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 모든 선남자야, 여래가 설한 경전은 다 중생을 제도해서 해탈케 하기 위함이니, 혹은 자신의 몸을 설하고, 혹은 다른 사람의 몸을 설하며, 혹은 자기의 몸을 보이고, 혹은 다른 사람의 몸을 보이며, 혹은 자기의 일을 보이고, 혹은 다른 사람의 일을 보이느니라.(금장본 여래수량품 제16 p706)
제선남자 여래소연경전 개위도설중생 혹설이신 혹설타신 혹시기신 혹시타신
諸善男子 如來所演經典 皆爲度脫衆生 或說己身 或說他身 或示己身 或示他身
혹시기사 혹시타사
或示己事 或示他事

 [강의] 3) 생을 나투어 모습을 나타내시고 법을 설하시어 얻는 이익을 밝혔다. 이를 형체와 소리의 이익이라고도 한다. 먼저 형체와 소리의 이익을 밝히고, 다음에 그것이 거짓되지 않음을 밝혔다.
 “자신의 몸을 설하고”란 부처님의 과거 수행시 일(因地)을 설하시는 것을 말한다.
 “다른 사람의 몸을 설함”이란 다른 부처님의 과거 수행시의 일을 설하시는 것이다.
 “자기의 몸을 보이고 다른 사람의 몸을 보임”이란 부처님 자신과 다른 부처님의 과거 전생에 받은 과보를 나타내 보인다는 것이다. 교학적으로는 정보(正報:자신의 직접적인 업인(業因)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과보)를 보임은 자기의 일이며, 의보(依報: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간접적인 업인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과보, 자신의 심신에 의한 과보가 아니라 주위 환경 등에 의한 과보)를 시현하신 것은 남의 일을 보여주신 것이다.
 “자기의 일을 보이고 다른 사람의 일을 보임”이란 부처님 자신과 다른 부처님께서 과거에 행했던 여러 가지 일을 보이는 것이다.
 “설하신다[說]”란 곧 소리의 교설이며, “보인다[示]”는 것은 형상의 규모이니, 형체와 소리는 자신과 남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법신을 설한다면 자기 몸을 설하는 것이 되며, 응신을 설할 때에는 남의 몸을 설하는 것이 된다. 연등불(然燈佛)을 만나 뵈었다고 말한 것은 곧 자기의 몸을 설한 것이 되고, 연등불이 나의 스승이었다고 한다면 곧 다른 사람의 몸을 설한 말씀이다.  또 수타의어(隨他意語: 부처님이 중생의 근기에 맞게 법을 설하는 방편설이니, 남의 몸을 설하시는 것이 된다.)는 남의 몸을 설한 것이 되고, 수자의어(隨自意語 : 부처님 본뜻을 그대로 드러내는 설법이니 곧 법의 본체를 드러내는 것이 되어 자기 몸을 설하는 것이 된다.)는 자기 몸을 설한 것이다. 자기와 남의 일을 보이시는 일도 또한 이와 비슷하다.

[경] 모든 말로 설하는 바는 다 참되고 헛됨이 없느니라.(금장본 여래수량품 제16 p706~708)
제소언설 개실불허
諸所言說 皆實不虛

 [강의] 4) 점교와 돈교의 두 가지 근기가 수승한 응신이 모습을 나타내시어 설하시고, 열등한 응신이 나투시어 설하시는 것을 말한다.
 “헛됨이 없다[不虛]”란 부처님의 설하시는 법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 부처님이 설하시는 점교 돈교의 두 가지 근기들이 이 두 가지 형체와 소리[形聲]의 가르침을 받으면 모두가 이익을 얻으니 거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헛됨이 없음에 대해서는 사실단의 취지와 본문 적문의 취지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사실단의 취지로 보면, 윗글의 과거장(過去章)에서 모두가 기뻐함을 밝힌 것은 세계실단의 이익과 같으며, 지금 “모두 헛됨이 없다”라고 한 것은 승열(勝劣)의 형체와 소리가 두 근기(낮은 근기 뛰어난 근기)에 들어맞아서 사실단(四悉檀) 이익을 얻으니 모두 거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적․본의 두 법문에 입각하여 보면, 점교와 돈교의 두 교문에서 이익을 얻는 자에 허실(虛實)이 있다. 옛날 방편의 수행으로 아직 진실도의 이익을 얻지 못한 사람은 그 인(因)이 거짓이며, 가까운 수적에 집착하여 아직 본지의 진실한 이익을 얻지 못한 사람은 곧 그 과보가 거짓이 된다.
 지금 적문의 교설을 듣고 함께 실상에 들어감은 이는 곧 인(因) 가운데서 진실한 이익을 얻은 것이며, 또 본문의 설을 듣고 곧 가까운 일에 집착하는 마음을 제거한 것은 길고 먼 과지(果地)의 진실한 이익을 얻은 것이다. 이제 두 가지 진실을 얻은 것은 예전의 두 가지 거짓과 상대되는 것이다.

