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대비바사론』과 『구사론』과의 대응(2)
『중론』제3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생 주 멸에 다시 [그것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다른 유위상(有爲相)이 있다고 한다면 이와 같은 이유로 무한소급(무궁)이 이루어진다. 만약(이런 생 주 멸에 다시 다른 유위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 주 멸은 유위가 아니라는 것이 된다고 한다.
이 시의 전반과 똑같은 내용을 제19시 전반에서도 말하고 있다.
“만약 다른 생(他의 生)이 이 생을 생기게 한다면 거기에서 생은 무한소급이 되고 만다.” 이 제3시의 전반이나 제19시의 전반과 똑같은 의미를 바수반두는 『구사론』에서 논하고 있다. “이 생 등의 상은 이미 이것이 유위가 되고, 응당 다시 구별해서 생 등의 사상(四相 : 생주 이 멸)이 있다. 만약 다시 상(相)이 있다면 곧 무궁(무한함)을 이루게 된다. 저것에 다시 나머지의 생 등의 상이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5권 12매좌)
또한 다른 곳에서도,
“어찌 본래의 상[本相]이 소상(所相)과 똑같이 하나하나에 응해서 네 종류의 수상(隨相)이 있게 되고, 이것도 다시 각각에 넷을 이루면 전전해서 무궁하게 됨을 이룰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이 논의는 그대로 『대비바사론』에 보이고 있다.(39권, 「대정장」 27, p.200하)
“묻는다, 생상(生相)에 다시 다른(그 외의) 생기는 상이 있겠는가 없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과실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여기에 다시 다른 타(他)의 생기는 상[生相]이 있어서, 이와 같이 해서 전전하여 마땅히 무궁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만약 없다면 누가 이 생을 생기게 하며, 게다가 다른 생을 생기게 하는가.”
“답한다. 응당 이 설을 이룰 수 있다. 생하는 것도 다시 생함이 있다.”
“묻는다. 만약 그렇다면 생기는 상은 응당 무궁을 이룰 수 있는가.”
무한소급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반론의 답이 제기되고 있다.
“① 이 설을 지음도 있다. 이 무궁을 허락함도 또한 과실이 있음도 없다. 삼세에 두루 하다고 하는데 어찌 주하는 곳이 없겠는가.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사는 끊어지기 어렵고 파하기 어렵고 뛰어 넘기 어렵다. 갖은 고난이 생장하여 이어짐에는 궁극이 없다. 또한 동일 찰나이기 때문에 무궁의 과실도 없다.
② 다른 학자가 말하기를 제행이 일어날 때에 3법이 함께 일어난다. 첫째는 법(法), 둘째는 생(生), 셋째는 생생(生生)이다. 이 중에서 생은 능히 그 외의 둘째인 법을 생기게 한다. 이른바, 법이 생생에 미치고, 생생은 오직 하나의 법을 생한다. 이것이 생이 된다고 말한다. 이 도리로 말미암아 무궁의 과실이 없다.”
이와 같이 『대비바사론』에는 두 가지의 답이 서술되어 있으나, 그 가운데에는 후자가 『구사론』에 채용되며, 또한 『중론』에도 서술되어 있다.
『구사론』(5권 12매좌-우)에서도 “마땅히 다시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무궁함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게송에서 말씀하기를, ‘여기에 생생 등이 있다. 대(大)와 일(一)에 있어서 능히 있다.”고 한다.
곧 생생이 본래의 생을 생하고 본래의 생이 생생을 생하기 때문에 무한소급(무궁)의 난점은 존재하지 않다고 하는 것을 상세히 논하고 있다. 『중론'도 이 논의를 받고 제4시에서는 “생을 생하도록 일으키는 생생이라고 부르는 생은 단순히 생이라고 하는 원리 곧 본래 생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본래 생은 생생을 생기게 한다.”라고 하고 반대파의 논의를 소개하고 있다.
제13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아직 생기지 않은 생은 어떻게 그 자체를 생기게 하는가. 만약 이미 생긴 것이 생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이미 생긴 것에서 어떻게 다시 생길 수가 있을까.” 이것이 전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사한 논의가 '구사론'에 보이고 있다.
