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삼시문파(三時門派)의 논법
제6시(詩) 이하의 시를 '중론소'를 참조해서 분류한다면, 제 7시(詩)에서 제 11시까지는 가는 자와 가는 법을 대립시켜서 이것을 논파하고, 제 12시에서 제 14시까지 에서는 사라짐의 시작을 논파하고 있다. 제 15시에서 제17의 시까지는 머무르는 것을 논파하고 있다. 이것 이하에서는 별도의 논법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뒤에 검토하기로 하고, 제7시에서부터 제17시까지는 다만 문제를 취하여 바꾼 것뿐인데 모두 위에서 서술한 제6시까지와 똑같은 논법이 사용되고 있다. 가상대사(嘉祥大師) 길장은 이 논법을 일괄해서 “삼시문파”라고 이름붙이고 있다.
위에서 서술한 논법과 비슷한 논의는 '중론'속에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길장은 이것에 삼시문파 또는 삼세문파라고 하는 이름을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제3장 제3시, 제7장 제13시, 제14시, 제15시, 제22시, 제26시, 제16장 제7시 후반, 제10장 제13시 후반, 제23장 제17시, 제18시 등이 이것들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더욱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다시 '대지도론'에 있어서도 이 제2장의 논법이 사용되고 있다(제51권 '대정장' 25권, p.428상). 같은 책 51권에는 대체로 제2장의 제1시부터 제8시까지의 내용을 서술하고 제19권에는 같은 내용의 제1시에서 제8시까지 내용을 서술하고 다시 제16시의 논의를 부과하고 있다. 이것은 아무래도 '대품반야경' 가운데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다[不來不去]”를 주석한 곳에 설하고 있기 때문에 '중론'의 이 논의도 '반야경'의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다”를 논증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역시 '십이문론'의 관생문(觀生門) 제12에도 이것과 같은 모양으로 논의를 서술하고 있다.
5) 제 2장의 철학적 의의
이상은 한편으로 제 2장의 논법의 개략을 서술한 것에 머물지 않고, 우리는 다시 나아가 그 철학적 의의를 고찰하고자 한다. '중론'은 어째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 가는 것이다”고 하는 두 가지의 사라지는 활동을 수반한다고 주장하고 있을까. 상식상 우리들의 이해로는 어려운 것이다. “사라지고 있는 것이 가는 것이다”라고 하는 명제는 “일본인은 사람이다”라고 하는 명제와 같은 내용으로 어떤 모순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이것이 불합리하다고 하여 나가르주나가 극력 논박하는 것은 어디에 있을까.
“사라지고 있는 것이 가는 것이다”라고 하는 명제는 “일본인은 사람들이다”라고 하는 명제와 같은 내용의 형식논리학적으로 보인다면 어떤 오류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해명적 판단 또는 분석적 판단에 있어서 주어로 되어있는 “사라지고 있는 것이” “일본인”이라고 하는 개념 가운데 술어의 “가는 것” “사람이다”라고 하는 개념이 그대로 포함되어 있다. 주어를 분석해서 술어를 이끌어 내는데 있기 때문에 조금도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나가르주나는 “두 가지의 사라지는 움직임이 부수해서 일어난다”고 한다. 곧 이것은 “사라지고 있는 것”의 사라짐[去]과 “가는 것”의 거(去)도 의미가 다르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가르주나는 “사라지고 있는 것이 가는 것이다”라고 하는 판단을 해명적 판단이 아니고 강하게 이름붙인다면 확장적 판단, 또는 종합적 판단과 같다고 생각한 것에 다르지 않는다.
6) 법유(法有)의 입장을 공격
무엇 때문일까. 여기서 우리는 '중론'이 법유의 입장을 상대로 하고 있다고 하는 역사적 연관을 고려한다면 용이하게 이 주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서술했던 것처럼 법유란 경험적 사물로서의 “사물”이 있다고 하는 의미는 아니다. 자연적 존재로서의 “사물”로써 이러저러한 특성에 있어서 “사물”로써 가지고 있는 사물로써 있기 때문에 “형체” “본질”로써의 사물이 있다는 의미이다. “……으로 있는 모습”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essentia를 essentia로 머물지 않고 높은 영역에 있는 existentia로서 파악하려고 하는 입장이다. 이보다 낮은 영역에 있어서 존립하는(bestehen) 것은 보다 높은 영역에 있어서 있다(sein).
