記念論文集」속에서 논해지고 있다).
이런 경우에 어떤 해석이 원의에 합치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다분히 이쪽이 원의에 합당한 점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단정하기는 아마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런 시구의 문장에는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가장 안전한 재료를 시용해서 추론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동일의 시구에 대해서 해석되고 있는 곳도 있기 때문에 예를 든 모든 주석에 의해서 중관파의 주장을 서술하고 있다고 인정되고 있는 시구에 관해서도 대단한 해석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그러나 『대승중관석론』 『반야등론석』과 별도로 『무외론』, 핑가라 주석, 찬드라키르티의 주(註)의 3주석에 관해서는 부분적으로는 다소의 해석의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전체로서는 매우 다른 차이는 없다고 생각된다. 물론 지식이 풍부한 통찰력을 가진 연구자가 검토한다면 전체에 걸쳐서 해석에 차이가 인정될지도 모르지만, 필자의 눈에 비쳐진 것은 위에 말한 세 가지 주석에 관해서는 상당한 차이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중론』의 본래의 시구는 시구만 읽는 다해도 대체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주어 술어 객어가 모두 갖추어 있어서 대략 주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외론』은 주석으로 되어 있으나 다만 시구의 문장에서 어순을 바꾸어놓은 데 지나지 않을 정도이다. 또한 각 주석 일반에 하나의 시구에 대한 축어적인 주석을 생략한 곳도 나타나 있다. 그 의미에서는 『미맘사스투라』 와 『베단타스트라』와는 크게 성질을 달리하고 있다.
또한 『중론』에 있어서 논적 배격(곧 파사)의 논리는 개념과 판단 내용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논리(법유의 입장)를 배척하고 있다. 개념과 판단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곳은 없기 때문에 예를 들면 『유식삼십송』 등과 같이 주석자에 의해서 크게 다른 해석을 했다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시구가 중관파의 주장을 서술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반대자의 주장을 서술하고 있을까라고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일단 어느 쪽으로 결정한다면 그 가운데 나오는 용어와 그것에 연결된 방향에 대해서는 대체로 같은 해석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상 『중론』의 여러 주석에 대해서 논하였으나 그 외에도 『반야경』이나 나가르주나의 다른 저서, 그 외 중관파의 책도 『중론'의 사상을 밝히기 위한 참고로서 언급하고자 한다. 또한 연대는 뒤에 가서 산티데바(Santidava 寂天 650경∼700년경)의 『깨달음을 행하기 위한 입문' 및 동서에 대한 뿌라지냐 카라마티(950∼1030년경)의 어려운 말로 된 주석도 그대로 제학자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중관파의 사상을 서술하고 있다고 보고 갖다 붙이지는 않는다.
2. 운동의 부정의 논리
1) 『중론' 논법의 기초
운동(運動) 부정의 논리(「중론」 제2장에 서술되어 있음)는 『중론』 논법의 기초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론』에 있어서 뒤의 제장(諸章)에 있어서는 그대로 제2장(운동: 가는 것과 오는 것의 고찰)에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여 자세한 논증을 생략하고, 제2장에 있는 증명을 그대로 확립해서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곧 “[그대로 제2장에 있는] ‘지금 나타나 사라져 계속되고 있는 것’과 ‘그대로 사라진 것’과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에 의해서 그대로 배척되었다”(제3장 제3시時 후반) “지금 나타나 사라져 계속되는 것, 그대로 사라져버린 것,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이와 같이 설명하고 있는”(제7장 제14시 후반) 나머지는 “지금 나타나 사라져 계속되고 있는 것,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에 대한 고찰]에 의해서 설명되어 왔다”(제10장 제13시 후반, 제16장 제7시 후반)라고 한다. 따라서 나가르주나는 이 제2장의 논법을 매우 중요시 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제2장의 제1시를 보면, “아직 그대로 사라진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또한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시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과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을 떠나서 ‘현재 사라져 계속되는 것’도 사라지지 않는다”(‘먼저 이미 사라진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도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이미 사라진 것과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을 떠나서 사라지는 시간도 사라지지 않는다.’구마라집역) 라고 되어 있으나, 엄밀하게 말하면 “이미 사라진 ‘시간의 길’[世路]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시간의 길’도 사라지지 않는다. 현재 사라져 계속되고 있는 ‘시간의 길’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는 의미가 있다.