“가령 미래의 생에 작용함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미래를 이룰까. 마땅히 미래상을 설할 수 있다. 법이 현재 존재하는 때에는 생의 작용은 이미 소실해 버린다. 어떻게 현재를 느낄 수 있는가.(5권 16매우, 야쇼미트라-稱友-주석도 참조)
제19시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다른 생이 이 생을 생기게 한다면 여기에 생은 무한소급이 되버리고 만다. 또한 만약 생하지 않는데 있는데도 생했다고 한다면 일체는 모두 이와 같이 생긴다고 할 것이다.”
전반은 논했기 때문에 생략한다. 후반은 『구사론』의 “만약 생이 미래에 존재해서 생의 법을 생기게 한다면 미래의 일체의 법은 무엇과 함께 생기지 않는다”(5권 17매 좌)에 상당하다고 할 것이다.
제23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현재 소멸해가면서 존재가 주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또한 지금 현재 소멸해 가고 있지 않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생 주 멸의 3상 또는 생 주 이 멸의 4상을 세우는 유부의 약점을 엿볼 수 있다. 불교에 의하면 일체는 무상(無常)하게 있다고 하는데 주한다고 하는 원리를 세우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불설에 반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도 『대비바사론』에 적지 않은 문제로 되어 있는데 주(住)를 유위상의 속에 들여 놓지 않는 학자도 당시 존재했다고 할 정도이다.(「대비바사론」 39권 대정장 27권 p.210 중-하) 『중론』의 이런 주장도 이 계통을 받고 있는지 모른다.(지금 이 제7장의 논법은 중관파의 다른 책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5) 논법의 독창성과 공통성
이와 같이 제7장만을 가지고 보더라도 『중론』의 주장은 『대비바사론』 및 『구사론』에 보이고 있는 유부를 공격하는 학자들의 설(특히 경부)과 공통적인 점이 적지 않다. 물론 이미 서술한 것처럼 『중론』은 경부(經部)를 포함해서 논파하고 있기 때문에 중관파와 경부를 바로 일괄해서 논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지만 그 논법에 공통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삼세문파(三世門破) · 일이문파(一異門破)와 같은 일반적인 또는 『중론』의 근본이 되는 논법은 나가르주나 자신의 독창적인 것인 듯하다. 또한 나가르주나 자신도 이것을 과시하고 있는데 제7장과 같이 어떤 특정파의 체계를 상대로 해서 있는 것은 중관파 이외의 어떤 파(예를 들면 경부)가 그의 파(예를 들면 유부)에 대해서 행했던 공격의 논리와 공통으로 하는 것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그러므로 장래 각종 불전 및 불교 외의 제파의 전적에서 『중론』과 똑같은 논법을 취할 수 있다면 중관파의 부파적 관계 및 역사적 의의가 일층 명백해 질 것이다.
이제 그 여유가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만 결론으로 『중론』에 있어서 논쟁의 논법에 나가르주나의 자신의 독창적인 것과 나가르주나가 다른 파에서 배워온 것의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는데 그치기로 한다.
주: 1) 비바사론을 크게 드날린 인물. 그는 『구사론』이라고 하는 논서에 주석을 베푼 구사론소(俱舍論疏)를 지어 설일체유부의 교의의 신기원을 이루었다는 평을 받는다.
6. 부정의 논리의 비교 사상적 고찰
1) 동서(東西)에 있어서 대응
나가르주나의 운동부정(運動否定)의 논리는 종종 제논의 운동부정론에 대비된다. 나가르주나와 제논 사이에 유사하게 존재하는 것은 종종 지적되듯이 특히 운동부정의 논의가 닮은 점이 있으나 제논과 나가르주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나가르주나에 대해서는 R.빠뉴카루에 의해서 “부정판단은 판단의 부정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이것은 곧 중관파의 운동부정론은 운동에 관한 긍정판단의 부정에 있다고 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하는 것으로 귀착한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운동의 관념에 대해서의 비판은 운동에 관한 판단을 문제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실념론적 방법으로, 곧 실재하는 실체로 여겼던(운동이라고 하는) 관념에 대해서 이루어졌다.
