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중론'의 십이인연의 확장해석

 이상 '중론'독자의 연기와 소승연기와의 관계를 살펴보았는데, 다음의 문제로 '중론'의 이와 같은 연기설은 역사적으로 어떤 계통을 받았을까에 관해서 논해보고자 한다.
우이 하쿠주(宇井伯壽)박사와 와츠지 테츠로우(和辻哲郞)박사 등 근대의 학자의 연구에 의해서 붓다가 연기설을 설한 진의는 소승 일반의 해석과 다른 점이 있다고 하는 것이 밝혀졌다. 곧 최초기의 불교에 있어서는 십이인연의 여러 가지 항목은 시간적으로 윤회의 과정속에서 있었던 계기(繼起)의 인과관계에 의해서 순서가 세워졌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 형식의 구조에 있어서 차례로 기초 지어져 있는 관계로 열거되어 있다. 그 진의는 인간이 미혹하고 있는 여러 가지 모습의 구조연관을 해명하고자 한 것이다. 붓다는 형이상학적 실체를 가정하는 당시의 인도사상을 배척하고 다만 인간 생존의 구조를 문제로 하였다. 그래서 십이인연의 속에 앞의 항목들이 순차적으로 다음의 것들을 기초로 하고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중론'에 있어서는 십이인연의 속에 앞의 한 개의 항목이 다음 항목을 기초로 하는 관계는 다시 극단적으로 철저하게 확장해석 되었다. '중론'에 의하면 일체의 삼루의 관계는 결코 각자 독존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상의상자(相依相資)되어 있다고 한다. 일체의 사물은 상호간에 한정하고 합해서 무한의 상관관계를 이루고 성립시키게 되며, 어떤 다른 사물과 무관한 독립 고정의 실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주장 하에 상의성의 의미의 연기를 설하고 있다.
 상의성이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고 하는 관계를 말하고 있으나, 원시불교에 있어서는 십이인연의 속에 “앞의 항목이 있을 때에는 다음 항목이 있다.”고 하는 의미였으나, 중관파는 그 관계를 이른바 사물의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중관파는 이것을 “길고 짧음과 같은 것" 논리적 상관관계로 해석하고 있다. 

4. 소승의 연기설과 '중론'

 그런데 '중론'에 이르기 까지 어떤 계통에서 연기설이 발달했다고 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상세히 보면 명확하지 않다. 부파대립시대의 불교의 전적 중 잔존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설일체유부 또는 남방상좌부 관계의 것이다. 그 해석은 '중론'에서는 매우 다른 것이다. 그러나 유부 또는 상좌부 계통의 논서 중에서도 '중론'과 관계가 있다고 하는 설은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앞에서 서술했던 ‘찰나연기’의 설명에서는 상의설의 취의가 서술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또한 {존파수밀보살소집론(尊婆須蜜菩薩所集論)}에는 “혹시 십이인연법이라고 해도 저것은 십이지를 세운 연기는 아니다. 모든 것들이 일어나는 공적한 법이라고 한다.”(2권, {대정장} 28권, p.736상)
 {존파수밀보살소집론}은 서기 1세기경 성립되었다고 하기 때문에 '중론'의 선구 사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설은 또한 {반야경}의 “무엇으로 십이인연을 알 수 있는가. 십이인연의 불생의 상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십이인연을 안다고 이름한다.”({마하반야바라밀경} {대정장} 8권, p.399하)라고 하는 설명과도 관계있을지 모른다.
 또한 실론 상좌부의 {논사}를 보면 십이인연의 각 항목은 구생(함께 생하는 것)한다. 각 항목 사이에 조건을 붙이는 관계가 가역적(可逆的)이다. 상호가 기초되어 합해진다고 하는 주장이 보인다. 이것은 '중론'에 있어서 예를 들면 “작용에 의해서 작자가 있다. 작자에 의해서 작용이 있다”라고 하는 의론과 상당히 흡사하다.
 또한 앞에서 고찰했던 것과 같이 {대비바사론}과 {순정리론}을 보아도 “길고 짧음” “이곳(중생세계)과 저곳(열반의 세계)”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관계를 ‘상대적으로 존재한다[相待有]’고 설명하는 교의학자가 있으나, 설일체유부는 이 ‘상대적으로 존재한다’는 설을 승인하지 않았다. 지금 중관파의 설명을 보아도 이러한 여러 가지의 교의학자의 설과 일맥의 연락이 있는 것이 느껴진다. “상대적으로 존재한다”는 원어는 명확하지 않으나 중관파는 이것을 ‘상대’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철저하게 추구하여 사물에 적용시킨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이런 것이 유(존재)있다고 하는 것은 말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소승불교의 제 논서에 있어서 '중론'과 관계있는 것으로 보이는 설명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므로 나가르주나는 이러한 여러 학파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중론'에서 독자적으로 연기의 관념을 주장하게 되었다.