이제 여기서는 명료하지 않은 점이 있으나 편의상 구마라집의 역어를 참조해서 앞에서와 같이 번역하고, 이하에서도 같은 모습으로 하고 있다.(따라서 이 제2장은 직접적으로는 행하는 것도 [감(去)을 부정하고 끄는 것은 작용을 부정한다. 또한 ‘순간의 길’[世路] 또는 世]를 문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현상적 존재로 있는 ‘유위법’ 전체의 문제에도 없어진다).
그 이유를 제주석에 대해서 보면, 우선 “이미 가버림”이란 이미 가버린 것으로 곧 “가는 작용이 그친 것”이기 때문에 작용을 떠난 것에 작용이 있을 리는 없다. 따라서 그대로 사라진 것이 다시 사라진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또한 ‘아직 가지 않음’도 사라져 가버린 것이 아니다. ‘아직 가지 않음’이란 가는 작용이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이고, 간다고 하는 작용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아직 가지 않음이 가버렸다”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가 쉬울지 모르지만, ‘가버림’이란 현재의 행하는 작용과 결합해서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양자는 전혀 별개의 것이기 때문에 “아직 가지 않음이 사라진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 한 것이라고 한다.
다시 “‘현재 가면서 있는 것’(갈 때: 去時)이 사라진”이라고 하는 것도 있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 가버려 계속 있는 것’(갈 때: 去時)은 이미 가버린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불리 시킨다면 있는 게 아닌 것으로 있고, 보통 사람들은 ‘현재 가버려 계속 있는 것’(갈 때) 이루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현재 가버려 계속 있는 것’을 추구한다면 이미 갔을까 아직 가지 않았을까 아무래도 포함되어 버린다. 찬드라키르티는 이런 점을 강조하고 있다.
3) “‘사라지면서 있는 것’이 가버림[去]”의 논리
그런데 ‘이미 가버린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현재의 ‘가고 계속 있는 것’이 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라고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제2시에서 묻고 있다.
“움직임이 존재하는 곳에는 사라지는 움직임이 있다. 그래서 그 움직임은 ‘현재 사라지면서 있는 것’(갈 때 去時)에 있어서 ‘그대로 가버렸던 것’에도 ‘아직 가지 않은 것’에도 없기 때문에 ‘현재 사라지면서 있는 것’의 속에 사라지는 움직임이 있다.”
여기에 대해서 나가르주나는 답한다.
“‘현재 사라지면서 있는 것’ 속에는 어째서 ‘사라지는 움직임’이 있는 것일까. ‘현재 사라져 계속 있는 것’의 가운데에는 두 가지의 ‘사라지는 움직임’은 있는 것이 아니다”(제3시)
우리들이 “사라지면서 있는 것”이라고 말할 때에는 그대로 ‘사라진다고 하는 작용’과 결합되어 있다. 만약에 “가고 계속 있는 것이 사라지는”이라고 말한다면 그의 “사라져 계속 있는 것”이 다시 “사라지는 움직임”과 결합해서 구성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불합리하다. 물론 “가고 계속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뿐이라면 그것은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 사라지면서 있는 것’이 갔다”란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가고 사라지면서 있는 것’ 사라지는 움직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고 계속 있는 것’이 사라진 것이기 때문에 사라지는 움직임 없어져서 그래도 ‘가고 계속 있는 것’이 있다고 하는 [오류]가 부수되어 온다.” (제4詩)
만약 “사라지면서 있는 것이 사라진다”고 하는 주장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사라지면서 있는 것’이 ‘사라지는 움직임’을 있지 않은 것으로 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이와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다. 다음에
“‘사라지면서 있는 것’에 ‘사라지는 움직임’이 있는 것이라면 두 가지의 ‘사라지는 움직임’이 부수(付隨)해서 따라온다. [곧] ‘사라지면서 있는 것’을 나타내는 ‘사라지는 움직임’과 또한 ‘사라지면서 있는 것’에 있어서의 ‘사라지는 움직임’이 있다(제5시詩).
