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부중도(八不中道)설
나가르주나는 제2의 석가로 일컬어지고, 북방불교에서는 8종(宗)의 조사, 용수보살이라 추앙된다. 그는 대승불교의 선구자로서 대지도론 십주비바사론 중론 과 같은 불후의 명저를 저술하여 대승불교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의 주장은 부처님의 진실한 뜻에 비추어 삿된 것을 부수어 올바른 것을 드러내려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을 목표로 하였다. 이를 위해서 용수는 중도(中道)의 이치로써 당시의 잘못되고 왜곡된 불교학자와 외도들의 학설을 물리고자 하였다. 용수의 중도(中道)는 바르게 깨친 법의 실상으로서 치우침이 없는 부처님의 경지를 뜻한다. 중도(中道)의 완성은 곧 불교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중도(中道)의 이치를 가장 훌륭하게 설파한 분이 용수보살이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중도(中道)의 이치는 모든 법이 본래부터 자성이 없이 갖가지 인연을 통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연기법(緣起法)에 근거하여 설해진 내용이다. 인연에 의해서 나타난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는 공한 것으로 양변을 여의었다. 그러므로 중도는 곧 연기의 법이며 공한 법이며 일체의 차별과 대립을 떠난 적멸의 법이다. 용수보살의 대표적인 논서라고 할 수 있는 중론 에서는 여덟 가지의 그릇된 견해를 부정함으로써 부처님의 적멸한 뜻이 어디 있는가를 밝히는 팔부종도론을 펴고 있다. 생(生)‧멸(滅)‧거(去)‧래(來)‧일(一)‧이(異)‧단(斷)‧상(常) 등의 8가지 미혹한 고집을 부정하여 나타나는 중도의 이치, 곧 일체법의 실상을 표현한다. 8구 4가지 상대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거(不來不去)의 팔부중도(八不中道)가 그것이다. 이것은 진제와 속제에 따라 각각 8부중도를 밝힌 것이다.
첫째 불생(不生)과 불멸(不滅)이란 생멸의 양극단을 부정한 것이다. 생은 인연이 화합하여 나타난 것이며, 멸하는 것도 인연이 다되어 사라지는 것뿐이다. 이와 같이 생과 멸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며 인연의 유무에 따라 생과 멸이 있게 되는 것. 범부들은 이 연기의 원리를 모르고 실제로 생과 멸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집착하므로 이를 고쳐주기 위하여 부정하는 것이다.
바닷물과 물방울의 예를 들어보면, 한 방울의 거품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전체적인 바다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생겨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다. 또 물방울은 항상 흰 것도 아니고 그 물방울의 물이 아주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또 물방울과 바다가 같은 것인가 하면 바닷물이 인연을 만나 물방울이라는 다른 현상을 일으킨 것일 뿐이므로 꼭 같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반대로 물방울과 물이 아주 다른 것이냐 하면 절대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물방울은 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혜로운 자의 입장에서 보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질계든 정신계든 망념된 중생의 차원에서 볼 때 일어남이 있고 사라짐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상은 거짓모습이라 생멸이 끊어졌다고 말한다.
둘째, 불일(不一)과 불이(不二)는 모든 법은 진리의 본체에서 보면 동일한 원리이지만, 현상계의 사물이 서로 다른 것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범부들은 현상계의 모습이 영원히 다른 것으로 극단적인 편견을 가지고 집착하므로 이를 부정하여 중도사상을 가르친 것이다.
불일불이(不一不異)는 모든 법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서로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는 하나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완연히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 또한 잘못된 소견들로 중도의 이치를 등졌기 때문에 이 같은 편견을 일으킨다고 한다.
일체 모든 법은 진리의 본체에서 보면 동일한 원리인데 현상계의 사물이 서로 다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불일불이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히 다른 것처럼 집착하는 견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내면의 원리와 현상계의 모습이 영원히 다르다는 극단적인 편견을 버리게 하고 진리는 하나이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하나라는 중도사상이다.
