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불일불이(不一不二)
1) 일이문(一異門)을 타파
'중론'의 제2장(운동의 고찰)에서는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현재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논의(삼시문三時門을 파함 제1∼제17)의 다음에는 제18시(詩)에서 제21시에 의해서 사라지는 움직임과 사라지는 주체의 불일불이(不一不異)를 증명하고 있다. 가상대사 길장은 이것을 “일이문(一異門)의 타파”라고 이름붙이고 있다. 이제 일이문 타파의 대표로 이 부분에 대한 찬드라키르티의 주(註)를 들어보기로 한다.('프라상가파다' p.101∼105)
“또한 만약 사라지는 움직임이 사라지는 주체를 떠나서 존재한다 해도, 혹은 떠나지 않고 존재한다 해도, 어떻게 고찰하더라도 사라지는 움직임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서술하여 말하기를, ‘사라지는 움직임을 이루는 것이, 곧 사라지는 주체에 있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한 사라지는 주체가 사라지는 움직임과도 다르게 있다고 하는 것도 옳지 않다.’”(제18詩)
그런데 어째서 옳지 않다고 하는가. 답해서 말하면,
“만약 사라지는 움직임을 이루는 것이 곧 사라지는 주체에 있다고 한다면 작용하는 주체와 작용하는 움직임이 일체로 있는 것이 된다.”(제19시)
만약 이 사라지는 작용이 사라지는 주체를 떠나지 않고(곧 사라지는 주체와) 다르지 않다면 그때에는 작용하는 주체와 작용이 동일하게 되는 것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작용이고, 이것은 작자(만드는 주체)라고 하는 구별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단절작용과 단절자가 동일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라지는 작용이 곧 사라지는 주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한 사라지는 주체와 사라지는 작용이 다른 것으로도 다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밝히고자 하여 말하기를,
“또한 만약 사라지는 주체와 사라지는 작용이 다르다고 분별한다면 사라지는 주체가 없다고 해도 사라지는 작용이 있다는 것이 될 것이고, 또한 사라지는 작용이 없다고 해도 사라지는 주체가 있다는 것이 될 것이다.”(제20시)
왜냐하면 만약 사라지는 주체와 사라지는 작용이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때에는 사라지는 주체와 사라지는 작용은 무관한 것이 될 것이다. 또한 사라지는 작용은 사라지는 주체와 관계없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비유하자면 포목과 병이 별개로 성립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사라지는 작용은 사라지는 주체와는 별도로 성립되고 있다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또한 사라지는 주체와 사라지는 작용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뜻으로 알기 때문에,
“일체로 있다고 해도 별체(別體)로서도 성립하는 것이 없는 이 사라지는 작용과 사라지는 주체의 두 가지는 어떻게 성립할 것인가.”(제21시)
위에서 기술한 이론에 의해서 일체라고 해도 혹은 별체라고 해도 성립하지 않는 경우 그 사라지는 주체와 사라지는 작용의 양자가 지금 어떻게 해야 성립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말하기를, “이 두 가지는 어떻게 성립할 수 있을까”라고 사라지는 주체와 사라지는 작용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는 취지이다.('푸라상가파다', p.104-105)
2) 법유(法有)의 모순을 타파하다
단지 사라지는 작용과 사라지는 주체라고 하는 관계를 떠나서 이것을 일반적인 해석을 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관관계에 있는 갑과 을이라고 하는 두 가지의 형체가 전혀 다르다고 한다면 양자의 사이에는 어떤 관계도 없고 따라서 작용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갑이 있고 을이 있다고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갑이 있고 을이 있다고 하는 것은 양자가 내면에 있어서 연락되어 있다. 그러므로 갑과 을이 전연 다르다고 하는 것은 말할 수 없다.
또한 갑과 을이 전연 동일하지 않다면 양자에 의해서 작용이 일어남도 없고, 또 갑이 있고 을이 있다고 하는 구별도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전혀 동일하다고 할 수 없다.