곧 만약 “사라지면서 있는 것이 사라진다”라고 한다면 주어의 “사라지면서 있는 것”의 속에 포함되어 있는 ‘사라짐[去]’과 새로이 술어로써 부가되는 '사라짐'의 두 가지의 ‘사라지는 움직임’이 부수하는 것이 된다. 두 가지의 사라지는 움직임을 인정한다면 다시 오류가 따른다.
“두 가지의 사라지는 움직임이 부수한다면, [다시] 두 가지의 ‘사라지는 주체’(사라지는 것)가 부수한다. 왜냐하면 사라지는 주체를 떠나서는 사라지는 움직임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제6시)
곧 ‘사라지는 주체’와 ‘사라지는 움직임’은 상호 의지해서 성립하고 있는 것이다. ‘사라지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면 반드시 ‘가는 주체’가 예상된다. 그러므로 ‘사라지는 움직임’이 두 가지 있다고 해도 ‘사라지는 주체’도 두 가지가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전부 있다고 하는 데에서 결론을 부수해서 이끌어 일으키기 때문에 “사라지면서 있는 것이 사리진다”고 하는 일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논의[議論]은 진실한 푸라상가 논법의 면목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제2장의 논리의 중심은 위에서 서술한 곳에 다 들어 있다.
주:1)베단타수트라(Vedānta-sūtra) : 『베단타미망사사스트라』『베단타사스트라』『베단타수트라'라고도 부른다. 인도의 육파철학의 한 파인 베단타 철학파의 근본 전적(典籍). 간결한 문체로 베단타 철학의 종전의 학설을 요약·정리·비판하여 하나의 체계를 이룬 것이다. 베단타는 산스크리트로 '베다(Veda)의 결론 또는 끝(anta)'이라는 뜻으로서 『우파니샤드』를 가리킨다. 이 학파의 학설은 인도 사상의 주류를 이루어 『베단타수트라(브라마수트라라고도 함)'에 정리되었고, 많은 주석서가 편찬되었다. 베단타학파의 여러 계통 중 『사마베다』에 속하는 『찬도갸우파니샤드』를 중심으로 하여 각종 『우파니샤드』 학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평가된다.
2)적천(寂天 antideva, 650∼750년 경) : 고인도古印度 남방 현강국(賢彊國)의 태자출신으로 속명은 적개(寂鎧)이다. 부왕이 사후 왕위를 계승하기 전날 밤 꿈에 문수보살의 계시를 받고 출가의 큰 인연이 있음을 깨달아, 나란타사에 가서 승천勝天을 은사로 하여 출가하여 적천(寂天)이라 하였다. 대중의 눈에는 잠자고 밥 먹고 보행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일자로 보여 대중의 미움을 샀다. 대중은 적천寂天을 쫓아낼 구실을 찾기 위해 독경대회를 열었다. 적천의 차례가 되어 등단하자, 대중들은 지금까지 듣지 못한 논장을 암송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때 보살의 머리 위에 문수보살의 상서로운 기운과 함께 문수보살이 모습을 공중에 나투며, 적천논사의 지혜 경계에서 입행론入行論을 송출해냈다. 인도에는 입행론入行論에 대한 해설서가 100여 종이 넘고, 티벳 역사상 일찍이 티벳어로 번역된 원문原文이 8종이며, 해설서도 20여 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승집보살학론(大乘集菩薩學論)』 (S'iks samuccaya,학처요집(學處要集), 27게와 그 주석 및 경증(經證), 범장본(梵藏本) 현존과 초심자에게 보살행을 밝혀 주는 『보리비결(菩提翡潔 Bodhicary vat ra 입보리행론)』, 10품(品) 900여게, (범어본 티벳본 현존), 그리고 『경집(經集S trasamuccaya)』등을 지었다. 중관학파는 불호(佛護)·월칭(月稱) 계통의 귀류론증파(歸謬論證派)(Pr sangika,) 와 청변(淸辨) 계통의 자립론증파(自立論證派 Svatantrika,) 로 갈라졌다. 귀류논증파는 필과공성파(必過空性派)라고도 부르며, 자립논증파는 자의입종파(自意立宗派)라고도 부른다. 그 후에는 적천(寂天) 등이 귀류논증파의 계통을 이었다.
