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淨)과 부정(不淨) 아버지와 아들>

 이와 같이 서로 의지한다는 것, 곧 제법의 상의상관 관계를 밝히는 것이 실로 '중론'의 주요목적이라 할 수 있고, 이를 위해서 여러 가지 논법이 사용되고 있다. '중론'의 가장 먼저 기술되어 있는 ‘팔불’에 관한 제 주석서들의 증명도 이 상의관계를 밝히는 이외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 있으며, 이제 분별해서 말한다면 정과 부정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정(淨)에 의존하지 않으면 부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 부정에 연해서 정을 말할 수 있다고 설한다. 그러므로 정은 (단독으로) 얻을 수 없다.” (23장 제10시)
“부정(不淨)에 의존하지 않으면 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 정에 연해서 부정을 말할 수 있다고 설한다. 그러므로 부정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제23장 제11시)
정과 부정은 개념상 완전히 다른 것으로, 정은 어디까지나 정이고, 부정이 아니다. 또한 부정은 어디까지나 부정이어서 정이 아니다. 양자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정과 부정이 이러저러한 자신의 본질(자성)을 가지고 있다면 곧 Existentia(존재)로서 존재한다면 정은 부정을 떠나서도 존재하고, 또한 부정은 정과는 독립해서 부정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정도 부정도 함께 자연적 존재의 “존재양상”으로 있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우리가 한그루의 나무와 한 개의 돌이라고 하는 두 개의 자연적 존재를 문제로 한다면 양자는 상호간에 독립해 있고 관계가 없이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대 인도인들이 문제로 여겼던 것은 자연적 존재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의 영역에 있었다. 따라서 정과 부정이라고 하는 두 가지의 존재양상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면 양자는 서로 관계가 없을 수 없고 서로 상대를 예상해서 성립한다. 정은 부정에 의해서 정이 되고, 부정은 정에 의해서 부정이 있게 된다. 따라서 양자는 독립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상의상관 사상은 중관파의 서적에 빈번히 나타나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예로 설명해 본다면 한층 명료해진다.(예를 들면, '백론' '회정론' '대지도론' '보리행경' 등에 나온다) 자연적 존재의 영역에 있어서는 아버지가 있어야 아들이 태어나기 때문에 아버지는 능생(能生)이고 아들은 소행이 된다. 역으로 아들이 아버지를 낳는 것은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존재양상으로서 아버지와 아들을 문제로 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아버지가 아들을 낳지 않는 사이에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들을 낳는 것으로 인해서 비로소 아버지라고 말한다('대지도론' 31권 '대정장 25권, p.290).
 아버지와 아들은 상호간에 서로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독립해서 아버지와 아들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한 아버지가 아들을 낳는 다는 것도 말할 수 없다. 일체의 법은 상의상관으로 관계하면서 성립해 있다고 하는 것이다.

  ④ 길장(吉藏)의 분류  
 다음에는 이러한 여러 가지 술어들의 한역(漢譯)을 보면, 구마라집은 청목석(靑目釋)을 번역하는데 “상대(相待)” “상인대(相因待)” “인대(因待)” “상인(相因)” 등의 말을 사용하고 있다. 위에서 서술한 설명에서 “상의”라고 하는 역어를 가끔 사용했던 것은 우이하쿠주(宇井佰壽) 박사가 사용했던 것을 따른 것이지만, 청목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중론소'를 보면, “상의(相依)”라고 하는 술어는 빈번히 나온다(p.519상, 585, 589상, 638하). “상대” “상인대” “인대” “상인” 등의 술어도 가상대사 길장이 가끔 사용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가상대사 길장도 '중론'이 상의설을 설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충분히 유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는 아직 충분히 분류되지 않았던 이 “상대(相待)”라고 하는 개념을 여러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중론소', p.652하)
 
 제1의 분류: “통대(通待)”와 “별대(別待)”.
 통대란 장(長)과 부장(不長)과의 관계와 같다고 말한다. 곧 장과 장 이외의 모든 것의 관계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갑(甲)과 갑이 아닌 것[非甲]과의 관계(곧 모순) 이다.
 별대란 장(長)과 단(端)과 같은 관계를 말한다. 곧 반대 개념의 관계이다. 어떤 학자는 전자를 “밀대(密待)”라고 부르고, 후자를 “소대(疎待)”라 불렀다고 전한다.   
 제2의 분류: “정대(定待)”와 “부정대(不定待)”
 정대란 예를 들면, 생사와 니르바나 색(물질 형체 있는 것)과 심(心)과의 관계와 같은 것을 말한다. 부정대란 5척(尺)은 1장(丈)에 대해서는 짧지만, 3척에 대해서는 길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경우의 관계를 말한다.
 제3의 분류: “일법대(一法待)”와 “이법대(二法待)”
 일법대란 1사람이 아버지이기도 하고 아들이기도 한 경우를 말한다. 이법대란 긴 것과 짧은 것의 2법에 관련시켜서 말하는 경우를 말한다.
인도의 중관파가 말하는 상대(相待)란 이러한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⑤ '중론' 논리의 특이성
 이와 같은 모든 존재의 상의성(相依性)에 주목한다면 '중론' 논리의 특수성을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중론'에 있어서는 “A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B가 성립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논법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곧

