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천태학에서의 반야경
여기서는 용수의 철학적 기반인 반야경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까에 대해 논구해보기로 한다. 천태학의 교판에서는 육백부 반야경을 통교적 성격이 가장 강한 가르침으로 보고 있다. 통교(通敎)란 앞의 삼장교(三藏敎)의 소승 연각 보살(장교보살)에도 통(同)하고, 뒤의 별교 원교의 보살에도 모두 통하는 교(入)로서 대승 초보의 교리라 본다. 대소승 모두에 통하지만 그 목적은 대승 보살을 교화하기위한 것(正化菩薩 傍化二乘)이다. 그러므로 이 통교는 대승교를 주로 하여 이승도 공통으로 배우는 교법인데, 방등 반야 대승경에 성문 연각이 같이 참여하여 법을 배우지만 아함경에는 보살 등이 동참하지 않는 것이다. 보살 중에서 근기가 낮은 자는 이 교를 듣고 앞의 장교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고 근기가 높은 자는 별․원교에 통하여 들어간다.
통교를 설한 경전으로는 비교적 반야경에 많이 설해져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방등경의 삼승공통의 교가 설하여 있는 것을 다 총합하지만, 실제로는 반야공관의 사상으로서 통교를 대표하고 구마라집역 '대품반야경' 30권('대지도론' 본문)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종파로는 삼론종의 교의를 가리킨다.
사상적으로 장교에서는 제법이 객관적 실재가 있어서 인연에 의하여 모이고 흩어지며 제법은 생멸하여 무상하다고 하므로 범부가 경험할 수 있는 도리였다. 그러나 통교에서는 인연으로 생멸하는 법이 그대로 공이며 생멸이 없는 실상을 깨닫는 것이다. 따라서 닦아 증득하는 수행법으로 볼 때 장교에서 석공관(析空觀)을 쓰는 반면 통교에서는 체공관(體空觀)을 사용한다.
체공관이란 연생법 자체가 본래 공인 이치를 깨달아 들어가는 것으로, 이 관을 사용하면 견혹 사혹의 두 가지 번뇌를 끊어 삼계를 벗어나고 다시 진사 무명의 혹을 일부분 억제하여 업감연기의 모든 법이 그 근본은 곧 공인 이치를 알게 되므로 미혹을 끊고 진여 중도의 이치를 증득한다.
용수는 연기하는 것들은 상대하는 다른 존재들이 있고 이들은 인연에 의해 성립한다. 곧 상대하는 다른 존재들을 인연으로 작용해서만 그 존재가 성립한다. 따라서 상대하는 존재를 갖지 않고 독립하여 자존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존재는 상대적으로 존재하는데 이를 연기하는 존재라 하고, 상대하여 존재가 성립하므로 독립자존의 자성이 없으며 고유의 존재성을 갖지 못한다. '중론' 15장에는 다음과 같이 인연과 무자성을 밝히고 있다.
모든 인연에 의해서 자성(svabhāva)이 생기는 것은 불합리하다. 만일 자성이 인연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라면 소작(kŗitaka)이 되고 만다.
어떻게 자성이 소작된 것이겠는가. 자성은 지어진 것이 아니고 다른 것에 연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 것에 연하지 않고 지어진 것, 곧 다른 것에 연하지 않고 지어진 것을 자성이라 하고, 세상의 어떤 존재도 이처럼 자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기하는 것들은 자성이 없으므로 어떤 존재도 독립자존의 실체가 없으므로, 이런 존재에 대해서 우리는 마음에 집착이나 소득(所得)이 일어날 것 없다. 연기하는 것들이 자성이 없으므로 무집착 무소득이니 공하다고 한다.
