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부정논리의 목적으로서 연기(緣起)의 해명

 1) 『중론』의 목적
 이상 팔부중도를 실마리로 하여 간단히 『중론』에 있어서 부정의 논리를 검토해보았으나, 이와 같이 『중론』에서 여러 가지 부정의 논리에 의해 법유(法有)의 주장을 배척하고 있는 것은 하나같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일까.  
 간단히 이에 대해 말해 본다면, 그 최후의 목적은 여러 가지의 사상(事象)이 서로 상호의존 혹은 상호한정에 있어서 성립하고[相因待] 있다고 하는 것을 밝히려 하고 있는 것이다. 곧 한 가지와 다른 것과는 서로 상관관계를 이루고 존재하기 때문에 만약 그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어떤 절대적인 것, 독립적인 것을 인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사물이라고 하는 경우에는 인도의 제철학 학파가 상정(想定)하는 여러 가지의 형이상학적 원리와 실체를 의미하고, 또한 불교의 설일체유부가 상정(想定)하는 오위칠십오법의 체계의 속에 여러 가지 다르마를 포함한 의미이다. 어디에 있더라도 좋을 것이다.
 예를 들면, 『중론』의 제2장(운동의 고찰)에 있어서 사라지는 작용, 사라지는 주체, 사라지는 장소를 부정한 후에 핑갈라는 말한다.
 “이와 같은 일에 사유 관찰한다면 사라지는 법(사라지는 작용)도 사라지는 것(사라지는 주체)도 사라지는 곳(사라지는 장소)도, 이러한 법은 모두 상인대(相因待)한다. 사라지는 법을 원인으로 사라지는 것이 있고, 사라지는 것에 원인하여 사라지는 법이 있다. 이 두 가지 법을 원인한다면 곧 사라질 수밖에 없는 장소가 있다. 한정하여(결정적으로) 있다고 말하는 것도 얻을 수 없고, 정하여 없다고도 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대정장' 30, p.50이하)

 2) 연기를 밝히는 『중론』
 이 ‘상인대하는 것’을 별도의 말로 “연기”라고 부르고 있다. 찬드라키르티의 주석에 의하면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不來不去] 연기가 성리하기 위해서 세간에 승인되었던 가고 오는 작용을 부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제2장에 있어서 부정의 논리가 설해지고 있다고 한다.('뿌라상가빠다' p.92) 그러므로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를 설하는 것은 실은 연기를 성립시키기 위한 것이다.
 또한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不生不滅]를 주장하는 것, “멸하지 않는다는 등에 의해 특징지어진 연기”(같은 책 p.12)를 밝히기 위해서 있고, 또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음[不一不異]을 설하는 것도,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게 되는 연기의 법을 해석하기 위한 연고로”('반야등론' 7권, '대정장' 30권 p.84〜86)에 있다. 또한 영원하지도 않고 단절되지도 않는다[不常不斷]는 최초기의 불교 이래 연기의 설명에 있어서 항상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이것은 후에 설명한다.-지금 『중론』에 있어서 여원하지도 않고 단절되지도 않는 연기가 설해지고 있는 것도 조금도 불가사의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팔부(八不)는 연기를 밝히기 위해 설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찬드라키르티는 “논서('중론')에서 천명해야만 하는 목적은 불멸 등의 여덟 가지의 특징에 의해 특징지어졌던 연기에 있는”('뿌라상가빠다' p.3)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론』에 있어서 부정의 논리가 모두 연기를 밝히기 위해서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중론』전체가 연기를 밝히고 있다고 하는 추정이 확실히 가능해진다. 다음에는 『중론』
의 중심사상으로서 연기의 설명으로 옮겨가고자 한다.

