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연기를 의미하는 공
공(空)이 무를 의미하지 않는 다고 한다면 이제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 것인가. 중관파에 의하면 공성(空性)이란 연기를 의미한다고 한다(뿌라상가빠다 , p.491-500) 공이란 “연기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동서, p.505)참조. 이에 비해서 불공이란 “연기하지 않는 것”과 동의어라고 한다(동서, p.403).
"만약 저 허망한 법이(허망하게 취한 법) 자성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사물에 의존해서 일어난 것은 아닐까. 그래서 허망하게 취하여 어떠한 것에 의존하여 일어난다고 하면 그것은 공성이 다름없는 것이 아닐까”( 이론배척(異論の排斥) 제66시 지금의 한역 회쟁론( 廻諍論 ) 제67시 참조)
중론 을 보면 유명한 삼제게(제24장 제18시)가 있는데,
“어떠한 연기하는 것도 그것을 우리는 공성이라고 설한다.”
라고 논하고 있다. 앞의 설명과 순서는 거꾸로 되어 있으나 연기와 공을 함께 같은 뜻이라고 생각하는 점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중관파의 저술 속에는 이것과 같은 취지의 설명이 상당히 많다. 또한 삼론종에서도 “만약 인연에 의한다면 곧 이것이 공이다”( 중론소 , p.934)라고 하여 똑같이 이 사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중론 제24장 제36시에는 ‘연기공’이라고 하는 말이 나오지만 이것은 찬드라키르띠(월칭)의 주석에 있는 것처럼 “연기를 특징짓는 공”( 뿌라상가빠다 , p.502), 혹은 “일체법의 연기를 특질로 하는 자성공”(동서, p.515)의 의미이다. 공이 연기를 의미한다고 하는 것을 하나의 말로 함축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공이 연기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반대파가 중관파를 허무론자로 보는 것은 온당치 않다. 찬그라키르띠(월칭)는 반대파의 비만에도 굴하지 않았다.
참으로 그대들은 무의 의미를 공의 의미라고 망령되게 실재시해서(증익하여) 과실로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공의 의미를 무의 의미라고 설명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연기의 의미라고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의 설을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다.(동서, p.499)
라고 논하면서 어떤 곳에서는 스스로 연기론자(동서, p.368)라고 부르고 있다.
중관파의 사상에 의하면, 일체법은 서로 의지하여 성립한다. 곧 연기한다고 하고 공과 연기는 같은 뜻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처음에 일체개공이라고 하는 주장을 기초로 해서 제법은 공을 특징으로 한다( 반야심경 암파문고, 나카무라역, p.27) 또한 공은 일체의 것(법)의 공통적인 특징이라고도 하고 있다.(뿌라상가빠다 , p.246) 종래 중국에서도 또한 근대 서양에서도 나가르주나는 연기를 부정해서 공을 설하고 있다고 하는 해석이 종종 있었지만 이것은 그들이 원의를 알지 못하고 밝힌 것이다. 연기와 공, 혹은 불생 등은 서로 반대의 개념이 아니라 실은 동일한 개념이기 때문이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에서 상세히 밝혔다)
2) 연기를 의미하는 무자성
이와 같이 같은 개념으로 보면 문제가 발생한다. 중론 에서는 “...이 없다”, “...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설명이 자주자주 나오기 때문에 중론 은 역시 제법의 무를 설한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것도 무(無)를 설했던 것은 아니고 제법이 자성상에서 없다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를 부정해서 무를 주장한 것은 아니고 실유(實有)를 부정해서 무자성을 설한 것이다(동서, p.198). 따라서 중론 은 연기와 공을 설한 것과 함께 무자성도 설하고 있다. 중관파는 스스로를 무자성론자라고도 부르고 있다.(동서, p. 24. 깨달음에 나아가는 입문 판지카, p.411). 그런데 이 무자성이라는 개념도 공과 같은 연기라고 하는 의미이다. 중론 에는
그것 자체의 자성이 연과 인에 의해서 생긴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인연에 의해 생긴 그것 자체는 만들어져 나온 것(所作의 것)이라고 할 것이다(제15장 제1시)
또한 어째서 그것 자체가 곧 만들어져 나온 것이라고 할까. 왜냐하면 그것 자체는 만들어져 나온 것이 아닌 것(무소작의 것)으로 또한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은 것이다(제15장 제2시)