한편 석공관에서는 목전의 현상은 타파하여 그 요소로 환원하여 참된 존재가 없다고 하지만, 체공관에서는 사물을 그대로 두고 그것이 존재로서의 의미를 인식론적으로 판단하여 이것이 영원한 존재이고 진실된 존재인가를 생각하여 공(空亦空)하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공관은 공도 아니고 유도 아닌 중도로 부르고 진여실상을 보게 된다. 이 진실된 상(相)은 제법의 본체이며 우주의 진리로서 그것은 유라고도 무라고도 할 수 없는 중도실상의 이치를 깨달아 나아감으로써 존재의 근거인 사물의 본성(本體)을 꿰뚫어 이미 별교나 원교에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불타관으로는 장교에서 불신(佛身)은 업보에 의하여 얻으며 불타가 열반에 들며 심신이 멸진해버려서 다시 아무런 작용이 없다(灰身滅智)고 하는데 통교에서 불신(佛身)은 업보에 의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위하여 이 세상에 나타내 보인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80세에 입멸한 것은 제도 받을 중생의 인연이 다하였으므로 열반상을 보인 것이고 중생의 인연에 따라 수명이 자재하므로 설사 열반에 들었더라도 제도할 기연이 있으면 언제든지 나타낼 수 있는 묘한 작용이 있다고 한다.
(1) 통교로서의 반야경
앞의 장교에도 통하고 뒤의 별교 원교에도 통한다. 그러므로 성문 연각 보살의 3승에 공통하게 통하는 가르침이다. 장교는 현상을 인연화합으로 보지만, 통교에서는 “환과 같고 화와 같다”고 본다. 장교는 사실을 사실로 보고 인연의 실을 인정하여 서서히 진리의 세계에 밟아 올라가는데 대해 통교는 원칙적으로 진리의 경지에서 보아 현상계 그대로가 단도직입으로 진리의 세계에 든다. 인연가합의 세계는 그대로 공인 것이다(因緣卽空). 이러한 진리는 아직은 공이라는 것으로 표시되지만 즉공이라고 하는 진리가 곧 실체인 중도진여를 소극적으로 암시하고 있으므로 대승의 초문이라고 한다.
통교는 교화의 대상을 보살로 삼는다. 그런데 둔근보살은 인연법 그대로 공한 것이라는 가르침을 듣고도 공에만 집착하여 중도진여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므로 이승과 똑같이 공한 진리만을 증득할 따름이니 장교의 공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근보살은 즉공의 가르침을 듣고도 중도진여를 사무쳐 보아 별교 원교에 나아간다.
통교는 말없는 도리[無言說道]로서 말이나 생각 이론이나 문장으로 나타낼 수 없는 도리를 말한다. 중도진여의 진리를 바로 들어내는 교이며 미․오․인․과(迷悟因果)의 사상(事相)을 언설로써 밝히는 교지가 아니다. 왜냐하면 꿈같고 화(化)같다하여 꿈속에 암중(暗中)모색하는 것이 아니요 원래는 실체가 없는 것이 공이기 때문이다.
'유마경'에서 말없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대품경'23에서 삼승인이 다 같이 제일의제인 언설이 없는 도리로써 번뇌를 끊는다고 했다. 「혜품」에서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세간에 언설이 있기 때문에 차별이 있지만 제일의에는 그런 것이 없다. 제일의에는 분별의 언설이 없으니 왜냐하면 제일의에는 언설의 도가 없기 때문이며 이론과 생각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현상이고 생멸 변역하는 상대법이기 때문이다.”
장교에서는 만유를 인연화합의 법이라고 분석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공을 증득하는 것이지만 통교는 만유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 만유 그대로 두고 공인 도리를 증득하는 것이므로 체색입공(體色入空)이라고 한다. 물질을 체달하여 공에 들어간다는 것은 물질이 곧 공[色卽是空]과 같다는 것. 색은 물리적으로 변괴(變壞)하고 질애(質礙)의 성질이 있어서 결국 공으로 돌아가게 된다. 또한 이것은 꿈과 같고 환과 같은 망상전도의 세계로서 그 본체는 공한 것이므로 “물질을 체달하여 공에 들어간다.” 현상계 일체 사법을 사법 그대로 두고 본체가 없는 도리를 통한다, 또 공은 사법을 여의지 않고 사법 그대로 공한 도리를 깨닫게 된다.
