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 또는 가지가지의 방편으로 미묘한 법을 설해서 (여래수량품 제16 p706)
우이종종방편 설미묘법
又以種種方便 說微妙法

 [강의] 음성으로 법을 설해 이익을 준 일을 밝힌 내용이다. 열등한 응신불께서 점교를 설하시고, 수승한 부처님은 돈교를 설하시므로 미묘한 법을 설한다고 했다.
“가지가지의 방편”이란 몸이 작고 수명이 짧음이니 예를 들면 열응신을 나타내셔서 점교(漸敎)를 말한 것이다. “미묘한 법을 설함”이란 몸이 크고 수명이 긴 것이니 곧 승응신을 나타내어 돈교(頓敎)를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는 중생의 근기와 인연에 따라 열응신 승응신을 나타내어 갖가지 방편으로 화엄 녹원 방등 반야의 설법이 있게 됨을 말한다.

 [경] 중생으로 하여금 능히 환희심을 일으키게 하느니라.(여래수량품 제16 p706)
능령중생 발환희심
能令衆生 發歡喜心

 [강의] 다음은 이익을 얻은 사람들이 기뻐한 일을 밝힌 내용이다.
“능히 환희심을 일으킴"이란 처음에는 점교로 설한다 해도 결국에는 대승에 들게 하시므로 다 환희를 얻게 한다고 하였다. 곧 교화를 펴는 이익을 나타낸다. 이 환희심은 곧 교화를 베풀어 이익을 얻는 일이다. 부처님은 사실단에 의하여 형체와 소리의 두 이익을 베푸시고 중생들은 네 가지 이익을 얻게 된 것이다. 중생의 근기에 법이 맞으면 중생들이 기뻐하고 거스르면 괴로워하니, 부처님 말씀에는 모두가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다고 한다.

 [경] 모든 선남자야, 여래는 모든 중생이 작은 법을 즐겨하여 덕이 엷고 업이 무거운 자를 보면, (여래수량품 제16 p706)
제선남자 여래 견제중생 낙어소법 덕박구중자
諸善男子 如來 見諸衆生 樂於小法 德薄垢重者

