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첨] 처음의 글은 아까 질문 중에서 해석된 내용과 같다. 얕은 데서 깊은 데로 이른다 함은, *삼지(三地)는 과(果)에 이를 때에 각각 그 이름을 얻게 된다 함이니, 그러므로 성행은 삼지를 각각 증득하는 것이다. 마땅히 알라, *지전(地前)의 계행․정행도 비록 다시 이름을 세우기 는 한다 해도, 초지(初地)에서 무외(無畏)와 동일하게 맺어짐과 같지는 못한 것이니, 그러므로 ‘깊은 데에 이른다’고 말한 것이다.
初文者, 如向問中所釋. 從淺至深, 三地至果, 各得其名. 是故聖行, 三地各證. 當知地前戒定兩行, 雖伏立名, 未約初地與無畏同結, 故云至深.
12093삼지는 과에 이를 때에 각각 그 이름을 얻음. 원문은 ‘三地至果, 各得其名’. 성행에서 증득된다는 부동지․감인지․무외지는, 지전에서 닦는 계․정․혜의 격력(隔力)의 수행으로 해서 생긴다는 것. 증득한 처지에서는 하나의 초지가 있을 뿐이나, 종전에 닦은 계의 면에서 보면 부동지라는 이름이 생기고, 정․혜의 면에서 보면 감인지․무외지라는 이름이 있기에 이른다는 뜻이다.
12094지전의 계행․정행도 비록 다시 이름을 세우기는 한다 해도. 원문은 ‘地前戒定兩行, 雖復立名’. 초지 이전에서도 계행․정행을 닦으면서 부동지․감인지를 이상으로서 추구할 수는 있다. 그리고 이런 처지에서는 三지가 대립할 것은 물론이나, 혜행을 닦아 무외지에 이를 때에는 삼지의 차별은 사라져서 원융함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석첨] 다음으로 *등지(登地)에서는 원융함을 함께하는 것을 밝힌 것에 대해 살피건대, 곧 앞의 *지전(地前)의 *여러 행(行)을 *융통(融通)한 내용이다. 이것에 또 넷이 있으니, 처음에서는 앞의 삼지(三地)를 융통했다.
次明登地同圓者, 卽是融前地前諸行. 又爲四. 初融前三地.
12095등지. 초지(初地)에 오르는 것.
12096지전. 초지 이전.
12097여러 행. 원문은 ‘諸行’. 오행(五行)을 가리킨다.
12098융통함. 원문은 ‘融’. 7455의 ‘融通’의 주.
[석첨] ‘*지상(地上)에서부터는 다 원융함을 함께한다 한 것에 대해 살피건대, 어찌 삼지(三地)가 *뚜렷하여 길이 차별인 채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다만 초지에 오를 때에 *이변(二邊) 때문에 동요되지 않음을 부동지라 이르고, 위로 불법을 수지하며 아래로 중생을 걸머짐을 감인지라 이르고, 생사․열반에 있어 함께 자재(自在)할 수 있음을 무외지라 이른 것뿐이다.’
地上去竝同者. 豈有三地條然永別. 秖登地時, 不爲二邊所動, 名不動地. 上持佛法, 下荷衆生, 名堪忍地. 於生死涅槃, 俱得自在, 名無畏地.
12099지상. 초지 이상의 위계.
12100뚜렷함. 원문은 ‘條然’. 조리가 서 있는 모양. 구별이 명백한 것.
12101이변. 1016의 주.
[석첨] 초지(初地)에 이를 때를 기준으로 *다 과(果)에서 거둬들여, *두드러진 면을 좇아 이 삼지의 이름을 세운 것이다.
至初地時, 竝從果攝, 從勝立此三地之名.
12102다 과에서 거둬들임. 원문은 ‘竝從果攝’. 격력의 수행을 문제 삼지 않고, 그 도달한 깨달음[果]에 입각해 융통했다는 뜻.
12103두드러진 면을 좇아 이 삼지의 이름을 세움. 원문은 ‘從勝立此三地之名’. 계행․정행․혜행을 닦아 이른 경지는 똑같이 초지지만, 굳이 비교한다면 특성의 차별이 없는 것도 아니므로, 그렇게 두드러진 점에 입각해 삼지의 이름을 세웠다는 것.
[석첨] 다음으로 ‘無畏’ 아래는, 곧 삼지의 이름을 얻게 된 유래다.
次無畏下, 卽此三地得名之由.
[석첨] ‘무외지는 *아덕(我德)을 따라 이름을 세움이며, 감인지는 낙덕(樂德)을 따라 이름을 세움이며, 부동지는 상덕(常德)을 따라 이름을 세움이요, 정덕(淨德)은 세 곳에 통한다.’
無畏地, 從我德立名. 堪忍地, 從樂德立名. 不動地, 從常德立名. 淨德通三處.
12104아덕. 사덕(四德) 중의 그것. 이하의 낙덕․상덕․정덕도 마찬가지다. 6252의 ‘常樂我淨’의 주.
