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세 개념(공→ 무자성→ 연기)의 순서가 정 반대인 이유
여기서는 공→ 무자성→ 연기의 의의에 대해서 고찰하기로 한다. 원래 공관은 불교의 근본 사상으로 단지 대승에서만 이를 설했던 것은 아니다. 불교 성립 당초부터 공의 입장은 일관되게 존속하고 있었다. 이미 독일의 오우 프랑케나 시이오벤코우(推尾弁匡) 박사 등 두 서넛의 학자들은 원시불교 성전 중에서 공관을 연구하고 반야경의 사상은 이미 원시불교 성전 중에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근래의 연구자로 우이하쿠츠(宇井伯壽)나 니시요시오(西義雄)에 의하면 소승에서도 법공(法空)을 설하고 있다고 한다. 보통 알려진 것과 같이 소승은 개인 존재의 공[人空] 만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 법공도 이미 설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승의 공관과 대승의 공관을 강하게 차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야경이 어떤 계통을 받아들여서 성립했는가 하는 것은 별도로 연구할 문제이지만 어쨌든 이전부터 있어왔던 공관을 받아들였다고 말하는 것은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반야경 어째서 공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당시 설일체유부 등의 소승 부파들에서 법의 실유를 제창했다는 것에 대해서 이것을 공격하기 위해서 특히 부정적으로 들리는 공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을 것이다. 곧 제법의 존재는 서로 의지해서 성립하고 있어서 독립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그 자신 중에 부정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는 것에 의해서 성립하였다. 따라서 공이라는 부정적 단어가 매우 적합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공을 “무자성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반야경의 처음 부분이 성립했을 무렵 반대파의 사람들은 그 주장을 듣고 공을 무無의 의미로 이해해서 공관을 허무론이라고 비난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반야경의 중간 부분을 읽고도 반대자가 공관을 비난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후에 가서도 반야경의 끝나는 부분 및 승천왕반야경에서는 공의 의미를 한층 명확하게 해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초기의 불교이래 중요하게 여겼던 '연기'라고 하는 말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상호한정' ‘상호의존’의 의미로 해석해서 공과 무자성은 연기의 의미라고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곧 연기에 의해서 공 및 무자성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이것에 의하여 해석한다면 연기 무자성 공의 세 개념의 논리적 기초의 구축 순서와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순서와는 정반대인 이유도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④ 중론의 역사적 사상적 위상
그러므로 반야경 전체가 공관을 기초하는 하나의 역사적인 운동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반야경 원형이 성립하는 말기에 연기를 중심사상으로 하는 사조를 받아들인 것이 나가르주나의 불교이다. 따라서 중론에서 서술되고 있는 바와 같이 연기가 전편의 주제로 되었고, 나가르주나는 이것을 독자의 천재적 논리에 의해 기초를 구축하였다. 이 역사적 맥락은 중론의 주석을 보아도 명료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중론」이 저술되기 이전부터 이미 대승불교는 공을 설하고 있었으나, 공에 대해서 ‘의혹의 견해가 있다’는 사람이 나타나고, ‘여러 가지 과실이 발생한다’는 데에 이르자, 여기서 나가르주나는 “어떤 인연으로 공한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공이란 연기의 의미라고 하고, 결코 반대자의 오해와 같은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중론으로 천명하게 되었다. 곧 공에 관해서 의혹의 견해가 유행했기 때문에 이것을 연기에 의해서 기초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론은 역사적으로는 반야경의 여러 계층을 통해서 보이는 것과 같은 공관을 기초로 한 운동을 끝맺음 하기 위한 의도가 있고 동시에 사상적으로는 반야경의 이해를 위해서 시작한 것이기도 하다. 중론은 공관의 입문서이고, 아상가(무착)가 말한 것처럼 ‘중론의 해석에 따라서 반야경의 초품 법문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반야경의 초품 곧 단적으로 공을 말하고 있는 부분의 내용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 반야경은 1부 1부를 부가 증대되었던 것인데, 이 운동의 최후에 이르러서는 새로이 중관학파를 성립시키게 되었던 것이 이 중론이다.