소승에서는 자성이 있다고 하는 법을 인연의 도움을 빌어서 생긴다고 하지만, 만약 진실로 자성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자성을 가지고 “실재하는 사물이 어떤 이유로 인과 연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뿌라산나빠다 , p.359)라고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자성을 가지는 법이 인과 연에 의해서 일어난다면 그것은 만들어진 것이고 남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런 사물에 대해서는 자성을 가진다고 말해서는 안된다.(동서, p.260, 263)
이미 앞에서 고찰했던 것과 같이 자성이란 법의 본질을 실체시한 것이기 때문에 설일체유부에 의하면 자성은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사물이 아니면 안된다. 그런데 그것들이 만들어진 것이고 남에 의해 존재한다면 완전히 모순이 된다.(동서, p.260) 또한 일반적으로 자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동서, p.160, 521), 만약 자성을 승인하면 현상계의 변화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 된다.(동서, p. 329)
그런데 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사물(제법)은 무자성이라고 하기 때문에 현상계의 변화도 성립할 수 있다고 중관학파는 설명하고 있다(동서, p. 329).
곧 여러 사물은 자체의 본성을 결여하고 있는 채로 연기하기 때문에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동서, p.160) 각 주석서에 있어서 무자성과 연기는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특히 연대로는 후기이지만 하리바드라(1120년경)는 무자성은 연기의 의미라고 하는 것을 명 료하게 단언하였다.
따라서 중론 은 공이나 무자성을 설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그것도 실은 적극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적지 않지만 중관파 후에서는 연기(특히 )상호 한정(상호의존)의 의미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중론파의 전개
중론(中論 ) 은 4권 500수 게송으로 중송(中頌, Madhyamaka-k rik , 中에 기초하는 詩頌)이라고도 한다. 서력 기원후 150∼250년경(불멸후 600∼700년경) 남 인도를 중심으로 교화를 폈던 용수의 저작이다.
용수당시 불교계는 아비달마의 20여 부파가 난립하여 혁신적인 사상의 불교도들로부터 대승경전이 편찬되어 대승불교가 흥기하고 있었다. 불교외적으로도 바라문교의 육파철학(六派哲學)이 정비되어 가고 힌두교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용수는 이러한 당시 상황에서 아비달마 교학의 법유론적(法有論的) 교리 해석에 대해 파사현정을 가하였으며 실재론적인 바라문 철학체계를 타파하였다. 용수의 노력에 힘입어 인도 불교는 결국 대승 불교로서의 꽃을 피우게 되었고, 최고의 힌두 사상가 상캬(samkhya)의 불이론(不二論 Advaita)철학 역시 용수의 사상을 모태로 출현하였다.
중론 은 아비달마의 실재론적 교리 이해를 타파하기 위해 저술된 것으로, 비교적 용수의 초기 저작에 속한다. 당시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붓다 재세시 교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교설 자체의 법상을 정밀하게 추구하다 보니 오히려 부처님 설법하신 근본 의도는 잊어버리고 교설의 문자에만 집착하여 논구하는 경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해탈을 위해 교시된 교법을 철저하게 신봉하다 보니 거꾸로 그 교법에만 속박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한편 아비달마적인 승원불교를 소승(小乘)이라고 폄하하며 반야계 경전의 공(空)사상을 추구하는 대승 불교 중에서도 인식의 진정한 정화없이 공사상을 수용하다 보니 공을 실재론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부류가 생기게 되었다. 이를 후대 유식불교에서는 악취공자(惡取空者)라고 부르지만 용수가 <中論>을 저술할 당시에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고, 중론 에서는 이들을 대승 불교 내의 사견인(邪見人)이라고 부른다. 중론 은 이렇게 소승의 실재론적 교리 해석과 대승의 실재론적 공관(空觀)을 시정하기 위한 두 가지 목적하에 저술되었다.
