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공(空)과 동의(同義)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中道)
이제 중론의 시구를 보면 ‘중도’라는 말은 한 번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비유비무(非有非無)”라고 하는 사상은 여기저기서 보인다. 제5장 제8시 제9장 제12시도 비유비무를 설하고 있으나, 다시 제15장은 핑가라(청목)의 해석, 무외론(無畏論), 붓다팔리타의 주, 반야등론(般若燈論)(청변, 490∼570년경)에 의하면 「관유무품(觀有無品)」이라고 제목 붙인 것처럼 적극적으로 유와 무를 문제로 하고 있다. 이 장 전체가 유 ‧ 무라고 하는 두 가지의 일방적인 견해를 배척하고 있으나, 특히 제7시에서는
가전연(Kātyāyaniputra 가다연니자를 가리키며,『발지론發智論』을 지었다)에게 가르친 (경)에서, ‘있다’거나 ‘없다’거나 라는 두 가지 견해가 유(有)라고 하거나 무(無)라고 설해준 존사(尊師)에 의해서 논파되었다.
라고 하여, 자기의 설이 석존 본래의 불교에 기초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주장한다. 또한 월칭(찬드라키르티)은 여러 가지 대승경전을 인용해서 자기설의 전거로 하고 있다.(뿌라상가빠다 134, 270, 276)
또한 연기는 비상비단(非常非斷)이라고 말하고, 따라서 중도란 비상비단의 의미라고 설한다. 그러나 중론에 의하면 이것은 비유비무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있다고 하는 것은 상주(常住)에 집착하는 편견이고, 없다고 하는 것은 단멸(斷滅)을 집착하는 편견이다. 그러므로 현자는 있다고 하는 것도 없다고 하는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된다.(제15장 제10시)
라 한다. 이것을 다시 설명하기를,
“그 본성상 존재하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상주에 집착하는 편견이다. “이전에는 존재했으나 지금은 없다”고 하는 것은 단멸에 집착하는 편견이 된다.(제15장 제11시)
라고 하여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비상비단(非常非斷)도 비유비무(非有非無)로부터 설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한 마디로 정리하면 중론에 있어서는 비유비무의 의미라고 해도 틀림없을 것이다.
이 비유비무의 중도는 공(空)과 같은 뜻이다. 중론에서는 공이 연기의 의미이다. 또한 연기와 중도가 동의이기 때문에 다시 중도와 공도 동일한 의미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미 전에 이른바 삼제게(三諦偈)에 관해서 「중론의 제 주석에 의하여 논해진 것이지만 다른 전적에서도 공은 비유비무로 설해지고 있다.(대지도론 55권 대정장25, p.448중; 65권 대정장25, p.587상; 뿌라상가빠다, p.495 등)
그 외에도 여기에 비슷한 설명은 상당히 많이 있으나, 요컨대 공이란 유무의 둘을 대립적 견해를 떠난 중도의 의미라고 설한다. 곧 공과 무와는 명료하게 구별되고 있기 때문에 공을 무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중관파의 의미에 적합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후세 중국에서는 비유비무 비유비공의 중도를 설해서 많은 경우에는 중도와 공을 구분하지만 또한 어떤 경우에는 동일시 한다. 예를 들면 가상대사(길장)는 공은 이변(二邊)이 없기 때문에 중도라고 부른다.(중론소, p.229)라고 한다. 이것에 관한 비슷한 설명도 보인다.