3)푸라상가 논법: 용수가 반대론자의 논법을 깨트리기 위하여 사용한 논법. 상대방의 논리의 모순을 철저하게 파고들어 여기서 오류를 찾아내는 방법이다. 후에 불호는 프라상가의 논법을 써서 상대방의 입론을 파척했다.불호는 프라상가의 논법을 써서 상대방의 입론을 파척했지만, 그것은 파척에 머물러 있으며, 적극적으로 공사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 때문에 청변은 공의 입장을 논리에 의해 적극적으로 나타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청변은 용수의 『근본중송』을 주석하여 『반야등론석』을 짓고 불호의 설을 비판하여 중관파의 입장을 천명했던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들 제 주석가운데 『무외론』, 핑가라(청목)의 주석과 찬드라키르티의 주석을 중심으로 하더라도 이들 사이에 다시 해석의 차이가 있을 때에는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해석의 차이는 실제로 인정된다. 이러한 눈에 띄는 예로는 동일한 식의 문구에 대한 제주석에서 정반대의 해석이 나오는 곳이 있다. 곧 이런 주석은 하나의 시구를 중관파의 주장으로 해석하고 있는 한편 다른 주석은 그와 동일한 시구를 반대파(예를 들면, 유부 독자부 정량부)의 주장으로 보이고 있다(이런 사실은 하시모토호케이 박사橋本芳契博士 「還曆記念論文集」속에서 논해지고 있다).
이런 경우에 어떤 해석이 원의에 합치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다분히 이쪽이 원의에 합당한 점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단정하기는 아마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런 시구의 문장에는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가장 안전한 재료를 시용해서 추론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동일의 시구에 대해서 해석되고 있는 곳도 있기 때문에 예를 든 모든 주석에 의해서 중관파의 주장을 서술하고 있다고 인정되고 있는 시구에 관해서도 대단한 해석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그러나 『대승중관석론』 『반야등론석』과 별도로 『무외론』, 핑가라 주석, 찬드라키르티의 주(註)의 3주석에 관해서는 부분적으로는 다소의 해석의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전체로서는 매우 다른 차이는 없다고 생각된다. 물론 지식이 풍부한 통찰력을 가진 연구자가 검토한다면 전체에 걸쳐서 해석에 차이가 인정될지도 모르지만, 필자의 눈에 비쳐진 것은 위에 말한 세 가지 주석에 관해서는 상당한 차이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중론』의 본래의 시구는 시구만 읽는 다해도 대체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주어 술어 객어가 모두 갖추어 있어서 대략 주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외론』은 주석으로 되어 있으나 다만 시구의 문장에서 어순을 바꾸어놓은 데 지나지 않을 정도이다. 또한 각 주석 일반에 하나의 시구에 대한 축어적인 주석을 생략한 곳도 나타나 있다. 그 의미에서는 『미맘사스투라』 와 『베단타스트라』와는 크게 성질을 달리하고 있다.
