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중론'에서 연기(緣起)의 의의
(1) 연기의 어의(語義)
①구마라집의 번역
'중론'에서 "연기(pratītyasamutpāda)"라고 하는 말을 구마라집은 “인연(因緣)” “중인연생법(衆因緣生法: 여러가지 인연으로 생기는 법)” “제인연(諸因緣: 여러가지 인연)” “인연법(因緣法)” 등으로 번역하였다. 또한 “연기하지 않는(apratītyasamutpanna)”이라고 하는 말을 “인연에 따라서 생기지 않는다, 연에 따라서도 생기지 않는다”라고 번역하고, 또한 “어디에도 연해서 존재하는 것(pratītya yad bhavati)”을 “만약 법이 연에서 생긴다면”, “만약 법이 여러 가지 연에서 생긴다면”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역어에서 볼 때 이전의 불교학에 있어서는 대체로 '중론'은 “인(因)과 연(緣)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 또는 “연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을 설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서양의 학자들 중에서도 소승의 연기와 구별해야만 하는 '중론'의 연기를 같은 소승과 똑같이 이해하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중론'의 연기를 보통 dependent origination production by causes, das abhängige Entstehen, la causation dépendente et conditionelle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연기를 이와 같이 인과 연에 의해서 생기는 것으로 본다면 해석상 매우 곤란한 문제를 만나게 된다. '중론'은 한편으로는 「인연으로 생긴 것」(인과 연에 의해서 생기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쪽에서는 이것을 배척하고 있다. 그러한 뚜렷한 예는 제1장(원인 ‘연’의 고찰) 및 제20장(원인과 결과의 고찰)인데, 아무래도 제법이 인과 연에 의해서 생긴다고 하는 설을 극력 공격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승인하고 다른 쪽에서는 배척하고 있다고 하는 이러한 모순을 일체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여기서 먼저 생각나는 것은 pratītyasamutpāda라고 하는 말을 구마라집은 중인연생법(衆因緣生法) 등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衆]의 인과 연에 의해 생기는 것”이라고 하는 의미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될까 라고 하는 점이다. 이것을 '중론'의 원문에 대조해서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제17장 제29 시구에 있어서 업(행위)은 연에 의해서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중론' 전체에서 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따라서 업도)은 연기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연에 의해서 생겼다”와 “연기한다”는 구별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두 말의 티베트 역을 보면 양자는 명료하게 구별된다.
②중관파와 유부파의 차이
구마라집이 양자를 구별하지 않은 것은 이 구별을 보이는 적당한 역어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연에 의해서 생겨났다”를 의미한다고 한다면 별도의 원어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곧 pratyayasamutpanna와 그 외 hetupratyayasaṃbhūta 혹은 hetupratyayajanita가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유의법에 관해서 사용되는 말들이다. 그러므로 '중론'에 있어서 “연기” “연기한다”라고 하는 말은 이것과 구별해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연기의 원어의 전반, 곧 pratītya를 중관파는 “연에 의해서”라고 하는 의미로는 해석하지 않는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연해서” pratītya란 “연을 얻어서”의 의미였으나 중관파에 의해서도 같은 뜻이며, 논리적인 의존관계를 의미하고 있다. 또한 티베트역에서 보아도 티베트의 번역자도 이것들은 같은 뜻이고, 논리적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하는 것은 틀리지 않는다. 따라서 “연해서(pratītya)”를 “원인에 의해서”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중론'의 연기는 “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중관파는 연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다음에는 이것을 논해보기로 한다.
