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대립의 근저에 있는 상호의존

 중관파는 이 문제에 관해서 중도를 설하고 있다. 중론에서는 법(유 bhāva)으로서 성립할 수 없는 것을 여러 가지 논의로 논증한 후에,

유가 존재하지 않을 때 어떠한 무가 존재할 것인가(제5장 제6시 전반)
유가 만약 성립하지 않는다면 무도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의 변화하는 것을(이상) 사람들은 무라고 부른다(제15장 제5시)

라고 하고 있다. 가상대사 길장은 이것을 한층 철저히 논하고 있다.
 요컨대 유와 무란 각각 독립해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상대방을 예상해서 성립한다는 개념이다. 곧 유와 무가 대립한다고 하는 가장 근본적인 대립의 근저에 “상호의존” “상호한정”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비유비무란 상호의존설(상호한정설)에 의하여 세워질 때 비로소 설명할 수 있는 것이며, 무자성 공이라는 두 가지의 개념이 연기에서 도출되는 것과 똑같이 중도의 개념도 또한 중관파 특유의 “상호한정”이라고 하는 의미에 근거하는 연기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중론은 연기를 중심문제로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지금 이 중도의 문제에 대해서 보아도 똑같이 확인된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가장 근본적인 대립으로서 유와 무가 부정된 이상 그 밖의 대립에 대해서도 똑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와 무아, 하나와 다름, 상과 무상(無常), 고와 락, 색법과 무색법(無色法), 가견법과 무가견법(無可見法), 유대와 무대(無對), 유위와 무위(無爲), 유루와 무루, 세간과 출세간이라고 하는 것처럼 대립을 떠나서 있는 것이 중도라고 말하고(뿌라상가빠다, p.258등) 다시 중국에서는 실로 많은 상호가 대립했던 개념에 관해서 중도가 설해지고 있다.(중론소, p.240등) 그러므로 중도란 한마디로 말하면 비유비무이지만, 이것을 확대해서 말하면 이른바 대립한 한 조의 개념에 관련시켜서 진술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논리에 역으로 표현한다면 절대자는 또한 “유이면서 무”이고,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와 같은 표현은 후대의 불교에서는 볼 수 있지만 중론과 그의 주석서에서는 서술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중관파에 의하면 붓다는 이와 같은 중도에 입각해서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의 성립하는 이론에 관해서 완전한 침묵을 지키기 때문에 모니(牟尼, 寂黙)라고 설하고 있다.(깨달음의 행으로 들어가는 입문 판지카, p.346)
 또한 중도는 대립의 배제라는 의미에서 “불이(不二)”라고도 불리고 있다(적원본荻原本 菩薩地), p.39; 瑜伽師地論 36권, 大正藏30권, p.487상; 菩薩地持經2권 大正藏32권,p.893상) 따라서 찬드라키르티(월칭)는 중관파는 불이론자(不二論者)라고 말하고(뿌라상가빠다, p.331), “유와 무의 2론을 배척함으로써 우리는 니르와나(열반)의 성에 들어가는 불이(不二)의 길을 밝힌다.”(같은 책, p.329)고 설하고 있다.

 ⑧ 반야경 중도의 전거

 다음으로 약간의 방론(傍論)이 있으나 반야경에 있는 중도의 전거를 조사해 보고자 한다.
 반야경이 중도의 사상을 설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앞에서와 같이 팽대(膨大)함에도 불구하고 구마라집역본의 대품반야를 보면 “중도”라고 하는 단어 자체는 1회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이미 많은 학자들이 확언하는 바이다. 구마라집역에서 중도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는 것은 대체로 “중도에 있다”는 의미이고, 또한 “중의(中義, 중간이라는 뜻)”라고 하는 말로 나오지만 이것도 중도의 의미는 아니고 “반야경 중의 의의”라고 하는 정도의 의미이다.
 이와 같이 구마라집역에는 중도라는 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역을 보면 물론 대체로 찾아낼 수 있지만, 적지 않지만 1회는  제1회 제2회 제3회에서 중도라고 하는 단어가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상당하는 부분을 방광반야, 구마라집역 대품반야, 현장역 제4회 제5회 팔천송반야 산스크리트 원본을 보면, 같은 취지로 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도라고 하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 반해서 승천왕반야에서는 중도라고 하는 말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중도라고 하는 말은 후기의 반야경속에 삽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팔부(八不) 공 무자성 연기에 대해서 보아도 반야경 자신의 발달에 따라 한발 한발 중론에 다가갈 준비가 완성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으나, 이제 중도에 관해서도 똑같은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3) 공견(空見)의 배척

   ① 공 또한 다시 공[空亦復空]

 이미 말한 삼제게 고찰에서 이 시구가 연기 공 가명 중도라고 하는 4가지 개념이 같은 뜻인 것을 설함에 지나지 않고, 헤겔류의 부정의 부정이라는 사고는 서술되어 있지 않음을 논하였다. 그러나 중론에서는 공견을 배척하고 있는 곳이 보이므로 “공 또한 다시 공”은 중론의 중심사상의 하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제 여기에서 그 의의를 논하고자 한다.
 “공 또한 다시 공[空亦復空]”이란 구마라집역의 청목(핑가라)석에서 여러 곳에 문구가 있지만, 찬드라키르티주를 보아도 여기에는(월칭주석) 그와 똑같이 들어맞는 문구가 발견되지 않는다. 이 사상은 이미 반야경 속에서도 인정된다. 18공(空) 또는 20공 속의 하나인 공공이 이것을 의미하고 있고, 그 밖에도 공견의 배척은 여러 곳에 설해져 있다. 중도(론)도 이러한 것을 받아들이고 있으나 그 가운데서도 다음의 시구는 가장 명료하게 이것을 설하고 있다.

