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수의 연기설과 자성론에 대한 논파
1) 상의상대(相依相待)의 연기설
나가르주나는 상의상대(相衣相待)의 연기설을 주장한다. 상의성이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는 상호의존 관계를 말한다. 일체법은 이러한 상의관계로 성립된다고 한다. 상의성은 원어로는 연(緣)으로 해서 있다는 것으로 A, B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것일지라도 다른 것을 지시하고 있는 것으로 있기 때문에 여기에 相互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연(緣)은 의지해서 생기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상호(相互)에 의해서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론' 제24장 제18게송에는 연기를 인연에 의한 시설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연기(pratītya-samutapāda)하는 것, 이를 우리는 공성(śūnyata)이라고 한다. 이것은 인연에 의한 시설(upādānam upādāya prajñapti)이며, 이것은 참으로 중도(madhyamā pratipad)이다”
'중론』에서의 연기가 상의성으로 해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범어에서는 연기를 상의성(相依性 idampratyayatā)이라고도 하는데, 따라서 상대(相待 apekṣā)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만 단지 연(緣)해서(pratītya)라고 하는 것도 있다.
『중론』의 연기가 상호의존적 관계인 상의성을 의미하고 있음을 나름대로 인식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입장을 더욱 발전시켜 연기는 상의성이며, 이때 상의성이란 논리적인 관계임을 분명히 하여 기존의 전통적 연기 해석인 근본불교의 시간적 인과관계 곧 십이지연기설과는 차이를 보인다.
상의성이라는 번역은 용수의 『중론』에는 이미 ‘상의성’(paraspara apekṣā)이란 용어로 나타난다.
“탐욕과 탐내는 자가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탐욕과 탐내는 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apekṣā paraspara)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론』에서 용수는 연기(pratītyasamutpāda)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위의 게송에서와 같이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한다는 이른바 ‘apekṣā paraspara’(相依)란 단어로 기술하고 있다. 『중론』에서의 연기의 형식 역시 제8장 12게 그리고 제23장 10게와 11게 등에서 나타나듯이 ‘A는 B에 의존하고 B는 A에 의존한다’는 상호 의존의 관계로 나타난다.
용수가 상의(相依)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상의(相依) 속에 서로 의지하는 상대 사이의 상호적인 관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용수의 연기는 오직 상대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상호적인 관계이다.『중론』에 나타난 상의성은 상의성의 연기로 일체의 존재가 서로 의존하는 관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의성의 연기의 기본적인 형태는 근본불교의 연기형태와는 달리 ‘A에 의해서 B가 있고, B에 의해서 A가 있다’라는 연기형식이다.
『중론』 제2장 제2절에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 그 대표적인 형태가 된다.
“움직임에 의해 움직임의 주체가 있다. 또 그 움직임의 주체에 의해 움직임이 작용한다.
‘깨끗함’에 의존하지 않는 ‘깨끗하지 않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깨끗하지 않음’에 연(緣)하여 ‘깨끗함’이 있다”고 우리는 알아야 한다. ‘깨끗하지 않음’에 의존하지 않는 ‘깨끗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A와 B의 상의성에 기초한 연기의 의미를 체계화시킨 것으로 용수 이전에는 존재의 상호 의존적 관계에 의해 연기의 의미를 해석하고 있는 경우는 보이지 않는다.
용수의 연기는 인연의 한 시설을 가리키고 앞의 게송에서 보았듯이 공성의 연기(pratītya-samutapāda)를 가리키기 때문에 단순한 무(無)가 아니라 순전한 무가 아닌 비무(非無)를 가리키며, 그렇지만 다시 공성이 연기(upādānam upādāya prajñapti)이기 때문에 순전한 유(有)가 아닌 비유(非有)이므로 비유비무인 중도(madhyamā pratipad)임을 보여준다.
