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여러 가지 현상을 건설하고 성립시키는 공관
 이와 같이 공이라고 하거나 무자성이라고 해도 모두 연기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공관은 자주 오해를 일으켜 여러 가지 현상을 부정한다든지, 공허한 것으로 되어 있는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요, 실은 여러 가지 현상을 건설해서 성립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론 에 의하면,

공이 적합(適合)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존재가 적합하다. 공이 적합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존재가 적합하지 않다(제24장 제14시)

라고 하여, 사물이 공하다면 연기에 의해 생긴 존재이므로 적합하고, 공하지 않다면 연기에 의하여 생긴 것이 아니므로 존재가 적합하지 않다고 하였다. 나가르주나의 저술  이론(異論)의 배척 에서는 공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 공성이 성립하는 사람들에 있어서는 일체의 사물이 성립한다. 공성이 성립하지 않는 사람들에서는 어떠한 사물도 성립하지 않는다.   

라고 해서 같은 취지의 사상을 말하고 있다.(한역에서는 "만약 공을 믿는다면 그런 사람은 일체를 믿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공을 믿지 못하면 그런 사람은 일체를 믿지 못한다."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이는 적절하다고 할 것이다) 곧 일체개공 이기 때문에 일체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이고, 만약 일체가 불공이고 실유라면 일체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중론 제24에서는 처음부터 유자성론자(有自性論者)의 공격에 대해서 적극적인 반박을 가하고 있다.

만약 그것 자체에 여러 가지 사물의 실유를 인정한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여러 가지 사물이 인연하는 것이 없는 것으로 모두 간주할 것이다.(제24장 제16시)
그대는 곧 결과 원인 행동주체 수단 작용 생기 멸망 및 과보를 파괴하는 것이 된다(제24장 제17시)

 그리고 이하에서는 계속해서 유자성론자를 공격하고 있다. 만약 공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네 가지의 진리(사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제20시-제24시). 그렇다면 네 가지 진리의 이러저러한 것을 아는 것, 단멸하는 것, 증명하는 것, 닦는 것도 불가능하다(제26시, 27시), 성스런 사과(四果)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제28시), 8현성도 있을 수 없고(제29시), 삼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제29장 30시). 만약 중생이 부처가 된다는 것도 불가능해진다(제 31, 32시), 죄장도 복덕도 과보도 없는 것이 된다(제33시, 제35시), 일반에 수행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제39시). 다시 일체 세속의 것도 성립할 수 없게 된다고 한다(제36, 제38시) 이와 같이 유자성론자(설일체유부 등)들이야말로 불교를 파괴하는 자들이며, 반대로 여러 가지 사물의 무자성을 설하는 중관파야 말로 참으로 불교를 건설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나가르주나의 주장이다. 이것도 전부 공 및 무자성이 연기, 곧 상호의존(相互依存)과 상호한정(相互限定)의 의미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상호한정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이상의 연관하는 것이 일방에서 타방의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계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상호의존이라고 해도 하나가 그것 자신으로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의 힘을 기다리기 때문에 역시 그것 자체의 속에 부정적 계기를 포함해서 있다고 하는 것이다. 연기라고 하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은 부정을 안으로 포함했던 개념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2) 연기 무자성 공의 세 개념의 관계
   ① 세 개념의 이론적 관계
 연기와 무자성과 공이라고 하는 3가지 개념이 의미하는 것은 결국 동일하다고 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이 세 가지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곧 이 개념이 기본적인 것이고, 어떤 것이 파생적인 것일까. 이러한 논리적 기초를 쌓는 관계여하(關係如何) 라는 문제가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세 가지를 두 개씩 묶어서, 곧 연기와 공, 연기와 무자성, 무자성과 공의 세 가지로 나누어 고찰하도록 한다.
 먼저, 연기와 공의 관계를 보면, 언제나 “연기하기 때문에 공하다”라고 설명되고 있다( 뿌라상가빠다 , p.59. 또한 p.512  대지도론 17권,  대정장 25, p.189중) 그런데 여기에 반해서 “공하기 때문에 연기한다”라고 하는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곧 언제나 연기가 이유이고 공은 귀결이다.
 둘째, 연기와 무자성과의 관계를 보면, 항상 “연기하기 때문에 무자성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뿌라상가빠다 , p.440). 이러한 취지의 설명은 매우 많다(동서 88, p.455.  무외론  국역, p.152;  대지도론 61권   대정장 25권, p.49;  십이문론   대정장 30, p.159이하.  입대승론  상권  대정장 32, p.41중). 여기에 반해서 "무자성하기 때문에 연기하고 있다"라고 하는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곧 연기가 이유이고, 무자성은 귀결이다.
 셋째, 무자성과 공과의 관계를 보면, 항상 “무자성하기 때문에 공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일례를 들어보면, “그리고 그것은 무자성이기 때문에 공하다”( 뿌라상가빠다 , p.500)라고 하고 있으며, 이것과 똑같은 설명이 여러 곳에서 보이고 있다(동서, p.323). 여기에 반해서 “공하기 때문에 무자성이다”라고 하는 설명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무자성이 이유이고, 공은 귀결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요약한다면 연기는 항상 이유이고, 공은 항상 귀결이다. 무자성은 연기에 대해서는 귀결이지만 공에 대해서는 이유이다. 곧 연기라고 하는 개념에서 무자성이 필연적으로 도출되어 다시 무자성이라는 개념에서 또한 공과 필연적으로 도출되고 있다. “연기→ 무자성→ 공”이라고 하는 논리적 기초가 형성되는 순서는 정해져 있는데 비해, 이것을 역으로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 중관파의 여러 논서를 보아도 역시 이와 같은 순서로 설명되고 있다.
 
