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공(空) 가명(假名) 중도(中道)는 연기(緣起)의 동의어
종래 중국에서는 공(空)도 하나의 극단(일변)으로 보았으나, 인도의 중관학파에서는 공은 유와 무라고 하는 두 가지의 극단을 떠난 중도에 두었다. 중국에서는 비유비공(非有非空)의 중도 설하였으나, 찬드라키르티(월칭)의 주석에 의하면 반드시 비유비무의 중도나 비유비공의 중도라고 하는 설명은 나타나지 않는다. 원래 인도의 중관파에서는 비유비공은 의미를 부여할 만한 말이 아니었다. 유는 무와 대립하여 있을 뿐 결코 공과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공은 실유와 대립하지만 결코 유와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공과 무를 구별하고, 또한 유와 실유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비유비무인 공은 또한 중도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이유로 공 가명 중도는 연기의 동의어이다.
또한 찬드라키르티는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이 자아와 제법과의 동일함을 설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상주와 단멸을 떠나서, 연해서 가설된 것을 의미하는, 최상의 심원한 연기의 본성을 보지 못한다"(동서, p.214-215)
라고 하기 때문에, 찬드라키르티는 중도와 가명과 연기를 동의로 보고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상은 주로 찬드라키르티의 주석에 대해서 검토해보았으나, 다시 다른 주석에 의해 보아도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외론(無畏論)을 보면,
“우리는 인연으로 생하는 것을 공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연해서 시설된 것이기 때문에 인연생(연기)하지 않는 어떤 것도 없다.”(무외론 국역, p.166)
라고 하기 때문에 천태종에서 말하는 삼제설(三諦說)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으며, 이러한 여러 가지 말들을 동의어로 보고 있다. 또한 반야등론석도 같은 입장이고, 또한 대승중관론석의 해석은 난해하여 잘 읽히지 않지만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남은 것은 핑카라(청목)의 해석인데 이 부분의 해석 중에 “공 또한 다시 공[空亦復空]”이라고 하는 문구가 있어서 이 제18시에 삼제사상이 들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공 또한 다시 공”이라고 하는 문구는 여기에 한하지 않고 다른 부분에도 설해져 있으며, 이 시구와 본질적 관계가 있다고 인정할 만한 것이 있을까 하는 것도 의문이다. 뿐만 아니라 공과 무란 엄중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마라집은 śūnyatā(공)을 무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에 무와 공의 문제에 관해서는 구마라집의 역본을 전거로 하여 의논을 세우는 것은 맞지 않다.
다시 나가르주나의 다른 저술에 대해 보아도 위에서 서술한 의론은 매우 확실하다. 회정론」의 최후 시구를 보면,
“공과 연기와 중도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설해주신, 저 비할 바 없는 부처님께 경례를 드립니다.”
라고 하여 이 세 개념이 동의라고 하는 것을 명료하게 단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천태의 해석이 나가르주나의 원의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명료하다. 다시 대지도론에 있는 설명이나 입대승론에 있는 이 제18시의 인용에서 보더라도 이것은 확인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대지도론에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인연으로 생기는 법 이것을 공상(空相)이라고 이름하고, 또한 가명이라고도 하며, 또한 중도라고도 이름 한다.
