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품류족론'의 연기설과 그 영향
또한 연기는 일체의 현상적인 존재(일체 유위법)에 관계되는 것에 있다고 하는 설도 있다. '품류족론'에 의하면 “연기법(연기하는 것)은 어떠한 것이 되는가. 이른바 유위법이다. 비연기법(연기하지 않는 것) 이란 어떠한 것이 되는 가 이른바 무위법이다”(6권 '대정장' 26권, p.715)라고 한다. 다만 이것에 지나지 않지만 유부의 대다수의 논서에 있어서, “품류족론에서 말하기를”이라든가 “본론에서 설하는 것과 같이”라고 하는데 이런 글에 인용되어 논의의 중심이 되고 있다. 유부의 7논의 하나로 있는 확실히 중요한 근본경전으로 되어 있는 '품류족론'에 이와 같은 설이 있다면 유부의 특별히 주장하는 분위연기와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이것이 유부에서는 문제로 논의 되었다.
유부의 보통의 해석에 의하면 ‘찰나’ ‘연속’ ‘분위’ ‘원속(遠續)’의 네 가지 연기는 유정에 관해서 설해지고 있으나, 만약 '품류족론'과 같은 연기를 일체 유위법으로 본다면 찰나연기 연속연기 등의 해석도 달라지게 된다. '구사론'에 의하면 “또한 어떤 설은 찰나와 연속은 품류족(론)과 같다. 함께 유위에 속한다”(9권 11매 좌)라고 말하는 설도 보이고 있다. 유정수(有情數)로 보았던 경우에는 찰나연기는 예를 들면 “찰나의 순간 탐(貪)에 연유해서 살생을 행하는 가운데 12지를 갖춘다”('구사론' 9권 11매 좌)를 말하고 연속연기에는 12지가 전후 서로 연계되어 차례로 된다고 말하고 있으나 연기가 일체유위법에 있다고 하는 설을 따르면 그 해석이 크게 변경된다. 야쇼미트라의 석론에서 보아도 “모든 유위법은 찰나에 특별히 멸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연기는 찰나적인 것이다. 그 연기는 원인으로 과를 이루는 양 찰나와 결합하기 때문에 결합적(연속)인 것이다”(야쇼미트라주 p.286)라고 한다.
또한 '아비다르마 등론'에 의하면, 우리들의 개인적 존재(오온)는 찰나 여기서 생멸하는 것이 있으나 일체의 형성력(행)이 개인 존재의 연속을 구성해 있어서 단절하지 않음은 무엇 때문에 있을까라고 말해도, 이러한 것은 결정적인 인과의 연속 속에 존재해서 연기를 구성해 있다고 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연기에 관해서 네 가지의 해석이 있었을 뿐이고, 다시 그의 네 가지에 관해서도 이설(異說)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연기가 일유위체법을 가리킨다고 하는 「품류족류」의 설이 주는 영향은 의외로 크다. '대비바사론'에 의하면 “연기법(연기하는 것)과 연기하여 생긴 법(연기에 의하여 생긴 것)과의 차별은 무엇인가(23권 '대정장' 27권, p.118상, 26권 '대정장 26권, p.716중)”라고 하는 문제에 관해서 여러 논사는 '품류족론'의 문구를 전거로 하여 양자는 차별이 없다고 단정하고 있다. 이 설은 '중사아비담론' 4권에도 설해져, '구사론'(9권 15매좌) 및 야소미트라의 석론(야쇼미트라주, p.291)에도 언급되어 설명되어 있다.
그러면 여기에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연기로 이미 생한 것(연에 의하여 생겼다는 뜻)”이 연기와 같은 뜻으로 되어있다는 것도 '품류족론'에 의하면 연기는 일체유위법을 가리키기 때문에 미래의 유위법도 연기로 이미 생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미래법을 연하여 이미 생긴 것이라고 하는 과거분사에 의해서 나타내는데, 이것은 틀린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대해서 야쇼미트라는 종류가 똑같이 있기 때문에 지장없다고 답하고 있다(야소미트라주, p.281). 확실히 유위(‘만들어진 것’의 뜻)를 과거분사로 나타내고 있는데, 미래의 유위법을 포함하고 있다고 같은 모양으로 미래법을 연하여 이미 생한다고 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일부의 해석이고 연기와 연하여 생긴 것의 차별에 관해서는 소승 아비달마 (특히 '대비바사론' 및 '순정리론'에는 엄청나게 많은 다수의 다른 해석이 설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후세의 책에 인용되어 논급되고 있는 것은 바수반두 및 상가바트라에 의해서 채용되고 있는 설, 곧 모든 지분의 인분(因分)을 연기로 하고 과분(果分)을 연하여 이미 생긴 것을 이루었다는 설과 그밖에 존자 망만(望滿)의 유명한 사구분별(존재에 관한 4종의 사고법)일 것이다.