5. 불생(不生)

1) 불생의 연기를 설하는 모순

 소승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연기를 인간의 윤회의 과정에 있어서 시간적 생기의 관계로 해석하였는데, '중론'의 연기설은 그와는 다르게 상의상관(相依相關)관계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여기에 문제가 발생한다. 연기라고 하는 말은 기(起 samutpāda)라고 하는 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물(혹은 여러 가지 다르마)의 생기의 관계를 의미해야만 한다.
 연기라고 하는 관념은 생기(生起)를 함의하고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론'이 불생불멸의 연기를 설하고 있는 것은 언어표현상에서 볼 때 모순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물음에 대해서는 대략 세 가지의 대답이 주어지고 있다. 먼저 '순중론(順中論)'의 해답을 보면,

묻는다. 어떻게 인연을 이름 붙여서 불생이라고 하는가. 만약 불생이라면 어떻게 인연이라고 설할 수 있는가. 만약 인연이라면 어떻게 불생이며, 만약 불생이라면 어떻게 인연인가. 이처럼 인연을 불생이라 이름 해도 이와 같이 뜻이 상응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논란에 대해서

답하여 말한다. 이것은 상응하지 않는다. 만약 인연을 설한다면 곧 상응하지 않는다. 만약 실체가 있다면 어떻게 인연이라 할 수 있는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것이 없다면 즉 그것은 없는 법(실재하지 않는 사물)이다. 무엇을 인연이라 하는가. 존재가 없는 법을 이루기 때문이다. 만약 법이 없는 것에 인연이 있다고 한다면 곧 토끼의 뿔도 반드시 인연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因)은 실체가 없는 것이 된다. 실체가 없는 물건이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허공속의 꽃과 같다. 이와 같기 때문에 도리가 성립한다. 인연을 사유하면 곧 그것은 불생이다. 무엇이 인연인가 
(하권, 대정장, 30권, p.49상)

라고 대답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만약 반대자가 말하는 것처럼 연기가 생기하는 의미라면 다음과 같은 모순이 일어나게 된다.
첫째, 만약 어떤 사물이 실유(實有)한다면 실유하는 사물이 다시 생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기한다고 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만약 어떤 사물이 허공에 있는 꽃과 같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없는 것에서 생기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더라도 생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물을 성립시키는 이법을 의미하는 연기가 생기의 의미일 수 없다. 따라서 연기란 불생이라는 것으로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밝힌 '순중론'의 논의는 '중론'의 내용 곧,
 
요컨대 유(有, 존재하는 것)가 생긴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는다. 또한 무가 생긴다고 하는 것도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 존재해서 없어진다고 하는 것의 생기하는 것도 없다. 이런 것은 이전에 이미 논증하였다.(제7장 제20시 지금은 '십이문론'과 '백론' 참조. 서양에서는 파르메니테스가 같은 내용의 뜻을 논했다고 한다)

라고 하는 논법에 따라서 연기가 불생에 있다고 하는 것을 논증하고 있다.

  2) 청변(바바비베카)의 해석
 다음에는 바바비베카(Bhavaviveka 청변 淸辯, 500-570무렵)의 해석을 보면, “연기란 여러 가지 인연이 화합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연기라고 이름 한다”('반야등론석' 1권 '대정장 30권, p.51하)라고 해석하기 때문에 바바비베카에 의하면, 연기란 “연(緣)에 의해서 생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론'에서 주장하는 “불생불멸하는 연기”는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는 개념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 바바비베카에 있어서는 큰 문제였다. 그것은 세속적 입장의 진리(세제)와 구극의 입장에서 보았던 진리(제일의제)와 두 가지의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해결을 시도하였다. 세제에 있어서는 생기가 있다. 그러나 제일의제에서는 없다. 따라서 '중론'의 귀경서에서 “불생불멸하는 연기”를 설하는 경우에 “연기”란 세제에 있다고 말한다. “불생불멸”은 제일의제에 있어서 설해지는 것이다(동, '대정장'30권, p. 52상).
 이와 같이 해석한다면 양자의 사이에 어떤 모순은 없지 않다고 할 주목할 만한 해답을 주고 있다.
 이 설명은 중국의 삼론종의 해석과도 유사하다. 이미 설했던 것처럼 중국학자들은 구마라지바의 역어에 따라 '중론'의 연기를 “연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가상대사 길장도 바바비베카와 똑같이 불생이라고 하는 것은 구극의 진리의 입장(진제)에서 말하지만, 연기는 세속적 진리의 입장(속제)에서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예를 들면, “제일의제에서는 본래 스스로 무생이고 세제에서는 인연에 의해서 임시[假]로 생겨난다”('중론소', p.100)고 설명하고 있다. 다만 가상대사 길장의 “2종의 진리”의 설은 “언교의 이제”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설명의 상대에서는 한 쪽의 구별을 시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