궤변이라고도 생각되는 나가르주나의 논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관계개념을 실체시하는 사고방식-특히 설일체유부에 있어서 가장 현저했던-을 공격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비판은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에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6은 4보다는 크지만 12보다는 작기 때문에 6은 동시에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 그래서 이것은 모순이라고 한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성장이 그치지 않은 청년으로 있는 테아이테트스보다도 지금은 키가 크다고 하더라도, 수년 후에는 소크라테스는 테아이테트스보다 키가 작게 될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키가 크다고 할 수 있는 동시에 작다고도 한다.”(B. 랏세루, 市井三郞역 「서양철학사」1, p.156)
이것에 가까운 논법으로는 찬드라키르티는 말한다.
“종자와 싹 과실이 각각 다른 개념이라고 해도 종자에서 싹 다시 과실이 생기고, 과실에서 싹이 생긴다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하다고 하는 것이 된다.”(「뿌라상가빠다」 p.376)
찬드라키르티는 말한다.
“만약 아들이 없는데도 아버지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성립한다면 아들이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 있을까. 아들이 없다면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아버지도 아들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깨달음의 행이 없는 곳으로의 입문」 제9장 제114시)
동서에 있어서 대응은 쉽게 이해할 수없는 점이 있다. 도식화해 보면,
(실념론(實念論) - 플라톤 -설일체유부)
실념론에 대한 반대자 플라톤에 상대하는 반대론 나가르주나학파라고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2) 서양의 회의론자(懷疑論者)와 유사점과 차이점
방법론의 목적에 관한 한계는 중관파의 철학은 피론(Pyrrhōn, BC 360-275년)이라는 같은 시기 회의론자들의 철학에 상당히 가깝다. 크리싯포스(Chrysipus, BC 280-207년)가 있다. 이에 반대해서 대립했던 것은 서로 다른 반대의 관점을 함의하고 있다. 악을 지니지 않은 선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악이 존재하지 않아도 선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선과 악은 대립해서 있기 때문에 양자는 대립에 있으면서 존립하는 데는 서로 다르지 않다.(B. 랏세루 앞의 책 p.257 p.258참조)
이런 논리적 원칙은 나가르주나에 의해서도 승인되었다. 그는 예로 들어, “정(淨)과 부정(不淨)은 서로 의존해서 성립한다”(「중론」 제23장 제10-11시. 제7장 제12시 참조)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가르주나는 서양의 회의론자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부정의 논리를 통해서 연기(緣起)를 해명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자연히 연기가 문제로 등장한 것이다.
주: 2) 그리이스 철학자로 엘레아인이다. 제논(Zenon ho Elea(BC 490?~430?)은 페리클레스가 교우하였다. 제논은 변증법의 창시자라고 불린다. 제논은 '제논의 역설'로 불리는 운동부정론으로 유명하다. 그의 유명한 역설에 따르면, 아무리 발이 빨라도 '아킬레우스는 거북을 따라 잡을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킬레우스가 10m를 따라붙으면 거북은 1m를 전진하고, 다시 아킬레우스가 1m를 전진하면 거북은 10㎝, 아킬레우스가 또 10㎝를 따라붙으면 후자는 1㎝…. 그의 주장에 따르면 거북은 어떤 경우든 미세하게 전진하므로 아켈레우스는 결코 거북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제논의 역설 중에는 '날아가는 화살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역설도 있다. 제논은 논박술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티몬은 그런 제논을 이렇게 노래한다. 제논의 역설은 변증론을 구사하며 [다부정론]과 [운동부정론]을 논증하였다. 즉 多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無限小인 동시에 無限大인 것입니다. 동시에 유한이면서도 무한이 아닌 것이다.
3)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철학자. 회의론(懷疑論)의 시조로 불린다. 그는 데모크리토스류(流) 사상에 감명을 받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라 인도의 현인(賢人)들과도 교유하였다. 회의론을 의미하는 ‘피로니즘(Pyrrhonism)’이라는 말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4) 다음 스토아학파의 학설을 대성하고 조직화한 크리싯포스는 논리학과 자연철학과 윤리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이 사상은 후기 학자들 가운데는 윤리학을 강조한 Seneca, Marcus Aruelius 등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중론』제3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생 주 멸에 다시 [그것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다른 유위상(有爲相)이 있다고 한다면 이와 같은 이유로 무한소급(무궁)이 이루어진다. 만약(이런 생 주 멸에 다시 다른 유위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 주 멸은 유위가 아니라는 것이 된다고 한다.