2. 중론과 공견(空見)-삼제게(三諦偈)의 해석에 연관해서-
(1) 중도(中道)
① 삼제게(三諦偈)
중관파의 사상에 있어서는 중(中) 또는 중도라고 하는 개념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중론의 원명은 동북목록(No.3824)에 의하면 Prajñā-nāma-mūlamadhyamakakārikā이고 또한 Madhyamaka-sastra(중론)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또한 입중관론에서는 중론」의 시구를 인용하는 경우에 “중론에서 말하기를”이라고 하는 것을 단지 “중(中)에서”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나가르주나의 학도들은 일반적으로 중관파(mādhyamika 중파)라고 부르고 혹은 Madhyamakavādin라고 부르며(깨달음을 행에 들어가는 문 판지카, 360, 390, 397페이지) 혹은 “중(中)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 (Madhyamakacitta)라고 바꾸어 부르기도 한다(구사론 야세미트라주). 그리고 중관파의 설은 Madhyamaka-darśana라고도 부르고 있다(뿌라상가빠다 p.175). 그러므로 나가르주나 중관파로서는 중 및 중도라는 관념은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중요한 중도라고 하는 말이 중론에서는 다만 1회 정도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곧 “네 가지 훌륭한 진리의 고찰”이라고 하는 제24장의 제18시에 언급되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직접 찾아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떠한 연기라도
그것을 우리는 공이라고 설한다.
그것은 가(假 임시적인 존재)로 존재하는 것들이며
그것은 곧 중도이다.(제18시)
라 하고 있다. 이것을 구마라집은 다음과 같이 한역하였다.
衆因緣生法(중인연생법; 여러 가지 인연으로 생긴 법)
我說卽是無(아설즉시무: 나는 곧 이것을 무라고 설한다)
亦爲是假名(역위시가명: 또한 이것을 가명이라고 하며)
亦是中道義(역시중도의: 또한 이것을 중도라고 한다)
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중국에서는 뒤에 이것이 다소 변경되었다.
因緣所生法(인연소생법; 인연으로 생긴 법)
我說卽是空(아설즉시공: 나는 곧 이것을 공이라고 설한다)
亦爲是假名(역위시가명: 또한 이것을 가명이라고 하며)
亦是中道義(역시중도의: 또한 이것을 중도라고 한다)
라고 하는 문구가 되어 일반에게 전해지고 있다. 천태종도 삼론종도 후자를 채용하고 있는데, 후자의 편이 원문에 위배되지 않고 잘 그 의미를 전하고 있다. 이 시구는 중국의 천태종 조사인 혜문(慧文)선사에 의해서 주의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천태종에 의해서 이 시구는 공 가 중의 삼제를 가리키게 되어 삼제게(三諦偈)로 불리게 되었다. 곧 그 취지는 인연에 의해서 생기는 것[因緣所生法]은 공이다. 이것은 확실히 진리이지만 우리는 공이라는 특수한 원리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공이라고 해도 가명이다. 공을 실체시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공을 다시 공하는 경지에서 중도가 나타난다. 인연에 의해서 생겨난 사물은 공하기 때문에 실제적 존재가 아니고, 그 공도 다시 공하기 때문에 공이 아니라고 하며, 이와 같이 해서 “존재하지도 않고 공하지도 않은 중도”가 성립한다. 곧 중도는 이중의 부정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중국 이래 전통적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천태 이후의 해석이 확실히 나가르주나의 원 뜻을 얻고 있는 것일까. 이미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결국에는 천태의 해석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②원문에 의한 원의(元意) 고찰
그런데 중국이래의 전통적 해석과 관계없이 중론을 연구한 체르밧스키 인도의 P. L. 바디야, N.닷트와 같은 몇 몇 학자들은 이 시구는 단순히 연기 공 가명 중도라고 하는 네 가지의 개념의 동일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삼제의 사상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원문이나 여러 주석들에 의해서 그 원의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또한 처음의 “인연으로 생긴 법, 나는 곧 이것을 공이라고 설한다”는 원문은 “어떠한 연기도 그것을 우리는 공이라고 설한다”이다. 중론에서도 일반적으로 연기와 공은 같은 뜻이기 때문에 여기서도 그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찬드라키르티(월칭)의 주석을 보아도 명백해진다(뿌라상가바다, p.503) 그러므로 중국이래의 해석과 같이 인연에 의해서 생겨난 제법을 부정해서 공을 설한 것이 아니라 연기를 긍정해서 그 연기와 공을 같은 뜻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또한 이것을 가명이라고 하며”의 원문은 “그것은 가(假 임시적인 존재)로 존재하는 것들이며”라고 하고, “그것”이 공을 가리킨다는 것은 찬드라키르티의 주석에서 보아도 명확하다.