“만약 어떤 것이 혹시 불공인 것이 존재한다면 공이라고 하는 어떠한 것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불공인 것은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공한 것이 존재하겠는가.”(제13장 제7시)
“일체의 집착을 벗어나기 위해서 수승하신 분(부처)으로부터 공이 설해졌다. 그런데 사람들이 만약 공견을 품는다면 이런 사람들을 ‘무엇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부른다.”(제13장 제8시)
“불완전하게 알고 있는 공은 지혜가 둔한 것을 해친다. 마치 불완전하게 잡힌 뱀 혹은 미완성의 주술과 같다.”(제14장 제11시)
“그렇기 때문에 그 법이 둔한 것(둔근기)과 함께 잘 이해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서, 성자(붓다)가 가르침을 설해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 후퇴하였다.”(24장 12시)

 위와 같이 논하고 있으나 그 자세한 의미는 역시 여러 주석에 의해서 보충하고 이해하는 외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찬드라키르티(월칭)는 제13장의 제8시를 해석한다.
 
 일체의 집착하는 견해에 의해서 만들어진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곧 집착이 작용하지 않는 것이  공이라 한다. 그래서 집착된 견해에 의해서 만들어진 집착을 쉬어 그치는 것은 유가 아니다. 그런데 그 공에 융의 집착을 가지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답 해 줄 수 없다. …만약 갑이라는 사람이 ‘나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선물을 줄 수 없다’라고 말할 때, 을이라는 사람이 만약 ‘아, 그 아무런 선물도 없는 것을 나에게 주시오’라고 말 한다면 그 갑이라는 사람은 어떠한 수단으로 ‘선물이 없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이와 똑같이 공에 대해서도 유를 집착한다면 이제 무엇으로 그 사람의 공에 대한 유의 집착을 깨트릴 수 있겠는가(뿌라상가빠다, p.247∼248)

 ② 두 가지 공견(空見)     
 곧 공이란 일체의 견을 멸하기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은 유라고 해석하고 다른 것에도 이와 같은 해석이 보인다(동서, p.247)
 그런데 이에 반해서 공견이란 공을 무의 의미로 해석하고,  곧 “무에 집착하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동서, p.248) 대지도론을 보면 방광(方廣)도인의 설을 들고 있고 또한 여기와 유사한 설명도 보인다. 중국에 있어서는 상당히 중요시 되고 있으나 이것도 공과 무 또는 단멸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견은 본래 비유비무의 의미인 공을 오해해서 그것을 유의 의미로 해석하거나, 또는 무의 의미로 해석하거나, 어쨌든 존재하는 보통 공견 또는 “공에 집착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다시 갑자기 생각해 보면 이 두 가지가 존재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찬드라키르티(월칭)는 제24장의 제2시를 해석해서 말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이 “두 가지의 진리(이제)”의 구별을 보지 못하고 제행의 공을 보는 곳의 그런 사람은 공을 보는 제행의 무를 허망하다고 상정하고(변계소집), 혹은 또한 공을 무엇인가 유로써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 공에 의지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유의 본성을 허망하게 상정할 것이다.(그 두 가지 속에 아무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의 경우라도 불완전하게 보이는 공은 반드시 (둔근기의 사람을) 멸해 버릴 것이다.(동서, p.495)

 다음에는 “일체가 모두 공하다”를 “일체가 모두 무다”라고 해석하는 설을 잘못된 견해(사견)라고 해서 공을 무의 의미로 해석하는 공견을 파하고(동서, p.495), 다음에는 공을 유의 의미로 해석해서 공에 기초하는 여러 사물의 유를 주장하는 공견도 논파하고 있다.(동서, p.496) 이와 같이 찬드라키르티(월칭)는 공견이 있다는 것을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핑가라(청목)의 주석에 있어서도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대정장30권, p.18하)

 그러므로 공 자신은 유라고도 할 수 없고 무라고도 할 수 없고 비유비무의 중도와 같은 뜻으로 있다. 니르와나에 이르는 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견은 그 공을 유 또는 무 어느 쪽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곧 공이라는 것은 곧 대립을 단절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고, 이것을 대립의 입장에 있어서 포착하려고 하는 것이 공견이다. 그래서 이른바 대립한 것 중에 가장 근본적인 대립은 유와 무의 대립이기 때문에 공견은 공을 유로 해석하는 것과 무로 해석하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것도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