④ 실유(實有)와 공(空)-독특한 불교적 개념
따라서 공(空)은 중도와 동의어로 유와 무의 대립을 떠나 있다고 한다. 공을 무와 동일시하고 유와 대립시키는 것은 나가르주나 원뜻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공이 어디에 대립하느냐면 불공(不空)에 대립하는 개념이다. 공이란 “연기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불공(不空)이란 “연기하지 않음” 곧 실유(實有)의 의미이다. 핑가라(청목)의 주석에 의하면 불공이란 “결정적으로 존재함”의 의미이고, 또한 반야등론석은 불공을 해석하기를,
살바다(설일체유부)의 사람들은 또한 “사물은 실체이고, 자성은 공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또한 찬드라키르티(월칭)의 주석에서 불공의 교증(敎證)으로서 인용했던 경문은 구사론등에서 삼세실유 법체항유(三世悉有 法體恒有)의 교증으로 인용되고 있는 경문과 동일하다. 따라서 불공이란 실유(實有)의 의미이고 중관학파의 설인 공과 서로 대립한다.(중국에서는 불공을 묘유의 의미로 해석하는 예도 있으나 인도의 주석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공은 유와 무의 대립을 초월한 것이고, 불공을 설하는 입장은 분별을 일으켜서 유와 무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는 것이 가능하다. 전자는 중도에 서 있는 입장이지만 후자는 중도를 버린 입장이다. 요컨대 유와 무는 대립하고 실유와 공은 또한 별도로 대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와 실유 및 무와 공은 각각 구별할 필요가 있다.
불교의 경론중에서 유(有)가 공과 대립해서 사용되는 경우는 그 유(有)는 확실히 광범위하게 대부분 내용이 없는 유(有)의 개념을 의미하지 않고 실유(實有)의 의미로 해석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유와 무란 사유 일반에서 불가결한 기본적인 개념이고, 여러 철학사상에 공통이지만 실유와 공은 완전히 불교적인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상의 논술을 도식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공(=비유비무=중도=연기)↔ 불공(=실유)
무(無)↔유(有)
이와 같이 요약할 수 있는데 이 공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경향을 갖고 있어서 인도에서도 공과 중도를 별도의 개념으로 보지 않고, 공은 무에 가까운 의미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중도도 비유비공(非有非空)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경향은 경전 속에서도 발견된다.
이미 유식관계 전적에서는 이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중관파에서는 두 가지 대립적 견해를 떠나 있는 것으로 설명되는 공이 여기서는 하나의 극단설(일변)이라고 보고 있다.
이것과 같은 해석이 중국의 해석에서도 보이고 있다. 가상대사 길장은 어떤 경우에는 공을 두 가지의 일방적인 견해를 떠나 있다고 하는 설명을 보여주고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서 공을 일방적 견해로 보지 않고 비유비공의 중도로 설하고 있다.
그러나 나가르주나의 원뜻은 이러한 견해와 잘 구별해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⑤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철학적 의의
이와 같은 중도가 비유비무의 의미라고 한다면 비유비무라고 하는 주장이 어떠한 철학적의의가 있을까를 다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 문제에 관해서 중론에서 매우 흥미로운 문제가 논해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제5장 제6시의 전반을 보면,
유(有)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때 어떠한 무(無)가 존재할 수 있을까.
라고 말하고 유와 함께 무를 논파하고 있으나 그 후에 반대파가 “그러나 유와 무를 관찰하는 자가 존재하지 않을까”라고 하는 의문에 대해서(뿌라상가빠다 p.132) 같은 시의 후반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유와도 다르고 무와도 다른 어떠한 사람이 있어서 유 무를 알 수 있겠는가.
라고 반박하고 있다. 찬드라키르티(월칭)의 주석에 의하면,
유와 무와 양자를 아는 자가 있는 곳의 유와 무와 다른 제3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와 무를 관찰하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동서, p.133)
라고 한다. 곧 유와 무와는 다른 제3자가 있다는 주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유와 무를 객관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가능하더라도, 그런 자신은 유라고도 무라고도 없다는 것이 주관이라고 말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령 주관으로 갑이라고 하는 속성을 존재하는 것(유)이라고 정의하는 경우에, 주관은 갑이라고 하는 점에서 본다면 존재하지만, 갑이 아닌[非甲] 또는 그 일부로 있는 을이라고 하는 점에서 본다면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떠한 주관이라고 하는 원리를 인정한다면 이것은 항상 유와 무라는 한정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유와 무와의 대립의 문제를 제외하고 주관과 객관의 문제를 독립적으로 논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할 것이다. 또한 중국에서도 이런 것은 설해졌다.
