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단불상(不斷不常)
1) 부단불상을 주장하는데 어울리는 법유와 법공
2) 나가르주나의 주장
나가르주나도 확실히 이런 ‘항상성’의 약점을 무릅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제 『중론』에 대해서 살펴보면, 법유(法有)의 입장에 있는 사람은 극력 자기의 설이 단(斷) 혹은 상(常)의 이론적 결함에 처해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데 대해서 나가르주나는 예를 든 상대가 이와 같이 증명해도 역시 단과 상의 이론적 결함에 처해있다고 공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제7장 제17시(詩)에 있어서 법유의 입장을 세운 사람들은
“이와 같이 마음으로 개인존재의 연속이 일어나고, 또한 개인 존재의 연속으로부터 과보의 생기(生起)가 있으며, 과보는 업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단(斷)이라 해도 없고, 또한 상(常)이라고 해도 없다”라고 말하고, 또한 제20시(詩)에서도,
“부처님에 의해 설해진 ‘업이 소실되지 않는다는 원리’는 공이라고 하는데 있어서도 그렇게 단절되지 않고 윤회하는데 있어서도 상주하지 않는다”라고 설하고 있는데 대해서 나가르주나는,
“어째서 업은 생기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본질을 의지하지 않는(무자성)데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불생(不生)에 있기 때문에(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멸실하는 것도 아니다”(제21시)라고 답하고 있다.
이런 의미는 부처가 ‘업은 과보를 받지 않고 소실하는 것은 없다고 하는 원리’를 설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업이 본체가 없다고 하는 것(무자성)에 있기 때문에 불생(不生)에 있다고 하며, 따라서 불멸(不失)하는 데에 있다고 하고, 상대(正量部)에서 이해하는 것 같은 의미는 아니라고 하고 있다. 다시 22시에 의하면,
“만일 업(業)이 그런 자체로서 (자성상)존재하지 않는다면 의심할 것도 없이 상주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업은 지어지는 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다. 무엇이라고 해도 상주하는 것은 지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답하고, 이하에서 반박을 계속하고 있으나 주지하다시피 나가르주나는 업이 그것 자체로서(자성상) 있다고 한다면 상주라고 하는 이론적 결함에 처한다든가, 업이 자체로 없다고 하는(무자성) 데에 있기 때문에 상주라고 하는 이론적 결함에 빠지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제21장 제15시에 있어서도 법유(法有)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 “유(有)의 입장을 승인(承認)하는 사람이라 해도 단멸(斷滅)이라고 하는 것도 없으며, 또한 상주(常住)라고 하는 것도 없다. 우리들은 이런 생존이라고 하는 것은 결과와 원인과의 생기(生起), 소멸의 연속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는데 대하여 나가르주나는,
“만약 결과와 원인의 생기와 소멸과의 연속이 생존한다면 소멸이 다시 생기는 일이 없기 때문에 원인의 단멸이 따라서 일어난다.”(제21장 16시)
3) 단상(斷常)에 빠짐을 논파
이상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법유(法有)의 입장도 법공(法空)의 입장도 모두 ‘부단부상’을 진실한 불교로 보아서 자기의 설에 있어서는 단상의 이론적 결점이 없다는 것을 상호 주장하고 있다.
어느 쪽이 붓다의 진의에 가까울까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이제 독립의 연구를 필요로 하지만,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실유하는 법을 인정한다 해도 그것이 존속한다면 상주라고 하는 이론적 결함에 떨어지고, 멸한다고 하면 단멸이라고 하는 이론적 결함에 떨어지기 때문에 법유의 입장에 있어서는 불상부단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반대로 다르마가 실체가 없다는 것[무자성]에 있기 때문에 불상부단이라 말할 수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곧 일(一) 이(異) 거(去) 래(來) 생(生) 멸(滅)을 논파했던 것처럼 단상을 논파한 것은 아니고 불상부단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상대의 설을 실은 단상에 떨어졌다고 하고 있어서 이것을 논파했기 때문에 다른 논란(파사)의 논법과는 어느 정도 달리하고 있다.