(2) 상호의존
①'중론'의 연기란
'중론'에서 주장하는 연기는 상의성(상호의존)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중론'의 시구 중에는 상관성이라고 하는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그러나 연기가 상의성의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은 주석에 의해서 밝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제8장(행위와 행위주체와의 고찰)에 있어서는 행위와 행위주체가 서로 떠나서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하는 것을 증명한 후에,
“행위에 의해서 행위주체가 있다. 또한 그 행위 주체에 의해서 행위가 일어난다. 그 외에 성립하는 원인을 우리들은 보지 못하였다.” (제12시)
라고 맺고 있다. 곧 행위와 행위주체와 서로 의존해서 성립하고 있는 것으로 상의성(相依性) 이외에 양자의 성립할 수 있는 이유는 생각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찬드라키르티(월칭)의 주석에 의하여 이 시구는 “아지랑이와 같은 세속의 사물은 상의성 만을 승인하는 것에 의하여 성립한다. 다른 이유에 의해서 성립하지 않는다”('푸라산나빠다' p.189) 라고 하는 것을 설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시구가 의미하는 “갑에 의해서 을이 있다. 을에 의해서 갑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을 상의성에서 명명했다고 보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또한 제2장 (괴로움의 고찰)에 있어서는 고가 스스로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다른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스스로와 남의 2에 의해서 공동으로 만들어지고, 원인 없이 만들어졌으며 아무래도 이들이 옳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는데 찬드라키르티는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위에서 진술한 사구(자작 타작 공작 무인작)를 떠나서 「행위와 행위의 주체를 고찰하는 장」에서 정해진 규정에 의해서 곧 상의성 만을 의미하는 연기의 성립에 의해서(여러 사물이)성립한다고 승인하지 않으면 안된다(동서, p.234)
그러므로 「중론'의 주장하는 연기란 “상의성 만을 의미하는 연기”에 있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것과 똑같은 의미의 일을 다른 여러 곳에서 서술하고 있다.
상의성만에 의해서 세속의 성립이 승인된다. 그러나 사구를 승인하는 것에 의해서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자성론의 <결함>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실로 상의성 만을 승인한다면 원인과 결과와는 상호에 서로 의지하기 때문에 자성상에 성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동서, p.54)
또한 찬드라키르티는 그의 저술 '입중론' 에 있어서 「상의성의 진리」를 강조하고 있다.
②법과 법의 논리적 상관관계
이와 같이 중관파가 연기를 상의성의 의미로 관하고 있는 이상 여러 가지의 연기의 계열에 공통한 근본사상을 나타내고 있는 곳의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기 때문에 저것이 생한다”라고 말하는 구절도 이 의미에서 해석되지 않으면 안된다. 소승의 제파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행해지고 있으나, 대체로 12지가 순서에 따라서 시간적으로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였고, 또한 '중론'에서 보아도 반대자는 시간적인 생기관계로 해석하고 있다.(동서, p.54참조) 그런데 중관파의 해석은 이것과 확연히 대립되고 있다. 찬드라키르티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마치 짧은 것에 대해서 긴 것이 있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동서, p.10)
이것은 주목해야만 하는 주장이다. 소승에 있어서는 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 시간적인 생기관계를 의미한다고 해석되었던 문구가 중관학파에서는 “마치 짧은 것에 대해서 긴 것이 있는 것과 같이” 혹은 “긴 것과 짧은 것처럼”(동서, p.458, 459, 529. 이제 같은 내용의 표현에 대해서는 p.252, 458참조)라고 말하는 것처럼 전부 법과 법의 논리적 상관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길고 짧은 것이 서로 의지해서 성립해 있는 것 처럼, 제법은 상호 서로 의지해서 성립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법유의 입장에 있어서는 절대로 허락할 수 없는 설명이다. 유부는 길고 짧음은 서로 의지해서 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독립된 “길다고 하는 것” “짧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곧 색경(시각의 대상)의 속에 형색(눈에 의해 보이는 형체를 가진 것)중의 긴 것 짧은 것이라는 법을 인정하고 긴 것 짧은 것이라고 하는 “존재양상”을 실체화 시키고 있다. 따라서 “긴 것과 짧은 것이 있는 것 처럼”이라고 하는 표현은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예를 들면, '구사론석론(俱舍論釋論)' 산스크리트문의 가운데 연기를 설하는 부분을 보아도 “긴 것과 짧은 것과 같은 것 처럼”이라든가 혹은 “짧은 것에 대해서 긴 것이 있는 것 처럼”이라는 설명은 한 번도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중관파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운운”이라고 하는 구절은 상의 곧 논리적 상관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여기에는 문제가 발생한다. '중론'의 시구 중에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라고 하는 구절을 부정하고 있는 시구가 있다.