라고 하는 시구의 원문이 만일 이 18시와 동일한 것이라면 구마라집 자신도 이 네 가지의 개념을 동의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다음에는 삼론종의 해석을 보면 가상대사 길장 자신이 삼제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지만, 그러나 위에서 서술한 사상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중론소」의 삼제게에 대한 주석을 보면 네 가지의 해석이 보이고 있다. 그 속에 처음의 세 가지는 천태의 해석 및 오늘날 일반에 서술되고 있는 해석에 가깝지만, 제4의 해석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다시 또한 가상대사 길장은 이 제18시를 다소 바꾸어서 전하고 있는 곳이 있다. 여기에 의하면,
“중론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인연으로 생긴 법 나는 곧 이것을 공이라고 설하고, 곧 이것을 가명이라고 하며, 곧 이것을 중도라고 한다”(이제의 상권 대정장 45권, p.85)
라고 하고 있어서, 이 시구 삼제의 사상을 읽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상대사 길장은 일반에서 한 가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개념으로 단정하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어쨌든 공과 가명과 중도가 모두 연기의 동의어라고 하는 것을 한쪽에서는 승인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④ 인도와 중국의 해석상의 차이
요컨대 제24장 제18시구에 관해서 후세 중국에서는 삼론종도 천태종도 여러 가지 복잡한 설명을 시도하기에 이르렀으나 인도의 제 주석에 의해서 그 원의를 탐구해보면 연기 공 가명 중도의 네 가지 개념이 같은 취지의 말로 설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후세에 보이는 것처럼 공을 다시 공으로 부정한 곳에서 중도가 나타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은 확실하다. 물론 우리는 중국불교사상의 독자의 의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중국불교에서의 해석이 인도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남는다. 먼저 첫째는 중도의 의미를 중국의 해석에서 잘라내어 다시 깊이 탐구하고 고찰할 필요가 있다. 둘째는 이른바 삼제게(三諦偈)에 공견을 비판하는 사상이 들어 있지 않다면 공견을 비판하는 사상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면 공견의 배척 곧 이른바 “공 또한 다시 공” 등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좋을까. 이하에서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중도의 의의
① 연기와 중도를 동의로 해석하는 초기불교
중도의 사상은 이미 원시불교 성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윤리적인 의미에서 팔정도가 중도라고 설하는 곳도 매우 많지만, 이것과 별도로 순수하게 이론적인 의미에서 중(中) 또는 중도(中道)를 설하고 있는 곳도 있다. “여래는 이변을 떠나서 중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중도의 설명이 항상 연기의 설명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기설이 어째서 중도를 설하는 것이 되는 것인가.
이미 알려진 것처럼 연기설은 “괴로움이 스스로 지은 것도 아니고, 남에 의해서 지어진 것도 아니며, 양자(그 자체 자성과 남의 것)로부터 지어진 것도 아니고, 원인 없이 지어진 것도 아니다”라고 하는 것을 주장하고, 연기란 “연기란 이와 같은 일방적인 견해를 떠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중도라고 설하고 있다. 곧 예를 들면 괴로움에 대해서 말한다면, 괴로움은 “스스로 지어진 것”이라고 설하는 것은 괴로움을 짓는 자와 그것을 감수하는 것이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상주(常住)를 집착하는 견해[常見]이고, 괴로움이 “다른 것에 의해서 지어진 것”을 설하는 것은 괴로움을 짓는 자와 그것을 감수하는 자가 다른 것을 의미하므로 단멸에 집착하는 견해이다[斷見]. 양자는 두 가지의 일방적인 견해(이변)에 있다고 한다. 이것에 대해서 연기는 그와 같은 극단적인 견해를 떠나 있을 뿐만 아니라, 괴로움이 양자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라든가 “원인 없이 지어진 것”이라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중도에 있다고 설명된다.
혹은 또한 상주를 집착하는 견해는 “일체는 유(有)”라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사상이고, 단멸에 집착하는 견해는 일체를 무라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사상이다(우정백수, 인도철학연구 2권, p.329). 또한 전자는 “세간은 유”라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고, 후자는 세간을 무라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왜냐하면 후세의 설명에 의하면 “세간”이란 오온이다(荻原本 팔천송반야, p.537) 그래서 “일체”도 오온이다라고 하는 설명이 있기 때문에 양자를 동일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래는 이와 같은 두 가지 일방적인 견해를 떠나서 중도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고 말한다.
혹은 또한 나의 존속을 인정하는 것은 “상주(常住)를 집착하는 견해”라 하고 나의 단멸을 인정하는 것은 “단멸에 집작하는 견해”라고 하며, 또한 “영혼과 신체는 동일하다”라고 하거나 “영혼과 신체는 다르다”라고 하는 두 가지 주장을 “두 가지의 일방적인 견해”라고 하고, 여래는 이 두 가지 일방적인 견해를 떠나서 중도를 설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중도는 여러 가지로 설명하지만 어떤 경우를 보아도 항상 연기를 설하는 곳에서 함께 설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고 할 것이다.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중론은 연기와 중도를 동일한 의미로 해석하고 있지만, 그와 같은 사고는 이미 초기불교에서도 발견된다.
② 대조적인 유부와 중관학파
연기가 중도와 동의로 말하고 있다는 것은 초기불교 이래로 있어왔던 사실이지만 후세 설일체유부 등은 연기를 시간적 생기관계(生起關係)를 설명하는 형식으로 해석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어째서 연기와 중도가 동일한 의미가 되는 지를 설명하기 힘들어 졌다.