(동서, p.504) 그러므로 이 문구의 의미는 중국 이래의 해석과 같이 “공 또한 다시 공하다[空亦復空]”(공도 또한 부정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의 의미를 설한 것이 아니라, 공과 가명이 같은 뜻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찬드라키르티(월칭)의 주석에 의하면, 공은 그것 그대로 가명이고 동시에 또한 가명이 그것 그대로 공의 의미이다. 공을 다시 공하다고 하는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다만 한역에는 가명이라고 하는 말에 불공不空이라고 하는 의미를 인정한다고 생각되며, 중론 본문에서 공을 가명으로 보는 것을, 비공非空을 공이라고 하는 취지가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놀랍게도 구마라집은 혹은 그의 번역을 도왔던 사람들은 이미 이와 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다시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이러한 설명은 주목할 만한 내용이다. 가명이란 자세히 번역하면 “연緣으로 시설된 것”라고 하는데, 앞에서 찬드라키르티(월칭)의 설명에 의하면, 한의 수레는 그 수레의 각 부분에 있는 수레바퀴 몸체 등이 모여 있어야 수레를 형성한다고 하고 각 부분을 제외한다면 수레라고 하는 것도 인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소승의 유명한 석공관이다. 이와 같은 설명은 원시불교 성전에 존재하고(잡아함경45, 대정장2, p.327중), 또한 대지도론42권에도 반야경의 “일체의 명자(名字)에 주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구절을 주석한 여러 곳에서 역시 수레의 비유를 들어서 같은 내용의 석공관을 설하고 있다.(대정장 25, p.364하) 종래 삼론종 천태종의 설명에 의하면 소승의 공관은 석공관이고, 대승의 공관은 체공관(體空觀: 현상을 비추어 보아 자성이 없으므로 무집착 무소득 공이라고 관하는 법) 또는 즉공관(卽空觀)이라고 불리는데 이와 같은 찬드라키르티의 주석이나 대지도론의 석공관의 설명이 있는 이상, 반드시 중국의 해석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마지막에 “또한 이것을 중도라고 한다”의 원문은 “이것은 곧 중도이다.”라 하고 있는데 찬드라키르티의 주석에 의하면 ‘이것’이란 공을 가리키고 있다.( 동서, p.504) 공이 곧 중도이다. 중국일반의 해석에 의하면 공을 공하지 않다는 경지에서 중도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공이 그대로 중도라고 불릴까 하는 이유를 보면 곧 자성상 생한 것이라 할 수 없기 때문에 유(有)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자성상 불생하는 것은 진실로 없다고 할 수 없다. 불생이나 공은 같은 취지의 뜻이기 때문에 공은 유라고 무라고 하는 두 가지 극단이변을 떠난 것이 된다. 그러므로 공은 두 극단을 떠난 중도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공→ 무자성→ 연기의 의의에 대해서 고찰하기로 한다. 원래 공관은 불교의 근본 사상으로 단지 대승에서만 이를 설했던 것은 아니다. 불교 성립 당초부터 공의 입장은 일관되게 존속하고 있었다. 이미 독일의 오우 프랑케나 시이오벤코우(推尾弁匡) 박사 등 두 서넛의 학자들은 원시불교 성전 중에서 공관을 연구하고 반야경의 사상은 이미 원시불교 성전 중에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근래의 연구자로 우이하쿠츠(宇井伯壽)나 니시요시오(西義雄)에 의하면 소승에서도 법공(法空)을 설하고 있다고 한다. 보통 알려진 것과 같이 소승은 개인 존재의 공[人空] 만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 법공도 이미 설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승의 공관과 대승의 공관을 강하게 차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야경이 어떤 계통을 받아들여서 성립했는가 하는 것은 별도로 연구할 문제이지만 어쨌든 이전부터 있어왔던 공관을 받아들였다고 말하는 것은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반야경 어째서 공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당시 설일체유부 등의 소승 부파들에서 법의 실유를 제창했다는 것에 대해서 이것을 공격하기 위해서 특히 부정적으로 들리는 공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을 것이다. 곧 제법의 존재는 서로 의지해서 성립하고 있어서 독립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그 자신 중에 부정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는 것에 의해서 성립하였다. 