 [강의] 현재 중생들에 이익을 준 일이다[現世益物]. 여기에는 중생의 근기들이 감함과 부처의 응함이 있다. 먼저 중생의 감함을 나타낸다.
“여래는…를 보면”이란 불안(佛眼)으로 비추어 보신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법화문구'에서는 사자분신삼매(師子奮迅三昧)에 의해 중생을 이익되게 한 내용이라 한다. 이 사자분신삼매에는 열 가지 공덕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다른 사람의 제근(諸根)이 성숙과 성숙하지 않음,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을 분별해 아는 공덕이다. 둘째 여래의 법륜(法輪)으로 아직 제도되지 못한 자를 가르쳐서 모두 법률(法律)에 들어가게 하는 공덕이다. 셋째 홍서(弘誓)가 시방세계에 두루 가득하고 그 음성도 또한 그렇게 되니, 혹 한 음성으로 두루 가득해지고 백천만의 음성도 또한 두루 가득해져서 널리 중생의 무리들을 가르치는 공덕이다. 넷째 무상의 법륜[無上輪]을 굴리셔서 중생을 교화하여 모두 멸도를 얻으니, 다른 사람은 굴릴 수 없고 오직 부처님만이 굴릴 수 있다. 다섯째 능히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청정한 계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시고 또한 사람들을 즐겁게 하여 주는 공덕이다. 여섯째 성품과 수행이 공과 합치하는 공덕이다. 일곱째 광명을 내어 입멸을 보이시고, 혹은 생존해 계시고 혹은 없어지며, 혹은 상호(相好) 나타내 보이고 혹은 상호를 숨기시는 공덕이다. 여덟째 사마(四魔)를 항복시키는 공덕이다. 아홉째 다른 사람을 지극히 중요한 법도[至要]에 들어 지관(止觀)을 증장(增長)시키도록 하는 공덕이다. 열째 최상의 십선(十善)의 근본을 갖추니 몸은 셋 입은 네 가지 등의 공덕이다.
“모든 중생이 작은 법을 즐겨하여”란 여래가 본 기연(機緣)을 말씀하신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대중들이 비록 청정하다고 하더라도 그 나머지는 소승을 즐기는 사람들이니 혹 의심과 후회가 생겨 오랜 기간 동안 괴로움에 시달린다. 이것을 가엾게 여기신 까닭에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라고 하였다. 게송에서도 오래 수행하지 않은 이는 지혜가 아직 밝지 못하여 분별에 의지하고 지혜에 의지 하지 않아서 법문을 듣고 나면 의심과 후회가 생기며 법문을 들으면 장차 악도에 떨어지려하니 이를 염려하여 설하지 않으셨다고 하였다. 성문 이승은 없고 다만 오래 수행하지 않은 이를 지적하여 작은 법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작은 법을 좋아한다’는 것은 소승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설법[近說]이니, 가야성에서 정각을 이룬 부처님의 설법을 바라는 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구원겁 전에 성불하신 부처님 법을 좋아함을 큰 법을 바라는 자라 할 때 여기서 가야성성불의 법을 바라는 자를 작은 법을 즐겨한다고 했을 뿐이다.
지금은 마땅히 통괄적으로 이를 설명한다. 이른바 이십오유(二十五有)에 대한 탐애는 곧 사람과 하늘세계의 근기이니, 이들이 내가 있는 곳에 찾아 온 것을 ‘작은 법[小法]’ 이라 이름한다. 열반을 탐내고 즐겨 자신의 해탈을 구하는 것이 곧 이승의 근기이니, 이들이 내가 있는 곳에 찾아 온 것을 또한 이름하여 ‘작은 법을 좋아한다’고 이름한다. 점차적인 것[漸敎]을 좋아하여 불도를 우회(紆廻)하는 것은 삼보살(三菩薩: 삼장보살 통교보살 별교보살)의 근기이니, 이들이 내가 있는 곳에 찾아 온 것을 도한 작은 법을 좋아한다고 이름한다.
 “작은법을 즐겨함”에 대해서는 네 가지 관점에서 보기도 한다. ①지난날에 입각하여 보면, 비록 대보리심을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마음을 오로지 하여 정진하지 않아서 대부분 폐욕(弊欲)에 집착하여 세간을 벗어날 수 없었으니 이 폐욕을 작은 법을 좋아한다고 이름한다는 것이다. ②현재에 입각하여 보면, 부처님이 아직 세상에 나오시지 않았을 때 제천과 인간 등이 비록 대승의 근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세간락(世間樂)에 물들어 사견(邪見) 집착하니, 그러므로 작은 법을 좋아한다고 이름한다. ③수행에 입각하여 보면, 비록 삼계의 폐욕이라는 작은 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삼승의 회단(灰斷)을 좋아한다면 이것도 역시 작은 법이라 이름한다. 이 사람은 비록 삼승의 근과(近果)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격별을 경유하여 일승을 닦기를 좋아하고 일심원돈을 두루 닦을 수 없으니, 그러므로 작은 법을 좋아한다고 이름한다. 이상의 세 가지 내용은 인문(因門)에 입각하여 작은 법을 좋아한다는 것을 밝혔다. ④과문(果門)에 입각하여 보면, 근성(近成)의 작은 도에서는 석씨궁(釋氏宮)에서 나와서 비로소 보리를 얻은 일을 듣기를 바라고, 장원(長遠)한 크고 오래된 도에서는 듣고자 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작은 것을 좋아한다고 이름한다. 이와 같은 작은 마음은 오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만약 전부터 대법을 바랐다면 부처님은 비로소 정각을 이루었다고 설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비로소 정각을 이루었다고 설한 것은 모두 작은 법을 좋아하는 자들을 위한 것일 뿐이라 한다.
 “덕이 엷다[薄德]”라고 한 것은 연인불성과 요인불성 두 가지 선의 작용이 미미하고 뒤떨어짐을 말하니, 아래의 경문에 “여러 아들이 어리다”라고 한 것이 이에 해당된다.
 “업이 무거운자[垢重者]”란 곧 번뇌가 무거운 자, 견사(見思)의 번뇌가 아직 제거되지 않은 것을 말한다.

 [경] 이 사람을 위하여 설하되, 내가 젊어서 출가하여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었다고 설하였느니라.(여래수량품 제16 p706)
위제인설 아소출가 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爲是人說 我少出家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강의] “이 사람을 위하여 설하되∼멸도하지 않건마는 멸도한다고 말하느니라.”(p710하) 현재 중생에 대해 부처님의 응화를 밝힌다[應化]. 여기에는 둘이 있으니 첫째는 생이 아니면서 생을 나투시는 것이요, 둘째는 멸이 아니면서 멸을 나투시는 일이다. 1) 생이 아니면서 생을 나투시는 데에도 둘이 있다. 첫째는 생을 나투심[現生]이고, 둘째는 생이 아닌 일[非生]이다.
 