중국 三論學의 大成者인 吉藏(길장)의 中觀論疏(중관론소) 序文(서문)에 의하면,"羅什三藏(라십삼장)의 문하생인 曇影(담영)은 수십 명의 註釋家(주석가)가 있었고, 河西(하서) 道朗(도랑)은 70家가 있었음"을 듣고 있음이 보인다. 그러나 티베트의 기록에 의하면 '八大註釋家' 즉 용수(Klu-Sgrub)·불호(Buddhapalita, 470~540)·월칭(Candrakirti, 600~650)·제바설마(Devasarman, 5~6세기)·구방사리(Gunasari, 5~6세기)·덕혜(Gunamati, 5~6세기)·안혜(Sthiramati, 510~570)·청변(Bhavya, 500~570) 등 여덟 분이 주석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오늘날 현존하는 주석서는, 450여개 모두를 해석한 것들(漢譯 3종, Tibet역 5종 이상, Sanskrit본 1종)과, 그 일부만 다루었던 것들 (漢譯 1종, 藏譯 3·4종)로 나누어 정리해 볼 수 있다.
중론본송(中論本頌)의 일부 품이나 게송만을 주석한 것으로 무착석(無着釋) 『순중석(順中釋)』2권(6C. 초 한역)이 현존하고, 최근 연구에 의해 덕혜(德慧, 5c말)가 일부게송의 전 2구를 해석한 내용이나 제바설마(提婆設摩)의 『난생론(煖生論)』, 적천(寂天, 8c.)의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과 이 논의 '세소(細疏)'에 일부 게송을 주석한 내용들이 밝혀졌다.
중기 중관파: 용수 이후 5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관파에 대해선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중관파가 명확한 체계를 갖춘 것은 불호(佛護) 이후이다. 중론 의 주석가는 후기 중관파의 문헌과 티벳의 전승에서 8명으로 거론되고 있다. 현존하는 주석서로는 무외(無外, Akutobhaya)의 주석, 청목(靑目, Pingala)의 주석, 무착(無着)의 순중론(順中論) , 불호(佛護, Buddhapalita)의 주석, 청변의 반야등론석(般若燈論釋) , 안혜(安慧, Sthiramati)의 대승중관석론(大乘中觀釋論) , 월칭(月稱, Candrakirti)의 명구론(明句論) 이 있다. 6세기 이후 융성한 중관파의 문헌은 중국에 별로 소개되지 않고 티벳에 전승되었다. 티벳의 전승에 의하면 중관파는 최고의 진리를 논증하는 방법의 차이로 인해 두 파로 나뉜다. 불호는 공의 논증을 귀류논법으로 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청변은 반야등론석 에서 귀류논법을 배척하고 인명(因明)의 추론형식에 따른 논증법으로 공을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후 월칭은 청변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불호를 옹호하게 된다. 이러한 논쟁을 겪으면서 중관파는 불호, 월칭 계통의 귀류논증파(歸謬論證派, Prasanghika)와 청변 계통의 자립논증파(自立論證派, Svatantrika)로 나뉘었다. 귀류논법은 상대방의 주장에 과실이 있음을 지적하여 그 주장을 파척하는 논법이다. 즉 입론자가 어떤 명제의 참을 주장하려고 할 때 상대방이 이에 대해 반대한다면, 상대방의 의향에 덧붙여 그 명제에 부정을 가정하고, 이 가정된 명제를 전제로 하여 도출된 결론이 불합리하거나 오류임을 밝힘으로 입론자의 주장이 참임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상대방의 주장에 과실이 있음을 지적하면 결국 상대방은 어떤 입언도 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공(空)을 논증하려고 하는 것이 귀류논증파의 방법이다. 귀류논증파는 스스로 주장을 세우지 않는다.
