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첨] 그런데도 보살 혼자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이름을 받음은, 그 *진실한 도리를 보아 *번뇌를 끊으면서도 *깨닫는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니, 그러기에 따로 무생법인의 이름을 받게 되는 것이다.

而菩薩獨受無生法忍名者. 以其見諦理斷結使, 不生取證之心, 故別受無生法忍之名也.

13153진실한 도리. 원문은 ‘諦理’. 사제의 진리.
13154번뇌. 원문은 ‘結使’. 결(結)이나 사(使)나 번뇌의 다른 이름.
13155깨닫는 것. 원문은 ‘取證’. 깨달음을 실현하는 것. 증오(證悟)와 같다.

 [석첨] 셋째로 ‘何者’ 아래서는 법인(法忍)을 세운 까닭을 밝혔다.

三何者下, 明立忍所以.

 [석첨] 왜 그런가. 만약 깨닫는다는 생각을 낸다면 곧 이승(二乘)의 경지에 떨어지고 말아서 *보살의 제九지에는 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何者. 若生取證之心, 卽墮二乘地, 不得入菩薩第九也.

13156보살의 제九지. 원문은 ‘菩薩第九地’. 제九의 보살지.

 [석첨] 다음으로 ‘復次’ 아래서는 박지(薄地)를 밝힌 것에 셋이 있다. 처음에서는 공통하는 취지를 세웠다.

次復次下, 明薄地爲三. 初立共意.

 [석첨] 다음으로 삼승이 한가지로 신통을 얻는다.

復次三乘, 同得神通.

 [석첨] 다음으로 ‘而二乘’ 아래서는 이승(二乘)을 물리쳤다.

次而二乘下, 斥二乘.

 [석첨] 그런데도 二승은 이를 써서 *중생을 성취시키며 불국토를 정화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유희(遊戱)의 이름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而二乘不能用, 成就衆生, 淨佛國土, 故不受遊戱之名.

13157중생을 성취시킴. 원문은 ‘成就衆生’. 12474의 주.
13158유희의 이름. 원문은 ‘遊戱之名’. 유희신통의 이름.

 [석첨] 셋째로 ‘菩薩’ 아래서는 바로 해석했다.

三菩薩下, 正釋.

 [석첨] 보살은 능히 그렇게 하는지라, 그러므로 유희신통의 이름을 받게 되는 것이다.

菩薩能爾, 故別受遊戱神通之名也.

 [석첨] 유희신통이라 말함은 자세함이 “마하지관” 제五의 기술과 같다.

言遊戱神通, 具如止觀第五記.

 [석첨] 다음으로 ‘阿那含’ 아래서 이욕지(離欲地)를 밝힌 것에는 넷이 있으니, 처음에서는 공통하는 취지를 세우고, 둘째로는 二승을 물리치고, 셋째로 ‘菩薩能’ 아래서는 바로 해석하고, 넷째로 ‘所以’ 아래서는 이욕지를 세우게 된 까닭을 밝히는 것에 의해 동일하지 않은 특질을 가렸다.

次阿那含下, 明離欲地爲四. 初立共意. 次斥二乘. 三菩薩能下, 正釋. 四所以下, 明立地所以, 辨不同之相.

 [석첨] 아나함(阿那含)은 *오하분결(五下分結)을 끊기는 했다.
 그러나 *깊은 선정(禪定)을 버리고 욕계에 와 태어나서 *빛을 숨겨 중생을 구제하지 못하니, *그 티끌에 동조함이 안 된다.
 그런데 *보살은 이 같을 수 있으니, 그러기에 따로 *이욕청정(離欲淸淨)의 이름을 받는 것이다.

阿那含雖斷五下分結.
而不能捨深禪定, 來生欲界, 和光利物, 不同其塵.
菩薩能如此, 故別受離欲淸淨之名.

13159오하분결. 12457의 주.
13160깊은 선정. 원문은 ‘深禪定’. 선정에는 여러 차등이 있으므로, 높은 경지의 선정은 아래의 경지에서 볼 때 깊은 선정임이 된다.
13161빛을 숨겨 중생을 구제함. 원문은 ‘和光利物’. 지혜를 숨기고 중생을 건지는 것.
13162그 티끌에 동조함은 안됨. 원문은 ‘不同其塵’. 티끌은 세속의 비유. 세속에 뒤섞여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 아나함은 욕계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점에서 거룩한 성자인 듯이도 보인다. 그러나 중생제도를 잊은 점에서는 중대한 과오에 빠진 것이 된다. 그리고 ‘화광’과 ‘동진’에 대하여는 11393의 ‘和光塵垢’의 주 참조.
13163보살은 이 같을 수 있음. 원문은 ‘菩薩能如此’. 보살은 중생 속에 섞여 그들을 구제할 수 있다는 뜻.
13164이욕청정의 이름. 원문은 ‘離欲淸淨之名’. 이욕지라는 이름. 번뇌를 떠나는(이욕) 것과 청정은 동일한 말이다.

 [석첨] 처음의 셋은 글 그대로다.

初三如文.