5. 『중론'에 있어서 부정의 논리의 역사적 맥락
1) 실념론(實念論)적 사유의 배척
이상 ‘팔부(八不)’를 중심으로 해서 『중론』에 있어서 이른바 파사의 논법의 근본적 태도를 논했으나 『중론'의 논법이 일견 독단적이고, 또한 궤변을 희롱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론을 자세히 고찰한다면 여러 가지 사상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통렬한 논법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중론』은 확실히 종전의 불교 다르마의 체계를 부정하고 파괴했던 것은 아니고, 법을 실유로 보는 사상을 공격하고 있다. 개념을 부정했던 것은 아니고 개념을 초월적 실재로 이해하는 경향을 배척했던 것이다. “에 있다는 것” essentia를 보다 높은 영역으로 “가 있는 것” existentia로 만들어서 실체화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서양 중세 철학사에 있어서 유례를 인용해 본다면 실념론(Realism Begriffs realism) 적인 사유를 배척하고 있는 것이다.
2) 중론파와 경부(經部)
다음의 문제로 『중론』의 이와 같은 논법은 어떤 계통에서 얻어지는 것일까 하는 역사적 맥락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전적으로 나가르주나의 독창적인 것일까, 혹은 다른 파에서 암시를 얻은 것일까. 『중론』에 있는 부분은 의심할 것도 없이 나가르주나의 독창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서양의 학자는 경부와 중관파를 유명론자(唯名論者 Nominalist)라고 부르고 있다. 양자가 공의 개념을 초월적 실재로 보는 경향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양자의 관계가 어떠한지가 문제가 된다. 양자의 논법에 유사점이 인정되는 것은 그대로 부분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나 한층 현저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전체적으로 취급하는 것은 지금 여유가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중론』중에서 당시의 소승불교와의 관계가 가장 밀접한 것으로 생각되는 제7장(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 유위有爲 의 고찰)을 취급하고, 또한 경부의 사상을 아는 데에는 『구사론』에 의한 것으로 한다.(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야쇼미트라에 따라서 저자 바수반두의 입장을 우선 경부로서 놓고) 물론 양자를 동일 평면상에 놓고서 취급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구사론』에 있어서는 이 문제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의 사상(만들어진 것 유위有爲의 다르마)에는 생 주 이 멸이라고 하는 네 가지의 특질이 있다고 이해하는 설일체유부의 사상설이 주로 공격받고 있는데 『중론』에서는 생 주 멸의 3상을 취하는 설이 논파되고 있다.(「십이문론」 「대지도론」 및 아리야데바의 「사백론」도 같은 3상설을 논파하고 있다) 또한 『구사론』은 유부를 상대로 하고 있으나, 『중론』의 제7장이 유부를 공격하고 있을까 어떨까 하는 문제가 되고 있다. 그렇지만 유위상 및 그의 부수적 특질(수상隨相)을 세웠다고 하는 근본적 입장은 같다는 것이다.
3) 사유위상(四有爲相)과 유부
그런데 그의 문제점은 여기에 있다. 예를 들면 우리의 마음과 몸이 가벼이 들뜨는 기분(경안輕安)이 되는 것이 있다. 이러한 가벼이 들뜬 기분이라고 하는 움직임(다르마)이 일어나느냐 일어나지 않느냐, 다음 순간에는 소멸하지만 자세히 나누어서 말하면, 그 사이에 ①생기하고, ②생기했다가 그 상태를 유지하고, ③그의 상태가 변화하고, ④소멸한다고 네 가지 단계가 있다. 그것을 여러 한역에서는 ①생, ②주, ③이, ④멸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유위의 다르마의 무상한 모습을 보여주는 특질이 있어서 사유위상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설일체유부의 교학에 의하면 이러한 네 가지는 독립의 원리(다르마)에 있고, 사람들에 있어서 “가벼이 들뜨는 기분” 일어날 때에는 생(生)이라고 하는 독립의 실체로서의 원리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이 생긴다고 한다.