따라서 공이라는 부정적 단어가 매우 적합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공을 “무자성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반야경의 처음 부분이 성립했을 무렵 반대파의 사람들은 그 주장을 듣고 공을 무無의 의미로 이해해서 공관을 허무론이라고 비난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반야경의 중간 부분을 읽고도 반대자가 공관을 비난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후에 가서도 반야경의 끝나는 부분 및 승천왕반야경에서는 공의 의미를 한층 명확하게 해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초기의 불교이래 중요하게 여겼던 '연기'라고 하는 말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상호한정' ‘상호의존’의 의미로 해석해서 공과 무자성은 연기의 의미라고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곧 연기에 의해서 공 및 무자성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이것에 의하여 해석한다면 연기 무자성 공의 세 개념의 논리적 기초의 구축 순서와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순서와는 정반대인 이유도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④ 중론의 역사적 사상적 위상
그러므로 반야경 전체가 공관을 기초하는 하나의 역사적인 운동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반야경 원형이 성립하는 말기에 연기를 중심사상으로 하는 사조를 받아들인 것이 나가르주나의 불교이다. 따라서 중론에서 서술되고 있는 바와 같이 연기가 전편의 주제로 되었고, 나가르주나는 이것을 독자의 천재적 논리에 의해 기초를 구축하였다. 이 역사적 맥락은 중론의 주석을 보아도 명료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중론」이 저술되기 이전부터 이미 대승불교는 공을 설하고 있었으나, 공에 대해서 ‘의혹의 견해가 있다’는 사람이 나타나고, ‘여러 가지 과실이 발생한다’는 데에 이르자, 여기서 나가르주나는 “어떤 인연으로 공한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공이란 연기의 의미라고 하고, 결코 반대자의 오해와 같은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중론으로 천명하게 되었다. 곧 공에 관해서 의혹의 견해가 유행했기 때문에 이것을 연기에 의해서 기초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론은 역사적으로는 반야경의 여러 계층을 통해서 보이는 것과 같은 공관을 기초로 한 운동을 끝맺음 하기 위한 의도가 있고 동시에 사상적으로는 반야경의 이해를 위해서 시작한 것이기도 하다. 중론은 공관의 입문서이고, 아상가(무착)가 말한 것처럼 ‘중론의 해석에 따라서 반야경의 초품 법문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반야경의 초품 곧 단적으로 공을 말하고 있는 부분의 내용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 반야경은 1부 1부를 부가 증대되었던 것인데, 이 운동의 최후에 이르러서는 새로이 중관학파를 성립시키게 되었던 것이 이 중론이다.
2. 중론과 공견(空見)-삼제게(三諦偈)의 해석에 연관해서-
(1) 중도(中道)
① 삼제게(三諦偈)
중관파의 사상에 있어서는 중(中) 또는 중도라고 하는 개념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중론의 원명은 동북목록(No.3824)에 의하면 Prajñā-nāma-mūlamadhyamakakārikā이고 또한 Madhyamaka-sastra(중론)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또한 입중관론에서는 중론」의 시구를 인용하는 경우에 “중론에서 말하기를”이라고 하는 것을 단지 “중(中)에서”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나가르주나의 학도들은 일반적으로 중관파(mādhyamika 중파)라고 부르고 혹은 Madhyamakavādin라고 부르며(깨달음을 행에 들어가는 문 판지카, 360, 390, 397페이지) 혹은 “중(中)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 (Madhyamakacitta)라고 바꾸어 부르기도 한다(구사론 야세미트라주). 그리고 중관파의 설은 Madhyamaka-darśana라고도 부르고 있다(뿌라상가빠다 p.175). 그러므로 나가르주나 중관파로서는 중 및 중도라는 관념은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중요한 중도라고 하는 말이 중론에서는 다만 1회 정도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곧 “네 가지 훌륭한 진리의 고찰”이라고 하는 제24장의 제18시에 언급되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직접 찾아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떠한 연기라도
그것을 우리는 공이라고 설한다.
그것은 가(假 임시적인 존재)로 존재하는 것들이며
그것은 곧 중도이다.(제18시)
라 하고 있다. 이것을 구마라집은 다음과 같이 한역하였다.
衆因緣生法(중인연생법; 여러 가지 인연으로 생긴 법)
我說卽是無(아설즉시무: 나는 곧 이것을 무라고 설한다)
亦爲是假名(역위시가명: 또한 이것을 가명이라고 하며)
亦是中道義(역시중도의: 또한 이것을 중도라고 한다)
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중국에서는 뒤에 이것이 다소 변경되었다.