“특별한 상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만들어진 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특별한 상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특별한 물건도 성립하지 않는다.(제5장 제4시)”
이와 같은 논법은 매우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제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제1장 제5, 7, 8, 14시 후반. 제2장 제22, 23시. 제3장 제5시 후반, 6시 후반. 제4장 제5시. 제7장 제29, 33시. 제9장 제11시. 제11장 제2시. 제14장 제8시. 제16장 제5, 7시. 제17장 제26, 27, 29, 30시. 제20장 제22, 24시 후반. 제22장 제4시 후반, 9시 후반. 제23장 제4, 6시 후반, 9, 12, 13, 14, 16, 19, 21시(여기서 다소 의미를 달리하지만, 24장에는 이것과 유사한 논법이 다수 있다.)
이들 논법은 한 가지가 아니고, 아무래도 한쪽에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쪽에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주석 중에도 매우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는 형식논리학의 입장에서 보지 않는다면 결코 바른 논의가 아니다. 예를 들면 제7장 (임의로 만들어진 유위의 고찰)에서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해서 유위법이 실유하는 것으로서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후에,
“생하고 주하고 멸하는 것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유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유위법이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무위법이 성립할 수 있겠는가”(제33시)
라고 하는데 일체법을 분류해서 유위와 무위라는 두 가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유위와 무위는 서로가 배제하는 관계에 있는 이상 유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위는 성립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일반에서 '중론'에 있어서 추론의 형식을 보면 형식논리학적으로는 부정확한  것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 우이하쿠주(宇井佰壽) 박사가 지적해 놓았다.('국역중론' 해제, p.28)
그러면 나가르주나의 의론에는 오류가 있다고 하는 것이 되지만, 그러나 '중론'이 상의설(相依說)을 주장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곤란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론'에 의하면 여러 가지 사물은 상관관계를 이루어 성립하기 때문에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갑에 의해서 을이 있고, 또한 을에 의해서 갑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조건문 형식으로 바꾸어 쓰면, “갑이 성립할 때에 을이 성립하고 또한 을이 성립할 때에 갑이 성립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중론' 및 그의 주석서에서 “갑이 성립한다면 을도 성립하겠지만, 갑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을도 성립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의론이 있는 경우, 형식논리학적으로 비판한다면 명료하게 부정확한 추론이라고 할 수 있다. '중론'이 상의설에 세워진 이상 앞에서 서술한 의론은 암암리에 “을이 성립한다면 갑도 성립한다”고 하는 명제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오류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일체의 조건이나 이유없이 다만 “한쪽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쪽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의론도 상의설을 고려한다면 잘못된 의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상호간에 의존하기 때문에 한쪽의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할 때에는 제2의 것도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깨달음에 나아가는 입문' 판지카, p.537)고 말한다. 또 “그러므로 상호간에 의존하기 때문에 한쪽의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른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동서, p.538)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가르주나가 상의설(相依說)을 주장하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종래 서양학자들에 의해서 자주 주장해온 것처럼, 나가르주나는 궤변을 설하고 있다고 하는 설이 오해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⑥ 유위법과 무위법에서 상의성
 이상에서는 연기(緣起) 또는 상의라고 하는 말의 내용을 논해보았다. 다음에는 연기라고 하는 말이 어떠한 범위에 관련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찰해 보기로 한다.
 이미 설일체유부에서는 연기란 유정수(有情數)에 한해서 말한다고 하는 설('순정리론' 25권 '대정장' 29권, p.482상)과 유정(有情) 비유정(非有情)에 통해서 말한다고 하는 설의 두 종류가 있으나('구사론' 5권 12매좌), 어쨌든 연기는 유위법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부(有部)는 유위법 외에 별도로 독립해서 실재하는 무위법을 인정하고 있다. 곧 무위법도 “자상(自相)에 있어서 주하는 것으로 존재한다”고 하여 법으로 존재하고, 유위법의 반대개념이 아니라면 또한 유위의 결여(缺如)도 아니라고 한다. 곧 자상을 가지는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법으로서 승인되었다. 그래서 이처럼 무위법에 관련해서는 연기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중론'은 앞에서 서술했던 것처럼 여기에 대해서 “또한 유위(有爲)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무위(無爲)가 성립할 수 있을까”(제7장 제33시)라고 한다. 유위법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무위법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는 의론은 중관파의 논서 속에 자주 나타난다.('현관장엄론', p.49. '십이문론' '대정장' 30권, p.160중, 162하, 163중. 청목석 '대정장' 30권, p.35상. '중관소', p.590하) 유위법도 무자성이고, 무위법도 무자성이다. 양자는 상의상관의 관계에 있어서 성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