 [경] 어찌하여 그러한고, 여래는 진실과 같이 삼계의 상을 알고 보아 생사에 혹은 물러가고 나옴이 없고, 또는 세상에 있는 자도 멸도하는 자도 없음이니, 실(實)도 아니고 허(虛)도 아니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느니라. 삼계를 삼계로 보는 것과 같지 아니함이니, 이와 같은 일을 여래는 밝게 보아서 착오가 없건마는,(금장본 여래수량품 제16 p708)
소이자하 여래 여실지견삼계지상 무유생사약퇴약출 역무재세급멸도자 비실
所以者何 如來 如實知見三界之相 無有生死若退若出 亦無在世及滅度者 非實
비허 비여비이 불여삼계 견어삼계 여사지사 여래 명견 무유착류
非虛 非如非異 不如三界 見於三界 如斯之事 如來 明見 無有錯謬

 [강의] 5) 중생들의 교화 이익이 거짓이 아님을 해석한 것이다. 먼저 모습을 나투시어 이익됨을 설하고, 가르침을 설하시어 이익되게 함을 설한다. 법신은 형상도 없고 멸함도 없으시나 중생에 멸함이 있기 때문에 분별작용으로 법신을 받아들이니, 여래께서 중생을 구하려는 원력 때문에 이러한 멸함에 응하셔서 동조하시는 것뿐이다.
 “진실과 같이 알고 봄”이란 실지인 절대적 지혜로 보고 안다는 것. 삼계의 진실을 비추어 보고 알기 때문에 삼계의 원인이 되는 인상(因相)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삼계의 상[三界之相]”이란 삼계에서 일어나는 생사고해 중생들의 실상.
 “생사에 혹은 물러가고 나옴이 없고”에서 생사가 없음이란 중생의 업에 때라 일으키는 분단생사나 생사고를 완전히 끊지 못한 변역생사의 두 가지 생사가 없음을 말한다. 또한 생사고의 원인인 집(集)을 일으킴을 물러남[退]이라 하고, 무상(無常)한 결과가 나타남을 출(出)이라 한다. 삼계의 실상을 바로 알기 때문에 이러한 생사고의 집이 없고 집이 없으니 결과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자도 멸도하는 자도 없음”이란 생사의 세간에 살아 있는 것과 열반의 멸에 들어감이 없어서 이 둘이 함께 멸하기 때문이다.
 “실도 아니고 허도 아니다”란 생사의 세간에 있는 것과 멸도에 들어감도 아니라면 멸도가 진실인 것도 아니고 생사가 거짓인 것도 아니므로 진실도 거짓도 아니라고 하였다.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란 세간과 떨어져 있고 다른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출세간의 진여도 아니기 때문이다.
 “삼계를 삼계로 보는 것과 같지 아니함”이란 여래는 중생들이 삼계를 유, 무로 보는 것과는 같지 않다는 것이다. 여래께서 여실하게 삼계의 모습을 보시는 것과 삼계의 중생들이 삼계를 보는 것과는 다름을 말한다. 중생은 바른 지견을 얻지 못하여 삼계의 진실한 모습을 모르지만, 여래께서는 삼계를 떠나 절대적 경지에서 보시므로 진실하게 아시기 때문이다.
 