한편 용수의 상의성에 대한 표현으로 '칠십공성게' 제63게송에서는 “저것에 의해 이것이 생길 때 이것은 저것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이것은 저것이 없을 때 생기지 않는다”라고 하고 제71게송에서는 “저것에 의해 이것이 생한다”고 하는데, 이는 저것인 객관적인 인연에 의해서 이것인 존재의 관념 곧 명칭의 시설(prajñaptih)이 있다고 하는 표현으로 객관이 있을 때 주관이 있다는 의로 상의상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에 유의해야 한다. '중론' 제7장 16게송 제18장 제10게송에서도 “어떠한 것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 하고 있다. '중론' 제1장 제10게송 “저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고, 저것이 생하므로 이것이 생한다”(월칭주 p.159)는 기술은 상의상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론』에 나타난 용수의 연기설은 시간적 인과관계뿐만이 아니라 논리적인 관계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용수가 '중론' 제1장 「관인연품」과 제20장 「관인과품」에서 인과를 부정한 것은 인과관계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인과의 자성을 전제할 때, 결코 인과관계가 성립할 수 없음을 부정한 것이다. 곧 시간적 연기설인 십이연기설을 『중론』의 한 장으로 포함시킨 것도 기존의 연기설을 부정한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용수의 연기설은 시간적인 관계뿐만이 아니라 논리적인 관계까지도 포함하는 포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2) 유자성론(有自性論)을 논파하기 위한 무자성 공론(空論)
용수가 ‘상의’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상의(相依)’ 속의 ‘상대(anyonya or paraspara)가 서로 ‘연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존재’ 사이의 ‘상호적인’ 관계로 되어 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이 용수의 연기는 오직 양자 사이에만 성립하는 상호적 관계이며, 더욱이 두 항에 관계하는 ‘유’(존재성)는 그 관계성 위에서 성립하고 있다. 용수의 연기설에서 상의상대는 그의 저술 속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근본원리로 유부(有部)의 유자성론(有自性論)의 논파라고 할 수 있다. 연기가 갖고 있는 논리적 관계와 시간적 관계의 두 특질 가운데, 당시 유부(有部)가 연기를 실재론적인 관점에서 시간적 관계로 해석하는 유(有)의 형이상학이 잘못되었음을 논파하기 위해 실재[자성]와 가장 대립적인 측면을 갖는 상의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재론적인 입장에서는 서로간의 관계에 의해 존재성을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존재 그 자체에서 자신의 존재 근거를 확보하기 때문에 연기설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용수가 이와 같은 상의성의 연기를 주장한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둘 이상의 상의(相依 apekṣa)하는 관계로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것은 개념적 의존관계로서 맺어진다. '중론' 제13게송에서는 작자와 업과 연기성(idampratyayatā), 소생과 능생 거자와 거법, 소견과 능견, 소상과 능상, 부분과 유분, 덕과 유덕, 능량과 소량 등 여러 가지 상대법을 들어서 상의상대를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정의 내리는 것(能相)과 정의되는 것(所相)의 근거는 희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와 같이 본다면 상의성의 연기는 주객대립의 분별을 지멸(止滅)시키기 위한 논리체계이고, 이를 해명하기 위한 개념이 상의(相依) 상대(相待)였다. 그의 상의성의 연기설은 주객대립의 허망분별을 벗어난 공의 입장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주관과 객관의 대립관계를 떠난 진실성‧진여의 입장에서 일체법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가. 또한 존재의 진리는 어떻게 생각되는가를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용수가 상의성을 논리적 상관관계로 이해한 것은 유부의 연기설과 구분하여 연기의 각 支分을 法과 法의 관계로서 파악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유부의 연기설이 법의 실체를 상정함으로써 연기의 각 지분간의 ‘시간적 생기관계’ 내지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것인데 반해, 중관파에서는 법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각 지분간에 단지 논리 관계만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연기관계가 소승(유부)에서는 시간적 생기관계로 해석되었지만, 중관파에서는 생멸 거래 상단 일이가 상의(相依)해서 성립하는 것처럼 완전히 법과 법의 논리적 상관관계로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중론』의 연기설은 상의성의 연기이며 이때의 상의성이란 순전히 ‘논리적 관계’로서의 연기이다. 이에 대해 유부의 연기설은 시간성에 근거한 ‘인과관계’를 의미한다. 이는 유부의 시간적 인과관계와 완전히 대립적인 의미로서 상의성을 해석함으로써 상의성이란 의미에서 시간성, 즉 인과관계를 배제시키고 있다.
