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수의 이제(二諦)와 공(空)

 용수(나가르주나)의 공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이제설의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이제란 세속제와 진제(또는 승의제)인데, 세속제가 세간적 생활 일상적인 활동에서 요해되는 가르침이라면 진제는 이런 세속적 입장을 떠난 진리의 입장에서 파악되는 참된 실재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속제가 세속의 도리로 설해진 부처님 가르침이라면, 진제는 진리에서 일체법의 실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세속제에서는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말라고 하는데, 진제에서는 선이나 악도 실체가 없다고 한다.

<진속이제>세속제 -부처님의 가르침이 세속의 도리로 설해진 것(세간)진제 - 세속적 입장을 여읜 진리(승의제, 제일의제)     - 일체의 세속을 초월하고 불생불멸로서 말과 생각의 대상을 떠난 진리     - 말로 할 수 없는 것[불가설不可說]으로 알 수 없고 볼 수 없고 보일 수 없다.     - 제일의제로 인식의 활동도 없는 곳, 글자로 논의할 수 없음
 그렇지만 이러한 속제와 진제는 균등하게 실천해야 한다. 속제를 모르고 진제만을 최고의 진리로 추구한다면 가치판단이 왜곡되어  공견에 빠지거나 진리의 세계만을 최고로 여겨 현상을 무시하고 함부로 행위하는 우를 범하기 쉽고, 진제를 모르고 속제만 추구할 경우 세속의 도리로 판단하여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기껏해야 인천의 세계에 머물게 된다고 한다.『중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제를 밝혀 공의 진의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부처님은 두 가지 진리에 의지해서 가르침을 폈다. 곧 일상적 관점에서의 진리(세속제)와 궁극적 관점에서의 진리(진제, 승의제, 제일의제)이다. 이 두 가지 진리의 차이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붓다가 설한 교설의 깊은 진실을 이해할 수 없다.
인연으로 생겨난 모든 것을 우리는 공(空)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임시로 드러내어 설하는 것(假名)으로
이것은 또한 중도(中道)이다.                 어떤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는 것은 없고,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하지 않은 것은 없다. " (중론)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온갖 사견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공의 진리를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다시 공이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자가 있다면 어떤 부처님께서도 그러한 자를 구제하지 못 하신다고 空見(공견)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는 속제로부터 진제, 그리고 공과 중도에 이르는 용수의 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아비달마불교의 이제
아비달마의 이제설은 근본불교의 이제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인무아(人無我)의 세속, 법유(法有)의 승의(勝義) 이제설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근본불교에서 인아(人我) 작자(作者) 수자(受者) 등이 세속적 언설로서 유이며, 승의로서 무아라고 한 것에서 한 발 나아간 발전된 이제설을 보여준다. '밀란다팡하'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제설을 설하고 있다.

대왕이시여, 머리카락에 연하고, 터럭에 연하고 손톱에 연하고, 치아에 연하고, 피부에 연하고, 살에 연하고, 근육에 연하고, 뼈에 연하고, …뇌에 의하여 나가세나라는 호칭 표상 관념 언설 명칭이 생기할 뿐입니다. 그러나 승의로써 인아(pudgala)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왕이시여, 파딧짜라 비구니는 세존을 향해서 말합니다. 예를 들면 부분이 모여서 수레라는 말이 있듯이 이와 같이 제온(諸蘊)이 있을 때 중생이라는 명칭으로서의 세속의 언설이 있습니다.(Milindapānha)
대왕이시여, 나라고 말하고 나의 것이라 말하는 것은 세속의 언설이지 승의가 아니옵니다. 대왕이시여 여래는 집착을 여의고 애착을 여의었습니다. 여래께는 나의 것이라는 집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Milindapānha, p.226)

 여기서는 나가세나라는 인아(人我)가 신체의 몸이나 털 손톱 등의 객관적인 실재적 요소들에 의해서 생기(生起)하듯이 세속의 관념 언설이며, 승의로서는 무아 무실체임을 말하고 있다. 곧 근본불교의 여러 경전에서 설하고 있듯이 수레의 비유에 의해서 중생의 인아(人我)가 무아인 세속의 언설임을 말한다. 이와 같이 밀란다팡하의 이제설은 근본불교의 이제설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조금 후대인 '대비바사론'에서는 죽은 자, 산 자, 입정에 든 자, 선정에서 나온 자, 작자(作者), 수자(受者), 보특가라 등은 언설로 나타내는 세속의 존재들로 세속의 유(saṁvṛriti,-sat)라 한다. 그런데 이들의 구성요소가 되고 기초가 되며 인연이 되는 사법(死法), 생법(生法), 소입정(所入定), 소출정(所出定), 업, 이숙과, 색 등의 사진(四塵) 오온 등은 각각 승의(勝義)의 존재로 승의의 유(paramāttha-sa)라 한다.
 이러한 견해는 인아(人我) 작자 수자 등이 세속의 언설로서 유이며 승의(勝義)로서 무아라고 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인아 작자 수자 등의 세속적 언설의 인연이 되는 오온 업 이숙과 등이 승의로써 유라 보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아비달마 후기에는 인아 작자 등 세속의 언설을 부정하고 그들 세속 언설의 인연인 오온 업 등의 유를 말하는 인무아법유(人無我法有)의 사상이 나타나고 있다. 법유를 승의라는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법유를 정견 여실함(yathābhūta)으로 보아 승의로 보고 있다. 이것은 인(人)을 가명으로서 무아인 세속의 언설로 할 뿐만 아니라, 법(法)인 인연을 승의의 유로 하고 있다.
 '구사론'에서는 여러 가지 구성요소가 있는 곳에 명명된 존재의 관념 언설이 세속제이며 세속 언설의 인연이 되는 모든 요소가 승의제라고 하는 이제설을 펴고 있다. 여기서 세속제는 주관의 인식이고 승의제는 주관의 인식을 나오게 하는 대상적인 실재적 근거로서 관념에 대응하는 실재가 있다고 하는 법유의 이론에 의해서 이제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아비달마의 이제설에 의하면, 우리들의 세속 언설은 가명(假名)이고, 무가치한 것이고, 비인격적인 요소만이 승의의 실재이다. 이런 이제설의 입장에서는 일체를 비인격적인 요소로 보아 아견을 멸하는 것이 실천도가 되며, 일체가 생명이 없는 모든 요소로 해소되고 분리된 사멸의 상태가 이상으로 할 만한 목표가 된다. 곧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란 이와 같은 이상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반야경의 이제설
 대승의 반야경에서는 일체가 객관적인 인연에 의하여 일어나고 독립자존성이 없는 무아무실체인 언설이라고 하는 무아설은 인법 일체가 무아 무실체임을 반성시키려고 하는 교설로 이것이 모든 법이 실재한다고 하는 법유(法有)의 교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팔천송반야경'에서는 아함경전에 설해진 연기 무아의 교설과 다르지 않다. 악기의 소리 집 신체 수레 등일체의 생기나 존재가 인연의 화합에 의해서 구성되는데서 이름 붙여지고 시설되며 인연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는 무실체인 관념 언설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반야경에서는 일체 존재는 연기이며 무실체인 관념 언설이기 때문에 불가득이다. 따라서 반야경의 공 불가득의 교설에서 는 당연히 연기설에 의한 무실체의 교설이 포함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나아가면 반야경은 일체가 오직 이름뿐이며, 무실체인 언설이기 때문에 일체를 불가득이라고 하고 몽환 같은 존재라 한다.