[석첨] 초지에 이를 때에는 사덕(四德)을 갖추게 되므로 삼지(三地)의 이름을 얻는 것이며, *얻되 앞뒤가 있음이 아니므로 삼지는 동시(同時)인 것이다.
至初地時, 具四德故, 得三地名. 得非前後, 故三地同時.
12105얻되 앞뒤가 있음이 아님. 원문은 ‘得非前後’. 사덕이 하나의 중도에 갖추어져 있는 까닭이다.
[석첨] 셋째로 별교․원교의 취지를 밝힌 것에 둘이 있다. 먼저 *법설(法說)을 밝혔다.
三明別圓之意爲二. 先法.
12106법설. 원문은 ‘法’. 190의 ‘法譬’의 주.
[석첨] ‘초지에 오르는 날에 사덕(四德)이 함께 성취되는 터이므로 증감(增減)이 있을 수 없으니, 대개 *화도(化道)는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登地之日, 四德俱成, 則無增減. 蓋化道宜然.
12107화도. 1616의 주.
[석첨] 다음으로 비설(譬說)을 보였다.
次譬.
[석첨] ‘예컨대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취지일 뿐이다.’
例如朝三暮四之意耳.
12108조삼모사. 장자(莊子)에 나오는 이야기. 한 사람이 원숭이를 기르는데, 도토리를 아침에 석 되를 주고 저녁에 네 되를 주겠다고 제의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화를 내더니, 그러면 아침에 네 되를 주고 저녁에 석 되를 주겠다 하자 모두 좋아하더라는 것.
[석첨] 비유 중에서 ‘조삼모사’라 함은 *장주(莊周)가 *저공(狙公)의 *서(抒)를 줌을 밝힌 설화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抒’라는 글자는 *사(似)와 여(與)의 반절(反切)이요, 또한 *심(甚)과 여(與)의 반절로도 읽을 수 있으니, 곧 *짐작(斟酌)의 뜻이다. 그러므로 지금에 쓰이는 글자는 곧 *손수(手) 변을 좇는 것은 아니다. 지금에 쓰이는 것은 글자가 응당 나무목(木) 변을 따라야 할 것이니, *또한 율(栗)이라고도 이른다. *저(狙)는 원숭이니, *설문(說文)에서는 이르되 ‘움켜잡는 동물의 족속이다’ 했다. 부(賦)는 *주는 뜻이요, 또한 *고르게 헤아림을 이른다. 아침에 석 되를 주고 저녁에 네 되를 주겠다는 말에 원숭이들이 다 성내더니, 아침에 네 되를 주고 저녁에 석 되를 주겠다고 고쳐 말하자 원숭이들은 다 기뻐했다는 것인데, *사마표(司馬彪)는 말하되,
‘석 되․네 되가 수효로 따져서는 다를 것이 없건만, 쓰는 때가 같지 않은 것이다.’라 했다. 이제 *지전(地前)․*지상(地上)에서 원교를 밝히시고 별교를 밝히심도 또한 이 같으니, 근기에 응해서 설하심은 달라도 도리에는 진실로 차이가 없는 것이다.
譬中云朝三暮四者. 莊周明狙公賦抒. 抒字, 似與反, 易可甚與反, 卽斟酌也. 非今所用, 字卽從手. 今所用者, 者應從木, 易云栗也. 狙者, 援也. 說文云, 攫屬. 賦者, 布與也. 易平量也. 朝三暮四, 衆狙皆怒. 朝四暮三, 衆狙皆悅. 司馬彪曰, 三升四升, 數則不別, 用時不同. 今地前地上, 明圓明別, 亦復如是. 赴機說異, 理實無差.
12109장주. 장자의 이름이 주(周)다.
12110저공. 원숭이를 기른 사람의 이름. 송나라(宋) 사람이었다 한다.
12111서를 줌. 원문은 ‘賦抒’ “장자”의 텍스트 중에는 서(杼)를 서(抒)로 쓰고 있는 예가 있는 것 같다. ‘도토리를 준다’는 뜻인데, ‘抒’로 하면 혼란이 생긴다.
12112사와 여의 반절. 원문은 ‘似與反’. 첫 글자의 초성과 다음의 글자의 중성․종성을 합친 것이 반절이므로, ‘사’의 ㅅ과 ‘여’의 *ㅕ를 합쳐 ‘셔’가 되고,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한자의 ‘ㅕ’는 모두 ‘ㅓ’로 읽으니까 ‘서’의 음이 된다.
12113심과 여의 반절. 원문은 ‘甚與反’. ‘심’의 ㅅ과 ‘여’의 ㅕ를 합쳐도 ‘셔→서’가 된다. 그래서 似와 與, 甚과 與는 결과가 같은데 왜 따로 들었느냐는 의문이 생기나, 우리의 한자 발음은 원음 그대로가 아닌데다가 고대의 중국 음은 현재의 그것과 다른 터이니까 해명이 곤란하다.