따라서 법유의 입장에서는 작용을 단순히 작용으로써 보지 않고 작용을 작용으로써 나타내는 ‘모습’ ‘본질’이 형이상학적 영역에 있어서 실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주해서의 제2장의 처음에 있어서는 법유의 입장에 있는 사람은 움직임(작용)이 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확실히 제법이 있다고 알 수 있다고 하고, “간다”고 하는 모습 본질이 실재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사라지고 있는 것”도 우리들에 의해 생각하면 다시 지향하고 있는 “존재모습”이기 때문에 단순히 의식 내용에 머물지 않고 배후의 실재계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 가는 것이다”라고 하는 경우에는 “사라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하나의 존재방식으로서 형이상학적 실재에 관해서 “간다”고 하는 술어를 부여하는 판단에 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법유의 입장은 이러저러한 존재방식을 그대로 실재로 보기 때문에 “사라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존재방식과 가는 것이라고 하는 존재방식은 전혀 별개의 것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 간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확장적 판단으로 두 가지의 가는 움직임을 포함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두 가지의 사라지는 움직임을 종합하는 근거는 어디서 구할 것인가. “존재방식 그런 것”(법만이)이 있고, 다른 어떠한 내용도 거부하고 있는 두 가지의 실체가 어떻게 해서 결합하고 있을까 이것이 나가르주나의 논점이다.
논적이 가지고 있는 이런 곤란한 점은 온전히 법유라고 하는 철학적 태도에서 유래한다. 물론 '중론'의 중요 논적으로 되어 있는 유부는 “가는 것”이라고 하는 다르마(법)를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이른바 운동을 부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는 것”도 하나의 존재방식이기 때문에 일반에 법유의 입장을 세운다면 “가는 것”도 실체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하더라도 여러 가지 곤란한 문제가 일어난다고 하는 것을 나가르주나는 강조하고 있다. 이 점은 경부라고 하는 학파가 유부에 대해서 만약에 법유의 입장을 고집한다면 75법 이외의 모든 존재를 실체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여러 가지 그 약점을 공격하고 있다는 동일한 태도일 것이다.
7) 플라톤에 보이는 본질 형체
만약에 현상계의 변화모습을 성립시키는 범형(範型)으로써 본질 형체가 있다면 그것은 변화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는 논의는 플라톤의 대화편에도 보인다.
소크라테스 : 다음의 것을 생각해보지 않겠는가. 진실로 이름을 세웠던 사람들은 만물이 어느 때라도 지나가고 또한 흐른다고 생각해서 유명해졌던 것일까 아닐까.…나 자신이 보는 데에서는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은 일에 따라서 그것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고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한 가지의 소용돌이 속에 떨어져 혼란스럽고, 또한 우리들을 끌고 가서 그 속에 다시 던져버린다. 내가 몇 번 꿈꾸는 것을 외경(畏敬)할만 한. 클라디로스군 생각해 보게. 우리들이 말해도 좋을까 미(美) 자체일까 선(善)일까 그와 같은 존재하는 것들의 하나하나가 있다고.
클라디로스 : 물론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 저런 것 자체를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얼굴이나 혹은 어떤 그런 것이 아름다울까 어떨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모두 흘러가는 것과 같이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없고 아름다움 자체는 어느 때라도 그것이 현재 있다고 하는 성질 그런 것은 아닐까.
클라디로스 : 그렇게 반드시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 그런데 그것이 어느 때라도 나와서 가버린다면 그것을 올바로 불러줄 수가 있을까. 우선 저런 것으로 있고 다음에는 이와 같은 것으로 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우리들이 말한 것과 동시에 그것은 곧 다른 것이 되고 나와서 가버리고 벌써 그런 상태를 계속하지 않는 것일까.
클라디로스 :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소크라테스 : 그런데 똑같은 상태에서 다른 것이 어떻게 저런 것으로 얻을 수 있는가.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도 적은 것도 똑같은 상태에 있다면 적은 것 그 시간의 사이는 물론 잠시도 변화하지 않는다. 또한 어떤 때라도 똑같은 상태에 있는 똑같은 것이 있다면 적은 것도 그것이 어째서 변화하기도 하고 운동하기도 할까. 자기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클라디로스 : 결코 하지 않습니다.