용수의 연기설은 이와 같이 업과 작자 능상과 소상 염법과 소염자 오온과 아 부분과 전체 등 법과 이를 짓는 자 곧 사람의 관계로 많이 기술하고 있다. 상의 상대 연기설은 모두가 상대적인 관념이며 독립성을 갖지 않은 무자성공임을 말하는 것이다.
월칭의 주석에 의하면 자기의 고유한 체(savo bhavaha)가 자성(svahāava)이라고 한다. 어떠한 사물이 가진 고유한 체가 그 사물의 자성이라고 한다. 어떤 사물의 고유한 것 곧 자성은 어떠한 것에 의하여 지어진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인연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은 다른 인연에 의해 생기하고 지배되고 작위(作爲)되는 것으로 독립자존의 자성이라는 고유의 존재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무자성이라고 한다.
용수의 연기무자성공론을 바로 알려면 그의 '중론' 제7장(제8게송, 제9게송, 제11게송 제12게송)과 회정론에 나오는 등불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아야 한다.
'종론'제 9게송을 보면,
등불(pradīpa)의 안이나 불빛이 도달하는 곳에는 어둠(andakāra)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등불은 무엇을 비추는 것인가. 왜냐하면 비추는 것은 어둠을 파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물이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를 성립시키는 것은 마치 등불이 다른 존재를 비추는 것과 함께 자기 자신의 존재도 비추는 근거가 되는 것과 같다” 이는 독립 자존하는 자성을 드러내는 비유로 사용된다. 등불이 어둠을 깨는 하나의 독립자존의 빛의 원리라면 이 빛의 원리가 존재하는 곳에서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둠의 세계는 아직 빛과 접촉하지 않은 별개의 세계로 되어서 빛이 어둠과 접촉해서 어둠을 비춘다고 하는 관계가 성립되지 않게 된다. 따라서 빛이 접촉한 장소는 빛이지 어둠이 아니며 빛은 접촉해서 비춰야할 대상을 상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등불을 하나의 독립 자존하는 빛의 원리라고 생각하는 한 이와 같은 논파를 면하지 못한다. 빛과 어둠이 만나는 장소는 어둠이 파괴된 장소이기 때문에 빛의 세계일뿐이며 어둠의 세계가 아니요, 그 빛의 세계는 어둠이 연해서 성립한 세계이므로 단순히 그 스스로 성립한 세계라고 할 수 없다. 빛이 비추어진 세계를 그 스스로 성립한 세계라고 라고 생각하면 빛과 어둠이 만난다는 의미는 상실하며 빛이 어둠을 비춘다고 하는 관계 역시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이 게송의 논파는 등불이 어둠에 연해서 성립하는 상대적인 연기적 존재이며 독립자존의 자성을 갖지 않은 무자성임을 말하고 있다. 등불이 어둠을 비추는 관계는 등불이 어둠에 연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성립한다. 등불은 어둠과 상극적적으로 모순되고 서로 부정하는 것으로서 그 스스로 독립 자존하지 않는 무자성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일체의 사물은 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은 일체의 사물이 다른 것에 의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성이란 ‘만들어지지 않은 것’,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연기를 인정하는 한 자성은 인정될 수 없으며, 일체법은 무자성이라는 것이다. 또 용수는 《회쟁론에서》일체법이 무자성이기 때문에 공인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와 같이 또한 나의 말도 연해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무자성이고, 무자성인 것이기 때문에 공(śūnyata)이라는 것이 성립한다. 용수는 자신의 말 역시 여러 연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자성이 없는 것이라고 하며, 무자성이기 때문에 공이라고 말하고 있다. 용수의 ‘공(śūnyata)’이란 연(緣)에 의해서 발생한 ‘고유한 자성이 없는, 혹은 존재하지 않는’ 등의 의미이며, 일체법이 자성을 결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의 등불의 게송에서와 같이 어둠과 등불이라는 고정된 집착 고집의 관념을 갖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무분별 무집착이라 한다.