“이것 자체(본체)가 없다는 것(유)에는 유의 성품(있는 것 일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것이 있을 때 이러한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성이 없다”(제1장 제10시)
여기에 있어서 우리는 당혹하게 되지만 그러나 찬드라키르티나 핑가라(청목)의 주석을 보면 이 의문도 얼음이 녹듯이 풀린다. 곧 이 게송은 “이런 것”을 원인으로 하고 “이런 것”을 결과로 이해하는 해석을 배척하고 있다. 요컨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라고 말하는 구는 네 가지 연중에 증상연(增上緣, 조력하는 것으로서의 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상의상관(相依相關) 관계를 의미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나가르주나는 주장하고 있다. 제1장에서는 이전의 제7, 8, 9시구에 있어서 여러 가지 인연(원인으로서의 연) 등무간연(等無間緣, 심리작용이 계속해서 일어나기 위한 연) 소연연(所緣緣,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연)을 논파하고 있으므로 이 제10 시구가 증상만연을 논파하고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소승제파들 처럼 이 시구가 증상연을 의미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가르주나가 배척하는 것이었으나 전술의 찬드라키르티의 주와 같이 이 구가 법과 법의 논리적 상관관계를 의미하고 있다고 이해한다면 진실로 나가르주나의 진의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전술한 나가르주나의 설명과 '중론' 제1장, 제10장의 시구와는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③「중론'의 중심문제
지금 찬드라키르티(월칭)의 주를 보면 이 상의설(相依說)을 여러 가지의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미 서술한 대로 일체의 법은 “긴 것과 짧은 것 처럼” 혹은 “짧은 것과 긴 것 처럼”서로 의지해서 존재한다고 말하고 혹은 “피안과 차안 처럼” 혹은 “종자와 싹 처럼” 상관관계에 있어서 성립하고 있다고 말한다.('뿌라상가빠다' p.252, 458, 459) 혹은 여러 가지 사물은 등불과 어둠 처럼 서로 상관 개념이 되어 존재하고 있다고도 설명하고 있다(동서, p.154, 266, 278, 382).
요컨대 제법은 서로 의존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동서, p.18p). 예를 들면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에 대해서 말해보면, “그래서 그것들은 서로 의지함으로써 성립하고 있다. 인식방법이 있을 때 인식대상도 있다. 인식 대상이 있다면 인식방법이 있다. 실로 인식방법과 인식대상과의 본성상(本性上)에서의 성립은 존재하지 않는다”(동서, p.75)라고 말한다. 또한 “선사(先師)는 서로 의지하여 성립하는 것으로 양자를 성립시킨다”(동서, p.189)고도 말한다. 이것을 술어로 요약해서 말하면 여러 가지 사물의 존재는 “서로 의지함”, “서로 의지하여 존재하는 것” “서로 의지함에 의하여 성립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중론'의 중심문제였던 것이다.
(1) 연기의 어의(語義)
①구마라집의 번역
'중론'에서 "연기(pratītyasamutpāda)"라고 하는 말을 구마라집은 “인연(因緣)” “중인연생법(衆因緣生法: 여러가지 인연으로 생기는 법)” “제인연(諸因緣: 여러가지 인연)” “인연법(因緣法)” 등으로 번역하였다. 또한 “연기하지 않는(apratītyasamutpanna)”이라고 하는 말을 “인연에 따라서 생기지 않는다, 연에 따라서도 생기지 않는다”라고 번역하고, 또한 “어디에도 연해서 존재하는 것(pratītya yad bhavati)”을 “만약 법이 연에서 생긴다면”, “만약 법이 여러 가지 연에서 생긴다면”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역어에서 볼 때 이전의 불교학에 있어서는 대체로 '중론'은 “인(因)과 연(緣)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 또는 “연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을 설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서양의 학자들 중에서도 소승의 연기와 구별해야만 하는 '중론'의 연기를 같은 소승과 똑같이 이해하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중론'의 연기를 보통 dependent origination production by causes, das abhängige Entstehen, la causation dépendente et conditionelle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연기를 이와 같이 인과 연에 의해서 생기는 것으로 본다면 해석상 매우 곤란한 문제를 만나게 된다. '중론'은 한편으로는 「인연으로 생긴 것」(인과 연에 의해서 생기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쪽에서는 이것을 배척하고 있다. 그러한 뚜렷한 예는 제1장(원인 ‘연’의 고찰) 및 제20장(원인과 결과의 고찰)인데, 아무래도 제법이 인과 연에 의해서 생긴다고 하는 설을 극력 공격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승인하고 다른 쪽에서는 배척하고 있다고 하는 이러한 모순을 일체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여기서 먼저 생각나는 것은 pratītyasamutpāda라고 하는 말을 구마라집은 중인연생법(衆因緣生法) 등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衆]의 인과 연에 의해 생기는 것”이라고 하는 의미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될까 라고 하는 점이다. 이것을 '중론'의 원문에 대조해서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제17장 제29 시구에 있어서 업(행위)은 연에 의해서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중론' 전체에서 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따라서 업도)은 연기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연에 의해서 생겼다”와 “연기한다”는 구별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두 말의 티베트 역을 보면 양자는 명료하게 구별된다.
