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네 가지 불생(四不生)

 이제 '중론'의 근본의 시구 자체에 대해서 고찰해 보면 귀경서(歸敬序)에 있어서 연기의 설명 뒤를 이어서 나오는 게송은 다음과 같다.
“여러 가지의 사물은 어디에 있다하더라도, 어떠한 것이라도, 자체로도, 다른 것에 의해서도, 자타의 두 가지에 의해서도, 혹은 원인 없이 생긴 것도[無因生], 있는 것은 없다”(제1장 제1시詩)
라고 하여, 연기(緣起)가 불생(不生)의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것과 똑같은 내용을 다른 시구에서도 서술하고 있다.
“사물은 자체(자성)로부터도 생기지 않는다. 다른 것으로부터도 생기지 않는다. 자체로도 남으로부터도 생기지 않는다. 무엇으로부터 생기는 것일까(제21장 제13시).
“사물은 자체로부터도 생기지 않는다. 다른 것으로부터도 생기지 않는다. 자체로부터도 남으로부터도 생기지 않는다면. 전도된 견해를 어떻게 해서 가지게 된 것일까”(제23장 제20시).  또한 12장에 있어서는 최초의 제1시에 있어서,
“만약 스스로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있다[自作], 남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있다[他作]양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있다[共作] 원인 없이 만들어진 것이 있다[無因作]라고 어떤 사람이 이러한 저러한 주장을 한다. 그런데 그 괴로움이 결과로 성립한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우선 주장하고, 제12장 전체가 이 시구의 논증을 위해 서술되고 있다. 이와 같이 사물은 자체로부터도 생기지 않으며, 남으로부터도 생기지 않으며, 양자로부터도 생기지 않고, 원인 없이도 생기는 것이 아니라면, 생기(生起)하는 존재양상을 부정하고 있다고 하기 때문에, '중론'에 있어서는 연기가 생기하는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 것은 밝혀진 것이다. 그 외 '중론'에서 불생을 논했던 시구는 대단히 많지만 이미 여러 번 언급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6) 붓다팔리타, 독자적인 기초를 세움

 다시 후세의 붓다팔리타에 이르러서 앞의 사불생(四不生, 생기에 대해서 네 가지의 존재양상에 대해서 보아도 불생이라고 하는 것)을 기술하여 독자의 설명에 의해서 기초를 구축하고 있다.
“여러 가지 사물은 자체로서 생겨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생기에 대해서는 의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큰 허물(적용범위가 매우 넓은)의 이론적 오류가 부수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체에 의해서 존재하는 사물이 다시 생기한다고 하는 것은 의의가 없기 때문이다”('뿌라산나빠다' p.14, 붓다빠리타주 p.11)
“여러 가지의 사물은 다른 것으로부터도 생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체의 사물로부터 일체의 사물이 생기(生起)한다(라고 하는 이론적 오류가)부수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동서, p.36. 동주, p.11)
“여러 가지의 사물은 자타의 양자로부터도 또한 생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양방의 논리에 대해서 지적했던 이론적 결함이 부수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동서, p.38. 동주, p.11)
"여러 가지 사물은 원인 없이도 생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항상 일체의 사물로부터 일체의 사물이 생기한다고 하는(라고 하는 이론적 결함이)부수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동서, p.38. 동주, p.11-12)