(2) 통교의 수행체계('대품반야경'19의 11, '대지도론'85의 6 참조)
통교의 수행체계는 초 건혜지 성지 팔인지 박지 이욕지 이변지 벽지불지 보살지 불지에 이르는 수행을 거치게 된다.
①건혜지(乾慧地)는 아직 진리에 젖어있지 않은 지위라는 뜻. 사념처관(四念處觀)을 수행하여 지혜를 얻었으나, 아직 궁극적인 법성(法性)의 진리를 터득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곧 오정심(五停心)→별상념처(別相念處)→총상념처(總相念處)를 닦는다.
②성지(性地)는 법성의 진리를 비슷하게 깨닫는 지위이다. 난위(煖位)→정위(頂位)→세제일위(世第一位)를 닦는다.
③팔인지(八人地(忍地)는 고법인부터 멸유인까지로서 견혹을 끊고 진제의 진리를 보는 위.
④견지(見地)는 견도 16심중 도류지(道類智)의 위로서 모든 견혹을 다 끊고 진제의 진리를 보게 된다. 8인지와 견지는 정중의 연속으로 무간삼매(無間三昧)라고 한다.
⑤박지(薄地)는 이제까지 무겁고 두텁던 욕계의 전6품의 사혹을 끊어서 얇아 졌다는 것.
⑥이욕지(離欲地)란 욕계의 9품사혹을 다 끊어서 다시는 욕계에 떨어지지 않는다.
⑦이변지(已辨地)는 삼계의 견․사를 다 끊어서 이미 삼계를 뛰어나가는 목적을 완료 했다는 것. 여기까지는 3승이 공통으로 하고, 성문은 여기서 증과를 얻는다.
⑧벽지불지(辟支佛地)란 성문이 나무가 다 타서 숯이 되는 것과 같은 습기의 불침이라면, 연각은 숯에 다시 불이 붙어서 재가 되듯 습기가 다시 침습한다.
⑨보살지(菩薩地)는 불과를 얻기 위한 인행을 쌓는 위. 장교의 보살은 번뇌를 다 끊지 않고 조복[伏惑行因]하여 삼계에 나서 중생을 제도하고 佛에서 습기를 완전히 끊는다. 통교에서는 약한 습기를 붙들고 아울러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자비서원의 힘을 더하여[誓扶習生] 삼계에 난다. 그러므로 보살은 중생을 교화하는 이타의 ‘道’와 진리를 내관하는 공관의 자리행 ‘관’을 아울러 행한다[道觀雙流]. 중생을 교화한다는 것도 그 당체가 공하여 실로 인정하지 않고 꿈속의 일로 볼 뿐이다. 꿈꾸는 중생은 꿈속의 고통이 거짓인지 모르므로 보살은 꿈꾸는 중생을 깨워주지 않으면 안된다.
⑩불지는 통교의 보살이 행을 만족하게 되면 기연이 익어서 불과를 증득하게 된다. 장교에서는 선인선과의 인연의 실을 인정하는 생멸교이므로 자기의 행업이 가득하여 불과를 얻는다고 하나, 통교에서는 인연즉공(因緣卽空)이므로 불의 존재를 스스로의 행의 과로 보지 않는다. 단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기연 즉 즉공의 도리를 모르는 자들에게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佛이 출현하는 것이다.
장교의 보살은 견․사의 정사를 완전히 끊지 않고 성불할 때에야 34찰나에 34심으로 온갖 번뇌를 끊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통교의 경우는 나머지 습기를 대번에 끊는다.
불신은 장교에서는 장육상(丈六相)의 열응신을 나타내지만, 통교의 이근보살은 즉공의 중도이므로 즉공을 표현하는 불신도 중도진여를 구현하는 무량의 상호를 갖춘 승응신을 갖춘다. 또 통교의 佛은 교화 대상인 중생들의 기연에 맞추어 나타내기 때문에 중생의 기연이 다하면 제도할 대상이 다한 것이므로 열반에 든다. 통교의 불은 서원으로 습기를 붙들어 도와서 생을 받은 것이므로 실제로 업을 지어서 생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화 받을 인연이 없어지면 佛의 그림자도 사라진다. 삼장교의 불은 본래 사람으로 태어난 업을 지어서 내생(來生)한 것으로 업의 힘이 다하면 입멸한다.