만약 법이 인연화합으로부터 생긴다면 이런 법의 정해진 성품(본성)이 없다. 만약 법에 정해진 성품이 없다면 곧 이것은 필경공이다.( 대지도론 80권  대지도론 25권, p.622상)
이러한 법이 모두 인연화합에서 생기기 때문에 무자성이다. 무자성이기 때문에 자성이 공하다.( 대지도론 44권,  대정장 25권, p.382중)    
만약 여러 가지 인연으로부터 생긴다면 곧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다면 곧 이것은 공하다. ( 십이문론    대정장 30권, p.166중)

 그 외에도 이것과 같은 취지의 설명이 매우 많아서 실로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또한  보리자량론(菩提自量論) 4권에서는 연기→ 무자성→ 공→ 무상(無相)→ 무원(無願)의 순서로 계통을 세워서 설명하고 있다.( 대정장 32권, p.532상)
어쨌든 제1단계로써 여러 가지 사물은 상호의존해서 상호한정으로부터 성립하고 있기 때문에 법유(法有)의 입장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자체(자성)를 상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다음으로 제2단계에서는 자체(자성)가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물은 공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논리적 기초를 세우는 순서는 일방적이고 가역적(可逆的)인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연기 무자성 공의 3개념은 동의어 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연기가 근본이고 다른 2가지는 연기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중론 이 공 및 무자성을 설함에도 불구하고 나가르주나가  중론 (기타  육십송여리론 의 귀경게에서 "연기를 설한다"라고 선언했던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고, 그래서  중론 의 중심사상은 연기라고 하는 주장이 더욱더 확실해지고 있다.