또한 설일체유부에는 곤란한 문제가 있었다. 초기불교는 “일체는 유부”라든지, “일체는 무”라고 하는 주장을 ‘두 가지의 일방적인 견해’라고 하여 배척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부는 그 일방적 견해에 있는 ‘일체가 유’라는 주장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불교 본래의 입장과 모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유부의 많은 논사들은 가능한 이러한 모순에 빠지지 않도록 중도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대비바사론에는 “가티야야나에 대한 가르침”화가전연경(化迦栴延經)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불교 외에 여러 부파는 자아를 세우기 때문에 단멸이나 상주의 과실에 빠지지만, 유부는 아(我)를 상정하지 않기 때문에 단멸이나 상주라는 과실에 빠지지 않으며, 실유인 법의 연속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유부의 설은 상견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논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원시불교 성전의 원의에 충실하지 않다는 것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유부가 법유(法有)의 입장에 서고 중도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관학파의 중도를 중심문제로 삼아서 다루고 그것을 연기의 의미로 설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중관학파는 초기불교의 입장으로 복귀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서술했던 바와 같이 나가르주나가 중론 제24장 18시에서 연기와 중도가 동의(同意)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아리야 데바도 똑같은 주장을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여러 부처님은 십이인연법을 설하고, 원인 중에 과가 있고 과가 없다[有果 無果]는 견해를 모두 떠났기 때문에 단멸과 상주에 집착하지 않고 중도를 행하여 열반에 들어간다.(백론 파인중유과품 제7 대정장 30권, p.178)
가상대사 길장도 간혹 여러 곳에서 연기와 중도를 구별해서 생각하고 있으나 또한 다른 곳에서는 양자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도 적지 않다.
또한 중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연기는 유와 무라는 두 가지 일방적인 견해를 떠나 있다고 설하고 있다. 그 외에도 이와 유사한 설명은 자주 보인다. 따라서 중도는 유나 무라는 두 가지 일방적 견해를 떠나 있다는 것이다. 찬드라키르티의 주석에 있는 설명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으나, 다른 저술에서도 같은 내용이 설해지고 있다.
유상(有相)은 한쪽 주장이고 무상(無相)도 한쪽 주장이다. 이 두변을 떠나 중도를 행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실상이다.(대지도론61권 대정장 25권, p.492)
이와 동일한 설명은 다른 문헌에도 자주 발견된다. 또한 삼론종에서도 비유비공(非有非空)의 중도를 설하고, 이와 함께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라는 설명도 보인다.
종래 중국에서는 공(空)도 하나의 극단(일변)으로 보았으나, 인도의 중관학파에서는 공은 유와 무라고 하는 두 가지의 극단을 떠난 중도에 두었다. 중국에서는 비유비공(非有非空)의 중도 설하였으나, 찬드라키르티(월칭)의 주석에 의하면 반드시 비유비무의 중도나 비유비공의 중도라고 하는 설명은 나타나지 않는다. 원래 인도의 중관파에서는 비유비공은 의미를 부여할 만한 말이 아니었다. 유는 무와 대립하여 있을 뿐 결코 공과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공은 실유와 대립하지만 결코 유와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공과 무를 구별하고, 또한 유와 실유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비유비무인 공은 또한 중도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이유로 공 가명 중도는 연기의 동의어이다.
또한 찬드라키르티는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이 자아와 제법과의 동일함을 설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상주와 단멸을 떠나서, 연해서 가설된 것을 의미하는, 최상의 심원한 연기의 본성을 보지 못한다"(동서, p.214-215)
라고 하기 때문에, 찬드라키르티는 중도와 가명과 연기를 동의로 보고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상은 주로 찬드라키르티의 주석에 대해서 검토해보았으나, 다시 다른 주석에 의해 보아도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외론(無畏論)을 보면,
“우리는 인연으로 생하는 것을 공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연해서 시설된 것이기 때문에 인연생(연기)하지 않는 어떤 것도 없다.”(무외론 국역, p.166)
라고 하기 때문에 천태종에서 말하는 삼제설(三諦說)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으며, 이러한 여러 가지 말들을 동의어로 보고 있다. 또한 반야등론석도 같은 입장이고, 또한 대승중관론석의 해석은 난해하여 잘 읽히지 않지만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남은 것은 핑카라(청목)의 해석인데 이 부분의 해석 중에 “공 또한 다시 공[空亦復空]”이라고 하는 문구가 있어서 이 제18시에 삼제사상이 들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공 또한 다시 공”이라고 하는 문구는 여기에 한하지 않고 다른 부분에도 설해져 있으며, 이 시구와 본질적 관계가 있다고 인정할 만한 것이 있을까 하는 것도 의문이다. 뿐만 아니라 공과 무란 엄중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마라집은 śūnyatā(공)을 무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에 무와 공의 문제에 관해서는 구마라집의 역본을 전거로 하여 의논을 세우는 것은 맞지 않다.