여기에 있어서도 '중론'이 단순한 실재론을 공격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법유를 설하는 특수한 철학의 근본적 입장을 공격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단순한 실재론에 있어서는 여기에 한 사람의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걸어가는 데에서 그 사람을 ‘가는 주체’라 하고, 걷는 작용을 추상화하여 ‘가는 작용’이라고 하는데 지나지 않기 때문에 양자의 같고 다름이라고 하는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법유(法有)의 입장은 자연적 존재를 문제로 하고, 그 존재모습이 있고, 이루어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의 사람이 걸어가는 경우에 “간다”고 하는 “존재양상”과 “가는 주체”라고 하는 “존재양상”과를 구별하여 고려해서, 이러저러하게 실체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법유의 입장을 이론적으로 어디까지라도 깊이 추구해 간다면 결국 여기까지 도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양자의 같고 다름의 여부가 문제가 된다. 나가르주나는 실로 이점을 타파한 것이다.
따라서 나가르주나는 개념을 부정했다고 하더라도 개념의 모순을 지적했던 것은 아니다. 개념에 형이상학적 실재성을 부여하는 것을 부정한 것이다. “가는 작용”이나 “가는 주체”를 부정했던 것은 아니고 “가는 작용”이나 “가는 주체”라고 하는 존재양상을 실유로 있다고 생각하고, 혹은 그 입장을 논리적 귀결로 하여 그런 것이 실유로 있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입장에 있는 부류의 철학적 경향을 배척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관관계에 있는 두 가지의 개념은 같음이 아니고 다름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같고 다름[一異]의 타파”는 『중론』에 있어서 곳곳에서 사용되고 있다.
제6장 제4시, 제5시, 제20장 제19시, 제20시, 제21장 제10시, 제27장 제8시, 다시 제10장 전체도 “같고 다름의 타파”로 전부 되어 있다.
다시 이 같고 다름[一異]의 타파는 나가르주나의 다른 저서에 있어서는 곧 '십이문론'(觀一異門 제6), '광파경(廣破經)', '대지도론'에 있어서도 사용되고 또한 요가행파에 있어서도 서술되어 있다.
3) 오구문을 파함[五求門破]
또한 '중론'에 있는 다른 논법 예를 들면, '오구문타파'는 찬드라키르티가 말했던 것처럼('푸라상가파다' p.212) 같고 다름[一異]의 타파에서 논리적 필연성을 가지고 도출된 것이다. 곧 갑과 을이라든가, (1) 동일한 것으로 존재하는 것, (2) 다른 것으로 존재하는 것과, (3) 갑과 을을 있다고 하는 것, (4) 갑이 을의 기반으로 있다는 것, (5) 을이 갑의 위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오구문을 타파하는(다섯 가지 견해를 타파하는)데 있으나, (1)과 (2)를 부정하고, (3) (4) (5)는 저절로 부정된다고 한다. 따라서 이 일이문(一異門) 타파에 끼쳤던 영향은 매우 크다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
3. 불생불멸(不生不滅)
1) 공통하는 의론의 근본적 태도
'중론'에 있어서는 불생불멸(不生不滅)도 작용에 관해서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불래불거(不來不去)의 증명의 경우와 같은 논리를 사용하고 있다. 곧 제2장의 최초에서 “우선 이미 갔다는 것은 가지 않음이다. 또한 아직 가지 않은 것도 가지 않음이다. 다시 <이미 갔다는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과를 떠난 <현재 가고 있는 것>도 가지 않음이다.”(제1시)라고 논하고 똑같이 밝히기를,
“이제 현재 생기는 것도, 이미 생긴 것도, 아직 생기지 않은 것도 결코 생기지 않는다. 지금 현재 가고 있는 것도, 이미 가버린 것도, 아직 가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이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제7장 제14시)
“아직 멸하지 않은 것도 멸하지 않는다. 이미 멸해버린 것도 멸하지 않는다. 지금 현재에 멸해가고 있는 것도 또한 아직 똑같이 멸하지 않는다.”(제7장 제26시)라고 한다. 그러므로 불생불멸은 물론 이고, 다른 일체의 작용에 관해서도 제2장의 삼세문(三世門) 타파를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푸라상가의 방법은 이것에만 한정하지 않기 때문에 '중론'에 있어서는 불생불멸에 관해서도, 그 증명을 위하여 여러 가지 논법이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제논법에 관해서는 부분적으로 이미 언급했으나(예를 들면, Ⅱ-4 공의 논리, “운동 부정의 논리”이하), 의론의 근본적 태도는 이미 '중론' 전체를 통해서 대부분 일관하고 있다.