 중생이 교화를 받음(機感)
 부처님께서  생이 아니면서 생을 나툼 생을 나툼 생을 나툼(垂迹)-1)
    교화하심 멸이 아니면서 멸을 나툼  이익       생이 아님(처음 생을 보임)-2)

이 단락은 생이 아니면서 생을 나타냄[非生現生]에서 생을 나툼[現生] 이다. 곧 총명하고 둔한 근기에 따라 수승한 응신과 열등한 응신의 나투심을 뜻한다.
“이 사람을 위하여 설하되…비로소 보리를 얻었다”라고 한 것은 앞에서 뛰어나고 둔한 두 근기가 법신을 찾아와 점교와 돈교를 설하여 감득함을 밝혔고, 이제 곧 수승하고 열등한 두 응신이 나타나심이니 열응신은 둔근(鈍根)에 응하시고 승응신은 뛰어난 근기[利根]에 응하심을 말한다. '법화문구'의 설명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두 응신에는 생신(生身)과 법신(法身)의 두 가지의 생이 있다. 생신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육신을 가지고 태어난 응신을 말하고, 법신은 진리의 체[理體]로서의 부처님 몸을 가리킨다. 열응신의 생이란 바른 지혜[正慧]를 가지고 어머니의 태중에 의탁하여 세상에 태어나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육년 고행에 이른 응화의 몸을 가리킨다. 법신의 생이란 삼십사심(三十四心) 단결습진(斷結習盡)으로 결(結)의 번뇌를 끊고 습기가 다하여 오분법신(五分法身)을 얻으신 부처님을 가리킨다.
또한 승응신 생신의 생을 놓고 본다면, 먼저 승응신의 생이란 '화엄경' '열반경' 등에서 설한 것과 같이 여러 보살과 더불어 마야(摩耶)부인의 태 안에 있으면서 항상 대승을 설법하시다가 태에서 나오시면서 시방(十方)을 각각 일곱 걸음을 걸어가신 일을 이름하여 생신의 생이라 한다. 다음으로 법신의 생이란 적멸도량에서 얻은 금강후심(金剛後心)에 무명을 끊어 다하고 묘각과 상응하는 지혜를 얻어 법성(法性)을 바닥까지 비추어 보시고 만덕(萬德)과 일체종지가 원만하고 밝게 두루 갖추어짐을 이름하여 법신의 생이라 한다.
다음 “출가(出家)”란 이사(二死) 에서 나아감을 뜻한다. 열응신은 분단생사(分段生死)의 집에서 나옴이니 업으로 지어 육도윤회하는 생사의 삶에서 벗어남을 가리킨다. 승응신은 분단생사와 변역생사의 집에서 나옴이다. 곧 육도윤회의 생사업에서 벗어날 뿐 만 아니라, 성문 연각의 변역생사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불도에 들어감을 변역생사의 집에서 출가한다고 했다.
“보리를 얻었다[得菩提]”란 열응신의 보리와 승응신의 보리로 나눌 수 있다. 열응신은 유작사제(有作四諦)에서 일어나는 무루(無漏) 진무생지(盡無生智)를 얻음을 이름하여 보리라 한다. 곧장교에서와 같이 이승들이 사제를 닦아 열반에 들지만 무여열반에 든 것이 아니어서 닦아야할 것이 남아 있다하여 유작사제라 하니 그들은 생사의 번뇌를 다끊는 지혜를 얻어 진지를 얻었고 생사에 매이지 않는 무생지를 얻은 것을 말한다.
 한편 승응신은 실상의 도를 비추어보는 일체종지를 보리라 하니, 곧 삼제원융한 실상의 이치를 아는 지혜를 승응신의 보리라 한다.

[경] 그러나 나는 실로 성불해 옴이 이와 같이 오래건마는 다만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여 불도에 들게 하려 이와 같이 설하였느니라. (여래수량품 제16 p706)
 연아실성불이래 구원약기 단이방편 교화중생 영입불도 작여시설
 然我實成佛已來 久遠若斯 但以方便 敎化衆生 令入佛道 作如是說