 [경] 모든 중생이 가지가지의 성품과 가지가지의 욕망과 가지가지의
행과 가지가지의 기억하고 생각함이 분별이 있는 고로,(금장본 여래수량품 제16 p708)
이제중생 유종종성 종종욕 종종행 종종억상분별고
以諸衆生 有種種性 種種欲 種種行 種種憶想分別故

 [강의] (6) 중생의 근기에 알맞아 거짓이 없음이다. 진리에 통달하면 근기에 알맞게 가르침을 베풀어 중생을 제도하시므로 반드시 거짓이 없으시다.  
 “중생들의 성품과 욕망”이란 갖가지 성품[種種性]은 과거로부터 익혀온 습성. 품성을 가리키고, 갖가지 욕망[種種欲]은 좋아하고 바라는 것이 같지 않음을 뜻한다. 성품은 과거의 행위로부터 오는 습기이므로, 욕망에서 성품이 생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서는 오늘의 근성이 있음으로 오늘의 욕구를 일으키므로 성품을 앞에 놓았다. 곧 번뇌 때문에 오음이 생기고 이렇게 생긴 오음으로 말미암아 다시 번뇌가 있게 되니 현실의 면에서는 전후가 없다고 할 수 있으나 원칙적으로는 번뇌가 먼저이고 오음이 뒤에 있게 되어 욕망으로 말미암아 성품을 이루게 된다.  
 “행과 기억하고 생각함”이란 가지가지 행[種種行]은 중생들의 행위 실천이 같지 않은 것이다. 가지가지 생각과 분별[種種憶想分別]은 갖가지 생각과 갖가지 사상과 갖가지 분별이 같지 않은 것이다. 중생들의 근기가 성욕(性慾) 행지(行智)가 갖가지로 차별이 있으므로 중생들 각각에게 온갖 선근을 증장할 수 있도록 교화한다.
 “중생들의 갖가지 성 욕 행 억상의 분별”이란 중생들의 근기가 성 욕 행 억상의 분별에 따라 사실단의 교화가 이루어진다는 취지이다. 첫째, 중생들의 근기와 성품이 이와 같이 갖가지이므로 이에 맞게 위인실단을 써서 제도한다. 위인실단은 중생들 근기 성품에 맞추어 법을 설해서 선근을 낳게 하는 교화이므로 성품에 가깝다. 둘째, 중생들의 욕구는 점돈이 있어서 욕구가 같지 않음으로 세계실단을 써야 한다. 셋째, 중생들의 행으로 말하면, 행에서 업의 작용[業行]이 일어나니 욕구를 따라 여러 행을 닦아야 한다면 위인실단을 써야 하고, 행 중에 애착이 많다면 장애가 있으므로 이런 때는 대치실단을 써야 한다. 넷째, 억상은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로, 수행 때문에 이해가 생겨 이루어진 일종의 상사해(相似解)이다. 그러나 아직 방편의 단계이고 무언설의 도는 아니다. 따라서 점교 돈교의 중생들이 내와의 범부위에 있으면서 여러 선근의 욕구를 지니고, 욕구 때문에 수행하며 수행 때문에 상사해를 얻는다. 이 중생에게는 제일의실단을 써서 제도한다는 것이다.
 
 [경] 모든 선근(善根)을 나게 하고자 여러 가지의 인연과 비유와 말로써
가지가지의 법을 설하여, 부처의 일을 하되 일찍이 잠시도 쉬지 아니하느니라.(금장본 여래수량품 제16 p708)
욕령생제선근 이약간인연 비유 언사 종종설법 소작불사 미증잠폐
欲令生諸善根 以若干因緣 譬喩 言辭 種種說法 所作佛事 未曾暫廢  

 [강의] (7) 갖가지 근기에 대해 이타의 설법을 하시어 이익되게 하신 일을 밝히셨다.
 “선근을 나게 하고자 인연과 비유로 법을 설함”이란 점교 돈교의 갖가지 근기에서 여러 가지 선근을 나게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혹은 자기 일을 보이고 혹은 남의 일을 보이고, 자타의 가르침을 설하며, 약간의 인연 비유를 나타내신 것이다. 점근기를 만나면 삼장교 중의 사문(유문 공문 역유역공문 비유비공문)에 인연과 비유로 설하고, 또는 통교 중의 사문을 설한다. 돈교의 근기를 만나면 별교 원교 중의 사문을 설하여 제도한다.
 “부처의 일을 잠시도 쉬지 않았다”란 전체적으로 거짓 없음을 밝히신 것이다. 자기 몸과 남의 모습을 드러내 가르침을 설함은 다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에 들게 하신 것이었고, 결코 인천과 이승을 위해 작은 일을 하신 것이 아님을 말한다.   
 “부처의 일[佛事]”이란 부처님께서 하시는 일. 모든 중생이 불도를 이루게 하는 일을 가리킨다.