12114짐작. 잔질하는 것.
12115손수 변을 좇음. 원문은 ‘從手’. 곧 ‘抒’라는 글자를 이른다. 이 자로 해서는 뜻이 안 통한다는 것.
12116나무 변을 따름. 원문은 ‘從木’. 마땅히 ‘杼’를 써야 한다는 것. 그러면 도토리의 뜻이 되므로 의미가 통한다.
12117또한 율이라고도 이름. 원문은 ‘亦云栗’. 도토리가 아니라 밤을 준 것으로 일컫기도 한다는 것.
12118저는 원숭이임. 원문은 ‘狙者, 援也’. 원숭이를 기른 사람의 이름인 ‘저공’에 대한 해석이다. 원래의 이름이 저공인 것이 아니라, 원숭이를 기른다 해서 붙여진 별명임을 알게 된다.
12119설문. 7248의 주.
12120주는 뜻. 원문은 ‘布與’. 베풀어 주는 것.
12121고르게 헤아림. 원문은 ‘平量’.
12122사마표. ‘장자’에 주를 베푼 사람.
12123지전. 초지 이전.
12124지상. 초지 이상.
[석첨] 넷째로 ‘從登地去’ 아래서는 앞의 오행(五行)의 자타(自他)의 인과(因果)가 각기 다르던 것을 융통시켰다. 곧 이제 초지 앞의 차제행(次第行)이 이에 한가지로 *지지(地地) 중의 법을 이루며, 모두가 지지의 오행의 상(相)을 이룬다 함이다.
이것에 또 셋이 있으니, 처음에서는 *자행(自行)을 융통하고, 다음에서는 *화타(化他)를 융통하고, 셋째 부분에서는 경계하여 권했다.
四從登地去, 融前五行, 自他因果各別. 今至初地, 前次第行, 地此同成地地中法, 盡成地地五行之相. 又三. 初融自行. 次融化他. 三誡勸.
12125지지. 십지(十地) 중의 하나하나.
12126자행. 243의 주.
12127화타. 1167의 주.
[석첨] ‘초지(初地)에 오른 다음부터는 *지지(地地)에 자행(自行)이 있으며, *지지에 자증(自證)이 있으니, 자행이란 오직 천행(天行)을 닦음이요, 자증이란 오직 천행을 증득(證得)하는 일일 뿐이다. 그러기에 따로 천행의 증득을 설하지는 않는 것이다.’
從登地去, 地地有自行, 地地有自證. 自行秖是修天行, 自證秖是證天行, 故不別說天行證也.
12128지지에 자행이 있음. 원문은 ‘地地有自行’. 초지에 오른 뒤에도, 자행은 보다 높은 경지를 향해 나아가도록 되어 있다는 것. ‘자행’은 243의 주.
12129지지에 자증이 있음. 원문은 ‘地地有自證’. 하나하나의 경지마다 그 나름의 자증이 있다는 것. ‘자증’은 560의 주.
[석첨] *자행은 성행․천행이니, 초지에 이를 때면 한가지로 초지의 천행을 이루는 까닭이다.
自行是聖行天行. 至初地時, 同成初地天行故也.
12130자행은 성행․천행임. 원문은 ‘自行是聖行天行’. 초지에 이르는 인(因)을 닦는 것이 성행이요, 그 인에 의해 중도의 진리를 부분적으로 증득한 것이 천행이니, 성행․천행은 인과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초지에 이를 때면, 성행 또한 천행으로 바뀌고 말아, 성행․천행의 구별은 없어지는 것이다.
[석첨] ‘지전(地前)의 화타(化他)는 범행(梵行)이라 이르니, 자(慈)․비(悲)․희(喜)는 화타의 *사행(事行)이며 일자지(一子地)는 그 깨달음이요, 사심(捨心)은 화타의 *이행(理行)이며 공평등(空平等)은 그 개달음이다. 그러나 이 이지(二地)도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만은 아니니, 등지(登地)의 자비인 까닭에 일자지라 말하며, 자비가 본체(本体)와 같으므로 공평등이라 말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지지(地地)에 비(悲)가 있어 악과 같이함을 병행(病行)이라 이르며, 지지에 자(慈)가 있어 선과 같이함을 영아행(嬰兒行)이라 이르니, *증도(證道)는 동일하므로 구별해 설하지는 않는 것이다.’
若地前化他名梵行. 慈悲喜是化他之事行, 一子地是其證. 捨心是化他之理行, 空平等是其證. 此二地亦不條然. 登地慈悲, 故言一子. 慈悲與體同, 故言空平等耳. 地地有悲同惡, 名病行. 地地有慈同善, 名嬰兒行. 證道是同, 故不別說.
12131사행. 10071의 주.
12132이행. 자기가 본래 진여․실상이라는 자각에 서서, 수행할 것도 깨달을 것도 없는 수행.
12133증도. 깨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