1) 상의상대(相依相待)의 연기설
나가르주나는 상의상대(相衣相待)의 연기설을 주장한다. 상의성이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는 상호의존 관계를 말한다. 일체법은 이러한 상의관계로 성립된다고 한다. 상의성은 원어로는 연(緣)으로 해서 있다는 것으로 A, B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것일지라도 다른 것을 지시하고 있는 것으로 있기 때문에 여기에 相互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연(緣)은 의지해서 생기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상호(相互)에 의해서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론' 제24장 제18게송에는 연기를 인연에 의한 시설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연기(pratītya-samutapāda)하는 것, 이를 우리는 공성(śūnyata)이라고 한다. 이것은 인연에 의한 시설(upādānam upādāya prajñapti)이며, 이것은 참으로 중도(madhyamā pratipad)이다”
'중론』에서의 연기가 상의성으로 해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범어에서는 연기를 상의성(相依性 idampratyayatā)이라고도 하는데, 따라서 상대(相待 apekṣā)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만 단지 연(緣)해서(pratītya)라고 하는 것도 있다.
『중론』의 연기가 상호의존적 관계인 상의성을 의미하고 있음을 나름대로 인식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입장을 더욱 발전시켜 연기는 상의성이며, 이때 상의성이란 논리적인 관계임을 분명히 하여 기존의 전통적 연기 해석인 근본불교의 시간적 인과관계 곧 십이지연기설과는 차이를 보인다.
상의성이라는 번역은 용수의 『중론』에는 이미 ‘상의성’(paraspara apekṣā)이란 용어로 나타난다.
“탐욕과 탐내는 자가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탐욕과 탐내는 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apekṣā paraspara)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론』에서 용수는 연기(pratītyasamutpāda)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위의 게송에서와 같이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한다는 이른바 ‘apekṣā paraspara’(相依)란 단어로 기술하고 있다. 『중론』에서의 연기의 형식 역시 제8장 12게 그리고 제23장 10게와 11게 등에서 나타나듯이 ‘A는 B에 의존하고 B는 A에 의존한다’는 상호 의존의 관계로 나타난다.
용수가 상의(相依)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상의(相依) 속에 서로 의지하는 상대 사이의 상호적인 관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용수의 연기는 오직 상대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상호적인 관계이다.『중론』에 나타난 상의성은 상의성의 연기로 일체의 존재가 서로 의존하는 관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의성의 연기의 기본적인 형태는 근본불교의 연기형태와는 달리 ‘A에 의해서 B가 있고, B에 의해서 A가 있다’라는 연기형식이다.
『중론』 제2장 제2절에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 그 대표적인 형태가 된다.
“움직임에 의해 움직임의 주체가 있다. 또 그 움직임의 주체에 의해 움직임이 작용한다.
‘깨끗함’에 의존하지 않는 ‘깨끗하지 않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깨끗하지 않음’에 연(緣)하여 ‘깨끗함’이 있다”고 우리는 알아야 한다. ‘깨끗하지 않음’에 의존하지 않는 ‘깨끗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A와 B의 상의성에 기초한 연기의 의미를 체계화시킨 것으로 용수 이전에는 존재의 상호 의존적 관계에 의해 연기의 의미를 해석하고 있는 경우는 보이지 않는다.
용수의 연기는 인연의 한 시설을 가리키고 앞의 게송에서 보았듯이 공성의 연기(pratītya-samutapāda)를 가리키기 때문에 단순한 무(無)가 아니라 순전한 무가 아닌 비무(非無)를 가리키며, 그렇지만 다시 공성이 연기(upādānam upādāya prajñapti)이기 때문에 순전한 유(有)가 아닌 비유(非有)이므로 비유비무인 중도(madhyamā pratipad)임을 보여준다.