7) 생기의 의미를 포함하기 않는 연기

 이 설명에 대해서는 바바비베카(청변)의 항의가 있었으나 찬드라키르티(월칭)와 뿌라즈냐카라마티는 그대로 채용하고 있다. 요컨대 나가르주나를 시조로 하는 중관학파의 제철학자들은 자생(自生) 타생(他生) 공생(共生) 무인생(無因生)이라고 하는 생기의 여러 양상을 부정하므로써 연기를 성립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연기에 생기의 의미가 포한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나가르주나의 다른 저서로 보아도 명료한 사실이다. 이미 대승경전가운데서도 “연기는 불생불멸이다”라고 논하고 있으나('도간경 稻幹經', p.88), 이제 나가르주나의 '육십송여리론(六十頌如理論)'을 보아도 ('국역일체경' 중관부3 '육십송여리론'의 각주에 인용되어 있는 山口益박사의 티베트문에서 번역되어 양간 가필되었다).
“미세한 사물에 대해서도 오히려[자성으로서] 생을 분별하는 지혜가 없는 사람은 연생(緣生, 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인과관계)의 뜻을 보지 못한다.”(제12시)
“어떻게 해서 이런 것을 알 수 있을까. [이것은] 진성을 아는 최상자(부처)에 의하여 연기를[바르게] 보고 연생의 사물은 불생이라고 설해진 것이다”(제48시) 라고 하고, 또한 “연기는 생멸을 떠나 있다”(제23시)라고도 한다.
어쨌든 어느 해석에 있어서나 우리들이 현실에서 경험하고 우리들이 그 속에서 생존하고 있는 곳에서의 현상세계에서는 여러 가지 사물이 생멸 변천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假)의 모습이고 진실에 있어서는 생멸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가르주나의 이런 설명은 불교의 어떤 계통에서 이어받은 것일까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제법이 불생”이라고 하는 것은 '반야경' 속에 반복해서 설해지고 있지만 연기를 불생(不生)으로 이해하는 것은 사상은 가장 초기불교에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붓다는 고(苦) 또는 고락(苦樂) 혹은 십이지의 하나하나에 대해서 그것은 스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남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며, 스스로 만들거나 남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스스로 지은 것도 아니고 남이 지은 것도 아닌 무인생(無因生)도 아니고, 실로 연기하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고 한다.
따라서 연기가 시간적인 생기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상은 최초기 불교에서 유래한다고 하는 점도 명료하다. 그래서 '중론'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원시불교 성전에 있어서는 모든 사물은 자작(自作) 타작(他作) 공작(共作) 무인작(無因作)의 어떠한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간단히 서술하고 있지만, 중관학파는 이것을 이어받아서 상세히 논증하고 있다.

8) 찬드라키르티(월칭) 주석의 모순
 이상에서 '중론'의 연기가 생기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않다고 하는 설명이 일관된 점이었으나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찬드라키르티의 주석 속에서 연기를 “제법이 연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는 곳이 있다. 그것은 위에서 밝힌 의론과 모순된다. 또한 이미 서술한 찬드라키르티(월칭) 자신의 설명에도 모순되는 것은 아닐까라고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예를 들면, “그러므로 ‘여러 가지 사물이 인과 연에 의지해서 생기한다’라고 하는 것이 ‘연기의 의의’이다”('뿌라산나빠다', p.5)라고 말하고, 찬드라키르티의 주석에는 그 외에 이것과 유사한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하더라도 소승일반의 해석과 다르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도 잘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 사물은 연에 의해서 생긴다고 하는 설명은 일단 승인하면서도 여러 가지 사물은 그것 자체로서는 (자성상) 생기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찬드라키르티도 이와 같은 설명 속에서 “이러한 연기한다는 것은 인과 연이 의존하여 [종자에서] 싹이 [무명이나 행으로부터] 식 등이 생기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그것 자체로서 생기하지 않는 것이 없다”(동서, p.503)고 한다.
'중론'을 보면
“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은 어떠한 것도 본성상 쉬어 고요함[적정,寂靜]이다. 그러므로 <현재 일어나는 것>은 고요하게 쉬고 있다. <생>이러한 것도 고요히 쉬어 있다.”(제7장 제16시)
또한 '육십송여리론'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연을 얻어서 생기는 것은 모두 그 자성으로서 생기한 것이 아니다”라고 설하고 있다. 그래서 찬드라키르티는 연기가 불생이라고 하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의 하나로 후자의 문구를 인용하고 있으며, 또한 이와 똑같은 취지의 경문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일단 생기를 인정한다면 자체로서 (자성상의) 불생을 설하는 것이기 때문에 앞에 서술한 설명과 모순되는 것은 없다고 한다.