공(空)이 무를 의미하지 않는 다고 한다면 이제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 것인가. 중관파에 의하면 공성(空性)이란 연기를 의미한다고 한다(뿌라상가빠다 , p.491-500) 공이란 “연기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동서, p.505)참조. 이에 비해서 불공이란 “연기하지 않는 것”과 동의어라고 한다(동서, p.403).
"만약 저 허망한 법이(허망하게 취한 법) 자성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사물에 의존해서 일어난 것은 아닐까. 그래서 허망하게 취하여 어떠한 것에 의존하여 일어난다고 하면 그것은 공성이 다름없는 것이 아닐까”( 이론배척(異論の排斥) 제66시 지금의 한역 회쟁론( 廻諍論 ) 제67시 참조)
중론 을 보면 유명한 삼제게(제24장 제18시)가 있는데,
“어떠한 연기하는 것도 그것을 우리는 공성이라고 설한다.”
라고 논하고 있다. 앞의 설명과 순서는 거꾸로 되어 있으나 연기와 공을 함께 같은 뜻이라고 생각하는 점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중관파의 저술 속에는 이것과 같은 취지의 설명이 상당히 많다. 또한 삼론종에서도 “만약 인연에 의한다면 곧 이것이 공이다”( 중론소 , p.934)라고 하여 똑같이 이 사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중론 제24장 제36시에는 ‘연기공’이라고 하는 말이 나오지만 이것은 찬드라키르띠(월칭)의 주석에 있는 것처럼 “연기를 특징짓는 공”( 뿌라상가빠다 , p.502), 혹은 “일체법의 연기를 특질로 하는 자성공”(동서, p.515)의 의미이다. 공이 연기를 의미한다고 하는 것을 하나의 말로 함축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공이 연기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반대파가 중관파를 허무론자로 보는 것은 온당치 않다. 찬그라키르띠(월칭)는 반대파의 비만에도 굴하지 않았다.
참으로 그대들은 무의 의미를 공의 의미라고 망령되게 실재시해서(증익하여) 과실로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공의 의미를 무의 의미라고 설명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연기의 의미라고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의 설을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다.(동서, p.499)
라고 논하면서 어떤 곳에서는 스스로 연기론자(동서, p.368)라고 부르고 있다.
중관파의 사상에 의하면, 일체법은 서로 의지하여 성립한다. 곧 연기한다고 하고 공과 연기는 같은 뜻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처음에 일체개공이라고 하는 주장을 기초로 해서 제법은 공을 특징으로 한다( 반야심경 암파문고, 나카무라역, p.27) 또한 공은 일체의 것(법)의 공통적인 특징이라고도 하고 있다.(뿌라상가빠다 , p.246) 종래 중국에서도 또한 근대 서양에서도 나가르주나는 연기를 부정해서 공을 설하고 있다고 하는 해석이 종종 있었지만 이것은 그들이 원의를 알지 못하고 밝힌 것이다. 연기와 공, 혹은 불생 등은 서로 반대의 개념이 아니라 실은 동일한 개념이기 때문이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에서 상세히 밝혔다)
2) 연기를 의미하는 무자성
이와 같이 같은 개념으로 보면 문제가 발생한다. 중론 에서는 “...이 없다”, “...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설명이 자주자주 나오기 때문에 중론 은 역시 제법의 무를 설한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것도 무(無)를 설했던 것은 아니고 제법이 자성상에서 없다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를 부정해서 무를 주장한 것은 아니고 실유(實有)를 부정해서 무자성을 설한 것이다(동서, p.198). 따라서 중론 은 연기와 공을 설한 것과 함께 무자성도 설하고 있다. 중관파는 스스로를 무자성론자라고도 부르고 있다.(동서, p. 24. 깨달음에 나아가는 입문 판지카, p.411). 그런데 이 무자성이라는 개념도 공과 같은 연기라고 하는 의미이다. 중론 에는
그것 자체의 자성이 연과 인에 의해서 생긴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인연에 의해 생긴 그것 자체는 만들어져 나온 것(所作의 것)이라고 할 것이다(제15장 제1시)
또한 어째서 그것 자체가 곧 만들어져 나온 것이라고 할까. 왜냐하면 그것 자체는 만들어져 나온 것이 아닌 것(무소작의 것)으로 또한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은 것이다(제15장 제2시)