 [경] 이와 같이 나는 성불함이 심히 오래되고 멀어서 수명이 한량없는 아승지겁이라. 항상 머물러 있어 멸도하지 않느니라.(금장본 여래수량품 제16 p708)
여시 아 성불이래 심대구원 수명 무량아승지겁 상주불멸
如是 我 成佛已來 甚大久遠 壽命 無量阿僧祗劫 常住不滅

 [강의] ○ 이와 같이 내가 성불한 지는∼멸도한다고 말하느니라.(금장본 여래수량품 p.708중〜710하): 여래는 멸도가 아니면서 멸도를 나타내 보이신 일이다. 여기에는 먼저 본래는 멸하지 않으심을 밝히고, 그러나 모습을 보여 멸한다고 하신 것을 나타내며, 멸도를 나투시는 이익을 밝히신다.

 멸이 아니면서 멸도를 나툼 멸도 나투심 진실로 멸하시지 않음
                            멸도 나투는 이익 몸을 나투시어 멸도하겠다고 밝힘

 1) 이 구절은 여래는 진실로 멸하지 않음을 밝힌다. 여래가 성불하신 것이 구원겁이시고 항상 영원하여 멸하지 않으므로 중생을 교화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성불한지 오래되었다”란 과위(果位)의 영구함을 말한 것이다.
 
 [경] 모든 선남자야, 내가 본래 보살도를 행하여 이룩한 수명을 지금도 오히려 다하지 못하였으며 다시 위에서 말한 수(數)의 곱이건마는,(금장본 여래수량품 제16 p708)
제선남자 아 본행보살도 소성수명 금유미진 부배상수
諸善男子 我 本行菩薩道 所成壽命 今猶未盡 復倍上數

 [강의] 인(因)을 들어 과(果)를 비유해 이를 통하여 여래가 상주하심을 밝혔다.
“내가 본래 보살도를 행하여 이룩한 수명”이란 과(果) 자체는 숫자를 들어 한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요, 부처님은 원인(圓因)을 닦아 초주에 오르실 때 이미 영원한 수명을 얻으셨기 때문에 다함이 없다. 인위에서 수명이 이러한데 과위에서 이루신 수명은 어떠하겠는가. 비록 인(因)이라 할지라도 이미 상주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것이어서 결코 무상은 아니다.      
 
 [경] 그러나 지금 진실한 멸도는 아니건마는 방편으로 말하되 마땅히 멸도를 취(取)하리라고 말하느니라.(금장본 여래수량품 제16 p708)
연 금 비실멸도 이편창언 당취멸도
然 今 非實滅度 而便唱言 當取滅度    

 [강의] 2) 자취를 보이신 중에 멸도에 들리라 선언하신 것이다. 법신과 보신과 응신의 멸도를 선언하심은 다음과 같다. 법신(法身)은 비록 생도 아니며 멸도 아니긴 하지만 역시 생멸이 있다. 만약 미혹의 마음으로 집착하면 번뇌가 생기고 지혜는 멸하여 없어질 것이며, 만약 깨달음의 마음이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면 곧 지혜가 나타나고 번뇌는 없어지게 된다. 곧 미혹과 깨달음의 근기가 인연하지 않으면 생멸은 없다.
 보신(報身)의 멸도함이 아니면서 멸도한다 선언하시는 것은 지혜에 본래 생멸이 없고 번뇌에도 생멸이 없으니 지혜로 번뇌를 깰 것이 없다. 따라서 불멸인 것이다.
 응신(應身)의 멸도 아니면서 멸도를 선언함은 응신은 보신의 작용이어서 체(體)가 이미 멸함이 없다면 그 용(用)이 또한 다함이 없다. 따라서 응신도 불멸인 것이다. 다만 중생이 항상 부처님을 뵙는다면 교만한 생각을 일으킬 것이기에 ‘내가 오늘밤 멸도에 들리라’ 선언하신 것뿐이다.
 “지금 진실한 멸도는 아님”이란 영산에서 설법하신 다음 멸도하신 것이 실제로 멸도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생의 교화를 위해 멸도를 보이신 것이라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