②중관파와 유부파의 차이
구마라집이 양자를 구별하지 않은 것은 이 구별을 보이는 적당한 역어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연에 의해서 생겨났다”를 의미한다고 한다면 별도의 원어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곧 pratyayasamutpanna와 그 외 hetupratyayasaṃbhūta 혹은 hetupratyayajanita가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유의법에 관해서 사용되는 말들이다. 그러므로 '중론'에 있어서 “연기” “연기한다”라고 하는 말은 이것과 구별해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연기의 원어의 전반, 곧 pratītya를 중관파는 “연에 의해서”라고 하는 의미로는 해석하지 않는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연해서” pratītya란 “연을 얻어서”의 의미였으나 중관파에 의해서도 같은 뜻이며, 논리적인 의존관계를 의미하고 있다. 또한 티베트역에서 보아도 티베트의 번역자도 이것들은 같은 뜻이고, 논리적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하는 것은 틀리지 않는다. 따라서 “연해서(pratītya)”를 “원인에 의해서”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중론'의 연기는 “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중관파는 연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다음에는 이것을 논해보기로 한다.
(2) 상호의존
①'중론'의 연기란
'중론'에서 주장하는 연기는 상의성(상호의존)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중론'의 시구 중에는 상관성이라고 하는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그러나 연기가 상의성의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은 주석에 의해서 밝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제8장(행위와 행위주체와의 고찰)에 있어서는 행위와 행위주체가 서로 떠나서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하는 것을 증명한 후에,
“행위에 의해서 행위주체가 있다. 또한 그 행위 주체에 의해서 행위가 일어난다. 그 외에 성립하는 원인을 우리들은 보지 못하였다.” (제12시)
라고 맺고 있다. 곧 행위와 행위주체와 서로 의존해서 성립하고 있는 것으로 상의성(相依性) 이외에 양자의 성립할 수 있는 이유는 생각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찬드라키르티(월칭)의 주석에 의하여 이 시구는 “아지랑이와 같은 세속의 사물은 상의성 만을 승인하는 것에 의하여 성립한다. 다른 이유에 의해서 성립하지 않는다”('푸라산나빠다' p.189) 라고 하는 것을 설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시구가 의미하는 “갑에 의해서 을이 있다. 을에 의해서 갑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을 상의성에서 명명했다고 보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또한 제2장 (괴로움의 고찰)에 있어서는 고가 스스로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다른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스스로와 남의 2에 의해서 공동으로 만들어지고, 원인 없이 만들어졌으며 아무래도 이들이 옳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는데 찬드라키르티는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위에서 진술한 사구(자작 타작 공작 무인작)를 떠나서 「행위와 행위의 주체를 고찰하는 장」에서 정해진 규정에 의해서 곧 상의성 만을 의미하는 연기의 성립에 의해서(여러 사물이)성립한다고 승인하지 않으면 안된다(동서, p.234)
그러므로 「중론'의 주장하는 연기란 “상의성 만을 의미하는 연기”에 있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것과 똑같은 의미의 일을 다른 여러 곳에서 서술하고 있다.
상의성만에 의해서 세속의 성립이 승인된다. 그러나 사구를 승인하는 것에 의해서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자성론의 <결함>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실로 상의성 만을 승인한다면 원인과 결과와는 상호에 서로 의지하기 때문에 자성상에 성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동서, p.54)
또한 찬드라키르티는 그의 저술 '입중론' 에 있어서 「상의성의 진리」를 강조하고 있다.