셋째, 불상(不常)과 부단(不斷)이란 영원히 상주하거나 단멸한다는 극단적인 사고를 갖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상주하지도 단멸하지도 않는다는 중도사상을 설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현상계의 모든 것이 인연화합으로 생긴 것을 모르고 겉모습만을 보고 믿는다. 또한 이런 윤회상의 중생의 몸은 항상 생멸의 가능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인 줄을 모르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기대하고 집착하므로 이와 같은 집착을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현상계의 모든 것들은 생멸을 되풀이하면서 윤회하는 주체이므로 부단(不斷)이다. 사람의 죽음은 인연이 흩어져 가는 현상이고 또 인연을 만나면 출생하는 것인데도 영원히 생명체가 단절되었다고 생각한다. 부단은 이러한 사견을 부정하는 것이다. 현상계는 무상한 것으로 변천하면서 존재하고 없어지는 것이라 하여 상견과 단견을 타파한다. 현상계는 무상한 것으로 변천하면서 존재하며 없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고 죽었다고 해도 다시 태어나고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 상주하지도 단멸하지도 않는다.
넷째, 불거(不去)와 불래(不來)는 중생들이 삼계 육도를 윤회하는 중에 이 세상에 온 것인데 영원히 온 것으로 착각한다. 본래 진리의 당체는 오고 감이 없는 여여한 것으로 마음을 닦고 복잡한 번뇌를 끊음으로써 삼계윤회를 해탈하여 본원의 진여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망각한 중생들을 깨우치는 것이다.
불래는 유정들이 진리를 망각하여 무명 등 번뇌 망상으로 업력을 쌓아 삼계와 육도에 윤회하다가 이 세상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온 것처럼 고집하는 것을 부정한다. 또 불거는 마음을 닦고 복잡한 번뇌를 끊음으로써 삼계윤회를 해탈하여 본원의 진여세계로 돌아감을 망각한 중생들을 깨우쳐 준다. 본래 진리의 당체는 가고 오는 체성이 아니고 한결같이 변함없는 체성을 지니는데 사람들은 임시로 왔다가 가는 것을 실제의 현상으로 집착함을 타파하는 것이다.
물방울의 예를 들면 물방울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도 바다의 입장에서 볼 때 물방울은 가고 온 곳이 없다. 바람을 따라 왔건 바람을 따라 갔건 그것은 하나의 허망한 현상이지 바닷물은 그대로인 것이다.
불거불래는 모든 법은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고 어디를 향해 간 바도 없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왔다가 저곳으로 가는 것이 모든 존재들의 흐름 같지만 그것 역시 형상에 집착하는 망념된 마음에서 그렇게 보일뿐 실제로는 움직임이 없다고 한다.
중도를 말함에 있어 중생들이 미혹하고 삿된 견해를 없애고 다시 따로 중도라는 어떤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삿되고 미혹한 견해를 끝까지 없애는 8불이 곧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팔부중도의 이치라고 한다. 따라서 8부중도의 이치를 알면 일체의 미혹되고 삿된 견해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팔부중도라는 생각까지도 없다는 것이다. 이 팔부중도설은 삼론종의 지극한 종지가 된다.