그것이 머무르는 것은 주(住)라고 하는 원리가 발생하기 때문이고, 다시 그 가볍게 들뜨는 기분이 변화하는 것은 이(異)라고 하는 원리가 발생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이 소멸하는 것은 멸(滅)이라고 하는 원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生)이라고 하는 원리가 “가볍게 들뜨는 기분”에 발생하는 그것을 생기게 하기 위해서는 생생(生生, 생을 生起시키는 것)이라고 하는 다른 원리가 작용한다. 그것을 한역으로 수상(隨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생생을 생기게 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라고 하는 것, 근본의 생이라고 하는 원리(본생)가 발생한다. 따라서 무한 소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주(住)와 주주, 이와 이이 멸과 멸멸과의 사이에도 같은 모습의 관계가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견해를 나가르주나는 비판하고 있고, 경부도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중론' 및 『
구사론'에 있어서 이와 같은 사상을 공격하는 논법을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4) 『대비바사론』과 『구사론』과의 대응
한편 『중론』 제7장 제1시에는 “만약 생기는 것[生]이 <만들어진 것> 유위로 있다고 한다면 거기(곧 生)에는 세 가지의 특질(相, 곧 생 주 멸)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만약 아직 생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無爲)에 있다고 한다면 어째서 만들어진 것을 만들어진 것으로 특질(有爲相)이 있을까.”라고 되어있으나, 전반은 『구사론』에 “제행의 유위가 되는 것은 네 가지의 본 모습에 의한다. 본 모습의 유위가 되는 것은 네 가지의 수상(隨相)에 의한다.”고 되어 있는 것에 대응해서 후반은 『대비바사론』에 의해서 분별론자는 “네 가지 유위상은 무위에 있고 성품이 강성하게 있기 때문에 유위상으로 있는 것이다”(38권, 「대정장」27, p.198)라고 설하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혹은 이와 같은 설에 들어맞을지도 모른다.
제2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하는 세 가지 상이 여러 가지로 다르다고 한다면, 유위(의 것)의 (생 주 이 멸이라고 하는) 특질을 이루는데 충분하지 않다. 그것이 합일한다면 어째서 동일한 때에 동일한 장소에 있다고 하는 것이 가능할까.”
『구사론』에는 주로 후반부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후반을 핑카라의 주석에는 “만약(그러한 것이) 화합한다면 그러한 것은 함께 서로 틀린(모순되는) 법이 된다. 왜냐하면 (동) 일시에 함께 나타난다”고 하는 하는 것만이 있으나, 『구사론』을 보면 설일체유부가 “만약 유위인 색(色) 등의 자성을 떠나서 생(生) 등의 물질(생기하는 원리 등의 실체)이 있다는 것은 또한 어떤 비리(非理)가 나타난다”고 반론하고 있는데 대해서, 경량부는 그것을 논란하기를 “동(同) 하나의 법이 동(同) 한 때에 곧 생하고 주하고 쇠퇴하여 변이하고[衰異] 괴멸(壞滅)하고 함께 존재한다고 인정할 수 있을까”(『구사론』 5권 16매 우-좌)라고 앞에 제시하고, “또한 주(住) 등의 세 가지의 작용(움직임)은 모두 현재라면 다시 하나의 법의 체가 한 찰나중에 곧 안주와 쇠이와 괴멸이 있어야 한다. 만약 어느 때에 주상(住相)이 능히 이 법을 주하게 하고, 곧 때에 이멸(異滅)이 능히 쇠괴(衰壞)한다면, 그 때에 이 법을 안주한다고 이름 할 수 있다. 쇠이(衰異)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괴멸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라고 논하고, 또한 후의 방법에 대해서는 “같은 하나의 법이 같은 때에 있어서 또한 주하고 또한 멸한다면 바른 이치에 응하는 것이 아니다.”라고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논법은 『중론』과 똑같다고 할 수 있다.