('클라디로스' '플라톤전집' 제2권 한자는 약간 고쳐서 인용하였음)
종래 서양의 제학자들은 제2장을 보고, 나가르주나는 운동을 부정했다고 평하고, 그리이스 엘리아파의 제논의 논증에 비교하고 있다. 그렇지만 양자의 논리를 정밀하게 비교한다면 유사성을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자연적 존재의 영역에 있어서 운동을 부정했다는 것은 아니고 법유(法有)의 입장을 공격했던 것이다.
주:1)『중론』 「관거래품(觀去來品)」에서는 法의 ‘不來不去’의를 밝혀서, 八不의 중도사상을 펴고 있다. 「관인연품」에서와 마찬가지로 ‘去’의 개념에 ‘來’를 포함시켜서 전개해 나가고 있는데, ‘去’가 이루어지지 않음과 동시에 ‘來’도 성립하지 않음을 논증하는 것이다. 去ּ來의 개념은 사물이 미래로부터 현재로 오고 또 현재로 부터 과거로 간다는 의미로써, 본질적으로 사물이 생겨나고 없어짐을 뜻하는 ‘生滅’의 개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는 '중론' 전체를 일관하는 ‘근본 원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유부가 주장하는 法의 자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성을 갖고 있는 法의 실체적인 변화의 원리는 ‘인연’이지만, 그 형식적인 변화의 양상은 ‘去來’로 표현된다.1) 그러므로 ‘因緣’과 ‘去來’를 논파함은, 유부의 법에 대한 모든 관념을 파기함과 아울러 八不偈의 ‘중도사상’을 밝히는 근간이 될 것이다.
우선 제일게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三時에 걸쳐, 어디에도 ‘去’의 작용이 있지 않음을 선언하고 있다.
이미 지나간 것[已去]에는 감[去]이 없고, 아직 가지 않은 것[未去]에도 감이 없으며, 또한 과거와 미래를 떠난 현재에도 감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과거는 이미 가버렸고, 미래는 아직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거와 미래를 떠나서 현재가 홀로 존립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며, 따라서 현재에도 감(去)은 성립되지 못한다.
주:2)나가르주나의 유부(有部)에 대한 비판은 '중론'에서 중심을 이룬다. 용수는 유부의 사상적 특징을 '법유(法有)라고 보았다. 따라서 법유 사상의 근저를 이루는 [자성(自性) : svabhaava]의 개념을 철저히 비판하고 있다. 이 자성이란 연기· 공성과는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유부는 일체 현상의 근본인 법이 자성으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용수는 이 자성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성이 연(緣)과 인(因)에서 생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성이 연과 인에서 생긴다면 그것은 만들어진 것이 될 것이다.(15-1) 그런데 어찌하여 자성이 실로 만들어진 것이 될까. 자성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고, 또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인 까닭이다.(15-2) 이처럼 자성이란 인연(因緣)에 의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하지 않는 것이라고 용수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자성의 개념은 연기의 입장과 위배되는 것이며 공의 개념과도 배치되는 것으로, 이러한 자성의 개념을
용수는『중론』 전체에 걸쳐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다. 곧 유부에서는 일체 현상의 작용을 가능케 하는 근본 실체로서 법의 자성을 인정한 것에 대하여, 용수는 모든 사물에 그러한 실체적 성질은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은 모든 사물이 실체적 자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연기하고 있는 것으로 곧 공인 까닭에 연유(緣由)하는 것이다. 따라서 연기와 공의 입장에 서서 자성의 개념을 비판하며, 아울러 사물이 연기, 공성의 존재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 것이『중론』의 근본 의도이었던 것이다.
주:3)엘레아(Elea)학파는 BC 5세기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식민지 엘레아 지방에서 번성했던 학파. 이 학파의 특징은 극단적 일원론을 주장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 자체로 충만하며 존재와 대립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따라서 분화·운동·변화는 모두 환상일 뿐이라고 보았다. 엘레아학파의 철학자들은 각기 독특한 이론을 주장했다. 파르메니데스는 사유의 직접적·논리적인 경로를 탐구했고 존재를 유한하고 무시간적인 것으로 보았다. 제논은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옹호했지만, 그와는 달리 간접증명법인 귀류법과 무한누진법을 이용했다. 멜리소스는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을 수정하여 존재를 무한히 크고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으로 보았다. 방법론에서 엘레아학파는 BC 6세기 밀레토스 학파의 경험적 접근법을 비판했다. 엘레아학파는 감각적 인식을 부정했으며, 실재는 움직이지 않으며 유일한 존재로 충만한 것으로서 극히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합리주의적 접근법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파르메니데스는 순수 존재론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진다. 파르메니데스의 시에 나오는 '진리의 길'에 근거한 엘레아학파의 존재론은 존재를 비존재와 함께 생각한 다른 학설들과 대립된다.
