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방치해두었던 『중론』의 연기설
가상대사 길장도 『중론』은 두 가지의 진리(이제)를 종지로 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중론』의 주제가 연기(緣起)라고 하고 있다. “능히 이 인연을 설하심은 정법을 바로 드러낸다고 한다.”(「중론소」 p250)
연기를 주제로 하고 있는 것은 단지 『중론』 만은 아니다. 나가르주나의 다른 저서도 연기를 취급하고 있다. 예를 들면, 『육십송여리론』의 모두에 나오는 시(귀경게)를 보면 한역은 다소 명료하지 않으나, “삼세 적묵(寂黙)의 주인께 귀명합니다. 연기하여 생기는(연기하는 것) 정법의 말을 선설하신 분 앞에 올립니다”라 되어 있고(「대정장」 30권 p254중), 또한 티베트문에 의하면, “생하고 멸하는 것을 이 진리에 의해서 끊으시고 연기를 설하여 주시는 저 모니(牟尼)의 주인께 계수례합니다”(산구익(山口益)역 「국역일체경」중관부3 p33 각주)라 하고 있다. 다음의 제1시에는 (한역) “유와 무의 이변을 떠나는 지자(智者)는 의지할 것이 없다. 깊고 깊어서 연함이 없는 연생(緣生)의 뜻이 성립한다.”
(티베트문) “만약 어떤 사람이 저 지혜가 있고 없음에서 떠나 주함이 없을 때는 저들은 깊고 깊은 무소득 연생의 뜻을 이해한다.”
다시 『중론』에 기초가 된 『반야경』에도 연기를 설하고 있다. 예를 들면, 존재하는 것은 연기의 순관과 역관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설하고, 또한 어떤 곳에서는 “연기는 깊고 깊은 뜻이 있다”고 찬탄한다. 또한 어떤 곳에서는 연기를 설명한 후에 “선현(善現)이여! 잘 알아야 합니다. 모든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고자 한다면 이와 같은 연기를 잘 관찰해서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야만 합니다”라고 하였다.(적원본荻原本 「팔천송반야」p720)
여기서 말하는 연기란 ‘서로 의지하고 있다는 것(relationality)’이라는 의미이고, 공(空)과 같은 뜻이다. 나가르주나는 (자체의) 변화라는 그러한 것을 부정하고 있다. 본성상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사람이 슬퍼할 이유도 없다면 기뻐할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상의 논술에서 우선 『중론』은 연기를 설하고 있는 책이고, 중론파는 연기론자이다 라고 하는 결론을 얻었다. 이하에서는 이 문제를 다시 심도 있게 연구하고자 한다.
5) 두 종류의 연기
『중론』의 연기설을 알기 위해서 먼저 주목해야할 것은 『중론』에 있어서는 연기에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가상대사 길장에 의하면 『중론』 27장 속에 처음의 25장은 오로지 대승의 가르침을 밝히고, 끝에 2장은 소승의 가르침을 서술하고 있다. 곧 전자는 대승의 관행을 밝히고 후자는 소승의 관행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중론』전체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한다.(「중론소」 p81하, p82하, p1021상. 「삼론현의」 61매 좌) 한편으로 가상대사 길장은 어떤 곳에서는 최후 하나의 시에서 다시 대승의 관행을 밝히는 “말(末)을 거두어 본(本)에 돌아간다”는 뜻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중론』 전체를 3단으로 나눈다고 하지만, 그 의미는 앞의 경우와 같다.(「중론소」 p71, p81하) 처음의 25장과 뒤의 2장과를 구별하려고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변화가 없다.
이 가상대사 길장이 말한 것은 이전의 옛 주석을 통해 보아도 확인할 수 있다. 핑카라의 주석에 의하면, 제26장(연기의 12지분에 대한 고찰)의 처음에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묻는다. 그대는 마하연(摩訶衍 대승이라는 것)을 가지고 제일의(第一義) 도로 설하고 있다. 나는 지금 성문법(소승의 것)을 설해서 제일의 도에 들어가는 것을 듣고자 한다.”(「대정장」
30권 p36중)
다음에 “답한다”라고 하면서 『중론』의 본문 시구를 인용하고 있다.