이 시의 전반과 똑같은 내용을 제19시 전반에서도 말하고 있다.
“만약 다른 생(他의 生)이 이 생을 생기게 한다면 거기에서 생은 무한소급이 되고 만다.” 이 제3시의 전반이나 제19시의 전반과 똑같은 의미를 바수반두는 『구사론』에서 논하고 있다. “이 생 등의 상은 이미 이것이 유위가 되고, 응당 다시 구별해서 생 등의 사상(四相 : 생주 이 멸)이 있다. 만약 다시 상(相)이 있다면 곧 무궁(무한함)을 이루게 된다. 저것에 다시 나머지의 생 등의 상이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5권 12매좌)
또한 다른 곳에서도,
“어찌 본래의 상[本相]이 소상(所相)과 똑같이 하나하나에 응해서 네 종류의 수상(隨相)이 있게 되고, 이것도 다시 각각에 넷을 이루면 전전해서 무궁하게 됨을 이룰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이 논의는 그대로 『대비바사론』에 보이고 있다.(39권, 「대정장」 27, p.200하)
“묻는다, 생상(生相)에 다시 다른(그 외의) 생기는 상이 있겠는가 없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과실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여기에 다시 다른 타(他)의 생기는 상[生相]이 있어서, 이와 같이 해서 전전하여 마땅히 무궁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만약 없다면 누가 이 생을 생기게 하며, 게다가 다른 생을 생기게 하는가.”
“답한다. 응당 이 설을 이룰 수 있다. 생하는 것도 다시 생함이 있다.”
“묻는다. 만약 그렇다면 생기는 상은 응당 무궁을 이룰 수 있는가.”
무한소급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반론의 답이 제기되고 있다.
“① 이 설을 지음도 있다. 이 무궁을 허락함도 또한 과실이 있음도 없다. 삼세에 두루 하다고 하는데 어찌 주하는 곳이 없겠는가.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사는 끊어지기 어렵고 파하기 어렵고 뛰어 넘기 어렵다. 갖은 고난이 생장하여 이어짐에는 궁극이 없다. 또한 동일 찰나이기 때문에 무궁의 과실도 없다.
② 다른 학자가 말하기를 제행이 일어날 때에 3법이 함께 일어난다. 첫째는 법(法), 둘째는 생(生), 셋째는 생생(生生)이다. 이 중에서 생은 능히 그 외의 둘째인 법을 생기게 한다. 이른바, 법이 생생에 미치고, 생생은 오직 하나의 법을 생한다. 이것이 생이 된다고 말한다. 이 도리로 말미암아 무궁의 과실이 없다.”
이와 같이 『대비바사론』에는 두 가지의 답이 서술되어 있으나, 그 가운데에는 후자가 『구사론』에 채용되며, 또한 『중론』에도 서술되어 있다.
『구사론』(5권 12매좌-우)에서도 “마땅히 다시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무궁함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게송에서 말씀하기를, ‘여기에 생생 등이 있다. 대(大)와 일(一)에 있어서 능히 있다.”고 한다.
곧 생생이 본래의 생을 생하고 본래의 생이 생생을 생하기 때문에 무한소급(무궁)의 난점은 존재하지 않다고 하는 것을 상세히 논하고 있다. 『중론'도 이 논의를 받고 제4시에서는 “생을 생하도록 일으키는 생생이라고 부르는 생은 단순히 생이라고 하는 원리 곧 본래 생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본래 생은 생생을 생기게 한다.”라고 하고 반대파의 논의를 소개하고 있다.
제13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아직 생기지 않은 생은 어떻게 그 자체를 생기게 하는가. 만약 이미 생긴 것이 생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이미 생긴 것에서 어떻게 다시 생길 수가 있을까.” 이것이 전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사한 논의가 '구사론'에 보이고 있다.