주:4)제논(Zenon)의 견해는 플라톤의 대화편 〈파르메니데스〉의 첫 부분에 나온다. 여기서 제논은 파르메니데스의 비판자들이 전제하고 있는 '폴라'(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존재) 개념의 난점이 모든 실재를 유일하고 보편적인 존재로 환원한 파르메니데스의 난점보다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귀류법으로 증명함으로써 그들을 논파하고 스승의 철학을 변호하려 했다. 다수성의 제논에 대한 4가지 반대 논증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사물이 하나보다 많다면 사물은 수적으로 유한하면서 동시에 무한해야 하는 모순이 생긴다. 사물은 일정하게 셀 수 있는 것이므로 유한하다. 그러나 분리된 2개의 사물 사이에는 제3의 사물이 존재해야 하며 제3의 사물과 제1의 사물 사이에 제4의 사물이 존재해야 한다. 이것은 무한히 반복되므로 사물은 또한 수적으로 무한하다. 한편 제논은 운동의 실재성을 반박하는 4가지 논증도 제시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물이 자신과 동일한 어떤 공간 속에 위치하는 한 그것은 정지해 있다. 날아가는 화살도 날아가는 매 순간에는 자기와 동일한 한 공간 속에 있다. 그러므로 날아가는 화살도 언제나 정지 상태에 있다. 이런 식으로 제논은 다수성·변화·운동 등은 억견의 환상이며 존재는 하나이고 운동하지 않는다고 논증했다. 그러나 제논의 역설적 논증의 많은 부분은 거꾸로 고르기아스와 플라톤에 의해 파르메니데스의 일자(一者)를 논파하는데 이용되었다.
제6시(詩) 이하의 시를 '중론소'를 참조해서 분류한다면, 제 7시(詩)에서 제 11시까지는 가는 자와 가는 법을 대립시켜서 이것을 논파하고, 제 12시에서 제 14시까지 에서는 사라짐의 시작을 논파하고 있다. 제 15시에서 제17의 시까지는 머무르는 것을 논파하고 있다. 이것 이하에서는 별도의 논법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뒤에 검토하기로 하고, 제7시에서부터 제17시까지는 다만 문제를 취하여 바꾼 것뿐인데 모두 위에서 서술한 제6시까지와 똑같은 논법이 사용되고 있다. 가상대사(嘉祥大師) 길장은 이 논법을 일괄해서 “삼시문파”라고 이름붙이고 있다.
위에서 서술한 논법과 비슷한 논의는 '중론'속에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길장은 이것에 삼시문파 또는 삼세문파라고 하는 이름을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제3장 제3시, 제7장 제13시, 제14시, 제15시, 제22시, 제26시, 제16장 제7시 후반, 제10장 제13시 후반, 제23장 제17시, 제18시 등이 이것들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더욱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다시 '대지도론'에 있어서도 이 제2장의 논법이 사용되고 있다(제51권 '대정장' 25권, p.428상). 같은 책 51권에는 대체로 제2장의 제1시부터 제8시까지의 내용을 서술하고 제19권에는 같은 내용의 제1시에서 제8시까지 내용을 서술하고 다시 제16시의 논의를 부과하고 있다. 이것은 아무래도 '대품반야경' 가운데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다[不來不去]”를 주석한 곳에 설하고 있기 때문에 '중론'의 이 논의도 '반야경'의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다”를 논증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역시 '십이문론'의 관생문(觀生門) 제12에도 이것과 같은 모양으로 논의를 서술하고 있다.