또한 『중론』에 있어서 논적 배격(곧 파사)의 논리는 개념과 판단 내용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논리(법유의 입장)를 배척하고 있다. 개념과 판단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곳은 없기 때문에 예를 들면 『유식삼십송』 등과 같이 주석자에 의해서 크게 다른 해석을 했다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시구가 중관파의 주장을 서술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반대자의 주장을 서술하고 있을까라고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일단 어느 쪽으로 결정한다면 그 가운데 나오는 용어와 그것에 연결된 방향에 대해서는 대체로 같은 해석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상 『중론』의 여러 주석에 대해서 논하였으나 그 외에도 『반야경』이나 나가르주나의 다른 저서, 그 외 중관파의 책도 『중론'의 사상을 밝히기 위한 참고로서 언급하고자 한다. 또한 연대는 뒤에 가서 산티데바(Santidava 寂天 650경∼700년경)의 『깨달음을 행하기 위한 입문' 및 동서에 대한 뿌라지냐 카라마티(950∼1030년경)의 어려운 말로 된 주석도 그대로 제학자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중관파의 사상을 서술하고 있다고 보고 갖다 붙이지는 않는다.
2. 운동의 부정의 논리
1) 『중론' 논법의 기초
운동(運動) 부정의 논리(「중론」 제2장에 서술되어 있음)는 『중론』 논법의 기초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론』에 있어서 뒤의 제장(諸章)에 있어서는 그대로 제2장(운동: 가는 것과 오는 것의 고찰)에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여 자세한 논증을 생략하고, 제2장에 있는 증명을 그대로 확립해서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곧 “[그대로 제2장에 있는] ‘지금 나타나 사라져 계속되고 있는 것’과 ‘그대로 사라진 것’과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에 의해서 그대로 배척되었다”(제3장 제3시時 후반) “지금 나타나 사라져 계속되는 것, 그대로 사라져버린 것,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이와 같이 설명하고 있는”(제7장 제14시 후반) 나머지는 “지금 나타나 사라져 계속되고 있는 것,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에 대한 고찰]에 의해서 설명되어 왔다”(제10장 제13시 후반, 제16장 제7시 후반)라고 한다. 따라서 나가르주나는 이 제2장의 논법을 매우 중요시 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제2장의 제1시를 보면, “아직 그대로 사라진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또한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시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과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을 떠나서 ‘현재 사라져 계속되는 것’도 사라지지 않는다”(‘먼저 이미 사라진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도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이미 사라진 것과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을 떠나서 사라지는 시간도 사라지지 않는다.’구마라집역) 라고 되어 있으나, 엄밀하게 말하면 “이미 사라진 ‘시간의 길’[世路]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시간의 길’도 사라지지 않는다. 현재 사라져 계속되고 있는 ‘시간의 길’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는 의미가 있다.
이제 여기서는 명료하지 않은 점이 있으나 편의상 구마라집의 역어를 참조해서 앞에서와 같이 번역하고, 이하에서도 같은 모습으로 하고 있다.(따라서 이 제2장은 직접적으로는 행하는 것도 [감(去)을 부정하고 끄는 것은 작용을 부정한다. 또한 ‘순간의 길’[世路] 또는 世]를 문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현상적 존재로 있는 ‘유위법’ 전체의 문제에도 없어진다).
그 이유를 제주석에 대해서 보면, 우선 “이미 가버림”이란 이미 가버린 것으로 곧 “가는 작용이 그친 것”이기 때문에 작용을 떠난 것에 작용이 있을 리는 없다. 따라서 그대로 사라진 것이 다시 사라진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또한 ‘아직 가지 않음’도 사라져 가버린 것이 아니다. ‘아직 가지 않음’이란 가는 작용이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이고, 간다고 하는 작용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아직 가지 않음이 가버렸다”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가 쉬울지 모르지만, ‘가버림’이란 현재의 행하는 작용과 결합해서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양자는 전혀 별개의 것이기 때문에 “아직 가지 않음이 사라진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 한 것이라고 한다.