1) 부단불상을 주장하는데 어울리는 법유와 법공
2) 나가르주나의 주장
나가르주나도 확실히 이런 ‘항상성’의 약점을 무릅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제 『중론』에 대해서 살펴보면, 법유(法有)의 입장에 있는 사람은 극력 자기의 설이 단(斷) 혹은 상(常)의 이론적 결함에 처해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데 대해서 나가르주나는 예를 든 상대가 이와 같이 증명해도 역시 단과 상의 이론적 결함에 처해있다고 공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제7장 제17시(詩)에 있어서 법유의 입장을 세운 사람들은
“이와 같이 마음으로 개인존재의 연속이 일어나고, 또한 개인 존재의 연속으로부터 과보의 생기(生起)가 있으며, 과보는 업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단(斷)이라 해도 없고, 또한 상(常)이라고 해도 없다”라고 말하고, 또한 제20시(詩)에서도,
“부처님에 의해 설해진 ‘업이 소실되지 않는다는 원리’는 공이라고 하는데 있어서도 그렇게 단절되지 않고 윤회하는데 있어서도 상주하지 않는다”라고 설하고 있는데 대해서 나가르주나는,
“어째서 업은 생기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본질을 의지하지 않는(무자성)데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불생(不生)에 있기 때문에(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멸실하는 것도 아니다”(제21시)라고 답하고 있다.
이런 의미는 부처가 ‘업은 과보를 받지 않고 소실하는 것은 없다고 하는 원리’를 설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업이 본체가 없다고 하는 것(무자성)에 있기 때문에 불생(不生)에 있다고 하며, 따라서 불멸(不失)하는 데에 있다고 하고, 상대(正量部)에서 이해하는 것 같은 의미는 아니라고 하고 있다. 다시 22시에 의하면,
“만일 업(業)이 그런 자체로서 (자성상)존재하지 않는다면 의심할 것도 없이 상주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업은 지어지는 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다. 무엇이라고 해도 상주하는 것은 지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답하고, 이하에서 반박을 계속하고 있으나 주지하다시피 나가르주나는 업이 그것 자체로서(자성상) 있다고 한다면 상주라고 하는 이론적 결함에 처한다든가, 업이 자체로 없다고 하는(무자성) 데에 있기 때문에 상주라고 하는 이론적 결함에 빠지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제21장 제15시에 있어서도 법유(法有)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 “유(有)의 입장을 승인(承認)하는 사람이라 해도 단멸(斷滅)이라고 하는 것도 없으며, 또한 상주(常住)라고 하는 것도 없다. 우리들은 이런 생존이라고 하는 것은 결과와 원인과의 생기(生起), 소멸의 연속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는데 대하여 나가르주나는,
“만약 결과와 원인의 생기와 소멸과의 연속이 생존한다면 소멸이 다시 생기는 일이 없기 때문에 원인의 단멸이 따라서 일어난다.”(제21장 16시)
3) 단상(斷常)에 빠짐을 논파
이상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법유(法有)의 입장도 법공(法空)의 입장도 모두 ‘부단부상’을 진실한 불교로 보아서 자기의 설에 있어서는 단상의 이론적 결점이 없다는 것을 상호 주장하고 있다.
어느 쪽이 붓다의 진의에 가까울까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이제 독립의 연구를 필요로 하지만,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실유하는 법을 인정한다 해도 그것이 존속한다면 상주라고 하는 이론적 결함에 떨어지고, 멸한다고 하면 단멸이라고 하는 이론적 결함에 떨어지기 때문에 법유의 입장에 있어서는 불상부단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반대로 다르마가 실체가 없다는 것[무자성]에 있기 때문에 불상부단이라 말할 수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곧 일(一) 이(異) 거(去) 래(來) 생(生) 멸(滅)을 논파했던 것처럼 단상을 논파한 것은 아니고 불상부단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상대의 설을 실은 단상에 떨어졌다고 하고 있어서 이것을 논파했기 때문에 다른 논란(파사)의 논법과는 어느 정도 달리하고 있다.
