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유위법과 무위법에서 상의성
그런데 “어떻게 해서든지 연기해서 일어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공하지 않은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다.”(제24장 19시)

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찬드라키르티(월칭)도 같은 뜻으로, “연기하지 않는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뿌라산나빠다 , p.505)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유위법도 무위법도 모두 일체법으로 상당히 서로 의지해 존재한다는 통일성 아래에 놓여 있다. 곧

“또한 만약 열반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열반은 임의로 만들어진(유위) 것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위로 있는 것은 결코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제25장 제5시) 라 하고 있어서 열반이라고 하는 것도 부처라고 하는 것도 모두 인연에 속해 있는 것이다.  중론 은 “일체의 불법 모두 이 인연의 뜻이 된다”( 중론소 , p.30상) 라고 분명히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유위법과 무위법이 함께 상의가 설해지고 있다.

⑧ 법계연기와 유사성
이것을 전술한 유부의 연기론과 비교해 본다면 매우 큰 차이가 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중론 이 주장하는 연기가 후세 중국의 화엄종에서 설하는 법계연기 사상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법계연기설에서는 유위법 무위법을 통하여 일체법이 연기해서 이루어진다고 설하고 있는데, 그 사상의 선구를 우리는  중론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 화엄종은 일체법이 상즉하고 원융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데, 중관학파의 글에서도 그 사상이 나타나고 있다. 곧 찬드라키르티의 주해에서는 “하나에 의해서 일체를 알고, 하나에 의해서 일체를 본다”( 뿌라상가빠다 , p.28)라고 말한다. 또한 하나의 법이 공하면 일체의 법이 공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논하고 있다.
아리야 데바는 말한다.

“한 가지 사물의 공을 보는 사람은 일체의 사물의 공을 보는 사람이라고 전한다. 하나의 사물의 공성은 일체 사물의 공성에 다름이 아니다” ( 사백론  제8장 제16시)찬드라키르티도 같은 취지를 말하고 있다. “중관파는 하나의 사물의 공성을 교시하려고 하는 것과 똑같이 일체 사물의 공성을 교시하고자 한다.”( 뿌라상가빠다“, p.127)
이와 같이 하나와 일체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극소(極小)에서 극대(極大)를 알 수 있다. 지극히 극소의 사물속에서 전 우주의 신비를 찾아 볼 수 있다. 각 부분은 전체적인 연관 속에서 일부분이기 때문에 부분을 통해서 전체를 볼 수가 있다. 실로  중론 이 보여주고자 하는 목적은 전체적인 연관의 건설이었다.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중론 이 설하는 연기와 화엄종이 설하는 연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종래 화엄종의 법계연기설은 완전히 중국에서 처음 제창한 법문이었다. 연기라고 하는 말의 내용을 변화시켜서 시간적 관념을 떠난 상호관계의 위에서 명명된 것이라고 보통 해석되었다. 그러나 화엄종에서 설하는 연기설은 그대로 삼론종 속에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삼론현의  83매 좌), 거슬러 올라가면  중론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중론」의 연기설은 화엄종의 사상과 근본에 있어서는 거의 일치한다고 해도 좋다. 다만 화엄종의 편이 한층 복잡한 조직을 세우고 있는 점이 다소 다를 뿐이다. 현수대사 법장은  십이문론종치의기(十二門論宗致義記) 를 저술하였고, 또한 일조(日照) 삼장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나가르주나로부터의 사상적 영향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법계연기의 교설이 어느 정도 나가르주나의  중론 이나 그 밖의 저서로부터 영향을 받았을까하는 것은 또 다른 연구과제라고 할 수 있으나 양자 간에 내면적으로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⑨ 자이나교와의 관계
이제 마지막 문제로서  중론 에서 들었던 것과 같은 표현이 원시불교 성전 속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자이나교의 성전에서 보이고 있다. 자이나교의 성전 속에 나타나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자이나교의 성전  아야랑가(Āyāraṅga)는 “한 가지 사물을 아는 사람은 일체를 안다. 일체의 사물을 아는 사람은  일체를 안다”라고 설하고 있으며 같은 취지의 사상이 자이나교의 산스크리트 시구로도 전해지고 있다.
“한 가지 번뇌를 피하는 사람은 일체의 번뇌를 피한다”라고도 말한다. 그런데 나가르주나는 이와 같은 표현을 자이나교에서 취해서 받은 것인가. 그러나 자이나교에 관한 나가르주나의 언급은 그렇게 많지 않아서 여전히 많지 않으므로 계속 의문에 여지가 있다. 여기에 대한 역사적 연관의 해명은 이후 연구로 미루고자 한다.