한편 용수의 상의성에 대한 표현으로 '칠십공성게' 제63게송에서는 “저것에 의해 이것이 생길 때 이것은 저것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이것은 저것이 없을 때 생기지 않는다”라고 하고 제71게송에서는 “저것에 의해 이것이 생한다”고 하는데, 이는 저것인 객관적인 인연에 의해서 이것인 존재의 관념 곧 명칭의 시설(prajñaptih)이 있다고 하는 표현으로 객관이 있을 때 주관이 있다는 의로 상의상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에 유의해야 한다. '중론' 제7장 16게송 제18장 제10게송에서도 “어떠한 것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 하고 있다. '중론' 제1장 제10게송 “저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고, 저것이 생하므로 이것이 생한다”(월칭주 p.159)는 기술은 상의상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론』에 나타난 용수의 연기설은 시간적 인과관계뿐만이 아니라 논리적인 관계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용수가 '중론' 제1장 「관인연품」과 제20장 「관인과품」에서 인과를 부정한 것은 인과관계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인과의 자성을 전제할 때, 결코 인과관계가 성립할 수 없음을 부정한 것이다. 곧 시간적 연기설인 십이연기설을 『중론』의 한 장으로 포함시킨 것도 기존의 연기설을 부정한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용수의 연기설은 시간적인 관계뿐만이 아니라 논리적인 관계까지도 포함하는 포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2) 유자성론(有自性論)을 논파하기 위한 무자성 공론(空論)
용수가 ‘상의’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상의(相依)’ 속의 ‘상대(anyonya or paraspara)가 서로 ‘연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존재’ 사이의 ‘상호적인’ 관계로 되어 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이 용수의 연기는 오직 양자 사이에만 성립하는 상호적 관계이며, 더욱이 두 항에 관계하는 ‘유’(존재성)는 그 관계성 위에서 성립하고 있다. 용수의 연기설에서 상의상대는 그의 저술 속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근본원리로 유부(有部)의 유자성론(有自性論)의 논파라고 할 수 있다. 연기가 갖고 있는 논리적 관계와 시간적 관계의 두 특질 가운데, 당시 유부(有部)가 연기를 실재론적인 관점에서 시간적 관계로 해석하는 유(有)의 형이상학이 잘못되었음을 논파하기 위해 실재[자성]와 가장 대립적인 측면을 갖는 상의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재론적인 입장에서는 서로간의 관계에 의해 존재성을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존재 그 자체에서 자신의 존재 근거를 확보하기 때문에 연기설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용수가 이와 같은 상의성의 연기를 주장한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둘 이상의 상의(相依 apekṣa)하는 관계로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것은 개념적 의존관계로서 맺어진다. '중론' 제13게송에서는 작자와 업과 연기성(idampratyayatā), 소생과 능생 거자와 거법, 소견과 능견, 소상과 능상, 부분과 유분, 덕과 유덕, 능량과 소량 등 여러 가지 상대법을 들어서 상의상대를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정의 내리는 것(能相)과 정의되는 것(所相)의 근거는 희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와 같이 본다면 상의성의 연기는 주객대립의 분별을 지멸(止滅)시키기 위한 논리체계이고, 이를 해명하기 위한 개념이 상의(相依) 상대(相待)였다. 그의 상의성의 연기설은 주객대립의 허망분별을 벗어난 공의 입장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주관과 객관의 대립관계를 떠난 진실성‧진여의 입장에서 일체법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가. 또한 존재의 진리는 어떻게 생각되는가를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용수가 상의성을 논리적 상관관계로 이해한 것은 유부의 연기설과 구분하여 연기의 각 支分을 法과 法의 관계로서 파악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유부의 연기설이 법의 실체를 상정함으로써 연기의 각 지분간의 ‘시간적 생기관계’ 내지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것인데 반해, 중관파에서는 법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각 지분간에 단지 논리 관계만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연기관계가 소승(유부)에서는 시간적 생기관계로 해석되었지만, 중관파에서는 생멸 거래 상단 일이가 상의(相依)해서 성립하는 것처럼 완전히 법과 법의 논리적 상관관계로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중론』의 연기설은 상의성의 연기이며 이때의 상의성이란 순전히 ‘논리적 관계’로서의 연기이다. 이에 대해 유부의 연기설은 시간성에 근거한 ‘인과관계’를 의미한다. 이는 유부의 시간적 인과관계와 완전히 대립적인 의미로서 상의성을 해석함으로써 상의성이란 의미에서 시간성, 즉 인과관계를 배제시키고 있다.