5. 『중론'에 있어서 부정의 논리의 역사적 맥락
1) 실념론(實念論)적 사유의 배척
이상 ‘팔부(八不)’를 중심으로 해서 『중론』에 있어서 이른바 파사의 논법의 근본적 태도를 논했으나 『중론'의 논법이 일견 독단적이고, 또한 궤변을 희롱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론을 자세히 고찰한다면 여러 가지 사상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통렬한 논법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중론』은 확실히 종전의 불교 다르마의 체계를 부정하고 파괴했던 것은 아니고, 법을 실유로 보는 사상을 공격하고 있다. 개념을 부정했던 것은 아니고 개념을 초월적 실재로 이해하는 경향을 배척했던 것이다. “에 있다는 것” essentia를 보다 높은 영역으로 “가 있는 것” existentia로 만들어서 실체화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서양 중세 철학사에 있어서 유례를 인용해 본다면 실념론(Realism Begriffs realism) 적인 사유를 배척하고 있는 것이다.
2) 중론파와 경부(經部)
다음의 문제로 『중론』의 이와 같은 논법은 어떤 계통에서 얻어지는 것일까 하는 역사적 맥락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전적으로 나가르주나의 독창적인 것일까, 혹은 다른 파에서 암시를 얻은 것일까. 『중론』에 있는 부분은 의심할 것도 없이 나가르주나의 독창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서양의 학자는 경부와 중관파를 유명론자(唯名論者 Nominalist)라고 부르고 있다. 양자가 공의 개념을 초월적 실재로 보는 경향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양자의 관계가 어떠한지가 문제가 된다. 양자의 논법에 유사점이 인정되는 것은 그대로 부분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나 한층 현저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전체적으로 취급하는 것은 지금 여유가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중론』중에서 당시의 소승불교와의 관계가 가장 밀접한 것으로 생각되는 제7장(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 유위有爲 의 고찰)을 취급하고, 또한 경부의 사상을 아는 데에는 『구사론』에 의한 것으로 한다.(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야쇼미트라에 따라서 저자 바수반두의 입장을 우선 경부로서 놓고) 물론 양자를 동일 평면상에 놓고서 취급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구사론』에 있어서는 이 문제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의 사상(만들어진 것 유위有爲의 다르마)에는 생 주 이 멸이라고 하는 네 가지의 특질이 있다고 이해하는 설일체유부의 사상설이 주로 공격받고 있는데 『중론』에서는 생 주 멸의 3상을 취하는 설이 논파되고 있다.(「십이문론」 「대지도론」 및 아리야데바의 「사백론」도 같은 3상설을 논파하고 있다) 또한 『구사론』은 유부를 상대로 하고 있으나, 『중론』의 제7장이 유부를 공격하고 있을까 어떨까 하는 문제가 되고 있다. 그렇지만 유위상 및 그의 부수적 특질(수상隨相)을 세웠다고 하는 근본적 입장은 같다는 것이다.
3) 사유위상(四有爲相)과 유부
그런데 그의 문제점은 여기에 있다. 예를 들면 우리의 마음과 몸이 가벼이 들뜨는 기분(경안輕安)이 되는 것이 있다. 이러한 가벼이 들뜬 기분이라고 하는 움직임(다르마)이 일어나느냐 일어나지 않느냐, 다음 순간에는 소멸하지만 자세히 나누어서 말하면, 그 사이에 ①생기하고, ②생기했다가 그 상태를 유지하고, ③그의 상태가 변화하고, ④소멸한다고 네 가지 단계가 있다. 그것을 여러 한역에서는 ①생, ②주, ③이, ④멸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유위의 다르마의 무상한 모습을 보여주는 특질이 있어서 사유위상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설일체유부의 교학에 의하면 이러한 네 가지는 독립의 원리(다르마)에 있고, 사람들에 있어서 “가벼이 들뜨는 기분” 일어날 때에는 생(生)이라고 하는 독립의 실체로서의 원리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이 생긴다고 한다.