⑥ 유와 무라고 하는 가장 근본적인 대립
여기서 우리는 서양 근세철학과의 현저한 차이를 볼 수 있다. 서양 근세철학은 대체로 말하면 자아의 자각으로부터 세워져서 자아를 추구하는 운동의 역사이다. 따라서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문제는 항상 주관과 객관과의 대립에 있었다. 그런데 불교는 최초부터 주관과 객관과의 대립을 배제시키는 입장을 가지고 “존재양상”으로서 여러 가지 법을 설해온 것이다. 유부는 그 법을 실유하는 것으로 보았고, 중관학파는 이것을 공이라고 설하였다. 그 양자는 모두 유와 무의 대립과 관련이 있다. 법은 중론 등에서는 가끔 bhāva(자성)라고 하는 말을 보여주고 있듯이 유가 존재한다면 법이 존재하는 것(예를 들면 허공의 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공중의 꽃도 명유(名有:이름으로 있다)로 있다고 하는 점에서 본다면 유(有)이다.
일반적으로 주관과 객관과의 대립을 말하면 “존재양상” “본질” 등을 문제로 하는 존재론(ontologie)적 철학은 반드시 그 궁극에서 유와 무의 대립에 처하게 된다(근래 하이데거 철학은 그에 대한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지금 앞의 중론의 설명을 보면 주관대 객관의 문제보다도 이른 바 “존재양상”의 “존재양상”으로서 유와 무의 대립문제 쪽이 한층 더 근저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와 무로 말하면 “존재양상”의 존재문제에서 어떤 것보다도 말할 수 없는 궁극적인 것으로 이것을 다른 “존재양상”에 의해서 규정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 만약 유(有)를 무엇인가로 설명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무(無)라고 하는 개념을 필요로 한다. 또한 무(無)를 무엇인가로 규정하려고 한다면 무는 무로 있기 때문에 역시 무(無)가 아닌 유(有)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에 상대적인 무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역시 유와 무의 대립에 사로잡히게 되기 때문에 문제는 조금도 해결되지 않는다. 실로 유와 무의 대립은 우리들이 해결하기 어려운 숙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일체주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유와 무의 대립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에 “유무는 여러 가지 견해의 근본이 된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중론의 시구를 보면 ‘중도’라는 말은 한 번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비유비무(非有非無)”라고 하는 사상은 여기저기서 보인다. 제5장 제8시 제9장 제12시도 비유비무를 설하고 있으나, 다시 제15장은 핑가라(청목)의 해석, 무외론(無畏論), 붓다팔리타의 주, 반야등론(般若燈論)(청변, 490∼570년경)에 의하면 「관유무품(觀有無品)」이라고 제목 붙인 것처럼 적극적으로 유와 무를 문제로 하고 있다. 이 장 전체가 유 ‧ 무라고 하는 두 가지의 일방적인 견해를 배척하고 있으나, 특히 제7시에서는
가전연(Kātyāyaniputra 가다연니자를 가리키며,『발지론發智論』을 지었다)에게 가르친 (경)에서, ‘있다’거나 ‘없다’거나 라는 두 가지 견해가 유(有)라고 하거나 무(無)라고 설해준 존사(尊師)에 의해서 논파되었다.
라고 하여, 자기의 설이 석존 본래의 불교에 기초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주장한다. 또한 월칭(찬드라키르티)은 여러 가지 대승경전을 인용해서 자기설의 전거로 하고 있다.(뿌라상가빠다 134, 270, 276)
또한 연기는 비상비단(非常非斷)이라고 말하고, 따라서 중도란 비상비단의 의미라고 설한다. 그러나 중론에 의하면 이것은 비유비무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있다고 하는 것은 상주(常住)에 집착하는 편견이고, 없다고 하는 것은 단멸(斷滅)을 집착하는 편견이다. 그러므로 현자는 있다고 하는 것도 없다고 하는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된다.(제15장 제10시)
라 한다. 이것을 다시 설명하기를,
“그 본성상 존재하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상주에 집착하는 편견이다. “이전에는 존재했으나 지금은 없다”고 하는 것은 단멸에 집착하는 편견이 된다.(제15장 제11시)
라고 하여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비상비단(非常非斷)도 비유비무(非有非無)로부터 설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한 마디로 정리하면 중론에 있어서는 비유비무의 의미라고 해도 틀림없을 것이다.