또한 『무외론』에도, “묻는다. 그대는 대승의 본전(本傳)에서 제일의에 들어가는 것을 설해 마친다면 지금 틀림없이 그대는 성문의 본전에서 그 제일의에 들어가는 것을 설한다”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시구를 가지고 와서 답하고 있다.
그러므로 처음의 25장에 나타난 연기는 대승의 연기, 곧 『중론』이 주장하려고 하는 독자의 연기가 설명되어 있고, 제26장에는 원시 불교성전 일반과 나란히 소승의 연기가 설명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핑가라 주석에 의하면 이 두 가지 연기를 대비시키고 있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등의 모든 사견을 끊고 불법을 알고자 하기 때문에 먼저 성문법 가운데 있으면서 십이인연을 설한다. 또한 이미 습행(習行)해서 대심(大心)이 있고, 깊은 법을 받아서 감당할 수 있다. 대승법으로써 인연의 상을 설한다. 이른바 “일체법의 불생불멸 불일불이 등, 필경공 무소유이다.”(「대정장」 30권 p1중)
곧 『중론』은 종래부터 전하고 있는 소승 일반의 연기론에 대항해서 독자의 연기설을 설하고 있다.
나가르주나가 소승의 십이인연설을 어째서 뒤의 부분에서 부가적으로 설명하고 있는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나가르주나가 주장하는 독자의 연기는 이름은 같은 “연기”지만 내용은 상당히 다르다고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충분히 이해시키려고 하는데 있었다고 생각된다. 곧 가상대사 길장에 의하면 “단지 대(大)를 나타내기 위하기 때문에” 소승의 연기를 설하였다고 할 수 있다.(「삼론현의」 62매 좌)
이상 여러 가지로 논술했던 것을 요약한다면 다음의 두 가지 점에 귀착하고 있다.
제1 『중론』은 연기를 중심문제로 하고 있다.
제2 『중론』은 종래에서 소승에서 설한 십이인연에 대해서 독자의 연기를 설하고, 그 위에 대항의식을 가지고 중장하고 있다.
그런데 나가르주나가 상대했던 그 이전의 연기설은 어떤 것이었을까.
다음에는 여기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아비달마 연기설
1) 연기설의 변천
소승 아비달마(법의 연구, 대법對法)의 연기설은 태어난 것(중생)이 삼계를 윤회하는 과정을 시간적으로 12인연의 각 지분 하나하나에 대해서 해석하고, 곧 삼세양중의 인과에 의해서 설명하는 태생학적 해석을 하고 있다고 보통 말하고 있다. 그러나 상세히 고찰해 보면 그 사이에 발전 변천이 있었고, 또한 여러 가지의 해석이 병설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설일체유부 제 논서 가운데 연기를 시간적 계기관계(繼起關係)로 간주해서 해석하는 생각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식신족론(識身足論)』에 이르러서였다.(3권 「대정장」 26권 p547상) 그곳에서는 두 가지의 연기의 해석이 설해지고 있다. 처음의 해석에는 각 연기의 지분의 관계를 동시의 계열로 보고 있으나, 후의 해석에는 그것을 시간적 계기관계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삼세양중인과에 의한 해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똑같은 유부의 『발지론(發智論)』에 의하면 무명과 행을 과거에, 생과 노사를 미래에, 그 외 다른 8가지를 현재에 배당해서 대개 윤회의 과정을 나타내 준다는 생각이 매우 명료히 나타나 있다.(1권 「대정장」 26권 p921)
인간의 괴로움 뇌란이 어떻게 해서 성립할까 하는 것을 고찰해서 그 원인을 추구하여, 이하와 같은 12항목의 계열을 세운 것. 1)이 있기 때문에 2)가 있게 된다고 하는 것처럼 관하는 것을 순관(順觀), 1)이 멸할 때에 2)가 멸한다고 하는 것과 같이 관하는 것을 역관(逆觀)이라고 한다.