그것이 머무르는 것은 주(住)라고 하는 원리가 발생하기 때문이고, 다시 그 가볍게 들뜨는 기분이 변화하는 것은 이(異)라고 하는 원리가 발생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이 소멸하는 것은 멸(滅)이라고 하는 원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生)이라고 하는 원리가 “가볍게 들뜨는 기분”에 발생하는 그것을 생기게 하기 위해서는 생생(生生, 생을 生起시키는 것)이라고 하는 다른 원리가 작용한다. 그것을 한역으로 수상(隨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생생을 생기게 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라고 하는 것, 근본의 생이라고 하는 원리(본생)가 발생한다. 따라서 무한 소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주(住)와 주주, 이와 이이 멸과 멸멸과의 사이에도 같은 모습의 관계가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견해를 나가르주나는 비판하고 있고, 경부도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중론' 및 『
구사론'에 있어서 이와 같은 사상을 공격하는 논법을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4) 『대비바사론』과 『구사론』과의 대응
한편 『중론』 제7장 제1시에는 “만약 생기는 것[生]이 <만들어진 것> 유위로 있다고 한다면 거기(곧 生)에는 세 가지의 특질(相, 곧 생 주 멸)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만약 아직 생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無爲)에 있다고 한다면 어째서 만들어진 것을 만들어진 것으로 특질(有爲相)이 있을까.”라고 되어있으나, 전반은 『구사론』에 “제행의 유위가 되는 것은 네 가지의 본 모습에 의한다. 본 모습의 유위가 되는 것은 네 가지의 수상(隨相)에 의한다.”고 되어 있는 것에 대응해서 후반은 『대비바사론』에 의해서 분별론자는 “네 가지 유위상은 무위에 있고 성품이 강성하게 있기 때문에 유위상으로 있는 것이다”(38권, 「대정장」27, p.198)라고 설하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혹은 이와 같은 설에 들어맞을지도 모른다.
제2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하는 세 가지 상이 여러 가지로 다르다고 한다면, 유위(의 것)의 (생 주 이 멸이라고 하는) 특질을 이루는데 충분하지 않다. 그것이 합일한다면 어째서 동일한 때에 동일한 장소에 있다고 하는 것이 가능할까.”
『구사론』에는 주로 후반부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후반을 핑카라의 주석에는 “만약(그러한 것이) 화합한다면 그러한 것은 함께 서로 틀린(모순되는) 법이 된다. 왜냐하면 (동) 일시에 함께 나타난다”고 하는 하는 것만이 있으나, 『구사론』을 보면 설일체유부가 “만약 유위인 색(色) 등의 자성을 떠나서 생(生) 등의 물질(생기하는 원리 등의 실체)이 있다는 것은 또한 어떤 비리(非理)가 나타난다”고 반론하고 있는데 대해서, 경량부는 그것을 논란하기를 “동(同) 하나의 법이 동(同) 한 때에 곧 생하고 주하고 쇠퇴하여 변이하고[衰異] 괴멸(壞滅)하고 함께 존재한다고 인정할 수 있을까”(『구사론』 5권 16매 우-좌)라고 앞에 제시하고, “또한 주(住) 등의 세 가지의 작용(움직임)은 모두 현재라면 다시 하나의 법의 체가 한 찰나중에 곧 안주와 쇠이와 괴멸이 있어야 한다. 만약 어느 때에 주상(住相)이 능히 이 법을 주하게 하고, 곧 때에 이멸(異滅)이 능히 쇠괴(衰壞)한다면, 그 때에 이 법을 안주한다고 이름 할 수 있다. 쇠이(衰異)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괴멸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라고 논하고, 또한 후의 방법에 대해서는 “같은 하나의 법이 같은 때에 있어서 또한 주하고 또한 멸한다면 바른 이치에 응하는 것이 아니다.”라고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논법은 『중론』과 똑같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