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 여래는 이 방편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느니라. 어찌하여 그러한고. 만일 부처님이 세상에 오래 머무른다고 하면, 박덕한 사람은 선근을 심지 않아 빈궁하고 하천(下賤)하며, 오욕에 탐착하여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이 허망하게 보는 그물에 들어가리라.(금장본 여래수량품 제16 p708~710)
여래 이시방편 교화중생 소이자하 약불 구주어세 박덕지인 부종선근 빈궁하
如來 以是方便 敎化衆生 所以者何 若佛 久住於世 薄德之人 不種善根 貧窮下
천 탐착오욕 입어억상망견망중
賤 貪著五欲 入於憶想妄見網中
[강의] 3) 멸도를 나투어 중생을 이롭게 함을 밝히신다. 여기에는 둘이 있으니, 먼저 멸도하지 않으시면 중생에게 손해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 다음으로 만약 멸도를 선언한다면 중생에게 이익이 있을 것이라는 취지이다.
“이 방편으로써[以是方便]”란 이 방편을 가지고. 여기서의 의미는 부처님께서 입멸에 들겠다고 선언하시고 입멸을 보이시는 것.
“부처님이 오래 세상에 머무른다고 하면”이란 중생에게 손해가 된다는 취지이다.
“박덕한 사람은 선근을 심지 않아 빈궁하천하며”란 중생들 중에 작은 법[小法]을 좋아하는 자들은 부처님께서 항상 계심을 뵙는다면 선근을 심지 않아 빈궁하고 하천하여 선을 행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견혹 사혹의 번뇌를 끊지 않아 악을 끊지 않으니 생사의 고해 속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오욕에 탐착하여〜허망한 그물에 빠짐”이란 기억하고 생각함은 곧 견혹(見惑)을 말하고, 오욕은 사혹(思惑)을 말한다. 이런 중생들은 번뇌가 무거워 이들에게 부처님이 멸도에 들 것임을 선언해야 번뇌를 끊고 악을 끊고 선이 생겨나게 되기 때문이다. 멸도를 선언하지 않는다면 이악(二惡: 이미 생겨난 악,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이 생겨 없어지지 않고 이선(二善: 이미 생긴 선,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이 손상되어 생겨나지 않게 된다.
“탐착하여 기억하고 생각함”이란 부질없는 억측[憶想], 갖가지 부질없는 생각들을 말한다.
“허망하게 봄[妄見]”이란 그릇된 소견, 곧 망령된 견해를 말한다.
[경] 만약 여래가 항상 있어 멸하지 않음을 보게 되면, 곧 교만한 생각을 일으키고, 싫어지며 게으름을 품어서 만나기 어려운 생각과 공경하는 마음을 내지 아니하리라.(금장본 여래수량품 제16 p710)
약견여래 상재불멸 변기교자 이희염태 불능생어난조지상 공경지심
若見如來 常在不滅 便起憍恣 而懷厭怠 不能生於難遭之想 恭敬之心
[강의] 첫째 멸도하지 않으시면 중생에게 손해가 있다는 것을 자세히 해석하였다.
“교만한 생각[便起憍恣]”이란 교만하고 방자한 생각을 일으킴. 만약 여래가 항상 계심을 보면 이러한 교만한 생각이 일어나 중생들이 손실이 있게 된다는 취지이다. 교만한 생각은 곧 견혹을 늘어나게 하여 싫어지고 게으름 피는 것은 곧 사혹을 일으키게 되어 부처님을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서 곧 견제(見諦)의 깨달음을 낳을 수 없게 된다. “싫어지며 게으름을 품음[而懷厭怠]”이란 싫증을 내고 게으름 피우는 것을 말한다.
“공경하는 마음을 내지 않음”이란 부처님을 공경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사유도(思惟道:사혹을 끊는 단계)를 낳지 못하여 중생에게 이익이 없게 된다.
[경] 이런고로 여래는 방편으로서 설하되, 비구야 마땅히 알라.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심은 만나기가 어렵다고 함이니라.