소승에서는 자성이 있다고 하는 법을 인연의 도움을 빌어서 생긴다고 하지만, 만약 진실로 자성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자성을 가지고 “실재하는 사물이 어떤 이유로 인과 연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뿌라산나빠다 , p.359)라고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자성을 가지는 법이 인과 연에 의해서 일어난다면 그것은 만들어진 것이고 남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런 사물에 대해서는 자성을 가진다고 말해서는 안된다.(동서, p.260, 263)
이미 앞에서 고찰했던 것과 같이 자성이란 법의 본질을 실체시한 것이기 때문에 설일체유부에 의하면 자성은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사물이 아니면 안된다. 그런데 그것들이 만들어진 것이고 남에 의해 존재한다면 완전히 모순이 된다.(동서, p.260) 또한 일반적으로 자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동서, p.160, 521), 만약 자성을 승인하면 현상계의 변화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 된다.(동서, p. 329)
그런데 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사물(제법)은 무자성이라고 하기 때문에 현상계의 변화도 성립할 수 있다고 중관학파는 설명하고 있다(동서, p. 329).
곧 여러 사물은 자체의 본성을 결여하고 있는 채로 연기하기 때문에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동서, p.160) 각 주석서에 있어서 무자성과 연기는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특히 연대로는 후기이지만 하리바드라(1120년경)는 무자성은 연기의 의미라고 하는 것을 명 료하게 단언하였다.
따라서 중론 은 공이나 무자성을 설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그것도 실은 적극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적지 않지만 중관파 후에서는 연기(특히 )상호 한정(상호의존)의 의미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중론파의 전개
중론(中論 ) 은 4권 500수 게송으로 중송(中頌, Madhyamaka-k rik , 中에 기초하는 詩頌)이라고도 한다. 서력 기원후 150∼250년경(불멸후 600∼700년경) 남 인도를 중심으로 교화를 폈던 용수의 저작이다.
용수당시 불교계는 아비달마의 20여 부파가 난립하여 혁신적인 사상의 불교도들로부터 대승경전이 편찬되어 대승불교가 흥기하고 있었다. 불교외적으로도 바라문교의 육파철학(六派哲學)이 정비되어 가고 힌두교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용수는 이러한 당시 상황에서 아비달마 교학의 법유론적(法有論的) 교리 해석에 대해 파사현정을 가하였으며 실재론적인 바라문 철학체계를 타파하였다. 용수의 노력에 힘입어 인도 불교는 결국 대승 불교로서의 꽃을 피우게 되었고, 최고의 힌두 사상가 상캬(samkhya)의 불이론(不二論 Advaita)철학 역시 용수의 사상을 모태로 출현하였다.
중론 은 아비달마의 실재론적 교리 이해를 타파하기 위해 저술된 것으로, 비교적 용수의 초기 저작에 속한다. 당시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붓다 재세시 교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교설 자체의 법상을 정밀하게 추구하다 보니 오히려 부처님 설법하신 근본 의도는 잊어버리고 교설의 문자에만 집착하여 논구하는 경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해탈을 위해 교시된 교법을 철저하게 신봉하다 보니 거꾸로 그 교법에만 속박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한편 아비달마적인 승원불교를 소승(小乘)이라고 폄하하며 반야계 경전의 공(空)사상을 추구하는 대승 불교 중에서도 인식의 진정한 정화없이 공사상을 수용하다 보니 공을 실재론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부류가 생기게 되었다. 이를 후대 유식불교에서는 악취공자(惡取空者)라고 부르지만 용수가 <中論>을 저술할 당시에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고, 중론 에서는 이들을 대승 불교 내의 사견인(邪見人)이라고 부른다. 중론 은 이렇게 소승의 실재론적 교리 해석과 대승의 실재론적 공관(空觀)을 시정하기 위한 두 가지 목적하에 저술되었다.