“가령 미래의 생에 작용함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미래를 이룰까. 마땅히 미래상을 설할 수 있다. 법이 현재 존재하는 때에는 생의 작용은 이미 소실해 버린다. 어떻게 현재를 느낄 수 있는가.(5권 16매우, 야쇼미트라-稱友-주석도 참조)
제19시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다른 생이 이 생을 생기게 한다면 여기에 생은 무한소급이 되버리고 만다. 또한 만약 생하지 않는데 있는데도 생했다고 한다면 일체는 모두 이와 같이 생긴다고 할 것이다.”
전반은 논했기 때문에 생략한다. 후반은 『구사론』의 “만약 생이 미래에 존재해서 생의 법을 생기게 한다면 미래의 일체의 법은 무엇과 함께 생기지 않는다”(5권 17매 좌)에 상당하다고 할 것이다.
제23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현재 소멸해가면서 존재가 주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또한 지금 현재 소멸해 가고 있지 않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생 주 멸의 3상 또는 생 주 이 멸의 4상을 세우는 유부의 약점을 엿볼 수 있다. 불교에 의하면 일체는 무상(無常)하게 있다고 하는데 주한다고 하는 원리를 세우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불설에 반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도 『대비바사론』에 적지 않은 문제로 되어 있는데 주(住)를 유위상의 속에 들여 놓지 않는 학자도 당시 존재했다고 할 정도이다.(「대비바사론」 39권 대정장 27권 p.210 중-하) 『중론』의 이런 주장도 이 계통을 받고 있는지 모른다.(지금 이 제7장의 논법은 중관파의 다른 책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5) 논법의 독창성과 공통성
이와 같이 제7장만을 가지고 보더라도 『중론』의 주장은 『대비바사론』 및 『구사론』에 보이고 있는 유부를 공격하는 학자들의 설(특히 경부)과 공통적인 점이 적지 않다. 물론 이미 서술한 것처럼 『중론』은 경부(經部)를 포함해서 논파하고 있기 때문에 중관파와 경부를 바로 일괄해서 논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지만 그 논법에 공통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삼세문파(三世門破) · 일이문파(一異門破)와 같은 일반적인 또는 『중론』의 근본이 되는 논법은 나가르주나 자신의 독창적인 것인 듯하다. 또한 나가르주나 자신도 이것을 과시하고 있는데 제7장과 같이 어떤 특정파의 체계를 상대로 해서 있는 것은 중관파 이외의 어떤 파(예를 들면 경부)가 그의 파(예를 들면 유부)에 대해서 행했던 공격의 논리와 공통으로 하는 것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그러므로 장래 각종 불전 및 불교 외의 제파의 전적에서 『중론』과 똑같은 논법을 취할 수 있다면 중관파의 부파적 관계 및 역사적 의의가 일층 명백해 질 것이다.
이제 그 여유가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만 결론으로 『중론』에 있어서 논쟁의 논법에 나가르주나의 자신의 독창적인 것과 나가르주나가 다른 파에서 배워온 것의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는데 그치기로 한다.
주: 1) 비바사론을 크게 드날린 인물. 그는 『구사론』이라고 하는 논서에 주석을 베푼 구사론소(俱舍論疏)를 지어 설일체유부의 교의의 신기원을 이루었다는 평을 받는다.
6. 부정의 논리의 비교 사상적 고찰
1) 동서(東西)에 있어서 대응
나가르주나의 운동부정(運動否定)의 논리는 종종 제논의 운동부정론에 대비된다. 나가르주나와 제논 사이에 유사하게 존재하는 것은 종종 지적되듯이 특히 운동부정의 논의가 닮은 점이 있으나 제논과 나가르주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나가르주나에 대해서는 R.빠뉴카루에 의해서 “부정판단은 판단의 부정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이것은 곧 중관파의 운동부정론은 운동에 관한 긍정판단의 부정에 있다고 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하는 것으로 귀착한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운동의 관념에 대해서의 비판은 운동에 관한 판단을 문제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실념론적 방법으로, 곧 실재하는 실체로 여겼던(운동이라고 하는) 관념에 대해서 이루어졌다.