1) 무명(無明, 무지) 2) 행(行, 잠재적 형성력) 3) 식(識, 식별작용) 4) 명색(名色, 심신) 5) 육처(마음작용이 성립하는 6장場, 안 이 비 설 신 의) 6) 촉(감관과 대상과의 접촉) 7) 수(受, 감수작용) 8) 애(愛, 맹목적 충동) 9) 취(取, 집착) 10) 유(有, 생존) 11) 생(生 생겨나는 것) 12) 노사(老死, 무상한 모습)
<삼세양중인과>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
과거 2인 현재 5과 현재 3인 미래 2과
다음으로는 똑같은 유부의 『대비바사론』에 이르면 “찰나” “연속”, “순위[分位]”, “원속(遠續)”의 4종류 연기의 해석이 보이고 있다.(23권 「대정장」 27권 p117하∼118)
이것은 『구사론』 9권, 『순정리론』 27권, 『현종론』 14권, 『잡아비담심론』 8권, 『창소지론(彰所知論)』 권 하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결국 시간적 계기적 설명이지만 그 가운데 단지 찰나연기 만은 일찰나에 12지분 모두를 갖추고 있다고 하는 설명이다. 이와 같이 독특한 논리적이고 혹은 존재론적 입장에서 해석이 베풀어지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중론』의 연기설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어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연기를 시간적 계기관계로 간주하는 생각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상좌부와 같은 곳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서 찰나연기설을 배척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상가바드라는 “일념(일순간)에도 또한 연기의 뜻이 있다”고 말하고, 다시 경전에도 설해지고 있기 때문에 찰나연기를 승인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순정리론」 27권, 「대정장」 29권 p493하)
주 : 1)Sangabhadra 곧 중현(衆賢)을 가리킨다. 중현은 4세기경 인도의 승려로 『순정리론』을 지었다. 세친(世親, 320?∼420?)이 『아비달마구사론』에서 설일체유부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취급한 데 비하여, 중현은 『순정리론』을 지어 설일체유부의 정통성을 주장하였다.
2) 분위연기(分位緣起)
이와 같은 해석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유부가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분위연기설”이다. 분위란 어의적으로 말하면 “변화발전의 단계”를 말한다. 이것은 삼세양중의 인과에 의해서 설하는 유명한 생태학적 해석이 있다. 그 내용은 지금 여기서 서술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유부의 강요서를 보면 『아비담감로미론(阿毘曇甘露味論)』권 상, 『아비담심론』 4권, 『아비담심론경』 5권은 모두 분위연기 만을 설하고 다른 것을 무시한다. 『아비담심론』 8권에는 대체로 분위연기를 주로 하여 설하고 있다. 『구사론』9권에 있어서도 분위연기가 가장 많이 서술되고 있으나, 여기에 대해서 상가바드라는 『순정리론』에서 “대법(아비달마)의 제 논사는 모두 이 설을 이루고 있다. 부처님은 분위에 의해서 제연기를 설하신다”라고 명료하게 단언하고 있다.(「순정리론」 27권, 「대정장」 29권 p494중)
그러므로 아비달마의 연기론에 대해 말해보면, 중생의 윤회전생의 과정을 설하는 것이 분위연기만을 가리키는 것같이 일반으로 생각되지만, 분위연기의 설이 나온 것은 비교적 후세의 일이다. 후에 이 설이 유력하게 되기 위해 유부의 강요서에 있어서는 다른 설은 어느 정도 축출되기에 이르렀으나, 이것과 다른 해석도 당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분위연기는 생하는 것(유정)은 윤회전생 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에 연기는 오직 유정에 관해서 설해지는 것이 된다. 그러니 소승 아비달마에 소개되고 있는 설을 보면 반드시 유정이라고 하는 부류에 들어가는 것[有情數]만을 한정하지 않는다. 상좌부는 유정과 비유정에 대해 갖가지 연기를 인정하게 한다. 『순정리론』에 의하면, “상좌부에서 말하기를 연기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유정수이고, 두 번째는 비유정이다”(25권 「대정장' 29권 p482상)라고 하고 있다. 또한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되었던 놀랍게도 유부에 속한 것으로 생각되는 선정 강요서에는 단편으로만 보았던 것이 아니고, 단정적인 것으로는 말할 수 없으나 유정수의 연기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있다.