    ② 3개념의 역사적 관계
 이상은 이 3개념의 논리적 관계를 고찰해 보았지만 다음에는 이 3개념의 역사적 관계를 밝혀보고자 한다. 물론 이 문제를 철저히 논하기 위해서 여러 경론을 널리 조사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기 때문에  반야경 에 관해서 검토하는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반야경 의 여러 본 중에는 어떤 원형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고 그것은 확대되고 혹은 변화해서 오늘날과 같은 여러 가지 텍스트를 남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원형이라고 하는 것은 그대로 제학자들의 생각했던 것처럼,(梶芳光運, <般若經에 나타난 그 原始形態에 대해서>  宗敎硏究  新第10권 제5호. 塩見徹堂, <般若經의 原形에 대해서>  宗敎硏究  신제10권 제6호) 그 원형이 동시에 성립되었던 것이 아니고 시대에 따라 앞에서부터 순서를 따라서 부가되었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사이에 어떠한 사상적 변천이 있었을까. 그것에는 여러 가지 검토해야할 것이 있으나, 여기서는 연기 무자성 공의 3가지 개념에 관해서 조사하고자 한다.
 먼저,  팔천송반야  산스크리트 원본을 살펴보면(품을 세는 방법은 산스크리트본에 따른다), 제1품에서 제7품까지는 반야공관의 단순한 설명과  반야경  호지의 공덕을 찬탄하는 내용이 시종 들어 있다. 그러나 제8품에 이르러 보면, “무자성이기 때문에 공하다”라고해서 공관을 무자성에 의해서 기초를 세우려는 시도가 보인다(荻原本, p.405). 계속해서 그 이후에도 같은 설명이 보인다(제12품 및 제19품. 荻原本, p.538 736).  반야경 에는 촉루품(가르침을 전하는 장)이 두 군데 있는데 최초의 촉루품 이전에 있어서는 공관을 무자성에 의해서 기초를 세우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최초의 촉루품 이후에도 다시 연기가 문제되고 있다. 물론 최초의 촉루품 이전(제27품 이전)에 있어서도 언급되고 있으나, 그것은 결코 중요한 것은 아니고 그것을  중론]의 연기설과 관계짓는 것은 곤란하다. 그런데 27품 이후가 되어도 이것에 반해서 연기가 중심문제가 되고 있다.
 이것은  대품경 을 통해서 보면 더한층 명료하다. 지금 구마라집역의  대품반야 에 의해보더라도 최초 촉루품(제66품) 이전을 보아도 공관을 기초 세우는 데 있어서 항상 “자성은 공하기 때문에”, “성품이 공하기 때문에”, “자상성(自相性)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자상은 공하기 때문에”, “자성, 없는 것이기 때문에” 등의 설명이 사용되고 있다. 모든 법이 자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드물게 연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곳이 있으나 대부분 충분하지 않다.
 그런데 제66품 이후가 되면 “연기하기 때문에 자성이 없다”라는 설명이 보인다. 곧 제66품 이전에서는 공관을 무자성에 의해서 기초세우고 있으나 제66품 이후가 되면 그 무자성을 다시 연기에 의해서 기초 세우고 있다. 이제 연기가 중심문제가 되고, 연기에 관해서 설하는 것이 매우 많아진다(예를 들면, 선달품 제79,  대정장 8권, p.399하. 필정품 제83,  대정장 8권, p.410하) 반야바라밀(최고 지혜의 완성)을 행하는 보살은 연기를 관해야 한다고 설하고 있고, 또한 연기는 보살만의 법으로, 여러 가지 극단적인 전도(잘못된 생각)를 제거하는 것이고 연기를 관한다면 성문 벽지불에 떨어지지 않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 상이 없는 고도의 깨달음)에 주하는데 이르게 된다고 극언하고 있다. 종래 연기는 벽지불(독각)에 관련해서 서술한 것이 많았었는데, 여기서는 연기는 성문 벽지불과는 관계가 없는 보살만의 법이라고 하기 때문에,  반야경 의 뒷부분의 작자는 소승의 연기에 대해서 대승 독자의 연기를 충분히 의식해서 주장했던 것이 확실하다. 이 부분은 일반적으로 연기에 관련되어 있는 설명이 매우 많다.
 다시  승천왕반야 에 대해서 본다면 이 경향은 한층 현저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연기를 설한다”, “연기관을 닦는다” 라고 하는 문구가 자주 발견된다. 그래서 여러 가지 존재가 연기한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여러 가지 존재는 상관적으로 성립하고 있기 때문에 법의 생멸은 실은 있을 수 없다고 설한다. 그리고 이 “깊고 깊은 연기”는 공과 같은 뜻이기 때문에 연기를 관하는 것에 의해서 일체개공을 체득할 수 있다고 설한다. 이와 같이  승천왕반야 에 있어서도  반야경 의 뒷부분을 이어받아서 연기에 의해서 공관을 기초세우고 있다. 그러므로  반야경]의 초기에 있어서는 공을 설하는 것 뿐이지만, 뒤에서는 공을 무자성에 의해서  설명하게 되고, 다시  반야경  말기에서는 이것을 연기에 의해서 기초 세우게 된다. 이 3개념의 논리적 기초를 세우는 순서는 이미 서술했던 것처럼 연기→ 무자성 →공이지만, 초기 대승불교에 있어서 역사적 발전의 순서는 이것에 반대로 공→ 무자성 →연기로 되어 있어서 양자의 관계되는 순서는 정반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