어찌하여 그러한고. 모든 박덕한 사람은 한량없는 백천만억 겁을 지나서 혹은 부처님을 친견한 자도 있고, 혹은 친견하지 못한 자도 있음이라. 이런 일이 있는 까닭으로 나는 이와 같이 말하노라.
모든 비구야, 여래를 얻어 보기가 어렵다고하면 이 중생들이 이 말을 듣고 반드시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을 내어서 마음에 연모하는 생각을 품고 부처님을 갈앙하여 곧 선근을 심으리니, 이런고로 여래는 실로 멸도하지 않건마는 멸도한다고 말하느니라.(금장본 여래수량품 제16 p710)
시고 여래 이방편 설 비구 당지 제불출세 난가치우 소이자하 제박덕인 과무
是故 如來 以方便 說 比丘 當知 諸佛出世 難可値遇 所以者何 諸薄德人 過無
량백천만억겁 혹유견불 혹시견자 이차사고 아 작시언 제비구 여래 나가득견
量百千萬億劫 或有見佛 或不見者 以此事故 我 作是言 諸比丘 如來 難可得見
사중생등 문여시어 필당생어난조지상 심회연모 갈앙어불 편종선근 시고 여
斯衆生等 聞如是語 必當生於難遭之想 心懷戀慕 渴仰於佛 便種善根 是故 如
래 수불실멸 이언멸도
來 雖不實滅 而言滅度
[강의] 둘째 멸도를 선언하여 중생에 이익이 있음을 밝힌다.
“선근을 심으리니”란 부처님을 만나 뵙고자 하여 많은 선근을 심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 만나기 어렵다”란 중생들이 작은 법에 집착하여 견혹 사혹의 장애가 두터운데 여기에 삼신불이 불멸하신다는 것을 듣게 되면 도를 닦지 않아서 진리와 하나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때문에 박덕한 사람은 부처님을 뵙는 사람도 있고 뵙지 못하는 사람도 있게 된다. 한편 선이 많고 악이 적은 사람이 삼불을 뵙는다면 이는 부처님이 항상 영축산에 계심을 뵈올 수 있다. 또한 장애가 무거운 반면 선이 가벼우면 이런 자를 위해 삼신의 만나기 어려움을 설하신다. 중생들은 삼불은 비록 다시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시지만 반드시 선을 낳고 미혹을 멸해야 친히 뵐 수 있으니 쉽지 않다고 한다.
“멸도한다고 말하느니라”란 여래는 생멸이 없으시지만, 중생을 위하여 생멸이 없는 가운데 생멸을 보이신다는 것이다.
“마음에 연모하는 마음을 품고”란 부처님이 멸도를 나투시는데 중생들이 견사혹을 멸하여 선근을 심음을 말한다.
[경] 또 선남자야, 모든 부처님 여래는 법이 다 이와 같아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니 다 진실이고 헛되지 아니함이니라.(금장본 여래수량품 제16 p710~712)
우선남자 제불여래 법개여시 위도중생 개실불허
又善男子 諸佛如來 法皆如是 爲度衆生 皆實不虛
[강의] 삼세의 교화에서 중생들이 진실한 이익을 얻음을 밝힌다.
“모든 여래는 법이 이와 같다”란 제불이 오탁악세에 출현하시어 반드시 삼승을 먼저 설하고 일승을 뒤에 설하여 제도하며, 가까운 성불을 먼저 하시고 구원겁 전에 성불을 뒤에 밝히신다는 것이다.
“다 진실하고 헛되지 않음”이란 방편이 바로 실제 진리이므로 모두 참되고 헛되지 않다고 했다.