○ 중론송의 논리 용수의 많은 저술 가운데 중관학파의 핵심을 이루는 내용은 중론 에 들어 있다. 중론(中論) 27품(品) 450여 게송에는 대승 반야공관, 이야말로 근본불교의 정신인 연기(緣起) 무아(無我) 중도(中道)의 뜻이 가장 잘 담겨 있다고 한다. 특히 중론 에는 공관에 입각한 부정논리 곧 양도론법(兩刀論法)이나 오구문파(五求門破)와 같은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논리와 이론이 들어 있다. 여기에는 불타(佛陀)의 진의를 알지 못한 채 교리 개념만을 집착·분별·회론하는 일부 아비달마 논사들의 잘못들을 냉엄하고 철저하게 파사(破邪)하고 있다. 중론 에서는 반야경들에서 역설하는 일체개공관(一切皆空觀)을 바탕으로 당시 불교계에 정형화된 중요한 교리개념 대부분을 27품목으로 거론하여, 이들을 실체 실유시(實有視)하여 분별(分別) 희론하는 사견(邪見) 오류(誤謬)를 없애버리기 위해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특수형식의 논리를 구사하며 동시에 중도실상(中도實相)의 정법(正法)세계를 경쾌히 밝혀낸 것이다. 중론송에 일관되는 부정논리는 반야(般若) 공관(空觀)에 입각하고 있다. 본래 반야경전들에는 일체 유위법은 꿈과 같고, 환작한 것 물방울 그림자와 같다고 한다. 또한 일체법은 불가득(不可得), 무소유(無所有)이며, 제법(諸法)은 공(空)·무자성(無自性)이고 불생불멸(不生不滅)하다는 내용이 밝혀져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일체법의 공함을 관행(觀行)하는 '반야바라밀(Prajñaparamit)'은 보살행의 기초요 목표로 될 뿐만 아니라 불(佛)·세존(世尊)의 일체지(一切智) 살바야(薩婆若)와 직결됨을 나타내고 있다. 중론송은 이런 부정논리를 통해 어떤 개체적 존재나 그 구성요소들 인(因)·연(緣), 온(蘊) 처(處), 계(界)·육계(六界) 등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 개체나 구성요소들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 가령 생(生), 멸(滅), 거(去), 래(來), 작(作), 견(見), 염(染), 수(受), 취(取), 전도(顚倒), 고(苦), 낙(樂) 등에 대해서도 실체적(實體的)으로 항상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부정논리로는 사종불생(四種不生), 양도론법(兩刀論法), 오종추구(五種推求) 귀류논증법(歸謬論證法)을 자재하게 구사하고 있다.
먼저 제법의 현상들에 대해서 사종불생(四種不生)을 주장한다. 일체 제법들은 인연에 의해 발생하므로 자생(自生)·타생(他生)·공생(共生)·무인생(無因生)이 아니라고 한다(관인연품觀因緣品). 이들은 과거(過)·현재(現)·미래(未) 삼세(三世) 가운데 불생(不生)이며, 무시(無始)·무종(無終)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을 일으키는 주체(主體)나 현상 자체는 유(有) 무(無) 역유역무(亦有亦無) 비유비무(非有非無)와 같은 방식의 사구추검으로도 파악될 수 없는 것들이므로 불생(不生)·불래(不來)이다. 나아가 그 반대현상들도 부정되어 불멸(不滅)·불거(不去)․비무(非無)가 아닐 수 없다고 논증하고 있다.
관인연품 제1(16게)에서는 제법(諸法)은 사종불생(四種不生)이다. 연(緣) 사연(四緣)은 무자성(無自性)이어서 성립하지 않고, 결과(結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과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연(緣) 비연(非緣)도 없다고 한다.
둘째, 양도론법(兩刀論法)이란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는데 그 어느 쪽을 선택해도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오게 되는 곤란한 상황, 궁지에 빠지고 딜레마(dilemma)에 빠지는 논리이다.