“아(我)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수명이라는 것도 없고, 유정도 없으며, 양육자도 없고, 신아(神我)도 없으며, 사람도 없고, 힘이라는 것도 없으며, 아는 자도 없고, 작자도 없으며, 수자도 없고, 지자도 없으며, 보는 자도 없을 때 어떻게 해서 색(色)이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해서 수 상 행 식이 있을 것인가.”('마하반야바라밀경 구족품 제81)

 이와 같이 반야경의 공설에서는 일체가 무실체인 세속의 언설이며 인도 법도 모두 부정하는 일체개공설이다. 곧 반야경의 공설은 승의제로 하는 학설이다. 이렇게 본다면 반야경의 이제설은 인도 법도 모두 세속적이 언설로서 세속제이며 무아무실체로서, 언설을 초월한 불가득 불가설의 공성이야말로 승의의 진실(승의제)가 된다.
 지금까지의 이제설은 불타교법에 대한 언설 불가설이라는 이제의 입장이었다. 곧 붓다 보살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에 관한 일체의 불타교설이 불가언 공성의  승의제를 이해시키기 위한 방편이 되는 언설의 세속제 였다. 그런데 이제가 불타교설의 형식으로서 설하는 경우도 있다.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세속제와 승의제의 이제에 의해 일체 중생에게 법을 설한다.”('마하반야바라밀경' 구족품 제81)

 이 경문을 보면 승의제는 불가설의 공성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세속제와 승의제는 모두 교설의 형식이다. 본래 이제는 진리의 형식이지 교설의 형식이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이제의 경우는 세속제는 세속제를 말하는 교설이고, 승의제는 승의를 말하는 교설의 의미이다. 승의제는 불가설 공성을 말하는 교설을 뜻하고, 세속제는 오온 십이처의 언설 세속의 존재를 말하는 교설을 가리킨다. 이제가 교설의 형식을 나타내는 경우에는 제(諦)가 약교(約敎)의 제(諦)가 된 것이다. 이제를 단순히 진리의 형식으로만 보아서는 안되고 진리의 형식인 동시에 진리의 형식을 말하는 교설의 형식으로서도 사용되는 것이다. '중론' 제24장에서는 “모든 부처님의 설법은 이제에 의한다. 세간 세속제와 승의제의 이제이다”라고 한 것이 이 뜻이다.
 반야경의 이제설은 불가설 공성으로 여기는 승의제와 불타의 불가설 공성을 위한방편 을 세속제로 하는 이제설을 살펴보았고, 승의제와 세속제를 교설의 형식으로 하는 이제설이 보인다. 이들 불타의 교설상에서 반성된 이제설과는 별도로 반야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속제와 승의제의 상즉을 설하는 이제설을 들 수 있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간 세속과 승의와는 다릅니까. 다르지 않습니까. 세존이 이르시되, 수보리여. 세간 세속과 승의와는 다르다고 하지 않는다. 세간 세속의 진여는 승의의 진여이다.”('마하반야바라밀경'도수품 제71)

 여기서는 언설의 세속제와 불가설의 승의제는 방편이고 목적이라 할 수 있어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속제는 승의제로 나아가는 과정적인 방편으로 그 존재 자체로 승의제와 상즉하고 승의제는 세속의 언설을 초월한 불가득 공성이면서 세속제와 상즉하는 것이다.
 이제의 상즉은 승의제가 불가언설의 공성으로 세속제를 부정하는 초월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세속제의 밖에 상대적으로 가로놓인 부정의 원리가 아니라, 세속제의 본래 의미가 되는 즉세속적(卽世俗的) 진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승의제의 공성이 세속적인 색 등의 오온에 대한 상대적인 부정의 원리가 아니라, 색 등 오온의 본래 의미가 되는 즉세속적인 진실임을 보여준다. “가명과 모순되지 않게 법성을 설한다”는 경문은 이제의 상즉을 말하는 것으로 가명은 세속제요 법성은 공성승(空性承衣諦) 의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