용수의 연기설은 이와 같이 업과 작자 능상과 소상 염법과 소염자 오온과 아 부분과 전체 등 법과 이를 짓는 자 곧 사람의 관계로 많이 기술하고 있다. 상의 상대 연기설은 모두가 상대적인 관념이며 독립성을 갖지 않은 무자성공임을 말하는 것이다.
월칭의 주석에 의하면 자기의 고유한 체(savo bhavaha)가 자성(svahāava)이라고 한다. 어떠한 사물이 가진 고유한 체가 그 사물의 자성이라고 한다. 어떤 사물의 고유한 것 곧 자성은 어떠한 것에 의하여 지어진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인연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은 다른 인연에 의해 생기하고 지배되고 작위(作爲)되는 것으로 독립자존의 자성이라는 고유의 존재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무자성이라고 한다.
용수의 연기무자성공론을 바로 알려면 그의 '중론' 제7장(제8게송, 제9게송, 제11게송 제12게송)과 회정론에 나오는 등불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아야 한다.
'종론'제 9게송을 보면,
등불(pradīpa)의 안이나 불빛이 도달하는 곳에는 어둠(andakāra)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등불은 무엇을 비추는 것인가. 왜냐하면 비추는 것은 어둠을 파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물이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를 성립시키는 것은 마치 등불이 다른 존재를 비추는 것과 함께 자기 자신의 존재도 비추는 근거가 되는 것과 같다” 이는 독립 자존하는 자성을 드러내는 비유로 사용된다. 등불이 어둠을 깨는 하나의 독립자존의 빛의 원리라면 이 빛의 원리가 존재하는 곳에서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둠의 세계는 아직 빛과 접촉하지 않은 별개의 세계로 되어서 빛이 어둠과 접촉해서 어둠을 비춘다고 하는 관계가 성립되지 않게 된다. 따라서 빛이 접촉한 장소는 빛이지 어둠이 아니며 빛은 접촉해서 비춰야할 대상을 상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등불을 하나의 독립 자존하는 빛의 원리라고 생각하는 한 이와 같은 논파를 면하지 못한다. 빛과 어둠이 만나는 장소는 어둠이 파괴된 장소이기 때문에 빛의 세계일뿐이며 어둠의 세계가 아니요, 그 빛의 세계는 어둠이 연해서 성립한 세계이므로 단순히 그 스스로 성립한 세계라고 할 수 없다. 빛이 비추어진 세계를 그 스스로 성립한 세계라고 라고 생각하면 빛과 어둠이 만난다는 의미는 상실하며 빛이 어둠을 비춘다고 하는 관계 역시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이 게송의 논파는 등불이 어둠에 연해서 성립하는 상대적인 연기적 존재이며 독립자존의 자성을 갖지 않은 무자성임을 말하고 있다. 등불이 어둠을 비추는 관계는 등불이 어둠에 연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성립한다. 등불은 어둠과 상극적적으로 모순되고 서로 부정하는 것으로서 그 스스로 독립 자존하지 않는 무자성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일체의 사물은 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은 일체의 사물이 다른 것에 의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성이란 ‘만들어지지 않은 것’,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연기를 인정하는 한 자성은 인정될 수 없으며, 일체법은 무자성이라는 것이다. 또 용수는 《회쟁론에서》일체법이 무자성이기 때문에 공인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와 같이 또한 나의 말도 연해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무자성이고, 무자성인 것이기 때문에 공(śūnyata)이라는 것이 성립한다. 용수는 자신의 말 역시 여러 연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자성이 없는 것이라고 하며, 무자성이기 때문에 공이라고 말하고 있다. 용수의 ‘공(śūnyata)’이란 연(緣)에 의해서 발생한 ‘고유한 자성이 없는, 혹은 존재하지 않는’ 등의 의미이며, 일체법이 자성을 결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의 등불의 게송에서와 같이 어둠과 등불이라는 고정된 집착 고집의 관념을 갖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무분별 무집착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