또한 제법의 현상이 일어나는 주체(主體)와 관련해서 인과(因果)관계나 능소(能所)관계로 그 현상들을 분석 검토해 보아도 서로가 동일(同一)하지도 합일(合一)되거나, 공존(共存)하지도 않으므로 불일(不一), 불상(不常), 불공(不共), 불합(不合)이고, 또 반대편으로 서로는 전혀 관련성 없는 별개적 이체(異體)인 것들이라고도 할 수 없으므로, 불이(不異)·부단(不斷)·비무(非無)가 아닐 수 없다고 논증하고 있다. 셋째, 오구문파(五求門破)의 논리이다. 오구문파는 일체의 모든 것들에 대해 ① 상호간 서로 같은 것인가. ② 서로 다른 것인가. ③ 어느 하나는 다른 하나를 갖고 있는 것인가. ④ 어느 하나 안에 다른 하나가 있는 것인가. ⑤ 반대로 다른 하나에 그것이 있는 것인가를 관찰하는 논리방식으로 오종추구(五種推求)라 한다. 이를 통하여 동일(同一), 별이(別異), 소유(所有), 상호(相互)간 서로에게 내재(內在)함을 모두 부정함으로 써 그 실체적 존재성을 부정한다. 이 비유로 불변자성의 실체인 아트만과 취(取)(제법)관계나 일체법에 실체 없는 관계가 밝혀진다.
예를 들면, 관연가연품 제10(16게)에서 장작과 장작불의 비유가 나오는데, 장작불과 장작은 불일불이(不一不異)요 의존(依存) 비의존(非依存)도 아니며 삼세 중에 존재하지 않고 오종추구(五種追求)로 관찰할 때에도 얻을 수 없는 것이라 한다. 넷째, 귀류논증법(歸謬論證法)이다. 이 논법은 서로를 동일하다고 하면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다른 것들(別異,不合)이라 보면 단견(斷見)이 생기는 모순에 떨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모순 오류 불합리에 빠지고 만다는 논증방법이다. 중론(中論)은 대승반야공관에 입각하여, 온갖 회론을 없애기 위해, 불생(不生)이나 불거(不去)인 까닭을 밝혀내는 특수 논증논리를 사용한다. 여기에는 생, 멸, 상(常), 단(斷), 일(一), 이(異), 거(去), 래(來), 유(有), 무(無) 등의 양극단을 초월한 불생불멸(不生不滅) 내지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中道) 실상(實相) 세계에 참다운 진리성이 있음을 논증하여 보여주고 있다.
나가르주나는 제2의 석가로 일컬어지고, 북방불교에서는 8종(宗)의 조사, 용수보살이라 추앙된다. 그는 대승불교의 선구자로서 대지도론 십주비바사론 중론 과 같은 불후의 명저를 저술하여 대승불교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의 주장은 부처님의 진실한 뜻에 비추어 삿된 것을 부수어 올바른 것을 드러내려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을 목표로 하였다. 이를 위해서 용수는 중도(中道)의 이치로써 당시의 잘못되고 왜곡된 불교학자와 외도들의 학설을 물리고자 하였다. 용수의 중도(中道)는 바르게 깨친 법의 실상으로서 치우침이 없는 부처님의 경지를 뜻한다. 중도(中道)의 완성은 곧 불교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중도(中道)의 이치를 가장 훌륭하게 설파한 분이 용수보살이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중도(中道)의 이치는 모든 법이 본래부터 자성이 없이 갖가지 인연을 통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연기법(緣起法)에 근거하여 설해진 내용이다. 인연에 의해서 나타난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는 공한 것으로 양변을 여의었다. 그러므로 중도는 곧 연기의 법이며 공한 법이며 일체의 차별과 대립을 떠난 적멸의 법이다. 용수보살의 대표적인 논서라고 할 수 있는 중론 에서는 여덟 가지의 그릇된 견해를 부정함으로써 부처님의 적멸한 뜻이 어디 있는가를 밝히는 팔부종도론을 펴고 있다. 생(生)‧멸(滅)‧거(去)‧래(來)‧일(一)‧이(異)‧단(斷)‧상(常) 등의 8가지 미혹한 고집을 부정하여 나타나는 중도의 이치, 곧 일체법의 실상을 표현한다. 8구 4가지 상대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거(不來不去)의 팔부중도(八不中道)가 그것이다. 이것은 진제와 속제에 따라 각각 8부중도를 밝힌 것이다.