중국 三論學의 大成者인 吉藏(길장)의 中觀論疏(중관론소) 序文(서문)에 의하면,"羅什三藏(라십삼장)의 문하생인 曇影(담영)은 수십 명의 註釋家(주석가)가 있었고, 河西(하서) 道朗(도랑)은 70家가 있었음"을 듣고 있음이 보인다. 그러나 티베트의 기록에 의하면 '八大註釋家' 즉 용수(Klu-Sgrub)·불호(Buddhapalita, 470~540)·월칭(Candrakirti, 600~650)·제바설마(Devasarman, 5~6세기)·구방사리(Gunasari, 5~6세기)·덕혜(Gunamati, 5~6세기)·안혜(Sthiramati, 510~570)·청변(Bhavya, 500~570) 등 여덟 분이 주석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오늘날 현존하는 주석서는, 450여개 모두를 해석한 것들(漢譯 3종, Tibet역 5종 이상, Sanskrit본 1종)과, 그 일부만 다루었던 것들 (漢譯 1종, 藏譯 3·4종)로 나누어 정리해 볼 수 있다.
중론본송(中論本頌)의 일부 품이나 게송만을 주석한 것으로 무착석(無着釋) 『순중석(順中釋)』2권(6C. 초 한역)이 현존하고, 최근 연구에 의해 덕혜(德慧, 5c말)가 일부게송의 전 2구를 해석한 내용이나 제바설마(提婆設摩)의 『난생론(煖生論)』, 적천(寂天, 8c.)의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과 이 논의 '세소(細疏)'에 일부 게송을 주석한 내용들이 밝혀졌다.
중기 중관파: 용수 이후 5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관파에 대해선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중관파가 명확한 체계를 갖춘 것은 불호(佛護) 이후이다. 중론 의 주석가는 후기 중관파의 문헌과 티벳의 전승에서 8명으로 거론되고 있다. 현존하는 주석서로는 무외(無外, Akutobhaya)의 주석, 청목(靑目, Pingala)의 주석, 무착(無着)의 순중론(順中論) , 불호(佛護, Buddhapalita)의 주석, 청변의 반야등론석(般若燈論釋) , 안혜(安慧, Sthiramati)의 대승중관석론(大乘中觀釋論) , 월칭(月稱, Candrakirti)의 명구론(明句論) 이 있다. 6세기 이후 융성한 중관파의 문헌은 중국에 별로 소개되지 않고 티벳에 전승되었다. 티벳의 전승에 의하면 중관파는 최고의 진리를 논증하는 방법의 차이로 인해 두 파로 나뉜다. 불호는 공의 논증을 귀류논법으로 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청변은 반야등론석 에서 귀류논법을 배척하고 인명(因明)의 추론형식에 따른 논증법으로 공을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후 월칭은 청변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불호를 옹호하게 된다. 이러한 논쟁을 겪으면서 중관파는 불호, 월칭 계통의 귀류논증파(歸謬論證派, Prasanghika)와 청변 계통의 자립논증파(自立論證派, Svatantrika)로 나뉘었다. 귀류논법은 상대방의 주장에 과실이 있음을 지적하여 그 주장을 파척하는 논법이다. 즉 입론자가 어떤 명제의 참을 주장하려고 할 때 상대방이 이에 대해 반대한다면, 상대방의 의향에 덧붙여 그 명제에 부정을 가정하고, 이 가정된 명제를 전제로 하여 도출된 결론이 불합리하거나 오류임을 밝힘으로 입론자의 주장이 참임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상대방의 주장에 과실이 있음을 지적하면 결국 상대방은 어떤 입언도 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공(空)을 논증하려고 하는 것이 귀류논증파의 방법이다. 귀류논증파는 스스로 주장을 세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