5) 제 2장의 철학적 의의
이상은 한편으로 제 2장의 논법의 개략을 서술한 것에 머물지 않고, 우리는 다시 나아가 그 철학적 의의를 고찰하고자 한다. '중론'은 어째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 가는 것이다”고 하는 두 가지의 사라지는 활동을 수반한다고 주장하고 있을까. 상식상 우리들의 이해로는 어려운 것이다. “사라지고 있는 것이 가는 것이다”라고 하는 명제는 “일본인은 사람이다”라고 하는 명제와 같은 내용으로 어떤 모순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이것이 불합리하다고 하여 나가르주나가 극력 논박하는 것은 어디에 있을까.
“사라지고 있는 것이 가는 것이다”라고 하는 명제는 “일본인은 사람들이다”라고 하는 명제와 같은 내용의 형식논리학적으로 보인다면 어떤 오류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해명적 판단 또는 분석적 판단에 있어서 주어로 되어있는 “사라지고 있는 것이” “일본인”이라고 하는 개념 가운데 술어의 “가는 것” “사람이다”라고 하는 개념이 그대로 포함되어 있다. 주어를 분석해서 술어를 이끌어 내는데 있기 때문에 조금도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나가르주나는 “두 가지의 사라지는 움직임이 부수해서 일어난다”고 한다. 곧 이것은 “사라지고 있는 것”의 사라짐[去]과 “가는 것”의 거(去)도 의미가 다르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가르주나는 “사라지고 있는 것이 가는 것이다”라고 하는 판단을 해명적 판단이 아니고 강하게 이름붙인다면 확장적 판단, 또는 종합적 판단과 같다고 생각한 것에 다르지 않는다.
6) 법유(法有)의 입장을 공격
무엇 때문일까. 여기서 우리는 '중론'이 법유의 입장을 상대로 하고 있다고 하는 역사적 연관을 고려한다면 용이하게 이 주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서술했던 것처럼 법유란 경험적 사물로서의 “사물”이 있다고 하는 의미는 아니다. 자연적 존재로서의 “사물”로써 이러저러한 특성에 있어서 “사물”로써 가지고 있는 사물로써 있기 때문에 “형체” “본질”로써의 사물이 있다는 의미이다. “……으로 있는 모습”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essentia를 essentia로 머물지 않고 높은 영역에 있는 existentia로서 파악하려고 하는 입장이다. 이보다 낮은 영역에 있어서 존립하는(bestehen) 것은 보다 높은 영역에 있어서 있다(sein).
따라서 법유의 입장에서는 작용을 단순히 작용으로써 보지 않고 작용을 작용으로써 나타내는 ‘모습’ ‘본질’이 형이상학적 영역에 있어서 실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주해서의 제2장의 처음에 있어서는 법유의 입장에 있는 사람은 움직임(작용)이 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확실히 제법이 있다고 알 수 있다고 하고, “간다”고 하는 모습 본질이 실재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사라지고 있는 것”도 우리들에 의해 생각하면 다시 지향하고 있는 “존재모습”이기 때문에 단순히 의식 내용에 머물지 않고 배후의 실재계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 가는 것이다”라고 하는 경우에는 “사라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하나의 존재방식으로서 형이상학적 실재에 관해서 “간다”고 하는 술어를 부여하는 판단에 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법유의 입장은 이러저러한 존재방식을 그대로 실재로 보기 때문에 “사라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존재방식과 가는 것이라고 하는 존재방식은 전혀 별개의 것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 간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확장적 판단으로 두 가지의 가는 움직임을 포함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두 가지의 사라지는 움직임을 종합하는 근거는 어디서 구할 것인가. “존재방식 그런 것”(법만이)이 있고, 다른 어떠한 내용도 거부하고 있는 두 가지의 실체가 어떻게 해서 결합하고 있을까 이것이 나가르주나의 논점이다.
논적이 가지고 있는 이런 곤란한 점은 온전히 법유라고 하는 철학적 태도에서 유래한다. 물론 '중론'의 중요 논적으로 되어 있는 유부는 “가는 것”이라고 하는 다르마(법)를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이른바 운동을 부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는 것”도 하나의 존재방식이기 때문에 일반에 법유의 입장을 세운다면 “가는 것”도 실체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하더라도 여러 가지 곤란한 문제가 일어난다고 하는 것을 나가르주나는 강조하고 있다. 이 점은 경부라고 하는 학파가 유부에 대해서 만약에 법유의 입장을 고집한다면 75법 이외의 모든 존재를 실체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여러 가지 그 약점을 공격하고 있다는 동일한 태도일 것이다.