가상대사 길장도 『중론』은 두 가지의 진리(이제)를 종지로 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중론』의 주제가 연기(緣起)라고 하고 있다. “능히 이 인연을 설하심은 정법을 바로 드러낸다고 한다.”(「중론소」 p250)
연기를 주제로 하고 있는 것은 단지 『중론』 만은 아니다. 나가르주나의 다른 저서도 연기를 취급하고 있다. 예를 들면, 『육십송여리론』의 모두에 나오는 시(귀경게)를 보면 한역은 다소 명료하지 않으나, “삼세 적묵(寂黙)의 주인께 귀명합니다. 연기하여 생기는(연기하는 것) 정법의 말을 선설하신 분 앞에 올립니다”라 되어 있고(「대정장」 30권 p254중), 또한 티베트문에 의하면, “생하고 멸하는 것을 이 진리에 의해서 끊으시고 연기를 설하여 주시는 저 모니(牟尼)의 주인께 계수례합니다”(산구익(山口益)역 「국역일체경」중관부3 p33 각주)라 하고 있다. 다음의 제1시에는 (한역) “유와 무의 이변을 떠나는 지자(智者)는 의지할 것이 없다. 깊고 깊어서 연함이 없는 연생(緣生)의 뜻이 성립한다.”
(티베트문) “만약 어떤 사람이 저 지혜가 있고 없음에서 떠나 주함이 없을 때는 저들은 깊고 깊은 무소득 연생의 뜻을 이해한다.”
다시 『중론』에 기초가 된 『반야경』에도 연기를 설하고 있다. 예를 들면, 존재하는 것은 연기의 순관과 역관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설하고, 또한 어떤 곳에서는 “연기는 깊고 깊은 뜻이 있다”고 찬탄한다. 또한 어떤 곳에서는 연기를 설명한 후에 “선현(善現)이여! 잘 알아야 합니다. 모든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고자 한다면 이와 같은 연기를 잘 관찰해서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야만 합니다”라고 하였다.(적원본荻原本 「팔천송반야」p720)
여기서 말하는 연기란 ‘서로 의지하고 있다는 것(relationality)’이라는 의미이고, 공(空)과 같은 뜻이다. 나가르주나는 (자체의) 변화라는 그러한 것을 부정하고 있다. 본성상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사람이 슬퍼할 이유도 없다면 기뻐할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상의 논술에서 우선 『중론』은 연기를 설하고 있는 책이고, 중론파는 연기론자이다 라고 하는 결론을 얻었다. 이하에서는 이 문제를 다시 심도 있게 연구하고자 한다.
5) 두 종류의 연기
『중론』의 연기설을 알기 위해서 먼저 주목해야할 것은 『중론』에 있어서는 연기에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가상대사 길장에 의하면 『중론』 27장 속에 처음의 25장은 오로지 대승의 가르침을 밝히고, 끝에 2장은 소승의 가르침을 서술하고 있다. 곧 전자는 대승의 관행을 밝히고 후자는 소승의 관행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중론』전체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한다.(「중론소」 p81하, p82하, p1021상. 「삼론현의」 61매 좌) 한편으로 가상대사 길장은 어떤 곳에서는 최후 하나의 시에서 다시 대승의 관행을 밝히는 “말(末)을 거두어 본(本)에 돌아간다”는 뜻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중론』 전체를 3단으로 나눈다고 하지만, 그 의미는 앞의 경우와 같다.(「중론소」 p71, p81하) 처음의 25장과 뒤의 2장과를 구별하려고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변화가 없다.
이 가상대사 길장이 말한 것은 이전의 옛 주석을 통해 보아도 확인할 수 있다. 핑카라의 주석에 의하면, 제26장(연기의 12지분에 대한 고찰)의 처음에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묻는다. 그대는 마하연(摩訶衍 대승이라는 것)을 가지고 제일의(第一義) 도로 설하고 있다. 나는 지금 성문법(소승의 것)을 설해서 제일의 도에 들어가는 것을 듣고자 한다.”(「대정장」
30권 p36중)
다음에 “답한다”라고 하면서 『중론』의 본문 시구를 인용하고 있다.
