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중론' 귀경서(歸敬序)와 '반야경'

 옛날부터 '중론'은 '반야경'에 근거한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기 때문에 팔불(八不)도 '반야경'에서 받은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구마라집역의 '대품반야경'을 보면 팔불이 정연하게 서술되고 있는 곳은 한 곳도 없다. 물론 팔불의 하나하나를 '반야경' 속의 여러 곳에서 수습해서 모은다면 팔불을 구성할 수는 있으나, '중론'의 순서와 똑같이 서술하고 있는 곳은 없다. 한편 현장의 '대반야바라밀경'을 보면 팔불이 일련의 부정구 속에 포함되어 나오고 있다.

이 반야바라밀 내지 보시바라밀다에는 들어옴도 나감도, 생함도 멸함도, 단멸함도 영원함도, 같지도 다르지도, 옴도 감도 얻을 수 있는 어떠한 법도 없다.(於此般若乃至布施波羅蜜多,竟無少法有入有出、有生有滅、有斷有常、有一有異、有來有去而可得者)['대반야바라밀경' 권165 初分校量功德品 第30의 63('대정장'5, p.888중). 이외에도 411권 '대정장'6, p.170중: 504권 '대정장6, p.569중: 제4회 제5회에는 발견되지 않으며, 구마라집역 '대품반야경'에도 보이지 않는다(자료 제1)]

다시 다음의 구절을 보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다는 일체법에 향하지도 등지지도 않고, 끌어들이지도 물리치지도 않으며,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고,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물들지도 청정하지도 않으며, 영원하지도 단멸하지도 않고, 같지도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가지도 않으며,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如是般若波羅蜜多於一切法不向不背、不引不賓、不取不捨、不生不滅、不染不淨、不常不斷、不一不異、不來不去、不入不出、不增不減 ['대반야바라밀경' 권296 初分說般若相品 제37의5('대정장'6, p.505중(자료 제2)]

라고 하고 있는데, '대반야경'의 끝 부분에 이르면 '중론'의 귀경서와 거의 같은 문구가 나오고 있다.

구수선현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 능히 연(緣)따라 생기는 제법을 공부한다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 연따라 생기는 제법이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영원하지도 않고, 같지도 다르지도 않고, 오지도 가지도 않아서 모든 희론이 끊어지고 본성이 담백함을 여실히 안다면 이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 연따라 일어나는 제법을 잘 공부한다고 할 것이다.(具壽善現白佛言:「世尊!云何菩薩摩訶薩修行般若波羅蜜多時,能學從緣所生諸法. 佛告善現:「若菩薩摩訶薩修行般若波羅蜜多時,如實知一切從緣所生法不生不滅、不斷不常、不一不異、不來不[1]去,絕諸戲論、本性淡泊。善現!是為菩薩摩訶薩修行般若波羅蜜多時,能學從緣所生諸法。)[권384 初分諸法平等品 69의2('대정장'6, p.988상)제1회, 472권 '대정장'7, p. 389상 제2회. 다만 여기서는 “本性淡白”이 “本性憺白”으로 되어 있고, 다른 곳에서는 모두 같은 문장이다. 제3회 이하에서는 나오지 않고 '방광반야' 및 구마라집역 '대품반야경'에서도 보이지 않는다.(자료제3)]

이것은 모두 '중론'의 귀경서에,

멸하지 않고 생하지도 않으며, 단멸하지도 영원하지도 않으며,
같은 뜻도 다른 뜻도 아니며, 오지도 가지도 않으며,
희론이 적멸하여 상서로운 연기를 설하신 정각을 이루신 분을
논의 설법자중 가장 훌륭하신 분께 경례드립니다.

라고 하여 유사함이 놀라울 정도이다. 곧 '반야경'의 이 경문에 “정각을 이루신분을 모든 설법자 중 가장 훌륭하신 분으로 경례드립니다"라고 한 문구를 부가하여 귀경서로서 체재를 정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시 흥미로운 것은 '중론'에 있어서는 귀경서의 직후에 제1장(원인의 연의 고찰)에 있는 4연의 하나하나를 부정하고 있는데, 이 현장역 '대반야경'에서는 거꾸로 4연의 하나하나의 공에 대해 얻을 수 없는 것을 서술하고 난 후에 보살은 연기를 여실히 알아야만 한다고 하여 위에서 서술한 팔불을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반야경'의 이 부분과 '중론'과는 밀접한 관계를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적지 않지만 이미 기술한 '영락경'(불모품)의 경문보다는 상당히 밀접하다고 할 수 있다.
위에 서술한 세 자료는 구마라집이 번역한 '대품반야경」에는 보이지 않고 또한 현재 십만송 및 2만오천송 반야의 산스크릿본의 이 부분은 아직 간행되지 않아서 알 수 없다.
결국 나가르주나는 현장역 '반야경'의 자료 제3에 상당하는 부분을 빌어와서 '중론'의 귀경서로 했다고하는 결론을 얻기 심히 용이하더라도, 과연 이와 같은 단정을 하기가 가능할까는 의문이다. 현장역에 보이는 것과 같은 현재의 모습이 나가르주나 이전에 성립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구마라집역 '대품반야경'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반대로 「중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앞의 내용(자료 제3)과 같은 설명이 부가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4) 아상가(무착)의 해석

팔불의 시구에 관해서 '순중론'의 설명을 보기로 한다.