6. 부정의 논리 대표로서 팔부((八不)        

  1) 팔부(八不)는 '중론'의 종지

 부정의 논리에 전형적인 일례로서 '중론'이나 대승경전의 일반에서는 불생(不生)이라고 하는 것이 서술되어 있으나 또한 '중론'의 최초의 서 시구에는 8종의 부정구(否定句)가 설해지고 있다. 이것을 중국 일본의 전통적 불학에서는 ‘팔불’로 부르고 있으나 이 팔불에 대해서 다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상에서 서술한 것과 같이 연기란 불생에 있는 것으로 생기(生起)를 부정한다면 당연히 다시 소멸 등도 부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불생과 연기가 동의(同義)라면 다시 팔불과 연기와 같은 모양으로 동의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상대사 길장은 팔불이 그대로 연기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팔불은 곧 연기이다”('중론소', p.85상)라고...
그렇다하더라도 이미 서술한 것과 같이 연기가 '중론'의 중심문제에 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팔불이 '중론'의 주요문제로 되어 있다고 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다. 찬드라키르티는 “연기에는 멸한다고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이]논 전체를 통해서 증명할 것이다”('뿌라상가빠다', p.11)라고 말한다. 또한 가상대사 길장은
“팔불은 이미 여러 경전의 대의로 이 논의 종지가 된다”('중론소', p.195하) 라고 말해서 '중론'편의 중요한 안목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도에 있어서는 팔불이 하나의 술어로써 사용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찬드라키르티의 주해서 '뿌라상가빠다'에서 ‘anirodhādy-așțaviśeșaņa(여덟 가지 특성)’이라고 하는 말이 한번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p.3) 중국에 있어서는 독립된 술어로 정착하였고, 마침내 매우 중요시 되어 '중론소'에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팔불은 대개 정관(正觀)의 취지가 귀착하는 곳이며, 방등(대승이란 뜻)이라는 마음의 골목이다.(p.197하)
“팔불은 단지 불보살의 근본이다”(p.200상)
“팔불은 곧 삼세제불의 방등의 중요한 경전이다”(p.84상)
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고, 같은 책에는 “정법” “중진(中進)” “여래진응이신(如來眞應二身)” “제일의실단” 등도 동일시되고 있다.

  2) 팔불로 만들어진 이유

 이 팔불의 논증 내용은 이미 서술했으므로 생략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나가르주나는 어째서 특히 불멸 불생 부단 부상 불일의 불이의 불래 불출의 여덟 개만을 뽑았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찬드라키르티는 “묻는다. 제법은 무량하다(그런데)어째서 여덟 가지 일만을 [논]파하는가. 답한다. 법은 무량하다고 하지만 간략히 해서 여덟 가지를 설한다면 곧 모두 일체법을 파하는 것이 된다”('대정장' 제30권, p.1하)
라고 설명하고 있다.
요컨대 무한의 부정이 가능하다하더라도 이 8가지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은 대표로써 논해서 서술하고 있고 이상에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어째서 특별히 이 8가지만을 뽑았는지 그 이유는 여전히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들의 마음에 생각을 떠올리는 것은 이 8가지 불(不)을 나가르주나는 대승경전 속 어딘가에서 빌려온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각처에 설해있지만 팔불이 정리되어 설해진 곳은 이미 가상대사 길장이 지적했던 것처럼['대승현론' 제2권 '대정장 45권, p.30중, '삼론현의'69매우枚右, '중론소', p.242상, '보살영락본업경'권하, 불모품('대정장' 24권, p.108하)]에 들어 있다. 그곳에서는
“이제(二諦)의 뜻은 불일 또한 불이,  불상 또한 부단, 불래 또한 불거, 불생 또한 불멸”에 있다.
또한 대승의 '대반열반경'(남본) 제25권에도
“십이인연이란 불생불멸 불상부단 비일비무 불래불거 비인비과”라 하고 있다.”
가상대사 길장은 “'중론'과 그 차례가 조금 다르나 그 뜻은 같다”라고 한다.
그러나 전자는 팔불이라고 하는 점에서 일치하지만 두 가지의 진리(이제)에 관해서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중론」과 다소 차이가 있지만, 후자는 연기에 관해서 말하는 점에서는 '중론'과 같다고 할 수 있으나 팔불은 없고 십불이 되었다.
그러므로 '중론'의 귀경서와는 다소 차이점이 있다. 또한 '대지도론'(74권 '대정장' 25권, pp. 579-580상) 에도 유사한 게송이 있지만, 이것은 '중론' 쪽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요, 그 역으로는 있을 수 없다. 또한 팔불은 '금광명경'에도 이를 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