또한 『무외론』에도, “묻는다. 그대는 대승의 본전(本傳)에서 제일의에 들어가는 것을 설해 마친다면 지금 틀림없이 그대는 성문의 본전에서 그 제일의에 들어가는 것을 설한다”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시구를 가지고 와서 답하고 있다.
그러므로 처음의 25장에 나타난 연기는 대승의 연기, 곧 『중론』이 주장하려고 하는 독자의 연기가 설명되어 있고, 제26장에는 원시 불교성전 일반과 나란히 소승의 연기가 설명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핑가라 주석에 의하면 이 두 가지 연기를 대비시키고 있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등의 모든 사견을 끊고 불법을 알고자 하기 때문에 먼저 성문법 가운데 있으면서 십이인연을 설한다. 또한 이미 습행(習行)해서 대심(大心)이 있고, 깊은 법을 받아서 감당할 수 있다. 대승법으로써 인연의 상을 설한다. 이른바 “일체법의 불생불멸 불일불이 등, 필경공 무소유이다.”(「대정장」 30권 p1중)
곧 『중론』은 종래부터 전하고 있는 소승 일반의 연기론에 대항해서 독자의 연기설을 설하고 있다.
나가르주나가 소승의 십이인연설을 어째서 뒤의 부분에서 부가적으로 설명하고 있는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나가르주나가 주장하는 독자의 연기는 이름은 같은 “연기”지만 내용은 상당히 다르다고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충분히 이해시키려고 하는데 있었다고 생각된다. 곧 가상대사 길장에 의하면 “단지 대(大)를 나타내기 위하기 때문에” 소승의 연기를 설하였다고 할 수 있다.(「삼론현의」 62매 좌)
이상 여러 가지로 논술했던 것을 요약한다면 다음의 두 가지 점에 귀착하고 있다.
제1 『중론』은 연기를 중심문제로 하고 있다.
제2 『중론』은 종래에서 소승에서 설한 십이인연에 대해서 독자의 연기를 설하고, 그 위에 대항의식을 가지고 중장하고 있다.
그런데 나가르주나가 상대했던 그 이전의 연기설은 어떤 것이었을까.
다음에는 여기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아비달마 연기설
1) 연기설의 변천
소승 아비달마(법의 연구, 대법對法)의 연기설은 태어난 것(중생)이 삼계를 윤회하는 과정을 시간적으로 12인연의 각 지분 하나하나에 대해서 해석하고, 곧 삼세양중의 인과에 의해서 설명하는 태생학적 해석을 하고 있다고 보통 말하고 있다. 그러나 상세히 고찰해 보면 그 사이에 발전 변천이 있었고, 또한 여러 가지의 해석이 병설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설일체유부 제 논서 가운데 연기를 시간적 계기관계(繼起關係)로 간주해서 해석하는 생각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식신족론(識身足論)』에 이르러서였다.(3권 「대정장」 26권 p547상) 그곳에서는 두 가지의 연기의 해석이 설해지고 있다. 처음의 해석에는 각 연기의 지분의 관계를 동시의 계열로 보고 있으나, 후의 해석에는 그것을 시간적 계기관계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삼세양중인과에 의한 해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똑같은 유부의 『발지론(發智論)』에 의하면 무명과 행을 과거에, 생과 노사를 미래에, 그 외 다른 8가지를 현재에 배당해서 대개 윤회의 과정을 나타내 준다는 생각이 매우 명료히 나타나 있다.(1권 「대정장」 26권 p921)
인간의 괴로움 뇌란이 어떻게 해서 성립할까 하는 것을 고찰해서 그 원인을 추구하여, 이하와 같은 12항목의 계열을 세운 것. 1)이 있기 때문에 2)가 있게 된다고 하는 것처럼 관하는 것을 순관(順觀), 1)이 멸할 때에 2)가 멸한다고 하는 것과 같이 관하는 것을 역관(逆觀)이라고 한다.