4) 유부에 의한 연기 무위설의 배척
이상 연기를 일체유위법이 된다는 설, 및 그의 영향을 간단히 논했으나, 다음에 연기는 무위법이라고 했던 파가 있었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구사론'에 의하면, “어떤 이가 설하기를 연기는 무위법이다. 계경(경전)에 여래의 출세, 혹은 출세하지 않는다해도 이와 같이 연기의 법성은 상주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야소미트라주, p.294주 참조)라고 되어 있다. 다른 많은 논서에도 언급되고 있으나 “어떤 이가 설하기를”이라고 하고 있는 곳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 자에 관해서는 화지부 법장부 동산주부 대중부 분별론자 등이 열거할 수 있다. 이들 자료에 전하는 내용이 여러 가지로 차이가 있다. 지금 여기서는 '중론' 등의 연기의 사상을 보기 위한 준비로서 유부가 연기 무위의 설을 배척하는 이유를 보고자 한다.
유부에 의한다면 연기 무위를 주장하는 논자가 전거로 들고 있는 “여래의 출세나 출세하지 않든 이 이치의 정해진 것이라고 전한다”라고 하는 경문은 실은 “인과 결정의”를 설한 것으로, 십이인연의 각 지분은 여러 지분에 대해서 ‘인(因)’이 되고 뒤의 각 지분은 각각 앞의 각 지분에 대해서 ‘과’가 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준다. 연기란 “연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존재하는데 그 연기를 상주하는 것, 또는 실체로 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므로 유부에서는 연기라고 하는 특별한 실체를 생각하는 것은 없었다고 하더라도, ‘법’이라고 하는 실체를 생각해서 그 실체가 인과관계를 이루어 생겨나는 것을 연기라고 이름 붙이고 있다고 한다.
5) 유부의 해석
최초기의 불교에 있어서는 연기의 가지가지 계열이 설해졌는데 어째서 여러 가지 다수의 연기 계열로서 여러 형의 연기가 설해졌을까 현재의 우리들로서는 매우 알기 어렵지만, 그러한 연기설에 통하는 일반적인 취지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기 때문에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멸한다”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이것이 여러 가지 연기의 계열에 공통되는 사상이라고 말한다. 이 문구가 유부에서는 어떻게 해석할까.
유부에서도 위에서 말한 구절이 연기의 기본사상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 연기의 뜻은 곧 이것을 설하는 곳의 이것이 있는 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구사론' 9권 18매 좌, '순정리론' 25권 '대정장' 29권, p.481중)
이 정의는 원시불교 성전에 있는 정의와 완전히 일치할 뿐만 아니라, 대승에 있는 정의에도 일치하고 있다. 예를 들면 대승의 '불설도간경'에서도 (도우.라.반.뿌산 '도간경', p.70∼71) 중관파도('뿌라상가빠다', p.98), 다시 요가파도(동서, p.147)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기 때문에 저것이 생한다”고 말하는 문구가 연기의 근본사상을 요약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불교 각 파가 똑같은 모양으로 다 승인하고 있다. 그러하기 때문에 이 문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의해서 각 파의 설이 달라지는 것이다.
지금 유부의 해석을 보면 상가파트라에 의해서,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란 과거 현재에 여러 가지 연기로 생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것이 생긴다”라고 말하는 것은 미래의 과가 생김이다. 미래에 있어서도 또한 연(緣)의 뜻이 있다고 해도, 분위(分位)에 입각하기 때문에 단지 이미 생긴 것을 설한다. 혹은 “이것이 있음에 의지해서 저것이 있다”란 지금 전생의 인에 의지해서 현재의 과가 있다('수정리론' 25권, '대정장' 29권, p.483중).