별교 원교와 비교하면 통교의 불은 중도의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므로 진실한 불일 수 없다고 한다.
'열반경' 「덕왕품」21의 19, 「사자후품」25의 20(또는 '우파새계경'16)을 근거로 한다. 여기에는 세 짐승이 내를 건널 때, 코끼리는 항상 바다 밑바닥을 밟고 건너므로 보살이 공한 진리를 사무침이 번뇌의 정사의 습기를 한 가지 끊는 것에 비유. 말은 얕은 물은 바닥을 밟고 건너지만 깊은 연못은 수영을 해서 건너므로 연각이 번뇌의 정사를 끊음에 습기 일분의 침입을 받음에 비유한 것이다. 토끼는 깊은 물이나 낮은 물에 수영을 해서 건너므로 성문이 정사만을 끊고 습기는 그대로 두는 것에 비유한다.
통교의 둔근보살은 7지에서는 회신멸지의 경계를 사무친 것에 불과하며, 이근보살은 9지까지는 별교 원교에 들어오지만 실제에 있어 불지에 오르는 사람은 없다. 즉 참으로 부처님의 과위를 증득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果頭無人]이고 통교의 불은 가식일 뿐이며, 부처님의 뜻은 처음부터 성불의 도가 아니라 미숙한 근기를 다스리고 이끌어 실교에 들어오게 하는 과정에 불과 할 뿐이다. 성불의 도가 있다면 오직 일불승의 원교외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교뿐 아니라 3교가 다 같이 교리상 불이 존재할 뿐 실제에 있어서는 그러한 성불은 없는 것이다.
둔근보살은 공한 쪽 만을 보고 불공을 보지 못하는데, 공과 불공을 포함한다는 것[卽空]은 주관의 말상을 비어 없애면서 현상 그대로의 실재를 긍정하는 것이니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공에는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불공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는 용수의 철학적 기반인 반야경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까에 대해 논구해보기로 한다. 천태학의 교판에서는 육백부 반야경을 통교적 성격이 가장 강한 가르침으로 보고 있다. 통교(通敎)란 앞의 삼장교(三藏敎)의 소승 연각 보살(장교보살)에도 통(同)하고, 뒤의 별교 원교의 보살에도 모두 통하는 교(入)로서 대승 초보의 교리라 본다. 대소승 모두에 통하지만 그 목적은 대승 보살을 교화하기위한 것(正化菩薩 傍化二乘)이다. 그러므로 이 통교는 대승교를 주로 하여 이승도 공통으로 배우는 교법인데, 방등 반야 대승경에 성문 연각이 같이 참여하여 법을 배우지만 아함경에는 보살 등이 동참하지 않는 것이다. 보살 중에서 근기가 낮은 자는 이 교를 듣고 앞의 장교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고 근기가 높은 자는 별․원교에 통하여 들어간다.
통교를 설한 경전으로는 비교적 반야경에 많이 설해져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방등경의 삼승공통의 교가 설하여 있는 것을 다 총합하지만, 실제로는 반야공관의 사상으로서 통교를 대표하고 구마라집역 '대품반야경' 30권('대지도론' 본문)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종파로는 삼론종의 교의를 가리킨다.
사상적으로 장교에서는 제법이 객관적 실재가 있어서 인연에 의하여 모이고 흩어지며 제법은 생멸하여 무상하다고 하므로 범부가 경험할 수 있는 도리였다. 그러나 통교에서는 인연으로 생멸하는 법이 그대로 공이며 생멸이 없는 실상을 깨닫는 것이다. 따라서 닦아 증득하는 수행법으로 볼 때 장교에서 석공관(析空觀)을 쓰는 반면 통교에서는 체공관(體空觀)을 사용한다.