6. 연기(緣起)

  1. 『중론』의 중심사상으로서의 연기

  1) ‘중도(中道)’인가 ‘이제(二諦)’인가
 『중론』의 중심사상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는 학자들에 의해서 여러 가지 설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상식적으로는 『중론』은 공(空), 도는 제법실상(사물의 진상)을 설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삼론종에 의하면 『중론』은 주로 두 가지의 진리 곧 이제를 설하고 있다고 한정할 수 있다.(예를 들면 가상대사 길장의 '삼론현의' 65우, 66좌. '중론소' p.46상, 84하) 그래서 가상대사(嘉祥大師) 길장(吉藏)은 두 가지의 진리가 『중론』의 중심사상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삼론현의' 66좌∼69)
 그런데 여기에 곤란한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중론』으로 제목 붙이고 있는 이상 『중론』의 중심사상은 두 가지의 진리가 아니고, ‘중도(中道)’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묻는다. 이미 제목 붙였듯이 『중론』이라고 이름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중도를 종(근본적 입장)으로 하지 않고 곧 이제를 종으로 하고 있는가.”
 여기에 대한 답을 보면, “답한다. 곧 이제는 이것이 중도이다. 이미 이제를 종(宗)으로 한다. 곧 이 중도를 종지로 하고 있다. 그러한 까닭은 도리어 이제에 대해서 중도를 밝히는 것으로써 근본을 삼기 때문이다. 세제(세속적 진리)의 중도, 진제(궁극적 진리)의 중도, 비진비속(非眞非俗)의 중도이다. 바로 지금은 이름과 종지 두 가지를 들어 보이고자 하기 때문이며, 중(中)과 진리[諦]에 대해 설하기 때문이며, 종지는 그 진리를 들고, 이름은 그 중(中)을 제목으로 붙인다. 만약 중도를 이름으로 하고, 다시 중도를 종지로 한다고 하면 다만 불이(不二)의 뜻을 얻고, 그 두 가지 뜻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삼론현의' 69∼70)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론』 자체에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는 것이 가능한가 아닌가는 의문이 있다. 두 가지의 진리(이제)라는 것은 제24장(네 가지의 수승한 진리의 고찰)의 제8, 제9, 제10시에 언급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해서는 독립해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중론』 및 그의 주석서에서 중관파 자신이 주장하는 것을 들으려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찬드라키르티의 주해에 의하면, “중관파는 허무론자와 다르지 않은 점이 있어서…”('뿌라상가빠다' p.368)라고 하는 반대자의 비난에 대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중관파는 연기론자로서…”(同右)라고 답하고 있다. 그러므로 찬드라키르티는 스스로 연기론자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2) 연기를 설하는 귀경서(歸敬序)
 다시 『중론』자체에 대해서 검토해 보기로 한다.
나가르주나는 『중론』의 모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멸하지 않고, 생하지 않고, 단절하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고,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희론이 적멸해서 길상(吉祥)하게 있는 연기를 설하신 정각자(正覺者)를, 모든 설법들 중에 가장 뛰어나신 분께 머리 숙여 예를 올립니다.” 이 모두의 입언(귀경서)이 『중론』 전체의 요지라고 할 수 있다.
 “우주에 있어서는 어떠한 것도 소멸하는 것이 없고 어떠한 것도 새로 생겨나는 것이 없으며, 어떠한 것도 종말이 있는 것이 없으며, 어떠한 것도 항상된 것이 없으며, 어떠한 것도 자신과 동일한 것이 없으며, 어떠한 것도 그것 자신에 있어서 나누어져 다른 것으로 있는 것이 없으며, 어떠한 것도 우리를 향해서 오는 것도 없고, 우리들로부터 사라져가는 것도 없다고 하는 훌륭한 연기의 진실을 부처님은 설하셨다”