7) 플라톤에 보이는 본질 형체
만약에 현상계의 변화모습을 성립시키는 범형(範型)으로써 본질 형체가 있다면 그것은 변화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는 논의는 플라톤의 대화편에도 보인다.
소크라테스 : 다음의 것을 생각해보지 않겠는가. 진실로 이름을 세웠던 사람들은 만물이 어느 때라도 지나가고 또한 흐른다고 생각해서 유명해졌던 것일까 아닐까.…나 자신이 보는 데에서는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은 일에 따라서 그것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고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한 가지의 소용돌이 속에 떨어져 혼란스럽고, 또한 우리들을 끌고 가서 그 속에 다시 던져버린다. 내가 몇 번 꿈꾸는 것을 외경(畏敬)할만 한. 클라디로스군 생각해 보게. 우리들이 말해도 좋을까 미(美) 자체일까 선(善)일까 그와 같은 존재하는 것들의 하나하나가 있다고.
클라디로스 : 물론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 저런 것 자체를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얼굴이나 혹은 어떤 그런 것이 아름다울까 어떨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모두 흘러가는 것과 같이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없고 아름다움 자체는 어느 때라도 그것이 현재 있다고 하는 성질 그런 것은 아닐까.
클라디로스 : 그렇게 반드시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 그런데 그것이 어느 때라도 나와서 가버린다면 그것을 올바로 불러줄 수가 있을까. 우선 저런 것으로 있고 다음에는 이와 같은 것으로 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우리들이 말한 것과 동시에 그것은 곧 다른 것이 되고 나와서 가버리고 벌써 그런 상태를 계속하지 않는 것일까.
클라디로스 :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소크라테스 : 그런데 똑같은 상태에서 다른 것이 어떻게 저런 것으로 얻을 수 있는가.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도 적은 것도 똑같은 상태에 있다면 적은 것 그 시간의 사이는 물론 잠시도 변화하지 않는다. 또한 어떤 때라도 똑같은 상태에 있는 똑같은 것이 있다면 적은 것도 그것이 어째서 변화하기도 하고 운동하기도 할까. 자기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클라디로스 : 결코 하지 않습니다.
('클라디로스' '플라톤전집' 제2권 한자는 약간 고쳐서 인용하였음)
종래 서양의 제학자들은 제2장을 보고, 나가르주나는 운동을 부정했다고 평하고, 그리이스 엘리아파의 제논의 논증에 비교하고 있다. 그렇지만 양자의 논리를 정밀하게 비교한다면 유사성을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자연적 존재의 영역에 있어서 운동을 부정했다는 것은 아니고 법유(法有)의 입장을 공격했던 것이다.
주:1)『중론』 「관거래품(觀去來品)」에서는 法의 ‘不來不去’의를 밝혀서, 八不의 중도사상을 펴고 있다. 「관인연품」에서와 마찬가지로 ‘去’의 개념에 ‘來’를 포함시켜서 전개해 나가고 있는데, ‘去’가 이루어지지 않음과 동시에 ‘來’도 성립하지 않음을 논증하는 것이다. 去ּ來의 개념은 사물이 미래로부터 현재로 오고 또 현재로 부터 과거로 간다는 의미로써, 본질적으로 사물이 생겨나고 없어짐을 뜻하는 ‘生滅’의 개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는 '중론' 전체를 일관하는 ‘근본 원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유부가 주장하는 法의 자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성을 갖고 있는 法의 실체적인 변화의 원리는 ‘인연’이지만, 그 형식적인 변화의 양상은 ‘去來’로 표현된다.1) 그러므로 ‘因緣’과 ‘去來’를 논파함은, 유부의 법에 대한 모든 관념을 파기함과 아울러 八不偈의 ‘중도사상’을 밝히는 근간이 될 것이다.
우선 제일게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三時에 걸쳐, 어디에도 ‘去’의 작용이 있지 않음을 선언하고 있다.
이미 지나간 것[已去]에는 감[去]이 없고, 아직 가지 않은 것[未去]에도 감이 없으며, 또한 과거와 미래를 떠난 현재에도 감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과거는 이미 가버렸고, 미래는 아직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거와 미래를 떠나서 현재가 홀로 존립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며, 따라서 현재에도 감(去)은 성립되지 못한다.