4. 부단불상(不斷不常)
1) 부단불상을 주장하는데 어울리는 법유와 법공
다음에 부단불상의 증명을 검토해보면, 이것을 다른 불래(不來), 불거(不去), 불일(不一), 불이(不異), 불생(不生), 불멸(不滅)의 증명의 경우와 비교해 보아도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법유(法有)의 경우는 생(生), 멸(滅), 일(一), 이(異), 거(去), 래(來)를 인정하고 있는데 대해서, 법공(法空)의 경우는 이것을 승인하지 않고, 불생, 불멸, 불일, 불이, 불래, 불거를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단멸과 상주에 관해서는 양방의 입장이 공통으로 이것을 배척해서 양자가 함께 자설로 부단불상을 밝히고 있다고 하는 것을 서로 주장하고 있다.
원래 붓다는 불교 외의 제파의 학설을 단(斷) 혹은 상(常)의 견해에 떨어진 것으로 배척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불교도들에게는 단멸과 상주의 편견을 가진 것은 입장상 허락하지 않는다.
곧 어떠한 개인 존재도 또한 어떠한 사물도 영구히 존재한다고(상주) 생각하지 않고, 또한 반대로 단지 모멸해 사라져버리는 것뿐이라고(단멸)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양방의 견해는 함께 배척되지 않으면 안된다.
부단불상은 불교도로서는 절대의 진리이다. 따라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같은 학파라고 해도 자설(自說)은 단상의 견해에 떨어지는 일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유부와 같이 다르마를 독립의 실체로 보고 이것이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항상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면 현저하게 집적설(集積說)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이것이 과연 부상부단을 설한 붓다의 최초 사상에 충실히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립하는 학파에 있었던 경부(經部)는 이미 이런 점에 착안해서 만약에 설일체유부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삼세실유법체항유(三世實有法體恒有)”의 설을 인정한다면 상주라고 하는 이론적 결점에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라고 말하고 유부(有部)를 공격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유부는 다르마 그 자체(법체)는 항상 존재한다고 해도 세상은 지나가기 때문에 곧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시간적 규정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항상의’ 이론적 결점에는 빠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극력 해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의연(依然)으로서 유부에는 이 약점이 항상 따라다니고 있다.
1) 일이문(一異門)을 타파
'중론'의 제2장(운동의 고찰)에서는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현재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논의(삼시문三時門을 파함 제1∼제17)의 다음에는 제18시(詩)에서 제21시에 의해서 사라지는 움직임과 사라지는 주체의 불일불이(不一不異)를 증명하고 있다. 가상대사 길장은 이것을 “일이문(一異門)의 타파”라고 이름붙이고 있다. 이제 일이문 타파의 대표로 이 부분에 대한 찬드라키르티의 주(註)를 들어보기로 한다.('프라상가파다' p.101∼105)
“또한 만약 사라지는 움직임이 사라지는 주체를 떠나서 존재한다 해도, 혹은 떠나지 않고 존재한다 해도, 어떻게 고찰하더라도 사라지는 움직임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서술하여 말하기를, ‘사라지는 움직임을 이루는 것이, 곧 사라지는 주체에 있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한 사라지는 주체가 사라지는 움직임과도 다르게 있다고 하는 것도 옳지 않다.’”(제18詩)
그런데 어째서 옳지 않다고 하는가. 답해서 말하면,
“만약 사라지는 움직임을 이루는 것이 곧 사라지는 주체에 있다고 한다면 작용하는 주체와 작용하는 움직임이 일체로 있는 것이 된다.”(제19시)
만약 이 사라지는 작용이 사라지는 주체를 떠나지 않고(곧 사라지는 주체와) 다르지 않다면 그때에는 작용하는 주체와 작용이 동일하게 되는 것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작용이고, 이것은 작자(만드는 주체)라고 하는 구별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단절작용과 단절자가 동일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라지는 작용이 곧 사라지는 주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한 사라지는 주체와 사라지는 작용이 다른 것으로도 다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밝히고자 하여 말하기를,