4. 종래의 연기론과의 관계

1) 중론 과 십이인연
 중론 에서 주장하는 독자의 연기설이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다면  중론 은 종래의 원시불교 성전 일반 및 소승의 십이인연설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을까.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중론 에 있어서는 두 종류의 연기가 설명되고 있다. 곧 제1장에서 제25장에서 설명되는 것은 완전히 논리적인 전혀 “상의성(相依性)만을 의미하는 연기”이다. 제26장에서는 소승의 이른바 “십이인연”을 설명하고 있다. 이 제 26장의 설명은 전혀 십이지를 시간적 생기의 전후관계로 보여주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지(무명)에 덮힌 자는 다음 생을 인도하기 위해 세 가지 행위(업)를 만들어 낸다. 그 업에 의해서 미혹의 영역에 취향해 간다.(제1시)

잠재적인 형성력(행)을 연으로 해서 식별작용(식)은 취해 들어간다. 그렇게 취향해 들어갈 때 심신(명색)이 발생한다(제2시). 명색이 발생할 때 마음의 작용이 성립하는 여섯 개의 장(육입)이 생긴다. 육입이 생겨서 감관과 상대하는 접촉(촉)이 생긴다.(제3시)

눈과 색, 형상으로 된 것(색)을 대상으로 주의(작의)에 연해서 곧 명색을 연으로 해서 식이 일어난다.(제4시)

색과 식과 눈과의 세 가지가 화합하는 것, 그것이 곧 촉이다. 또한 그 촉에서 감수작용(수)가 일어난다.(제5시)

감수(수)에 연하여 맹목적 충동 애가 있게 된다. 왜냐하면 수의 대상을 애욕하기 때문이다. 애욕 할 때에 4가지 집착(취)를 취하게 된다.(제6시)   

집착(취)가 있을 때 취의 주체에 대해서 생존이 생긴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집착하지 않으면 해탈할 것이며, 유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제7시)

그 생존은 곧 다섯 가지의 구성요소(오온) 이다. 생존에서 생이 일어난다. 노사 고 등 우(憂) 비(悲) 뇌(惱) 실망-이들은 생에서 발생한다. 이와 같이 해서 이 덩어리가 되는(망상 뿐) 괴로움이 모여서 고음(苦陰)이 생긴다.(제8 제9시)

이와 같이 오로지 시간적 생기의 관계로 해석되어 있고, 찬드라키르티의 주석에서는 한 항목으로부터 다음 항목이 발생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항상 “그것 되게”라고 하는 설명이 부가되어 있다. 또한 나가르주나는 그 밖의 저술에서 십이인연을 삼세양중인과에 의해서 설명하고( 인연심론송인연심론석因緣心論頌因緣心論釋  대정장32, pp.490-491  대지도론  25권), 중관파는 극히 후대에 이르기까지 삼세양중 인과에 의해 설명을 언급하고 있다.( 깨달음의 행에 들어가는 입문 , p.389)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
   無明   行   識   名色   六入   觸   受    愛   取    有   生   老死
                                                                                 
     
                                                                           
    과거 2因            현재 5果              현재 3因      미래 2果           

  무명無明(ignorance):무지 맹목적(小乘), 진여자성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根本不覺(大乘), 大煩惱地(俱舍論), 根本煩惱(我痴 我見 我慢 我愛)(唯識), 맹목적 생활의지. 착각 망상.
  행行(formations): 행위 동작 또는 업의 뜻. 삼업으로 끊임없는 활동력
  식識(conciousness): 생명체의 주재로서 心意識 善惡의 능작자.
  명색名色(mantality-materiality): 이름만 있고 형상은 없는 심식을 명이라 한다. 정신과 물질 心肉의 합성, 명이란 자석의 자장과 같고 색이란 자석의 자철과 같다.
  육입六入(sixfold base): 육근 육처.
  촉觸(contact): 육근과 육경의 접촉
  수受(feeling): 감각작용
  애愛(craving): 욕애 갈애 탐착. 마음을 집착시키는 번뇌장 본능적인 愛.
  취取(ciinging): 애에 따라 일어나는 집착심. 자기소유화
  유有(becoming action): 존재의 뜻. 과보의 업인이 되는 과보. 업인으로 삼유생성.
  생生(birth):
  노사老死(ageing and death)        




그러나 용수가 진실로 주장하고 싶어했던 연기가(제1장으로부터 제25장 까지) 12지분은 아니라고 하는 것은 분명하다. 제3장 8시에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만약 보여지는 것과 보는 작용이 없기 때문에 식(識)과의 네 가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취(집착) 등은 일체로서 어떻게 취 등이 존재하겠는가.” 라고 하고 있다. 이에 대한 여러 주석을 보면 ‘식 등의 네 가지’는 식(識) 촉(觸) 수(受) 애(愛)를 가리킨다. 그런데 핑가라(청목)의 주석에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견(見)이나 가견(可見)의 법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식 촉 수 애의 네 가지 법은 모두 없다. 애 등이 없기 때문에 4취 등의 십이인연 지분도 없다”(대정장 30권, p.6중)

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중론 에서 주장하는 연기가 12지분의 의미가 아니고, 상의성의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시 주목해야 할 것은  무외론 에서는 제26장은 ‘12지분을 관하는 장’으로 되어 있고, 또한 찬드라키르티의 주석에서는 ‘12지를 고찰하는 장’으로 되어 있다. 또한  무외론  및 핑가라의 주석에서는 제26장 속에서 ‘연기’(또는 그것에 상당하는 말, 예를 들면 여러 가지 인연으로 생하는 법[衆因緣生法]이라는 말이 한 번도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가장 오래된 이 두 가지 주석에서만 연기라고 할 경우에는 항상 상의성(相依性)을 의미하고  12지의 의미를 포함하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