체공관이란 연생법 자체가 본래 공인 이치를 깨달아 들어가는 것으로, 이 관을 사용하면 견혹 사혹의 두 가지 번뇌를 끊어 삼계를 벗어나고 다시 진사 무명의 혹을 일부분 억제하여 업감연기의 모든 법이 그 근본은 곧 공인 이치를 알게 되므로 미혹을 끊고 진여 중도의 이치를 증득한다.
용수는 연기하는 것들은 상대하는 다른 존재들이 있고 이들은 인연에 의해 성립한다. 곧 상대하는 다른 존재들을 인연으로 작용해서만 그 존재가 성립한다. 따라서 상대하는 존재를 갖지 않고 독립하여 자존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존재는 상대적으로 존재하는데 이를 연기하는 존재라 하고, 상대하여 존재가 성립하므로 독립자존의 자성이 없으며 고유의 존재성을 갖지 못한다. '중론' 15장에는 다음과 같이 인연과 무자성을 밝히고 있다.
모든 인연에 의해서 자성(svabhāva)이 생기는 것은 불합리하다. 만일 자성이 인연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라면 소작(kŗitaka)이 되고 만다.
어떻게 자성이 소작된 것이겠는가. 자성은 지어진 것이 아니고 다른 것에 연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 것에 연하지 않고 지어진 것, 곧 다른 것에 연하지 않고 지어진 것을 자성이라 하고, 세상의 어떤 존재도 이처럼 자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기하는 것들은 자성이 없으므로 어떤 존재도 독립자존의 실체가 없으므로, 이런 존재에 대해서 우리는 마음에 집착이나 소득(所得)이 일어날 것 없다. 연기하는 것들이 자성이 없으므로 무집착 무소득이니 공하다고 한다.
한편 석공관에서는 목전의 현상은 타파하여 그 요소로 환원하여 참된 존재가 없다고 하지만, 체공관에서는 사물을 그대로 두고 그것이 존재로서의 의미를 인식론적으로 판단하여 이것이 영원한 존재이고 진실된 존재인가를 생각하여 공(空亦空)하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공관은 공도 아니고 유도 아닌 중도로 부르고 진여실상을 보게 된다. 이 진실된 상(相)은 제법의 본체이며 우주의 진리로서 그것은 유라고도 무라고도 할 수 없는 중도실상의 이치를 깨달아 나아감으로써 존재의 근거인 사물의 본성(本體)을 꿰뚫어 이미 별교나 원교에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불타관으로는 장교에서 불신(佛身)은 업보에 의하여 얻으며 불타가 열반에 들며 심신이 멸진해버려서 다시 아무런 작용이 없다(灰身滅智)고 하는데 통교에서 불신(佛身)은 업보에 의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위하여 이 세상에 나타내 보인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80세에 입멸한 것은 제도 받을 중생의 인연이 다하였으므로 열반상을 보인 것이고 중생의 인연에 따라 수명이 자재하므로 설사 열반에 들었더라도 제도할 기연이 있으면 언제든지 나타낼 수 있는 묘한 작용이 있다고 한다.
(1) 통교로서의 반야경
앞의 장교에도 통하고 뒤의 별교 원교에도 통한다. 그러므로 성문 연각 보살의 3승에 공통하게 통하는 가르침이다. 장교는 현상을 인연화합으로 보지만, 통교에서는 “환과 같고 화와 같다”고 본다. 장교는 사실을 사실로 보고 인연의 실을 인정하여 서서히 진리의 세계에 밟아 올라가는데 대해 통교는 원칙적으로 진리의 경지에서 보아 현상계 그대로가 단도직입으로 진리의 세계에 든다. 인연가합의 세계는 그대로 공인 것이다(因緣卽空). 이러한 진리는 아직은 공이라는 것으로 표시되지만 즉공이라고 하는 진리가 곧 실체인 중도진여를 소극적으로 암시하고 있으므로 대승의 초문이라고 한다.
통교는 교화의 대상을 보살로 삼는다. 그런데 둔근보살은 인연법 그대로 공한 것이라는 가르침을 듣고도 공에만 집착하여 중도진여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므로 이승과 똑같이 공한 진리만을 증득할 따름이니 장교의 공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근보살은 즉공의 가르침을 듣고도 중도진여를 사무쳐 보아 별교 원교에 나아간다.