다시 나가르주나의 다른 저술에 대해 보아도 위에서 서술한 의론은 매우 확실하다. 회정론」의 최후 시구를 보면,
“공과 연기와 중도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설해주신, 저 비할 바 없는 부처님께 경례를 드립니다.”
라고 하여 이 세 개념이 동의라고 하는 것을 명료하게 단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천태의 해석이 나가르주나의 원의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명료하다. 다시 대지도론에 있는 설명이나 입대승론에 있는 이 제18시의 인용에서 보더라도 이것은 확인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대지도론에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인연으로 생기는 법 이것을 공상(空相)이라고 이름하고, 또한 가명이라고도 하며, 또한 중도라고도 이름 한다.
라고 하는 시구의 원문이 만일 이 18시와 동일한 것이라면 구마라집 자신도 이 네 가지의 개념을 동의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다음에는 삼론종의 해석을 보면 가상대사 길장 자신이 삼제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지만, 그러나 위에서 서술한 사상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중론소」의 삼제게에 대한 주석을 보면 네 가지의 해석이 보이고 있다. 그 속에 처음의 세 가지는 천태의 해석 및 오늘날 일반에 서술되고 있는 해석에 가깝지만, 제4의 해석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다시 또한 가상대사 길장은 이 제18시를 다소 바꾸어서 전하고 있는 곳이 있다. 여기에 의하면,
“중론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인연으로 생긴 법 나는 곧 이것을 공이라고 설하고, 곧 이것을 가명이라고 하며, 곧 이것을 중도라고 한다”(이제의 상권 대정장 45권, p.85)
라고 하고 있어서, 이 시구 삼제의 사상을 읽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상대사 길장은 일반에서 한 가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개념으로 단정하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어쨌든 공과 가명과 중도가 모두 연기의 동의어라고 하는 것을 한쪽에서는 승인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④ 인도와 중국의 해석상의 차이
요컨대 제24장 제18시구에 관해서 후세 중국에서는 삼론종도 천태종도 여러 가지 복잡한 설명을 시도하기에 이르렀으나 인도의 제 주석에 의해서 그 원의를 탐구해보면 연기 공 가명 중도의 네 가지 개념이 같은 취지의 말로 설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후세에 보이는 것처럼 공을 다시 공으로 부정한 곳에서 중도가 나타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은 확실하다. 물론 우리는 중국불교사상의 독자의 의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중국불교에서의 해석이 인도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남는다. 먼저 첫째는 중도의 의미를 중국의 해석에서 잘라내어 다시 깊이 탐구하고 고찰할 필요가 있다. 둘째는 이른바 삼제게(三諦偈)에 공견을 비판하는 사상이 들어 있지 않다면 공견을 비판하는 사상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면 공견의 배척 곧 이른바 “공 또한 다시 공” 등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좋을까. 이하에서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중도의 의의
① 연기와 중도를 동의로 해석하는 초기불교
중도의 사상은 이미 원시불교 성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윤리적인 의미에서 팔정도가 중도라고 설하는 곳도 매우 많지만, 이것과 별도로 순수하게 이론적인 의미에서 중(中) 또는 중도(中道)를 설하고 있는 곳도 있다. “여래는 이변을 떠나서 중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중도의 설명이 항상 연기의 설명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기설이 어째서 중도를 설하는 것이 되는 것인가.
이미 알려진 것처럼 연기설은 “괴로움이 스스로 지은 것도 아니고, 남에 의해서 지어진 것도 아니며, 양자(그 자체 자성과 남의 것)로부터 지어진 것도 아니고, 원인 없이 지어진 것도 아니다”라고 하는 것을 주장하고, 연기란 “연기란 이와 같은 일방적인 견해를 떠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중도라고 설하고 있다. 곧 예를 들면 괴로움에 대해서 말한다면, 괴로움은 “스스로 지어진 것”이라고 설하는 것은 괴로움을 짓는 자와 그것을 감수하는 것이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상주(常住)를 집착하는 견해[常見]이고, 괴로움이 “다른 것에 의해서 지어진 것”을 설하는 것은 괴로움을 짓는 자와 그것을 감수하는 자가 다른 것을 의미하므로 단멸에 집착하는 견해이다[斷見]. 양자는 두 가지의 일방적인 견해(이변)에 있다고 한다. 이것에 대해서 연기는 그와 같은 극단적인 견해를 떠나 있을 뿐만 아니라, 괴로움이 양자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라든가 “원인 없이 지어진 것”이라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중도에 있다고 설명된다.