 [강의] 2) 부처님께서 본래 나신 바가 없지만 인천과 아수라 등이 응신의 모습을 보고 비로소 났다고 말한 것이다. 사실은 옛날 이미 생신과 법신을 얻었기 때문에 지금 중생들이 보는 부처의 삶이 진실한 부처의 삶의 전체가 아님을 말한다. 지금 보여주는 부처님의 삶은 다만 덕이 엷고 더러운 번뇌에 있는 중생을 교화해 불도에 들게 하려고 방편으로 이같이 설하였던 것이라 한다.  
 다음 “그러나 나는 실로 성불해 옴이”란 사실은 본래부터 태어난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과 인간과 아수라 등이 이 두 종류의 생신 법신을 보고 비로소 지금 세상에 처음 태어나신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오래건마는”이란 부처는 이미 오랜 옛날 이미 생신 법신의 두 몸을 얻었으며, 오늘날의 생(生)은 진실한 생이 아님을 말한다. “이와 같다”란 윗글의 비유에서 말한 오백진점겁(五百塵點劫)이나 되는 장구한 세월을 말한다.
 “방편으로써 중생들을 교화해”란 이미 진실한 생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생을 나타내시는가 하면 작은 법을 좋아하는 사람의 덕이 박하고 번뇌가 무거운 자로 하여금 불도(佛道)를 얻도록 하는 이익을 위함이니, 그런 까닭에 “방편으로 중생들을 교화한다.” 라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설하였느니라”란 생이 아니면서 생을 나타낸 말이다. 다른 경에서는 열응신의 생이, 생이 아님을 타파했지만, 오히려 열응신 법신의 생이, 생이 아님을 파하지 못하였고 지금의 경에서는 승응신 법신의 생이, 생이 아님을 바로 파하였다. 다른 경에서는 생신은 비록 멸도에 든다고 하여 파하지만 법신은 멸도에 든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법화경에서는 “나는 실로 성불한 지는 이와 같이 오래건만” 이라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열응신 승응신의 두 법신의 생이 모두 파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곧 생은 생이 아니 것이 되어 다른 경들과는 영원히 차이가 있다.
 주: 1) 금장본 , '묘법연화경', 영산법화출판사, p.706:6항.
2) 사마 : 중생을 괴롭히는 네 가지 마구니와 같은 번뇌. ①번뇌마(煩惱魔)는 신심을 괴롭히는 탐진치 등의 번뇌들. ②음마(陰魔)는 번뇌를 일으키는 오음의 마(魔). ③사마(四魔)는 사람의 생명을 끊는 죽음의 마(魔) ④타화자재천마(他化自在天魔)는 욕계 제6천인 타화자재천의 마왕으로, 사람들의 선한 일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3)  불타발타라역 '대방광불화엄경' 권 제23(대정장9, p543중)
4)  이십오유 : 삼계에 윤회하는 중생을 25존재로 분류한 것. 욕계에 14유(有), 색계에 7유, 무색계에 4유가 있다.
5) 회단 : 회신멸지(灰身滅智)를 말한다. 이는 이승(二乘)에서 추구하는 열반인데, 삼승 중에 열등한 삼장보살도 회신멸지하므로 삼승의 회단이라 했다.
6) 삼십사심 단결습진 : 34심에서 결의 번뇌를 끊고 습기마저 다하는 것. 삼십사심 단결성도(斷結成道)라고 한다. 곧 팔인(八忍) 팔지(八智)의 십육심으로 견혹(見惑)을 끊고, 구무애(九無碍) 구해탈(具解脫)의 십팔심으로 사혹을 끊는다. 이어 남아 있는 미세한 무명의 습기마저 끊어 없애고 성도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삼장교의 성도 수행이라 한다.
7) 오분법신 : 다섯 가지 공덕의 법으로 불신을 이룸을 말한다. ① 계(戒)는 삼업의 허물을 여의도록 경계하는 법신. ② 정(定)은 일체 망념을 여의는 선정의 법신. ③ 혜(慧)는 진지(眞智)로 원만히 밝아서 법성을 달관하는 지혜의 법신. ④ 해탈(解脫)은 일체의 계박을 해탈하는 법신. ⑤ 해탈지견신(解脫知見身)이란 이미 진실된 해탈을 아는 법신.
8) 시방을 7보 걸으신 것으로 시방 7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행 7보로 무량복전을 짓고, 서행 7보로 노․사(老死)를 끊었으며, 북행 7보로 유(有)의 생사를 제도하고, 동행 7보로 도수(導首)에 나아가게 되었으며, 사유(四維: 사방의 사이) 7보로 번뇌 사마(四魔)를 끊었으며, 상방 7보로 부정한 것에 물들지 않았으며, 하방 7보로 지옥의 불을 꺼지게 했다.
9) 금감후심 : 보살의 마음이 견고하여 파괴되지 않는 단계. 십지(十地)의 후심으로 등각(等覺)을 말한다.
10) 유작사제 : 닦아야 할 것이 남아 있는 유위의 사제. 이승(二乘)의 사제라 한다.
11) 진무생지 : 십지(十智)중 제9지의 진지(盡智)와 제10의 무생지(無生智). 진지는 번뇌를 모두 다 없앰으로써 얻는 지혜. 또는 사성제(四聖諦)를 체득한 지혜라고도 한다. 무생지는 사성제를 이미 얻고 나서 다시 얻어야 할 것이 없음을 아는 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