통교는 말없는 도리[無言說道]로서 말이나 생각 이론이나 문장으로 나타낼 수 없는 도리를 말한다. 중도진여의 진리를 바로 들어내는 교이며 미․오․인․과(迷悟因果)의 사상(事相)을 언설로써 밝히는 교지가 아니다. 왜냐하면 꿈같고 화(化)같다하여 꿈속에 암중(暗中)모색하는 것이 아니요 원래는 실체가 없는 것이 공이기 때문이다.
'유마경'에서 말없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대품경'23에서 삼승인이 다 같이 제일의제인 언설이 없는 도리로써 번뇌를 끊는다고 했다. 「혜품」에서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세간에 언설이 있기 때문에 차별이 있지만 제일의에는 그런 것이 없다. 제일의에는 분별의 언설이 없으니 왜냐하면 제일의에는 언설의 도가 없기 때문이며 이론과 생각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현상이고 생멸 변역하는 상대법이기 때문이다.”
장교에서는 만유를 인연화합의 법이라고 분석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공을 증득하는 것이지만 통교는 만유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 만유 그대로 두고 공인 도리를 증득하는 것이므로 체색입공(體色入空)이라고 한다. 물질을 체달하여 공에 들어간다는 것은 물질이 곧 공[色卽是空]과 같다는 것. 색은 물리적으로 변괴(變壞)하고 질애(質礙)의 성질이 있어서 결국 공으로 돌아가게 된다. 또한 이것은 꿈과 같고 환과 같은 망상전도의 세계로서 그 본체는 공한 것이므로 “물질을 체달하여 공에 들어간다.” 현상계 일체 사법을 사법 그대로 두고 본체가 없는 도리를 통한다, 또 공은 사법을 여의지 않고 사법 그대로 공한 도리를 깨닫게 된다.
(2) 통교의 수행체계('대품반야경'19의 11, '대지도론'85의 6 참조)
통교의 수행체계는 초 건혜지 성지 팔인지 박지 이욕지 이변지 벽지불지 보살지 불지에 이르는 수행을 거치게 된다.
①건혜지(乾慧地)는 아직 진리에 젖어있지 않은 지위라는 뜻. 사념처관(四念處觀)을 수행하여 지혜를 얻었으나, 아직 궁극적인 법성(法性)의 진리를 터득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곧 오정심(五停心)→별상념처(別相念處)→총상념처(總相念處)를 닦는다.
②성지(性地)는 법성의 진리를 비슷하게 깨닫는 지위이다. 난위(煖位)→정위(頂位)→세제일위(世第一位)를 닦는다.
③팔인지(八人地(忍地)는 고법인부터 멸유인까지로서 견혹을 끊고 진제의 진리를 보는 위.
④견지(見地)는 견도 16심중 도류지(道類智)의 위로서 모든 견혹을 다 끊고 진제의 진리를 보게 된다. 8인지와 견지는 정중의 연속으로 무간삼매(無間三昧)라고 한다.
⑤박지(薄地)는 이제까지 무겁고 두텁던 욕계의 전6품의 사혹을 끊어서 얇아 졌다는 것.
⑥이욕지(離欲地)란 욕계의 9품사혹을 다 끊어서 다시는 욕계에 떨어지지 않는다.
⑦이변지(已辨地)는 삼계의 견․사를 다 끊어서 이미 삼계를 뛰어나가는 목적을 완료 했다는 것. 여기까지는 3승이 공통으로 하고, 성문은 여기서 증과를 얻는다.
⑧벽지불지(辟支佛地)란 성문이 나무가 다 타서 숯이 되는 것과 같은 습기의 불침이라면, 연각은 숯에 다시 불이 붙어서 재가 되듯 습기가 다시 침습한다.