 다시 아상가(無著, 310경∼390년경) 이른바 『순중론(順中論)』을 보면 그의 귀경서에 대해서  “이와 같은 논의 게송은 이 논의 근본이 된다. 모두 서 논을 섭수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이해한다”(권상, '대정장' 30권 p.39이하)고 평하고 있기 때문에 이 연기를 설하는 귀경서가 '중론'의 중심사상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무외론(無畏論)』에는 귀경서의 앞에 “생과 멸을 이와 같이 끊으시고, 연기법을 설하여 주신 저 모니왕(牟尼王)께 귀명합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찬드라키르티가 “'중론'에 천명하고자 했던 목적은 연기(緣起)라고 할 수 있다”('뿌라상가바다' p.3)라고 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3) 『중론』 최후의 시구
 이상은 『중론』의 최초의 시구에 대해서 검토해 보았으나, 다음에는 『중론』의 최후의 시구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곧 제27장(잘못된 견해의 고찰)의 제30시에,
“일체의 잘못된 견해를 끊어버리기 위해 연민을 가지고 바르게 진리를 설해주신 고따마께 우리는 이제 귀명합니다”라고 되어 있다. 찬드라키르티 주석을 보면,
“누가 있다고 하더라도 바른 진리(정법)를, 곧 멸함도 없고, 태어남도 없고, 단절됨도 없고, 영원함도 없고,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고,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닌, 희론이 적멸하여 길상하게 바른 진리를 연기라고 하는 이름에 의해서 설하고 계시다…그보다 위가 없고 둘도 없는 스승께 귀명합니다”('뿌라상가빠다' pp.592∼593)라고 주해하고 있기 때문에 찬드라키르티에 의하면 바른 진리란 연기를 가리킨다고 한다.
 또한 이 시구에 대해서 『반야등론석(般若燈論釋)'의 해석을 보면, 『승사유범천소문경'의 “깊은 인연의 법을 이해한다면 곧 모든 사견이 없어진다. 법은 모두 인연에 속한다. 스스로 결정된 근본이 없다. 인연의 법은 생겨나지 않고, 인연의 법은 멸하지 않는다.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모든 부처님은 항상 현전(現前)하시리라”라고 하는 시구를 인용한 후반에 『중론' 전체를 요약해서 “지금 일어남이 없다는 등에 차별되는 연기를 이해한다면 이른바 일체의 희론 및 같고 다름 등의 여러 가지 견해를 쉬고 모두 다 적멸하는 것, 이 자각하는 법 -이 허공과 같은 법, 이것은 무분별법으로서, 이것은 제일의 경계의 법이 된다. 이러한 것들 진실의 감로를 이해시키는-이것이 일부의 논의 종지가 된다”(15권 '대정장'30, p.135중하)고 한다. 이 ‘일어남이 없는 차별 연기[無起等差別緣起]의 원어는 놀랍게도 찬드라키르티의 주석에 있는 anirodhādiviśișțapratītyasamutpāda('뿌라상가빠다' p.2∼3:12∼13행 참조)의 시작을 anutpāda로 하고 있기 때문에 찬드라키르티와 대립하고 있는 바바비베카도 이 점에 관해서는 찬드라키르티의 설과 완전히 같다.
 그러므로 『중론」은 최초는 연기를 가지고 설하기 시작해서 최후에도 연기를 가지고 요약하고 있다. 여기서는 『중론』 전체가 연기를 설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찬드라키르티의 주석에 의하면 “일체의 것은 연기하기 때문에 공하다고 할 수 있으나 『중론』 전체에 의해서 증명되고 있다”('뿌라상가빠다' p.591)고 한다. 과연 『중론』 전체가 연기를 설하고 있을까 어떨까, 이것은 이하 『중론』의 제문제를 다룰 때 살펴보기로 한다.

  4) 방치해두었던 『중론』의 연기설
 『중론』이 연기를 중심문제로 삼고 있다고 하는 것은 종래의 불교연구의 전통에서 본다면 매우 기묘한 의론으로 보일지 모른다. 산스크리트 원문 출판 이전에 『중론』을 읽은 사람은 모두 구마라집 역출 핑갈라 주석에만 의지했으나 구마라집은 연기(pratītyasamutpāda)를 인연(因緣), 중인연생법(衆因緣生法) 제인연(諸因緣) 등의 말로 번역했기 때문에 『중론」의 연기설은 명료하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불교 내에 있어서 갖가지 연기설을 병행해서 설명하는 경우에도 업감연기(業感緣起)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 진여연기(眞如緣起) 법계연기(法界緣起) 등은 자주 언급되었으나 『중론』의 연기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그런데 『중론'의 서문과 찬드라키르티의 주석이 출판됨과 함께 연구자에 의해서보다 『중론』 독자의 연기설이 점차 주목받게 되었다. 현재에는 『중론』의 연기설은 방치되어 있지만, 그러나 『중론』의 중심사상을 연기(緣起)에서 구한다고 하는 것은 근대 제학자들의 승인을 얻어가고 있으며, 어떤 장애도 없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