 [석첨] 동일치 않음을 가린 것 중에 둘이 있다. 처음에서는 진리를 관함에 지혜를 씀이 동일하지 않음을 밝혔다.

辨不同中二. 初明觀諦用智不同.

 [석첨] 그러므로 삼승인(三乘人)이 똑같이 *이제(二諦)를 관한대도 *용여(用與)가 동일하지 않다. 그리하여 만약 二승이라면 비록 二제를 관해 *오로지 *체가입공(体假入空)한다 해도, 진제(眞諦)를 써서 번뇌를 끊는 것에 의해 *무학과(無學果)에 이름에 그친다. 한편으로 보살 또한 二제를 관하는 터이나, 처음 간혜지로부터 끝으로는 견지에 이르기까지는 다분히 *종가입공(從假入空)을 써서 *일체지(一切智)․*혜안(慧眼)을 얻으므로 다분히 진제를 씀이 되지만, 박지로부터는 유희신통을 배워 다분히 *종공입가관(從空入假觀)을 닦아 *도종지(道種智)․*법안(法眼)을 얻으니 다분히 속제를 씀이 되고, 벽지불지로부터는 *이관쌍조(二觀雙照)를 배워 보살지에 들어 자연히 *살바야(薩婆若)의 바다에 흘러드니, 이는 *무공용(無功用)의 마음으로 *종지(種智)․*불안(佛眼)을 닦은 끝에 불지(佛地)가 원명(圓明)하여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이룸이 되니, 불안도 마찬가지로 二제를 비춤이 완성한 것이 된다.

所以三乘之人, 同觀二諦, 用與不同. 若二乘雖觀二諦, 一向體假入空, 用眞斷結, 至無學果. 菩薩亦觀二諦. 始從幹慧, 終至見地, 多用從假入空, 得一切智慧眼, 多用眞也. 從薄地學遊戱神通, 多修從空入假觀, 得道種智法眼, 多用俗也. 從辟支佛地, 學二觀雙照, 入菩薩地, 自然流入薩婆若海. 是則無功用心修種智佛眼, 佛地圓明, 成一切種智. 佛眼同照二諦究竟也.

13165이제. 3051의 주.
13166용여. 무슨 관법(觀法)을 써서 어떤 경지에 이르느냐 하는 점. 여(與)에는 허용한다․승인한다는 뜻이 있으므로 얻어지는 과(果)를 이른 것 같다.
13167오로지. 원문은 ‘一向’.
13168체가입공. 이는 체법(体法)의 공관(空觀)이므로 종가입공(從假入空)보다 뛰어난 공관이다.
13169무학과. 1974의 ‘四果’의 주 참조.
13170종가입공. 2770의 ‘從假入空觀’의 주.
13171일체지. 흔히 부처님의 지혜를 가리키나, 천태종에서는 이승(二乘)의 지혜를 이른다. 공관으로 얻은 지혜.
13172혜안. 3933의 ‘五眼’의 주 참조.
13173종공입가관. 2795의 주.
13174도종지. 2796의 주.
13175법안. 3933의 ‘五眼’의 주.
13176이관쌍조. 공관과 가관을 아울러 비추어 보는 일. 곧 공의 용(用)과 가의 용을 아울러 살피는 것.
13177살바야. 6801의 주.
13178무공용. 자연 그대로여서 아무런 조작이 가해지지 않은 상태.
13179종지. 일체종지.
13180불안. 3933의 ‘五眼’의 주 참조.
13181일체종지. 2799의 주.

 [석첨] 다음으로 ‘故大論’ 아래서는 대지도론을 인용해 보살에서 이름 세운 것을 증명했다.

次故大論下, 引論證菩薩立名.

 [석첨] 그러므로 대지도론에서는 말했다.
 ‘성문의 법 중에서 간혜지(幹慧地)라 이르는 것은, 보살에 있어서는 곧 복인(伏忍)이다. 성문의 법에서 성지(性地)라 이르는 것은, 보살의 법 중에서는 유순인(柔順忍)이라 이른다. 성문의 법에서 팔인지(八人地)라 이르는 것은, 보살에 있어서는 *무생인도(無生忍道)라 이른다. 성문의 법에서 견지(見地)라 이르는 것은, 보살의 법에서는 *무생법인과(無生法忍果)다. 성문의 법에서 박지(薄地)라 이르는 것은, 보살의 법에서는 유희오신통(遊戱五神通)이라 한다. 성문의 법에서 이욕지(離欲地)라 이르는 것은, 보살의 법에서는 이욕청정(離欲淸淨)이라 한다.’
 
故大論云. 聲聞法中名幹慧地, 於菩薩卽是伏忍. 聲聞法名性地, 於菩薩法中, 名柔順忍. 聲聞法名入人地, 於菩薩名無生忍道. 聲聞法名見地, 於菩薩法, 是無生法忍果. 聲聞名薄地, 於菩薩法, 名爲遊戱五神通. 聲聞法名離欲地, 於菩薩法, 名爲離欲淸淨.

13182무생인도. 무생법인의 수행.
13183무생법인과. 무생법인을 완성한 단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