라고 한다. 또한 “유(有)의 바퀴, 돌리고 돌려서 무시(無始)가 됨을 보여준다”고 한다.(앞과 동)
'구사론'에는 당시의 여러 가지 해석이 집록되어 있다. 바수반두 자신은 약 4설을 설하고 있다.
첫째, “연기에 의해 결정(확정해서 있는 설)됨을 알리기 위한 까닭이다”('구사론' 9권 19매우)
둘째, “또한 모든 지분의 전생(傳生: 순차적으로 생기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까닭이다”(앞과 같음)
셋째, “삼제(三際: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의 전생을 나타내기 위한 까닭이다”(앞과 같음).
넷째, “또한 친함(직접적)과 전함(하나 걸러서 간접적)과 두 연(緣)을 나타내기 위한 까닭이다(앞과 같음).
또한 장로 세개(世鎧)의 설에 의하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라고 말하는 제1구는 무인론(無因論)을 파하기 위해서 설하고, “이것이 생하기 때문에 저것이 생한다”라고 말하는 제2구는 상인론(常因論)을 파하기 위해 설했다고 하고 있지만(앞과 동), 바수반두는 이 해석을 배척하고 있다. 또한 나(아트만)가 의지해서 십이지가 순차로 성립한다고 하는 설이 있다. 이것도 바수반두는 배척하고 있다(앞과 같음). 또한 경량부의 스님들은 제1구는 “인과의 끊이지 않음을 나타낸다”, 제2구는 “인과의 생기(生起)를 나타낸다”를 위해서 설해졌다고 한다(앞과 같음) 또한 존자 슈리라다(실리라다)는 제1구는 “원인이 상속하고 있다면 과의 상속도 또한 있다”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고, 제2구는 “인분(因分)이 일어남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모든 과분도 또한 생긴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설하지만, 바수반두는 이 설도 또한 배척하고 있다.(앞과 같음).
이와 같이 당시의 해석은 여러 가지로 잡다하다. 다시 철저히 연구를 한다면 단정적인 결론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러한 여러 해석에 공통으로 있는 경향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곧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한다”라고 말하는 구절을 시간적 생기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위에서 말한 해석들이 모두 그와 같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 이와 같이 해석하는 경향이 강했던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것을 뒤의 중관파가 주장하는 상의설(相依說)과 비교하면, 여기에 현저한 차이가 보인다.
따라서 연기란 시간적 생기 관계로 해석하고 있다. 예를 들면,
“묻는다. 어째서 연기라 이름하는가. 연기란 어떤 뜻이 있는가. 답한다. 연(緣)을 기다려서 일어나기 때문에 연기라고 이름한다. 어떻게 연을 기다리는가. 이른바 인연 등으로…”('대비바사론' 23권 '대정장' 29권, p.481상)
그러므로 연기의 직접적인 어의는 실유하는 독립의 법이 연의 도움을 빌어서 생기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에 대해서 중관파는 어떠한 연기를 설했을까.
이상 약설했던 것처럼 소승 아비달마에 나타난 연기관은 제설이 분분해서 하나로 돌아감을 알 수 없는 상태로 있지만, 중관철학과 대비(對比)를 하기 위한 준비로서는 우선 여기서 그치고 다음과 같이 요약하기로 한다.
첫째, 유부에 있어서는 '대비바사론'이후 4종의 연기가 인정되고 있으나, 유부가 가장 역설했던 것은 “분위연기”이다. 후세에 의하면 연기란 중생의 생사를 유전하는 과정을 서술하는 태생학적인 해석이 대부분 다른 설을 축출하는데 이르렀다.
둘째, '품류족론'에 있어 연기란 일체유위법을 가리킨다고 하기 때문에, 후세 문제의 중심이 되었고, 여러 방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셋째, 여기에 반하는 연기를 무위법이 된다고 주장하는 파가 있었다.
넷째,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라고 하는 연기설의 공통적인 취지를 보여주는 문구는 유부에서도 보존되고 있으나 단지 이것은 “연(緣)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라고 하는 시간적 생기(生起) 관계를 의미하고 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