“또한 만약 사라지는 주체와 사라지는 작용이 다르다고 분별한다면 사라지는 주체가 없다고 해도 사라지는 작용이 있다는 것이 될 것이고, 또한 사라지는 작용이 없다고 해도 사라지는 주체가 있다는 것이 될 것이다.”(제20시)
왜냐하면 만약 사라지는 주체와 사라지는 작용이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때에는 사라지는 주체와 사라지는 작용은 무관한 것이 될 것이다. 또한 사라지는 작용은 사라지는 주체와 관계없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비유하자면 포목과 병이 별개로 성립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사라지는 작용은 사라지는 주체와는 별도로 성립되고 있다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또한 사라지는 주체와 사라지는 작용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뜻으로 알기 때문에,
“일체로 있다고 해도 별체(別體)로서도 성립하는 것이 없는 이 사라지는 작용과 사라지는 주체의 두 가지는 어떻게 성립할 것인가.”(제21시)
위에서 기술한 이론에 의해서 일체라고 해도 혹은 별체라고 해도 성립하지 않는 경우 그 사라지는 주체와 사라지는 작용의 양자가 지금 어떻게 해야 성립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말하기를, “이 두 가지는 어떻게 성립할 수 있을까”라고 사라지는 주체와 사라지는 작용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는 취지이다.('푸라상가파다', p.104-105)
2) 법유(法有)의 모순을 타파하다
단지 사라지는 작용과 사라지는 주체라고 하는 관계를 떠나서 이것을 일반적인 해석을 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관관계에 있는 갑과 을이라고 하는 두 가지의 형체가 전혀 다르다고 한다면 양자의 사이에는 어떤 관계도 없고 따라서 작용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갑이 있고 을이 있다고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갑이 있고 을이 있다고 하는 것은 양자가 내면에 있어서 연락되어 있다. 그러므로 갑과 을이 전연 다르다고 하는 것은 말할 수 없다.
또한 갑과 을이 전연 동일하지 않다면 양자에 의해서 작용이 일어남도 없고, 또 갑이 있고 을이 있다고 하는 구별도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전혀 동일하다고 할 수 없다.
여기에 있어서도 '중론'이 단순한 실재론을 공격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법유를 설하는 특수한 철학의 근본적 입장을 공격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단순한 실재론에 있어서는 여기에 한 사람의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걸어가는 데에서 그 사람을 ‘가는 주체’라 하고, 걷는 작용을 추상화하여 ‘가는 작용’이라고 하는데 지나지 않기 때문에 양자의 같고 다름이라고 하는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법유(法有)의 입장은 자연적 존재를 문제로 하고, 그 존재모습이 있고, 이루어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의 사람이 걸어가는 경우에 “간다”고 하는 “존재양상”과 “가는 주체”라고 하는 “존재양상”과를 구별하여 고려해서, 이러저러하게 실체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법유의 입장을 이론적으로 어디까지라도 깊이 추구해 간다면 결국 여기까지 도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양자의 같고 다름의 여부가 문제가 된다. 나가르주나는 실로 이점을 타파한 것이다.
따라서 나가르주나는 개념을 부정했다고 하더라도 개념의 모순을 지적했던 것은 아니다. 개념에 형이상학적 실재성을 부여하는 것을 부정한 것이다. “가는 작용”이나 “가는 주체”를 부정했던 것은 아니고 “가는 작용”이나 “가는 주체”라고 하는 존재양상을 실유로 있다고 생각하고, 혹은 그 입장을 논리적 귀결로 하여 그런 것이 실유로 있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입장에 있는 부류의 철학적 경향을 배척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관관계에 있는 두 가지의 개념은 같음이 아니고 다름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같고 다름[一異]의 타파”는 『중론』에 있어서 곳곳에서 사용되고 있다.
제6장 제4시, 제5시, 제20장 제19시, 제20시, 제21장 제10시, 제27장 제8시, 다시 제10장 전체도 “같고 다름의 타파”로 전부 되어 있다.
다시 이 같고 다름[一異]의 타파는 나가르주나의 다른 저서에 있어서는 곧 '십이문론'(觀一異門 제6), '광파경(廣破經)', '대지도론'에 있어서도 사용되고 또한 요가행파에 있어서도 서술되어 있다.