1) 무명(無明, 무지) 2) 행(行, 잠재적 형성력) 3) 식(識, 식별작용) 4) 명색(名色, 심신) 5) 육처(마음작용이 성립하는 6장場, 안 이 비 설 신 의) 6) 촉(감관과 대상과의 접촉) 7) 수(受, 감수작용) 8) 애(愛, 맹목적 충동) 9) 취(取, 집착) 10) 유(有, 생존) 11) 생(生 생겨나는 것) 12) 노사(老死, 무상한 모습)
<삼세양중인과>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
과거 2인 현재 5과 현재 3인 미래 2과
다음으로는 똑같은 유부의 『대비바사론』에 이르면 “찰나” “연속”, “순위[分位]”, “원속(遠續)”의 4종류 연기의 해석이 보이고 있다.(23권 「대정장」 27권 p117하∼118)
이것은 『구사론』 9권, 『순정리론』 27권, 『현종론』 14권, 『잡아비담심론』 8권, 『창소지론(彰所知論)』 권 하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결국 시간적 계기적 설명이지만 그 가운데 단지 찰나연기 만은 일찰나에 12지분 모두를 갖추고 있다고 하는 설명이다. 이와 같이 독특한 논리적이고 혹은 존재론적 입장에서 해석이 베풀어지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중론』의 연기설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어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연기를 시간적 계기관계로 간주하는 생각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상좌부와 같은 곳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서 찰나연기설을 배척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상가바드라는 “일념(일순간)에도 또한 연기의 뜻이 있다”고 말하고, 다시 경전에도 설해지고 있기 때문에 찰나연기를 승인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순정리론」 27권, 「대정장」 29권 p493하)
주 : 1)Sangabhadra 곧 중현(衆賢)을 가리킨다. 중현은 4세기경 인도의 승려로 『순정리론』을 지었다. 세친(世親, 320?∼420?)이 『아비달마구사론』에서 설일체유부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취급한 데 비하여, 중현은 『순정리론』을 지어 설일체유부의 정통성을 주장하였다.
2) 분위연기(分位緣起)
이와 같은 해석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유부가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분위연기설”이다. 분위란 어의적으로 말하면 “변화발전의 단계”를 말한다. 이것은 삼세양중의 인과에 의해서 설하는 유명한 생태학적 해석이 있다. 그 내용은 지금 여기서 서술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유부의 강요서를 보면 『아비담감로미론(阿毘曇甘露味論)』권 상, 『아비담심론』 4권, 『아비담심론경』 5권은 모두 분위연기 만을 설하고 다른 것을 무시한다. 『아비담심론』 8권에는 대체로 분위연기를 주로 하여 설하고 있다. 『구사론』9권에 있어서도 분위연기가 가장 많이 서술되고 있으나, 여기에 대해서 상가바드라는 『순정리론』에서 “대법(아비달마)의 제 논사는 모두 이 설을 이루고 있다. 부처님은 분위에 의해서 제연기를 설하신다”라고 명료하게 단언하고 있다.(「순정리론」 27권, 「대정장」 29권 p494중)
그러므로 아비달마의 연기론에 대해 말해보면, 중생의 윤회전생의 과정을 설하는 것이 분위연기만을 가리키는 것같이 일반으로 생각되지만, 분위연기의 설이 나온 것은 비교적 후세의 일이다. 후에 이 설이 유력하게 되기 위해 유부의 강요서에 있어서는 다른 설은 어느 정도 축출되기에 이르렀으나, 이것과 다른 해석도 당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분위연기는 생하는 것(유정)은 윤회전생 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에 연기는 오직 유정에 관해서 설해지는 것이 된다. 그러니 소승 아비달마에 소개되고 있는 설을 보면 반드시 유정이라고 하는 부류에 들어가는 것[有情數]만을 한정하지 않는다. 상좌부는 유정과 비유정에 대해 갖가지 연기를 인정하게 한다. 『순정리론』에 의하면, “상좌부에서 말하기를 연기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유정수이고, 두 번째는 비유정이다”(25권 「대정장' 29권 p482상)라고 하고 있다. 또한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되었던 놀랍게도 유부에 속한 것으로 생각되는 선정 강요서에는 단편으로만 보았던 것이 아니고, 단정적인 것으로는 말할 수 없으나 유정수의 연기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