궤변이라고도 생각되는 나가르주나의 논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관계개념을 실체시하는 사고방식-특히 설일체유부에 있어서 가장 현저했던-을 공격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비판은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에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6은 4보다는 크지만 12보다는 작기 때문에 6은 동시에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 그래서 이것은 모순이라고 한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성장이 그치지 않은 청년으로 있는 테아이테트스보다도 지금은 키가 크다고 하더라도, 수년 후에는 소크라테스는 테아이테트스보다 키가 작게 될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키가 크다고 할 수 있는 동시에 작다고도 한다.”(B. 랏세루, 市井三郞역 「서양철학사」1, p.156)
이것에 가까운 논법으로는 찬드라키르티는 말한다.
“종자와 싹 과실이 각각 다른 개념이라고 해도 종자에서 싹 다시 과실이 생기고, 과실에서 싹이 생긴다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하다고 하는 것이 된다.”(「뿌라상가빠다」 p.376)
찬드라키르티는 말한다.
“만약 아들이 없는데도 아버지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성립한다면 아들이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 있을까. 아들이 없다면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아버지도 아들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깨달음의 행이 없는 곳으로의 입문」 제9장 제114시)
동서에 있어서 대응은 쉽게 이해할 수없는 점이 있다. 도식화해 보면,
(실념론(實念論) - 플라톤 -설일체유부)
실념론에 대한 반대자 플라톤에 상대하는 반대론 나가르주나학파라고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2) 서양의 회의론자(懷疑論者)와 유사점과 차이점
방법론의 목적에 관한 한계는 중관파의 철학은 피론(Pyrrhōn, BC 360-275년)이라는 같은 시기 회의론자들의 철학에 상당히 가깝다. 크리싯포스(Chrysipus, BC 280-207년)가 있다. 이에 반대해서 대립했던 것은 서로 다른 반대의 관점을 함의하고 있다. 악을 지니지 않은 선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악이 존재하지 않아도 선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선과 악은 대립해서 있기 때문에 양자는 대립에 있으면서 존립하는 데는 서로 다르지 않다.(B. 랏세루 앞의 책 p.257 p.258참조)
이런 논리적 원칙은 나가르주나에 의해서도 승인되었다. 그는 예로 들어, “정(淨)과 부정(不淨)은 서로 의존해서 성립한다”(「중론」 제23장 제10-11시. 제7장 제12시 참조)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가르주나는 서양의 회의론자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부정의 논리를 통해서 연기(緣起)를 해명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자연히 연기가 문제로 등장한 것이다.
주: 2) 그리이스 철학자로 엘레아인이다. 제논(Zenon ho Elea(BC 490?~430?)은 페리클레스가 교우하였다. 제논은 변증법의 창시자라고 불린다. 제논은 '제논의 역설'로 불리는 운동부정론으로 유명하다. 그의 유명한 역설에 따르면, 아무리 발이 빨라도 '아킬레우스는 거북을 따라 잡을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킬레우스가 10m를 따라붙으면 거북은 1m를 전진하고, 다시 아킬레우스가 1m를 전진하면 거북은 10㎝, 아킬레우스가 또 10㎝를 따라붙으면 후자는 1㎝…. 그의 주장에 따르면 거북은 어떤 경우든 미세하게 전진하므로 아켈레우스는 결코 거북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제논의 역설 중에는 '날아가는 화살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역설도 있다. 제논은 논박술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티몬은 그런 제논을 이렇게 노래한다. 제논의 역설은 변증론을 구사하며 [다부정론]과 [운동부정론]을 논증하였다. 즉 多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無限小인 동시에 無限大인 것입니다. 동시에 유한이면서도 무한이 아닌 것이다.
3)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철학자. 회의론(懷疑論)의 시조로 불린다. 그는 데모크리토스류(流) 사상에 감명을 받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라 인도의 현인(賢人)들과도 교유하였다. 회의론을 의미하는 ‘피로니즘(Pyrrhonism)’이라는 말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4) 다음 스토아학파의 학설을 대성하고 조직화한 크리싯포스는 논리학과 자연철학과 윤리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이 사상은 후기 학자들 가운데는 윤리학을 강조한 Seneca, Marcus Aruelius 등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