첫째 불생(不生)과 불멸(不滅)이란 생멸의 양극단을 부정한 것이다. 생은 인연이 화합하여 나타난 것이며, 멸하는 것도 인연이 다되어 사라지는 것뿐이다. 이와 같이 생과 멸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며 인연의 유무에 따라 생과 멸이 있게 되는 것. 범부들은 이 연기의 원리를 모르고 실제로 생과 멸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집착하므로 이를 고쳐주기 위하여 부정하는 것이다.
바닷물과 물방울의 예를 들어보면, 한 방울의 거품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전체적인 바다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생겨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다. 또 물방울은 항상 흰 것도 아니고 그 물방울의 물이 아주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또 물방울과 바다가 같은 것인가 하면 바닷물이 인연을 만나 물방울이라는 다른 현상을 일으킨 것일 뿐이므로 꼭 같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반대로 물방울과 물이 아주 다른 것이냐 하면 절대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물방울은 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혜로운 자의 입장에서 보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질계든 정신계든 망념된 중생의 차원에서 볼 때 일어남이 있고 사라짐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상은 거짓모습이라 생멸이 끊어졌다고 말한다.
둘째, 불일(不一)과 불이(不二)는 모든 법은 진리의 본체에서 보면 동일한 원리이지만, 현상계의 사물이 서로 다른 것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범부들은 현상계의 모습이 영원히 다른 것으로 극단적인 편견을 가지고 집착하므로 이를 부정하여 중도사상을 가르친 것이다.
불일불이(不一不異)는 모든 법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서로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는 하나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완연히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 또한 잘못된 소견들로 중도의 이치를 등졌기 때문에 이 같은 편견을 일으킨다고 한다.
일체 모든 법은 진리의 본체에서 보면 동일한 원리인데 현상계의 사물이 서로 다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불일불이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히 다른 것처럼 집착하는 견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내면의 원리와 현상계의 모습이 영원히 다르다는 극단적인 편견을 버리게 하고 진리는 하나이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하나라는 중도사상이다.
셋째, 불상(不常)과 부단(不斷)이란 영원히 상주하거나 단멸한다는 극단적인 사고를 갖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상주하지도 단멸하지도 않는다는 중도사상을 설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현상계의 모든 것이 인연화합으로 생긴 것을 모르고 겉모습만을 보고 믿는다. 또한 이런 윤회상의 중생의 몸은 항상 생멸의 가능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인 줄을 모르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기대하고 집착하므로 이와 같은 집착을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현상계의 모든 것들은 생멸을 되풀이하면서 윤회하는 주체이므로 부단(不斷)이다. 사람의 죽음은 인연이 흩어져 가는 현상이고 또 인연을 만나면 출생하는 것인데도 영원히 생명체가 단절되었다고 생각한다. 부단은 이러한 사견을 부정하는 것이다. 현상계는 무상한 것으로 변천하면서 존재하고 없어지는 것이라 하여 상견과 단견을 타파한다. 현상계는 무상한 것으로 변천하면서 존재하며 없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고 죽었다고 해도 다시 태어나고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 상주하지도 단멸하지도 않는다.
넷째, 불거(不去)와 불래(不來)는 중생들이 삼계 육도를 윤회하는 중에 이 세상에 온 것인데 영원히 온 것으로 착각한다. 본래 진리의 당체는 오고 감이 없는 여여한 것으로 마음을 닦고 복잡한 번뇌를 끊음으로써 삼계윤회를 해탈하여 본원의 진여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망각한 중생들을 깨우치는 것이다.
불래는 유정들이 진리를 망각하여 무명 등 번뇌 망상으로 업력을 쌓아 삼계와 육도에 윤회하다가 이 세상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온 것처럼 고집하는 것을 부정한다. 또 불거는 마음을 닦고 복잡한 번뇌를 끊음으로써 삼계윤회를 해탈하여 본원의 진여세계로 돌아감을 망각한 중생들을 깨우쳐 준다. 본래 진리의 당체는 가고 오는 체성이 아니고 한결같이 변함없는 체성을 지니는데 사람들은 임시로 왔다가 가는 것을 실제의 현상으로 집착함을 타파하는 것이다.