3) 오구문을 파함[五求門破]
또한 '중론'에 있는 다른 논법 예를 들면, '오구문타파'는 찬드라키르티가 말했던 것처럼('푸라상가파다' p.212) 같고 다름[一異]의 타파에서 논리적 필연성을 가지고 도출된 것이다. 곧 갑과 을이라든가, (1) 동일한 것으로 존재하는 것, (2) 다른 것으로 존재하는 것과, (3) 갑과 을을 있다고 하는 것, (4) 갑이 을의 기반으로 있다는 것, (5) 을이 갑의 위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오구문을 타파하는(다섯 가지 견해를 타파하는)데 있으나, (1)과 (2)를 부정하고, (3) (4) (5)는 저절로 부정된다고 한다. 따라서 이 일이문(一異門) 타파에 끼쳤던 영향은 매우 크다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
3. 불생불멸(不生不滅)
1) 공통하는 의론의 근본적 태도
'중론'에 있어서는 불생불멸(不生不滅)도 작용에 관해서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불래불거(不來不去)의 증명의 경우와 같은 논리를 사용하고 있다. 곧 제2장의 최초에서 “우선 이미 갔다는 것은 가지 않음이다. 또한 아직 가지 않은 것도 가지 않음이다. 다시 <이미 갔다는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과를 떠난 <현재 가고 있는 것>도 가지 않음이다.”(제1시)라고 논하고 똑같이 밝히기를,
“이제 현재 생기는 것도, 이미 생긴 것도, 아직 생기지 않은 것도 결코 생기지 않는다. 지금 현재 가고 있는 것도, 이미 가버린 것도, 아직 가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이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제7장 제14시)
“아직 멸하지 않은 것도 멸하지 않는다. 이미 멸해버린 것도 멸하지 않는다. 지금 현재에 멸해가고 있는 것도 또한 아직 똑같이 멸하지 않는다.”(제7장 제26시)라고 한다. 그러므로 불생불멸은 물론 이고, 다른 일체의 작용에 관해서도 제2장의 삼세문(三世門) 타파를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푸라상가의 방법은 이것에만 한정하지 않기 때문에 '중론'에 있어서는 불생불멸에 관해서도, 그 증명을 위하여 여러 가지 논법이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제논법에 관해서는 부분적으로 이미 언급했으나(예를 들면, Ⅱ-4 공의 논리, “운동 부정의 논리”이하), 의론의 근본적 태도는 이미 '중론' 전체를 통해서 대부분 일관하고 있다.
4. 부단불상(不斷不常)
1) 부단불상을 주장하는데 어울리는 법유와 법공
다음에 부단불상의 증명을 검토해보면, 이것을 다른 불래(不來), 불거(不去), 불일(不一), 불이(不異), 불생(不生), 불멸(不滅)의 증명의 경우와 비교해 보아도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법유(法有)의 경우는 생(生), 멸(滅), 일(一), 이(異), 거(去), 래(來)를 인정하고 있는데 대해서, 법공(法空)의 경우는 이것을 승인하지 않고, 불생, 불멸, 불일, 불이, 불래, 불거를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단멸과 상주에 관해서는 양방의 입장이 공통으로 이것을 배척해서 양자가 함께 자설로 부단불상을 밝히고 있다고 하는 것을 서로 주장하고 있다.
원래 붓다는 불교 외의 제파의 학설을 단(斷) 혹은 상(常)의 견해에 떨어진 것으로 배척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불교도들에게는 단멸과 상주의 편견을 가진 것은 입장상 허락하지 않는다.
곧 어떠한 개인 존재도 또한 어떠한 사물도 영구히 존재한다고(상주) 생각하지 않고, 또한 반대로 단지 모멸해 사라져버리는 것뿐이라고(단멸)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양방의 견해는 함께 배척되지 않으면 안된다.
부단불상은 불교도로서는 절대의 진리이다. 따라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같은 학파라고 해도 자설(自說)은 단상의 견해에 떨어지는 일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유부와 같이 다르마를 독립의 실체로 보고 이것이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항상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면 현저하게 집적설(集積說)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이것이 과연 부상부단을 설한 붓다의 최초 사상에 충실히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립하는 학파에 있었던 경부(經部)는 이미 이런 점에 착안해서 만약에 설일체유부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삼세실유법체항유(三世實有法體恒有)”의 설을 인정한다면 상주라고 하는 이론적 결점에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라고 말하고 유부(有部)를 공격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유부는 다르마 그 자체(법체)는 항상 존재한다고 해도 세상은 지나가기 때문에 곧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시간적 규정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항상의’ 이론적 결점에는 빠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극력 해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의연(依然)으로서 유부에는 이 약점이 항상 따라다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