②법과 법의 논리적 상관관계
이와 같이 중관파가 연기를 상의성의 의미로 관하고 있는 이상 여러 가지의 연기의 계열에 공통한 근본사상을 나타내고 있는 곳의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기 때문에 저것이 생한다”라고 말하는 구절도 이 의미에서 해석되지 않으면 안된다. 소승의 제파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행해지고 있으나, 대체로 12지가 순서에 따라서 시간적으로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였고, 또한 '중론'에서 보아도 반대자는 시간적인 생기관계로 해석하고 있다.(동서, p.54참조) 그런데 중관파의 해석은 이것과 확연히 대립되고 있다. 찬드라키르티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마치 짧은 것에 대해서 긴 것이 있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동서, p.10)
이것은 주목해야만 하는 주장이다. 소승에 있어서는 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 시간적인 생기관계를 의미한다고 해석되었던 문구가 중관학파에서는 “마치 짧은 것에 대해서 긴 것이 있는 것과 같이” 혹은 “긴 것과 짧은 것처럼”(동서, p.458, 459, 529. 이제 같은 내용의 표현에 대해서는 p.252, 458참조)라고 말하는 것처럼 전부 법과 법의 논리적 상관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길고 짧은 것이 서로 의지해서 성립해 있는 것 처럼, 제법은 상호 서로 의지해서 성립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법유의 입장에 있어서는 절대로 허락할 수 없는 설명이다. 유부는 길고 짧음은 서로 의지해서 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독립된 “길다고 하는 것” “짧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곧 색경(시각의 대상)의 속에 형색(눈에 의해 보이는 형체를 가진 것)중의 긴 것 짧은 것이라는 법을 인정하고 긴 것 짧은 것이라고 하는 “존재양상”을 실체화 시키고 있다. 따라서 “긴 것과 짧은 것이 있는 것 처럼”이라고 하는 표현은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예를 들면, '구사론석론(俱舍論釋論)' 산스크리트문의 가운데 연기를 설하는 부분을 보아도 “긴 것과 짧은 것과 같은 것 처럼”이라든가 혹은 “짧은 것에 대해서 긴 것이 있는 것 처럼”이라는 설명은 한 번도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중관파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운운”이라고 하는 구절은 상의 곧 논리적 상관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여기에는 문제가 발생한다. '중론'의 시구 중에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라고 하는 구절을 부정하고 있는 시구가 있다.
“이것 자체(본체)가 없다는 것(유)에는 유의 성품(있는 것 일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것이 있을 때 이러한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성이 없다”(제1장 제10시)
여기에 있어서 우리는 당혹하게 되지만 그러나 찬드라키르티나 핑가라(청목)의 주석을 보면 이 의문도 얼음이 녹듯이 풀린다. 곧 이 게송은 “이런 것”을 원인으로 하고 “이런 것”을 결과로 이해하는 해석을 배척하고 있다. 요컨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라고 말하는 구는 네 가지 연중에 증상연(增上緣, 조력하는 것으로서의 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상의상관(相依相關) 관계를 의미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나가르주나는 주장하고 있다. 제1장에서는 이전의 제7, 8, 9시구에 있어서 여러 가지 인연(원인으로서의 연) 등무간연(等無間緣, 심리작용이 계속해서 일어나기 위한 연) 소연연(所緣緣,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연)을 논파하고 있으므로 이 제10 시구가 증상만연을 논파하고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소승제파들 처럼 이 시구가 증상연을 의미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가르주나가 배척하는 것이었으나 전술의 찬드라키르티의 주와 같이 이 구가 법과 법의 논리적 상관관계를 의미하고 있다고 이해한다면 진실로 나가르주나의 진의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전술한 나가르주나의 설명과 '중론' 제1장, 제10장의 시구와는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③「중론'의 중심문제
지금 찬드라키르티(월칭)의 주를 보면 이 상의설(相依說)을 여러 가지의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미 서술한 대로 일체의 법은 “긴 것과 짧은 것 처럼” 혹은 “짧은 것과 긴 것 처럼”서로 의지해서 존재한다고 말하고 혹은 “피안과 차안 처럼” 혹은 “종자와 싹 처럼” 상관관계에 있어서 성립하고 있다고 말한다.('뿌라상가빠다' p.252, 458, 459) 혹은 여러 가지 사물은 등불과 어둠 처럼 서로 상관 개념이 되어 존재하고 있다고도 설명하고 있다(동서, p.154, 266, 278, 382).
요컨대 제법은 서로 의존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동서, p.18p). 예를 들면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에 대해서 말해보면, “그래서 그것들은 서로 의지함으로써 성립하고 있다. 인식방법이 있을 때 인식대상도 있다. 인식 대상이 있다면 인식방법이 있다. 실로 인식방법과 인식대상과의 본성상(本性上)에서의 성립은 존재하지 않는다”(동서, p.75)라고 말한다. 또한 “선사(先師)는 서로 의지하여 성립하는 것으로 양자를 성립시킨다”(동서, p.189)고도 말한다. 이것을 술어로 요약해서 말하면 여러 가지 사물의 존재는 “서로 의지함”, “서로 의지하여 존재하는 것” “서로 의지함에 의하여 성립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중론'의 중심문제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