다시 “‘현재 가면서 있는 것’(갈 때: 去時)이 사라진”이라고 하는 것도 있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 가버려 계속 있는 것’(갈 때: 去時)은 이미 가버린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불리 시킨다면 있는 게 아닌 것으로 있고, 보통 사람들은 ‘현재 가버려 계속 있는 것’(갈 때) 이루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현재 가버려 계속 있는 것’을 추구한다면 이미 갔을까 아직 가지 않았을까 아무래도 포함되어 버린다. 찬드라키르티는 이런 점을 강조하고 있다.
3) “‘사라지면서 있는 것’이 가버림[去]”의 논리
그런데 ‘이미 가버린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현재의 ‘가고 계속 있는 것’이 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라고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제2시에서 묻고 있다.
“움직임이 존재하는 곳에는 사라지는 움직임이 있다. 그래서 그 움직임은 ‘현재 사라지면서 있는 것’(갈 때 去時)에 있어서 ‘그대로 가버렸던 것’에도 ‘아직 가지 않은 것’에도 없기 때문에 ‘현재 사라지면서 있는 것’의 속에 사라지는 움직임이 있다.”
여기에 대해서 나가르주나는 답한다.
“‘현재 사라지면서 있는 것’ 속에는 어째서 ‘사라지는 움직임’이 있는 것일까. ‘현재 사라져 계속 있는 것’의 가운데에는 두 가지의 ‘사라지는 움직임’은 있는 것이 아니다”(제3시)
우리들이 “사라지면서 있는 것”이라고 말할 때에는 그대로 ‘사라진다고 하는 작용’과 결합되어 있다. 만약에 “가고 계속 있는 것이 사라지는”이라고 말한다면 그의 “사라져 계속 있는 것”이 다시 “사라지는 움직임”과 결합해서 구성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불합리하다. 물론 “가고 계속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뿐이라면 그것은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 사라지면서 있는 것’이 갔다”란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가고 사라지면서 있는 것’ 사라지는 움직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고 계속 있는 것’이 사라진 것이기 때문에 사라지는 움직임 없어져서 그래도 ‘가고 계속 있는 것’이 있다고 하는 [오류]가 부수되어 온다.” (제4詩)
만약 “사라지면서 있는 것이 사라진다”고 하는 주장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사라지면서 있는 것’이 ‘사라지는 움직임’을 있지 않은 것으로 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이와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다. 다음에
“‘사라지면서 있는 것’에 ‘사라지는 움직임’이 있는 것이라면 두 가지의 ‘사라지는 움직임’이 부수(付隨)해서 따라온다. [곧] ‘사라지면서 있는 것’을 나타내는 ‘사라지는 움직임’과 또한 ‘사라지면서 있는 것’에 있어서의 ‘사라지는 움직임’이 있다(제5시詩).
곧 만약 “사라지면서 있는 것이 사라진다”라고 한다면 주어의 “사라지면서 있는 것”의 속에 포함되어 있는 ‘사라짐[去]’과 새로이 술어로써 부가되는 '사라짐'의 두 가지의 ‘사라지는 움직임’이 부수하는 것이 된다. 두 가지의 사라지는 움직임을 인정한다면 다시 오류가 따른다.
“두 가지의 사라지는 움직임이 부수한다면, [다시] 두 가지의 ‘사라지는 주체’(사라지는 것)가 부수한다. 왜냐하면 사라지는 주체를 떠나서는 사라지는 움직임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제6시)
곧 ‘사라지는 주체’와 ‘사라지는 움직임’은 상호 의지해서 성립하고 있는 것이다. ‘사라지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면 반드시 ‘가는 주체’가 예상된다. 그러므로 ‘사라지는 움직임’이 두 가지 있다고 해도 ‘사라지는 주체’도 두 가지가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전부 있다고 하는 데에서 결론을 부수해서 이끌어 일으키기 때문에 “사라지면서 있는 것이 사리진다”고 하는 일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논의[議論]은 진실한 푸라상가 논법의 면목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제2장의 논리의 중심은 위에서 서술한 곳에 다 들어 있다.