“묻는다. 그대가 이 논을 설하는데 뜻에는 차례가 없는가 혹은 차례가 있는가. 어떤 인연으로 의논을 설하여 소의(所依)의 법과 같이 이와 같은 논을 지었는가”('대정장' 권30, p. 40상)

라고 하는 물음에 대하여,

“답한다. 이와 같은 뜻은 세존께서 모두 대경(大經) 속에서 설해 놓으셨다”라고 말하고 이하에는 '반야경'의 문구('대품반야경' 제38 법시품에 있고, 현장역 '대반야바라밀다경' 165권 431권 504권 여러 곳에 있다)를 인용하고 있으나, 그 마지막에는

이 반야바라밀다란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생하는 것도 멸하는 것도, 단멸하는 것도 영원한 것도,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없으니 이것이 진실한 반야바라밀이다.(若是般若波羅蜜者。彼無少法可取可捨。若生若滅。若斷若常。若一義。若異義。若來若去。此是真實般若波羅蜜)  '順中論義入大般若波羅蜜經初品法門'卷上 龍勝菩薩造 無着菩薩釋 '대정장'30, p.40상)

라고 하고 있다. 이 인용문 뒤쪽에서 아상가(무착)는

이런 인연에 의해서 이 논을 짓는다. 우리는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의 이런 방편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이와 같이 해석한다. 이른바 '중론'으로 들어가는 문이 될 것이다.

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경문의 뜻을 따라 해석하면 나가르주나는 '반야경'의 이 부분에 근거해서 팔불의 시구를 설하고, '중론'의 1편의 안목으로 하였다고 아상가는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아상가는 이 팔불의 시구를 실마리로 삼아서  '중론' 및 '반야경'의 사상을 해석하고 있다.
아상가가 인용했던 '반야경'의 문구는 앞에서 서술한 자료 제1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중론' 귀경서와 거의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는 자료 제3은 아상가가 읽었던 '반야경'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만약 무착이 앞에서 기술한 자료 제3에 해당하는 경문을 알고 있었다면 자료 제1을 팔불의 전거로 하지 않고, 아마도 '중론' 귀경서와 거의 같은 자료 제3을 인용했을 것이다.(전자는 실은 십불十不이지만, 후자는 팔불을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상가가 보았던 '반야경'에는 자료 제1은 존재하고 있었지만, 자료 3은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료 제3은 후세에 성립된 것이 되고, '중론」의 귀경서는 '반야경'으로부터 그대로 얻어진 것이 아니고 반대로 '중론'쪽에서 '반야경'의 증광 확대되는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하는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상세한 것은 여전히 연구를 요하지만, 어쨌든 팔불의 시구에 관해서 '반야경'(특히 현장역)과 '중론'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7. 무아(無我)

1) 무아는 제법실상

 불교의 전통적인 관념이라고 할 수 있는 무아는 '중론'에서는 매우 독자의 특징적인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불교의 근본사상의 하나로 말해지고 있는 무아의 의의를 '중론'에서는 제 18장(아트만의 고찰)에서 설하고 있다. '무외론'에 의하면 제18장 초에서,
 
묻는다. 진리의 특질은 무엇인가 어떠한 방법으로 진리를 고찰할 수 있는가.
답한다. 아(아트만)와 나의 것(아소我所)를 여의는 것이 진리의 특질이다. 앞에서 서술한 것과 같은 도리에 의해서 고찰해 본다면 진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어떻게 해서”라고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답할 것이다....

라고 해서 다음에 '중론'의 근본 시구를 인용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18장에서  무아의 설명은 제법실상(사물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 베풀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제1시에서는
만약 아(아트만)가 5의 구성요소(오온)에 있다고 한다면 아는 생하고 멸함이 있다고 할 것이다. 만약 아가 오온과 다르다고 한다면 아는 오온의 모습을 갖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고 아트만(아)의 관념을 부정하고 있으나 찬드라키르티(월칭)의 주석에 의하면 오구문파(五求門破)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곳의 일이문파(一異門破)로 간주할 수 있다고 한다.('뿌라산나빠다', p.341). 여기에 관해서는 다시 제27장에 있는 제4시에서 제8시까지 똑같은 내용이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18장의 제2시에는,

아(아트만)가 없을 때에 어떻게 나의 것(아트만에 속한 것)이 있다고 할 것인가. 아와 나의 것(아트만에 속한 것)이 고요해지기 때문에 나의 것이라고 하는 관념을 여의고 자아의식을 여의게 된다.

라고 하고 있으나, '무외론'은 “아와 아소가 없는 것이 곧 진성(眞性)의 모습이다”라고 주석하고 있다. 다시 제3시에는,

나의 것이라고 하는 관념을 여의고 자아의식을 여읜 사람을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것이라고 하는 관념을 여의고, 자아의식을 여읜 것을 보는 사람은 실은 보지 못한다.

라고 한다. 이것은 깜짝 놀랄 만한 발언이다. 우리는 평생 아욕(我欲)에 괴로워하기 때문에 아욕을 떠난 경지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런데 아욕을 떠난 경지라고 하는 것이 별도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은 진리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찬드라키르티의 주석에 의하면, “자아의식이 없다는 것” “나의 것”이라고 하는 관념을 떠났다고 하는 독립적인 원리나 실체를 생각한다면 실은 사물의 진상(제법실상)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하는 의미라고 한다('뿌라산나빠다', p.387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