⑨보살지(菩薩地)는 불과를 얻기 위한 인행을 쌓는 위. 장교의 보살은 번뇌를 다 끊지 않고 조복[伏惑行因]하여 삼계에 나서 중생을 제도하고 佛에서 습기를 완전히 끊는다. 통교에서는 약한 습기를 붙들고 아울러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자비서원의 힘을 더하여[誓扶習生] 삼계에 난다. 그러므로 보살은 중생을 교화하는 이타의 ‘道’와 진리를 내관하는 공관의 자리행 ‘관’을 아울러 행한다[道觀雙流]. 중생을 교화한다는 것도 그 당체가 공하여 실로 인정하지 않고 꿈속의 일로 볼 뿐이다. 꿈꾸는 중생은 꿈속의 고통이 거짓인지 모르므로 보살은 꿈꾸는 중생을 깨워주지 않으면 안된다.
⑩불지는 통교의 보살이 행을 만족하게 되면 기연이 익어서 불과를 증득하게 된다. 장교에서는 선인선과의 인연의 실을 인정하는 생멸교이므로 자기의 행업이 가득하여 불과를 얻는다고 하나, 통교에서는 인연즉공(因緣卽空)이므로 불의 존재를 스스로의 행의 과로 보지 않는다. 단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기연 즉 즉공의 도리를 모르는 자들에게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佛이 출현하는 것이다.
장교의 보살은 견․사의 정사를 완전히 끊지 않고 성불할 때에야 34찰나에 34심으로 온갖 번뇌를 끊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통교의 경우는 나머지 습기를 대번에 끊는다.
불신은 장교에서는 장육상(丈六相)의 열응신을 나타내지만, 통교의 이근보살은 즉공의 중도이므로 즉공을 표현하는 불신도 중도진여를 구현하는 무량의 상호를 갖춘 승응신을 갖춘다. 또 통교의 佛은 교화 대상인 중생들의 기연에 맞추어 나타내기 때문에 중생의 기연이 다하면 제도할 대상이 다한 것이므로 열반에 든다. 통교의 불은 서원으로 습기를 붙들어 도와서 생을 받은 것이므로 실제로 업을 지어서 생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화 받을 인연이 없어지면 佛의 그림자도 사라진다. 삼장교의 불은 본래 사람으로 태어난 업을 지어서 내생(來生)한 것으로 업의 힘이 다하면 입멸한다.
별교 원교와 비교하면 통교의 불은 중도의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므로 진실한 불일 수 없다고 한다.
'열반경' 「덕왕품」21의 19, 「사자후품」25의 20(또는 '우파새계경'16)을 근거로 한다. 여기에는 세 짐승이 내를 건널 때, 코끼리는 항상 바다 밑바닥을 밟고 건너므로 보살이 공한 진리를 사무침이 번뇌의 정사의 습기를 한 가지 끊는 것에 비유. 말은 얕은 물은 바닥을 밟고 건너지만 깊은 연못은 수영을 해서 건너므로 연각이 번뇌의 정사를 끊음에 습기 일분의 침입을 받음에 비유한 것이다. 토끼는 깊은 물이나 낮은 물에 수영을 해서 건너므로 성문이 정사만을 끊고 습기는 그대로 두는 것에 비유한다.
통교의 둔근보살은 7지에서는 회신멸지의 경계를 사무친 것에 불과하며, 이근보살은 9지까지는 별교 원교에 들어오지만 실제에 있어 불지에 오르는 사람은 없다. 즉 참으로 부처님의 과위를 증득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果頭無人]이고 통교의 불은 가식일 뿐이며, 부처님의 뜻은 처음부터 성불의 도가 아니라 미숙한 근기를 다스리고 이끌어 실교에 들어오게 하는 과정에 불과 할 뿐이다. 성불의 도가 있다면 오직 일불승의 원교외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교뿐 아니라 3교가 다 같이 교리상 불이 존재할 뿐 실제에 있어서는 그러한 성불은 없는 것이다.
둔근보살은 공한 쪽 만을 보고 불공을 보지 못하는데, 공과 불공을 포함한다는 것[卽空]은 주관의 말상을 비어 없애면서 현상 그대로의 실재를 긍정하는 것이니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공에는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불공이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