물방울의 예를 들면 물방울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도 바다의 입장에서 볼 때 물방울은 가고 온 곳이 없다. 바람을 따라 왔건 바람을 따라 갔건 그것은 하나의 허망한 현상이지 바닷물은 그대로인 것이다.
불거불래는 모든 법은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고 어디를 향해 간 바도 없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왔다가 저곳으로 가는 것이 모든 존재들의 흐름 같지만 그것 역시 형상에 집착하는 망념된 마음에서 그렇게 보일뿐 실제로는 움직임이 없다고 한다.
중도를 말함에 있어 중생들이 미혹하고 삿된 견해를 없애고 다시 따로 중도라는 어떤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삿되고 미혹한 견해를 끝까지 없애는 8불이 곧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팔부중도의 이치라고 한다. 따라서 8부중도의 이치를 알면 일체의 미혹되고 삿된 견해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팔부중도라는 생각까지도 없다는 것이다. 이 팔부중도설은 삼론종의 지극한 종지가 된다.
○ 중론송의 논리 용수의 많은 저술 가운데 중관학파의 핵심을 이루는 내용은 중론 에 들어 있다. 중론(中論) 27품(品) 450여 게송에는 대승 반야공관, 이야말로 근본불교의 정신인 연기(緣起) 무아(無我) 중도(中道)의 뜻이 가장 잘 담겨 있다고 한다. 특히 중론 에는 공관에 입각한 부정논리 곧 양도론법(兩刀論法)이나 오구문파(五求門破)와 같은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논리와 이론이 들어 있다. 여기에는 불타(佛陀)의 진의를 알지 못한 채 교리 개념만을 집착·분별·회론하는 일부 아비달마 논사들의 잘못들을 냉엄하고 철저하게 파사(破邪)하고 있다. 중론 에서는 반야경들에서 역설하는 일체개공관(一切皆空觀)을 바탕으로 당시 불교계에 정형화된 중요한 교리개념 대부분을 27품목으로 거론하여, 이들을 실체 실유시(實有視)하여 분별(分別) 희론하는 사견(邪見) 오류(誤謬)를 없애버리기 위해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특수형식의 논리를 구사하며 동시에 중도실상(中도實相)의 정법(正法)세계를 경쾌히 밝혀낸 것이다. 중론송에 일관되는 부정논리는 반야(般若) 공관(空觀)에 입각하고 있다. 본래 반야경전들에는 일체 유위법은 꿈과 같고, 환작한 것 물방울 그림자와 같다고 한다. 또한 일체법은 불가득(不可得), 무소유(無所有)이며, 제법(諸法)은 공(空)·무자성(無自性)이고 불생불멸(不生不滅)하다는 내용이 밝혀져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일체법의 공함을 관행(觀行)하는 '반야바라밀(Prajñaparamit)'은 보살행의 기초요 목표로 될 뿐만 아니라 불(佛)·세존(世尊)의 일체지(一切智) 살바야(薩婆若)와 직결됨을 나타내고 있다. 중론송은 이런 부정논리를 통해 어떤 개체적 존재나 그 구성요소들 인(因)·연(緣), 온(蘊) 처(處), 계(界)·육계(六界) 등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 개체나 구성요소들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 가령 생(生), 멸(滅), 거(去), 래(來), 작(作), 견(見), 염(染), 수(受), 취(取), 전도(顚倒), 고(苦), 낙(樂) 등에 대해서도 실체적(實體的)으로 항상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부정논리로는 사종불생(四種不生), 양도론법(兩刀論法), 오종추구(五種推求) 귀류논증법(歸謬論證法)을 자재하게 구사하고 있다.