혹은 또한 상주를 집착하는 견해는 “일체는 유(有)”라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사상이고, 단멸에 집착하는 견해는 일체를 무라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사상이다(우정백수, 인도철학연구 2권, p.329). 또한 전자는 “세간은 유”라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고, 후자는 세간을 무라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왜냐하면 후세의 설명에 의하면 “세간”이란 오온이다(荻原本 팔천송반야, p.537) 그래서 “일체”도 오온이다라고 하는 설명이 있기 때문에 양자를 동일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래는 이와 같은 두 가지 일방적인 견해를 떠나서 중도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고 말한다.
혹은 또한 나의 존속을 인정하는 것은 “상주(常住)를 집착하는 견해”라 하고 나의 단멸을 인정하는 것은 “단멸에 집작하는 견해”라고 하며, 또한 “영혼과 신체는 동일하다”라고 하거나 “영혼과 신체는 다르다”라고 하는 두 가지 주장을 “두 가지의 일방적인 견해”라고 하고, 여래는 이 두 가지 일방적인 견해를 떠나서 중도를 설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중도는 여러 가지로 설명하지만 어떤 경우를 보아도 항상 연기를 설하는 곳에서 함께 설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고 할 것이다.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중론은 연기와 중도를 동일한 의미로 해석하고 있지만, 그와 같은 사고는 이미 초기불교에서도 발견된다.
② 대조적인 유부와 중관학파
연기가 중도와 동의로 말하고 있다는 것은 초기불교 이래로 있어왔던 사실이지만 후세 설일체유부 등은 연기를 시간적 생기관계(生起關係)를 설명하는 형식으로 해석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어째서 연기와 중도가 동일한 의미가 되는 지를 설명하기 힘들어 졌다.
또한 설일체유부에는 곤란한 문제가 있었다. 초기불교는 “일체는 유부”라든지, “일체는 무”라고 하는 주장을 ‘두 가지의 일방적인 견해’라고 하여 배척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부는 그 일방적 견해에 있는 ‘일체가 유’라는 주장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불교 본래의 입장과 모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유부의 많은 논사들은 가능한 이러한 모순에 빠지지 않도록 중도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대비바사론에는 “가티야야나에 대한 가르침”화가전연경(化迦栴延經)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불교 외에 여러 부파는 자아를 세우기 때문에 단멸이나 상주의 과실에 빠지지만, 유부는 아(我)를 상정하지 않기 때문에 단멸이나 상주라는 과실에 빠지지 않으며, 실유인 법의 연속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유부의 설은 상견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논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원시불교 성전의 원의에 충실하지 않다는 것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유부가 법유(法有)의 입장에 서고 중도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관학파의 중도를 중심문제로 삼아서 다루고 그것을 연기의 의미로 설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중관학파는 초기불교의 입장으로 복귀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서술했던 바와 같이 나가르주나가 중론 제24장 18시에서 연기와 중도가 동의(同意)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아리야 데바도 똑같은 주장을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여러 부처님은 십이인연법을 설하고, 원인 중에 과가 있고 과가 없다[有果 無果]는 견해를 모두 떠났기 때문에 단멸과 상주에 집착하지 않고 중도를 행하여 열반에 들어간다.(백론 파인중유과품 제7 대정장 30권, p.178)
가상대사 길장도 간혹 여러 곳에서 연기와 중도를 구별해서 생각하고 있으나 또한 다른 곳에서는 양자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도 적지 않다.
또한 중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연기는 유와 무라는 두 가지 일방적인 견해를 떠나 있다고 설하고 있다. 그 외에도 이와 유사한 설명은 자주 보인다. 따라서 중도는 유나 무라는 두 가지 일방적 견해를 떠나 있다는 것이다. 찬드라키르티의 주석에 있는 설명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으나, 다른 저술에서도 같은 내용이 설해지고 있다.
유상(有相)은 한쪽 주장이고 무상(無相)도 한쪽 주장이다. 이 두변을 떠나 중도를 행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실상이다.(대지도론61권 대정장 25권, p.492)
이와 동일한 설명은 다른 문헌에도 자주 발견된다. 또한 삼론종에서도 비유비공(非有非空)의 중도를 설하고, 이와 함께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라는 설명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