因緣所生法(인연소생법; 인연으로 생긴 법)
我說卽是空(아설즉시공: 나는 곧 이것을 공이라고 설한다)
亦爲是假名(역위시가명: 또한 이것을 가명이라고 하며)
亦是中道義(역시중도의: 또한 이것을 중도라고 한다)
라고 하는 문구가 되어 일반에게 전해지고 있다. 천태종도 삼론종도 후자를 채용하고 있는데, 후자의 편이 원문에 위배되지 않고 잘 그 의미를 전하고 있다. 이 시구는 중국의 천태종 조사인 혜문(慧文)선사에 의해서 주의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천태종에 의해서 이 시구는 공 가 중의 삼제를 가리키게 되어 삼제게(三諦偈)로 불리게 되었다. 곧 그 취지는 인연에 의해서 생기는 것[因緣所生法]은 공이다. 이것은 확실히 진리이지만 우리는 공이라는 특수한 원리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공이라고 해도 가명이다. 공을 실체시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공을 다시 공하는 경지에서 중도가 나타난다. 인연에 의해서 생겨난 사물은 공하기 때문에 실제적 존재가 아니고, 그 공도 다시 공하기 때문에 공이 아니라고 하며, 이와 같이 해서 “존재하지도 않고 공하지도 않은 중도”가 성립한다. 곧 중도는 이중의 부정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중국 이래 전통적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천태 이후의 해석이 확실히 나가르주나의 원 뜻을 얻고 있는 것일까. 이미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결국에는 천태의 해석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②원문에 의한 원의(元意) 고찰
그런데 중국이래의 전통적 해석과 관계없이 중론을 연구한 체르밧스키 인도의 P. L. 바디야, N.닷트와 같은 몇 몇 학자들은 이 시구는 단순히 연기 공 가명 중도라고 하는 네 가지의 개념의 동일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삼제의 사상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원문이나 여러 주석들에 의해서 그 원의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또한 처음의 “인연으로 생긴 법, 나는 곧 이것을 공이라고 설한다”는 원문은 “어떠한 연기도 그것을 우리는 공이라고 설한다”이다. 중론에서도 일반적으로 연기와 공은 같은 뜻이기 때문에 여기서도 그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찬드라키르티(월칭)의 주석을 보아도 명백해진다(뿌라상가바다, p.503) 그러므로 중국이래의 해석과 같이 인연에 의해서 생겨난 제법을 부정해서 공을 설한 것이 아니라 연기를 긍정해서 그 연기와 공을 같은 뜻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또한 이것을 가명이라고 하며”의 원문은 “그것은 가(假 임시적인 존재)로 존재하는 것들이며”라고 하고, “그것”이 공을 가리킨다는 것은 찬드라키르티의 주석에서 보아도 명확하다.(동서, p.504) 그러므로 이 문구의 의미는 중국 이래의 해석과 같이 “공 또한 다시 공하다[空亦復空]”(공도 또한 부정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의 의미를 설한 것이 아니라, 공과 가명이 같은 뜻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찬드라키르티(월칭)의 주석에 의하면, 공은 그것 그대로 가명이고 동시에 또한 가명이 그것 그대로 공의 의미이다. 공을 다시 공하다고 하는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다만 한역에는 가명이라고 하는 말에 불공不空이라고 하는 의미를 인정한다고 생각되며, 중론 본문에서 공을 가명으로 보는 것을, 비공非空을 공이라고 하는 취지가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놀랍게도 구마라집은 혹은 그의 번역을 도왔던 사람들은 이미 이와 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다시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이러한 설명은 주목할 만한 내용이다. 가명이란 자세히 번역하면 “연緣으로 시설된 것”라고 하는데, 앞에서 찬드라키르티(월칭)의 설명에 의하면, 한의 수레는 그 수레의 각 부분에 있는 수레바퀴 몸체 등이 모여 있어야 수레를 형성한다고 하고 각 부분을 제외한다면 수레라고 하는 것도 인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소승의 유명한 석공관이다. 이와 같은 설명은 원시불교 성전에 존재하고(잡아함경45, 대정장2, p.327중), 또한 대지도론42권에도 반야경의 “일체의 명자(名字)에 주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구절을 주석한 여러 곳에서 역시 수레의 비유를 들어서 같은 내용의 석공관을 설하고 있다.(대정장 25, p.364하) 종래 삼론종 천태종의 설명에 의하면 소승의 공관은 석공관이고, 대승의 공관은 체공관(體空觀: 현상을 비추어 보아 자성이 없으므로 무집착 무소득 공이라고 관하는 법) 또는 즉공관(卽空觀)이라고 불리는데 이와 같은 찬드라키르티의 주석이나 대지도론의 석공관의 설명이 있는 이상, 반드시 중국의 해석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마지막에 “또한 이것을 중도라고 한다”의 원문은 “이것은 곧 중도이다.”라 하고 있는데 찬드라키르티의 주석에 의하면 ‘이것’이란 공을 가리키고 있다.( 동서, p.504) 공이 곧 중도이다. 중국일반의 해석에 의하면 공을 공하지 않다는 경지에서 중도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공이 그대로 중도라고 불릴까 하는 이유를 보면 곧 자성상 생한 것이라 할 수 없기 때문에 유(有)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자성상 불생하는 것은 진실로 없다고 할 수 없다. 불생이나 공은 같은 취지의 뜻이기 때문에 공은 유라고 무라고 하는 두 가지 극단이변을 떠난 것이 된다. 그러므로 공은 두 극단을 떠난 중도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