이 비유비무의 중도는 공(空)과 같은 뜻이다. 중론에서는 공이 연기의 의미이다. 또한 연기와 중도가 동의이기 때문에 다시 중도와 공도 동일한 의미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미 전에 이른바 삼제게(三諦偈)에 관해서 「중론의 제 주석에 의하여 논해진 것이지만 다른 전적에서도 공은 비유비무로 설해지고 있다.(대지도론 55권 대정장25, p.448중; 65권 대정장25, p.587상; 뿌라상가빠다, p.495 등)
그 외에도 여기에 비슷한 설명은 상당히 많이 있으나, 요컨대 공이란 유무의 둘을 대립적 견해를 떠난 중도의 의미라고 설한다. 곧 공과 무와는 명료하게 구별되고 있기 때문에 공을 무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중관파의 의미에 적합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후세 중국에서는 비유비무 비유비공의 중도를 설해서 많은 경우에는 중도와 공을 구분하지만 또한 어떤 경우에는 동일시 한다. 예를 들면 가상대사(길장)는 공은 이변(二邊)이 없기 때문에 중도라고 부른다.(중론소, p.229)라고 한다. 이것에 관한 비슷한 설명도 보인다.
④ 실유(實有)와 공(空)-독특한 불교적 개념
따라서 공(空)은 중도와 동의어로 유와 무의 대립을 떠나 있다고 한다. 공을 무와 동일시하고 유와 대립시키는 것은 나가르주나 원뜻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공이 어디에 대립하느냐면 불공(不空)에 대립하는 개념이다. 공이란 “연기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불공(不空)이란 “연기하지 않음” 곧 실유(實有)의 의미이다. 핑가라(청목)의 주석에 의하면 불공이란 “결정적으로 존재함”의 의미이고, 또한 반야등론석은 불공을 해석하기를,
살바다(설일체유부)의 사람들은 또한 “사물은 실체이고, 자성은 공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또한 찬드라키르티(월칭)의 주석에서 불공의 교증(敎證)으로서 인용했던 경문은 구사론등에서 삼세실유 법체항유(三世悉有 法體恒有)의 교증으로 인용되고 있는 경문과 동일하다. 따라서 불공이란 실유(實有)의 의미이고 중관학파의 설인 공과 서로 대립한다.(중국에서는 불공을 묘유의 의미로 해석하는 예도 있으나 인도의 주석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공은 유와 무의 대립을 초월한 것이고, 불공을 설하는 입장은 분별을 일으켜서 유와 무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는 것이 가능하다. 전자는 중도에 서 있는 입장이지만 후자는 중도를 버린 입장이다. 요컨대 유와 무는 대립하고 실유와 공은 또한 별도로 대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와 실유 및 무와 공은 각각 구별할 필요가 있다.
불교의 경론중에서 유(有)가 공과 대립해서 사용되는 경우는 그 유(有)는 확실히 광범위하게 대부분 내용이 없는 유(有)의 개념을 의미하지 않고 실유(實有)의 의미로 해석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유와 무란 사유 일반에서 불가결한 기본적인 개념이고, 여러 철학사상에 공통이지만 실유와 공은 완전히 불교적인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상의 논술을 도식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공(=비유비무=중도=연기)↔ 불공(=실유)
무(無)↔유(有)
이와 같이 요약할 수 있는데 이 공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경향을 갖고 있어서 인도에서도 공과 중도를 별도의 개념으로 보지 않고, 공은 무에 가까운 의미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중도도 비유비공(非有非空)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경향은 경전 속에서도 발견된다.
이미 유식관계 전적에서는 이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중관파에서는 두 가지 대립적 견해를 떠나 있는 것으로 설명되는 공이 여기서는 하나의 극단설(일변)이라고 보고 있다.
이것과 같은 해석이 중국의 해석에서도 보이고 있다. 가상대사 길장은 어떤 경우에는 공을 두 가지의 일방적인 견해를 떠나 있다고 하는 설명을 보여주고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서 공을 일방적 견해로 보지 않고 비유비공의 중도로 설하고 있다.