주:2)나가르주나의 유부(有部)에 대한 비판은 '중론'에서 중심을 이룬다. 용수는 유부의 사상적 특징을 '법유(法有)라고 보았다. 따라서 법유 사상의 근저를 이루는 [자성(自性) : svabhaava]의 개념을 철저히 비판하고 있다. 이 자성이란 연기· 공성과는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유부는 일체 현상의 근본인 법이 자성으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용수는 이 자성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성이 연(緣)과 인(因)에서 생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성이 연과 인에서 생긴다면 그것은 만들어진 것이 될 것이다.(15-1) 그런데 어찌하여 자성이 실로 만들어진 것이 될까. 자성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고, 또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인 까닭이다.(15-2) 이처럼 자성이란 인연(因緣)에 의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하지 않는 것이라고 용수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자성의 개념은 연기의 입장과 위배되는 것이며 공의 개념과도 배치되는 것으로, 이러한 자성의 개념을
용수는『중론』 전체에 걸쳐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다. 곧 유부에서는 일체 현상의 작용을 가능케 하는 근본 실체로서 법의 자성을 인정한 것에 대하여, 용수는 모든 사물에 그러한 실체적 성질은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은 모든 사물이 실체적 자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연기하고 있는 것으로 곧 공인 까닭에 연유(緣由)하는 것이다. 따라서 연기와 공의 입장에 서서 자성의 개념을 비판하며, 아울러 사물이 연기, 공성의 존재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 것이『중론』의 근본 의도이었던 것이다.
주:3)엘레아(Elea)학파는 BC 5세기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식민지 엘레아 지방에서 번성했던 학파. 이 학파의 특징은 극단적 일원론을 주장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 자체로 충만하며 존재와 대립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따라서 분화·운동·변화는 모두 환상일 뿐이라고 보았다. 엘레아학파의 철학자들은 각기 독특한 이론을 주장했다. 파르메니데스는 사유의 직접적·논리적인 경로를 탐구했고 존재를 유한하고 무시간적인 것으로 보았다. 제논은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옹호했지만, 그와는 달리 간접증명법인 귀류법과 무한누진법을 이용했다. 멜리소스는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을 수정하여 존재를 무한히 크고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으로 보았다. 방법론에서 엘레아학파는 BC 6세기 밀레토스 학파의 경험적 접근법을 비판했다. 엘레아학파는 감각적 인식을 부정했으며, 실재는 움직이지 않으며 유일한 존재로 충만한 것으로서 극히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합리주의적 접근법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파르메니데스는 순수 존재론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진다. 파르메니데스의 시에 나오는 '진리의 길'에 근거한 엘레아학파의 존재론은 존재를 비존재와 함께 생각한 다른 학설들과 대립된다.
주:4)제논(Zenon)의 견해는 플라톤의 대화편 〈파르메니데스〉의 첫 부분에 나온다. 여기서 제논은 파르메니데스의 비판자들이 전제하고 있는 '폴라'(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존재) 개념의 난점이 모든 실재를 유일하고 보편적인 존재로 환원한 파르메니데스의 난점보다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귀류법으로 증명함으로써 그들을 논파하고 스승의 철학을 변호하려 했다. 다수성의 제논에 대한 4가지 반대 논증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사물이 하나보다 많다면 사물은 수적으로 유한하면서 동시에 무한해야 하는 모순이 생긴다. 사물은 일정하게 셀 수 있는 것이므로 유한하다. 그러나 분리된 2개의 사물 사이에는 제3의 사물이 존재해야 하며 제3의 사물과 제1의 사물 사이에 제4의 사물이 존재해야 한다. 이것은 무한히 반복되므로 사물은 또한 수적으로 무한하다. 한편 제논은 운동의 실재성을 반박하는 4가지 논증도 제시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물이 자신과 동일한 어떤 공간 속에 위치하는 한 그것은 정지해 있다. 날아가는 화살도 날아가는 매 순간에는 자기와 동일한 한 공간 속에 있다. 그러므로 날아가는 화살도 언제나 정지 상태에 있다. 이런 식으로 제논은 다수성·변화·운동 등은 억견의 환상이며 존재는 하나이고 운동하지 않는다고 논증했다. 그러나 제논의 역설적 논증의 많은 부분은 거꾸로 고르기아스와 플라톤에 의해 파르메니데스의 일자(一者)를 논파하는데 이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