[경] 비유하건대 좋은 의원이 지혜가 총명하고 통달해서 밝게 방문과 약을 다루어서 여러 가지 병을 잘 다스림이니 그 사람은 자식이 많아서 십, 이십으로부터 백이라. 사연이 있어 멀리 다른 나라에 가니(금장본 여래수량품 제16 p712)
비여양의 지혜총달 명련방약 선치중병 기인 다제자식 약십이십 내지백수 이
譬如良醫 智慧聰達 明練方藥 善治衆病 其人 多諸子息 若十二十 乃至百數 以
유사연 원지여국
有事緣 遠至餘國
[강의] 법설에 대한 비유설로는 법화경 일곱 가지 비유[法華七喩]중 마지막 비유, 의자유(醫子喩)이다. 그 의미는 여래께서는 영원히 상주하시지만, 오탁악세의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방편으로 입멸을 보이시어 이들로 하여금 불도를 닦아 일승도에 들도록 하셨다는 내용이다. 비유설은 비유를 열어 보인 개비(開譬)와 그 비유의 뜻을 같이 밝힌 합비(合譬)로 되어 있다.
비유를 연 것에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훌륭한 의사[良醫]가 아들의 병을 고치는 비유로 삼세 교화가 적절했음을 비유한다. 둘째는 훌륭한 의사가 아들의 병을 고쳐 진실한 이익이 있었다는 비유로 위의 삼세의 교화에 거짓 없음을 비유했다. 처음 아들의 병을 고치는 비유에는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눈다. 첫째는 훌륭한 의사가 멀리 다른 나라에 간 비유로 부처님이 과거의 중생을 교화한 비유이고, 둘째 양의가 돌아오고 나서 다시 떠나간 비유로 현재의 교화(應化)를 비유하며, 셋째는 다시 돌아온 비유이니 미래의 부처님의 응화를 비유했다.
<훌륭한 의사가 아들의 병을 고치는 비유>
의사 아들의 비유 아들의 병을 고침 양의가 멀리 간 비유
(醫子喩) 병을 고친 진실한 이익 돌아와 다시 떠난 비유
다시 돌아온 비유
이 단락은 첫째 훌륭한 의사가 아들의 병을 고치는 비유 중에서 아버지가 타국에 간 비유이다. 이는 과거에 중생의 근기에 응하여 교화하신 뜻을 비유했다. 여래께서 멸도하겠다고 선언하신 것은 중생에게 교화의 이익을 주기 위함이었음을 비유한 것이다. 의사[良醫]는 부처님, 약은 가르침, 오묘한 약은 이치, 병에 따라 약을 처방함은 중생의 갖가지 욕망과 질병에 따라 가르침을 펴는 것을 뜻한다. 일체법을 설함은 중생의 온갖 마음을 다스림을 뜻한다.
“좋은 의원”이란 양의(良醫). 곧 훌륭한 의술을 가진 의사. 좋은 의사. '법화문구'에서는 10종류 훌륭한 의사를 밝히고 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병을 치료해도 병이 더하면 더했지 줄어드는 기세가 없으며, 때로는 사람을 죽게 하는 경우도 있는 의원이다. 이는 공(空)을 본 외도에 비유된다. 이들은 멋대로 나쁜 짓을 하고 사람들에게 사견(邪見)을 일어나게 하여 선근을 끊게 하며, 법신은 이미 없어졌고 목숨과 같은 지혜도 죽어버린 사람들이다.
둘째, 병을 치료해도 병이 더하지도 않고 덜해지지도 않는 의원이다. 이는 유견(有見)을 지니고 고행하는 외도에 비유된다. 이런 사람은 높은 바위에서 몸을 던지고 불 속에 뛰어들어 고행으로 거룩한 수행을 하지만 선정을 얻지 못하여 번뇌를 끊지 못하니 이것이 곧 덜해지지 아니하는 것이며, 또한 훌륭한 수행도 단절하지 않으니 이것이 곧 병이 더해지지 않는 다고 한다.
셋째, 병을 치료하되 차차 병이 덜해져서 더해지지 않는 의원이다. 이는 다만 세간의 의원이 치료하는 경우 병이 차도가 있다가 도로 다시 생겨나는 경우에 해당되며, 이는 곧 선정을 닦아 번뇌의 결박을 끊은 외도에 비유된다.