주:1)베단타수트라(Vedānta-sūtra) : 『베단타미망사사스트라』『베단타사스트라』『베단타수트라'라고도 부른다. 인도의 육파철학의 한 파인 베단타 철학파의 근본 전적(典籍). 간결한 문체로 베단타 철학의 종전의 학설을 요약·정리·비판하여 하나의 체계를 이룬 것이다. 베단타는 산스크리트로 '베다(Veda)의 결론 또는 끝(anta)'이라는 뜻으로서 『우파니샤드』를 가리킨다. 이 학파의 학설은 인도 사상의 주류를 이루어 『베단타수트라(브라마수트라라고도 함)'에 정리되었고, 많은 주석서가 편찬되었다. 베단타학파의 여러 계통 중 『사마베다』에 속하는 『찬도갸우파니샤드』를 중심으로 하여 각종 『우파니샤드』 학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평가된다.
2)적천(寂天 antideva, 650∼750년 경) : 고인도古印度 남방 현강국(賢彊國)의 태자출신으로 속명은 적개(寂鎧)이다. 부왕이 사후 왕위를 계승하기 전날 밤 꿈에 문수보살의 계시를 받고 출가의 큰 인연이 있음을 깨달아, 나란타사에 가서 승천勝天을 은사로 하여 출가하여 적천(寂天)이라 하였다. 대중의 눈에는 잠자고 밥 먹고 보행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일자로 보여 대중의 미움을 샀다. 대중은 적천寂天을 쫓아낼 구실을 찾기 위해 독경대회를 열었다. 적천의 차례가 되어 등단하자, 대중들은 지금까지 듣지 못한 논장을 암송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때 보살의 머리 위에 문수보살의 상서로운 기운과 함께 문수보살이 모습을 공중에 나투며, 적천논사의 지혜 경계에서 입행론入行論을 송출해냈다. 인도에는 입행론入行論에 대한 해설서가 100여 종이 넘고, 티벳 역사상 일찍이 티벳어로 번역된 원문原文이 8종이며, 해설서도 20여 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승집보살학론(大乘集菩薩學論)』 (S'iks samuccaya,학처요집(學處要集), 27게와 그 주석 및 경증(經證), 범장본(梵藏本) 현존과 초심자에게 보살행을 밝혀 주는 『보리비결(菩提翡潔 Bodhicary vat ra 입보리행론)』, 10품(品) 900여게, (범어본 티벳본 현존), 그리고 『경집(經集S trasamuccaya)』등을 지었다. 중관학파는 불호(佛護)·월칭(月稱) 계통의 귀류론증파(歸謬論證派)(Pr sangika,) 와 청변(淸辨) 계통의 자립론증파(自立論證派 Svatantrika,) 로 갈라졌다. 귀류논증파는 필과공성파(必過空性派)라고도 부르며, 자립논증파는 자의입종파(自意立宗派)라고도 부른다. 그 후에는 적천(寂天) 등이 귀류논증파의 계통을 이었다.
3)푸라상가 논법: 용수가 반대론자의 논법을 깨트리기 위하여 사용한 논법. 상대방의 논리의 모순을 철저하게 파고들어 여기서 오류를 찾아내는 방법이다. 후에 불호는 프라상가의 논법을 써서 상대방의 입론을 파척했다.불호는 프라상가의 논법을 써서 상대방의 입론을 파척했지만, 그것은 파척에 머물러 있으며, 적극적으로 공사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 때문에 청변은 공의 입장을 논리에 의해 적극적으로 나타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청변은 용수의 『근본중송』을 주석하여 『반야등론석』을 짓고 불호의 설을 비판하여 중관파의 입장을 천명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