그러나 나가르주나의 원뜻은 이러한 견해와 잘 구별해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⑤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철학적 의의
이와 같은 중도가 비유비무의 의미라고 한다면 비유비무라고 하는 주장이 어떠한 철학적의의가 있을까를 다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 문제에 관해서 중론에서 매우 흥미로운 문제가 논해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제5장 제6시의 전반을 보면,
유(有)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때 어떠한 무(無)가 존재할 수 있을까.
라고 말하고 유와 함께 무를 논파하고 있으나 그 후에 반대파가 “그러나 유와 무를 관찰하는 자가 존재하지 않을까”라고 하는 의문에 대해서(뿌라상가빠다 p.132) 같은 시의 후반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유와도 다르고 무와도 다른 어떠한 사람이 있어서 유 무를 알 수 있겠는가.
라고 반박하고 있다. 찬드라키르티(월칭)의 주석에 의하면,
유와 무와 양자를 아는 자가 있는 곳의 유와 무와 다른 제3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와 무를 관찰하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동서, p.133)
라고 한다. 곧 유와 무와는 다른 제3자가 있다는 주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유와 무를 객관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가능하더라도, 그런 자신은 유라고도 무라고도 없다는 것이 주관이라고 말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령 주관으로 갑이라고 하는 속성을 존재하는 것(유)이라고 정의하는 경우에, 주관은 갑이라고 하는 점에서 본다면 존재하지만, 갑이 아닌[非甲] 또는 그 일부로 있는 을이라고 하는 점에서 본다면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떠한 주관이라고 하는 원리를 인정한다면 이것은 항상 유와 무라는 한정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유와 무와의 대립의 문제를 제외하고 주관과 객관의 문제를 독립적으로 논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할 것이다. 또한 중국에서도 이런 것은 설해졌다.
⑥ 유와 무라고 하는 가장 근본적인 대립
여기서 우리는 서양 근세철학과의 현저한 차이를 볼 수 있다. 서양 근세철학은 대체로 말하면 자아의 자각으로부터 세워져서 자아를 추구하는 운동의 역사이다. 따라서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문제는 항상 주관과 객관과의 대립에 있었다. 그런데 불교는 최초부터 주관과 객관과의 대립을 배제시키는 입장을 가지고 “존재양상”으로서 여러 가지 법을 설해온 것이다. 유부는 그 법을 실유하는 것으로 보았고, 중관학파는 이것을 공이라고 설하였다. 그 양자는 모두 유와 무의 대립과 관련이 있다. 법은 중론 등에서는 가끔 bhāva(자성)라고 하는 말을 보여주고 있듯이 유가 존재한다면 법이 존재하는 것(예를 들면 허공의 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공중의 꽃도 명유(名有:이름으로 있다)로 있다고 하는 점에서 본다면 유(有)이다.
일반적으로 주관과 객관과의 대립을 말하면 “존재양상” “본질” 등을 문제로 하는 존재론(ontologie)적 철학은 반드시 그 궁극에서 유와 무의 대립에 처하게 된다(근래 하이데거 철학은 그에 대한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지금 앞의 중론의 설명을 보면 주관대 객관의 문제보다도 이른 바 “존재양상”의 “존재양상”으로서 유와 무의 대립문제 쪽이 한층 더 근저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와 무로 말하면 “존재양상”의 존재문제에서 어떤 것보다도 말할 수 없는 궁극적인 것으로 이것을 다른 “존재양상”에 의해서 규정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 만약 유(有)를 무엇인가로 설명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무(無)라고 하는 개념을 필요로 한다. 또한 무(無)를 무엇인가로 규정하려고 한다면 무는 무로 있기 때문에 역시 무(無)가 아닌 유(有)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에 상대적인 무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역시 유와 무의 대립에 사로잡히게 되기 때문에 문제는 조금도 해결되지 않는다. 실로 유와 무의 대립은 우리들이 해결하기 어려운 숙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일체주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유와 무의 대립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에 “유무는 여러 가지 견해의 근본이 된다”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