넷째, 병을 치료하니 차도가 있고 다시 발생하지 않는데 그 치료한 것을 세상에 골고루 펴지 못하는 의원이다. 이는 곧 이승(二乘)의 사람들이 겨우 한 두 종류의 인연 있는 사람에 국한되고 모든 환자를 골고루 치료할 수 없는 것에 비유된다.
다섯째, 비록 모든 사람의 병을 아울러 골고루 치료할 수는 있으나 교묘한 기술이 없어 치료할 때 고통이 따르는 방법을 쓰는 의원이다. 이는 석론에서 “서투른 치료”라고 부르는 일에 해당되며 이는 곧 육도바라밀을 수행하는 보살이 자비심으로 널리 중생의 병을 다스리는 것에 비유된다.
여섯째, 병을 치료하는데 묘한 기술로 치료하여 고통과 괴로움이 없으나 꼭 죽게 된 환자는 치료할 수 없는 의원이 있으니, 이는 통교 보살의 체법(體法)경지에 비유된다. 이 보살은 다만 반복이 있는 범부의 병만을 치료할 수 있을 뿐 도(道)의 씨앗이 불탄 이승의 병은 고칠 수 없는 것이다.
일곱째, 비록 고치기 어려운 병을 치료할 수는 있으나 한꺼번에 모든 사람의 병을 고칠 수는 없는 의원이다. 이는 곧 별교의 보살에 비유된다.
여덟째, 한꺼번에 모든 병을 고칠 수는 있으나 본래의 모습처럼 회복시킨 수는 없는 의원이다. 이는 곧 원교의 초심자인 십신(十信)의 위계에 비유된다.
아홉째, 골고루 모든 병을 치료하고 또한 능히 본래의 모습처럼 회복시킬 수도 있으나 본래의 모습보다 더 좋게 할 수는 없는 의원이다. 이는 곧 원교의 후심(後心)보살에 비유된다. 후심보살은 수행이 매우 오래된 노련한 보살을 뜻한다.
열 번째, 모든 병을 단번에 치료하고 곧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킬 수 있으며 또한 본래의 모습보다 더욱 훌륭하게 할 수도 있는 의원이다. 이는 곧 부처님에 비유된다.
“그 사람은 자식이 많아서 십, 이십에서 백 명이었다고 하자” 열이란 성문, 스물은 벽지불, 백 명은 보살을 가리킨다.
“사연이 있어 멀리 다른 나라에 가니”란 과거 응신으로 교화하시다가 멸도하신 것을 나타낸다. 멸도하시고 다른 국토에 가서 교화하신 것이다.
“통달해서 밝게 방문과 약을 다룸[明鍊藥方]”이란 처방과 약의 성질에 대해 밝게 알고 숙련되어 중생들을 잘 치료함이다.
“멀리 다른 나라에 가니”란 부처님께서 이곳의 대중을 교화하여 대승의 인연을 심어 놓으신 다음, 다른 국토의 대중을 교화하기 위해 멸도를 보이신 것을 가리킨다.
[경] 모든 아들이 그 후에 다른 독약을 마시고 약기운이 발해서 정신이 어지러워 땅에 뒹굴음이라.(금장본 여래수량품 제16 p712)
제자 어후 음타독약 약발민란 완전우지
諸子 於後 飮他毒藥 藥發悶亂 宛轉于地
[강의] 아버지가 돌아오고 나서 다시 떠나감이다. 현세의 교화를 비유했다. 여기에는 둘이 있다. 첫째, 중생이 덕이 박덕하여 번뇌 많음을 본다는 뜻을 비유한 것이다. 삼계의 중생들이 부처님 멸도 후에 외도와 소승의 가르침에 집착하니 여러 세계를 윤회하므로 ‘땅에 뒹굴어 다닌다’고 했다. 곧 유행의 길을 떠나 다른 나라에 이르러 육도를 윤회하면서 삼계에 떨어진 것이다.
“다른 독약을 마심”이란 윗글에서의 기연에 응하여 서로 관계를 맺고 보니 모든 중생들은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에 즐겨 삼계의 삿된 법에 집착하게 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그러므로 ‘다른 의원이 준 독약을 마셨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