먼저 제법의 현상들에 대해서 사종불생(四種不生)을 주장한다. 일체 제법들은 인연에 의해 발생하므로 자생(自生)·타생(他生)·공생(共生)·무인생(無因生)이 아니라고 한다(관인연품觀因緣品). 이들은 과거(過)·현재(現)·미래(未) 삼세(三世) 가운데 불생(不生)이며, 무시(無始)·무종(無終)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을 일으키는 주체(主體)나 현상 자체는 유(有) 무(無) 역유역무(亦有亦無) 비유비무(非有非無)와 같은 방식의 사구추검으로도 파악될 수 없는 것들이므로 불생(不生)·불래(不來)이다. 나아가 그 반대현상들도 부정되어 불멸(不滅)·불거(不去)․비무(非無)가 아닐 수 없다고 논증하고 있다.
관인연품 제1(16게)에서는 제법(諸法)은 사종불생(四種不生)이다. 연(緣) 사연(四緣)은 무자성(無自性)이어서 성립하지 않고, 결과(結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과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연(緣) 비연(非緣)도 없다고 한다.
둘째, 양도론법(兩刀論法)이란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는데 그 어느 쪽을 선택해도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오게 되는 곤란한 상황, 궁지에 빠지고 딜레마(dilemma)에 빠지는 논리이다.
또한 제법의 현상이 일어나는 주체(主體)와 관련해서 인과(因果)관계나 능소(能所)관계로 그 현상들을 분석 검토해 보아도 서로가 동일(同一)하지도 합일(合一)되거나, 공존(共存)하지도 않으므로 불일(不一), 불상(不常), 불공(不共), 불합(不合)이고, 또 반대편으로 서로는 전혀 관련성 없는 별개적 이체(異體)인 것들이라고도 할 수 없으므로, 불이(不異)·부단(不斷)·비무(非無)가 아닐 수 없다고 논증하고 있다. 셋째, 오구문파(五求門破)의 논리이다. 오구문파는 일체의 모든 것들에 대해 ① 상호간 서로 같은 것인가. ② 서로 다른 것인가. ③ 어느 하나는 다른 하나를 갖고 있는 것인가. ④ 어느 하나 안에 다른 하나가 있는 것인가. ⑤ 반대로 다른 하나에 그것이 있는 것인가를 관찰하는 논리방식으로 오종추구(五種推求)라 한다. 이를 통하여 동일(同一), 별이(別異), 소유(所有), 상호(相互)간 서로에게 내재(內在)함을 모두 부정함으로 써 그 실체적 존재성을 부정한다. 이 비유로 불변자성의 실체인 아트만과 취(取)(제법)관계나 일체법에 실체 없는 관계가 밝혀진다.
예를 들면, 관연가연품 제10(16게)에서 장작과 장작불의 비유가 나오는데, 장작불과 장작은 불일불이(不一不異)요 의존(依存) 비의존(非依存)도 아니며 삼세 중에 존재하지 않고 오종추구(五種追求)로 관찰할 때에도 얻을 수 없는 것이라 한다. 넷째, 귀류논증법(歸謬論證法)이다. 이 논법은 서로를 동일하다고 하면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다른 것들(別異,不合)이라 보면 단견(斷見)이 생기는 모순에 떨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모순 오류 불합리에 빠지고 만다는 논증방법이다. 중론(中論)은 대승반야공관에 입각하여, 온갖 회론을 없애기 위해, 불생(不生)이나 불거(不去)인 까닭을 밝혀내는 특수 논증논리를 사용한다. 여기에는 생, 멸, 상(常), 단(斷), 일(一), 이(異), 거(去), 래(來), 유(有), 무(無) 등의 양극단을 초월한 불생불멸(不生不滅) 내지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中道) 실상(實相) 세계에 참다운 진리성이 있음을 논증하여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