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공이라고 하는 원리를 상정하는 공견(空見)
이와 같이 공견은 두 종류가 있을 뿐이고 이와 동시에 공견은 이 두 종류에 한정한다고 하는 점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만약 이외에 제3의 공견이 있어서 공을 갑이라고 하는 개념의 의미로 해석한다고 해도 공은 여러 가지 사물을 성립하기 위한 근거이기 때문에 공은 가장 근원적인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갑이라고 하는 개념은 내포보다는 적고 외연보다는 큰 개념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논리적 경과를 다듬어 가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유와 무의 대립에 부딪히게 된다. 갑과 갑이 아닌 것과의 대립보다도 유와 무의 대립 쪽이 한층 더 근저에 있다. 따라서 공을 갑이라고 하는 설명도 결국은 유 혹은 무라고 하는 집착하는 견해에 귀착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공견이 이 두 종류 외에 있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와 같이 공견에는 두 종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두 종류로 나누어지지 않고 공견이라고 하는 한 단어로 묶어서 취급하고 있다. 이것은 어째서 인가. 원래 둘 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하나로 보아 논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이것도 유와 무의 존재론적 대립의 특수한 구조에 의해서 쉽게 이해된다고 생각된다. 공을 유로 해석하는 견해와 공을 무로 해석하는 견해와의 본질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이 차이는 정해진 개념[被規定]에 있는 공속에서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규정적 개념에 있는 유 또는 무에서 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유와 무와의 본질적 차이는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만약 우리들이 무엇인가 해답을 준다면 그 해답은 더욱더 근본적인 존재의 모습으로서 유와 무의 대립에 의해서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
유와 무와의 차이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다시 유와 무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제1차의 유와 무와의 대립과 제2차의 유와 무와의 대립과의 문제에는 제1차 제2차라고 하는 이외에는 무엇인가 본질적인 차이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유와 무의 본질적 차이를 개념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따라서 공을 유로 해석하는 공견과 공을 무로 해석하는 공견을 개념적으로 정의하여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공관에서는 여기에 반해서 유와 무 사이에 간혹 공통점이 발견된다. 유와 무는 상호 대립하면서도 다시 공과 상대하고 있다. 공이란 유 무를 초월해서 상호의존 중도 등과 동의어이며, 대립을 떠난 입장이다. 이에 반해서 유와 무는 대립을 존속하는 입장이다. 공에 대해서 유 무나 초대립대 대립의 관계이다. 따라서 공을 유로 간주하는 것이나 공을 무로 보는 것이나 모두 본래 초대립적일 수밖에 없는 공을 대립의 입장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견이 2종류가 있음에도 2종류로 파악하지 않고 항상 공견이라고 하는 하나의 개념하에 이해되는 것이다. 공견이란 공이라고 하는 원리를 상정하는 사고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공이라고 하는 것 혹은 원리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가. 중론에 있어서 이미 기술한 제13장의 제7시가 가장 명료하게 설하고 있으나 여기에 대해서 핑가라의 주석에는 불공법과 공법과는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에 만약 불공법이 있다고 한다면 공법도 존재하겠지만 이미 불공법이 성립할 수 없음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그것과 상관관계가 있는 공법이라는 사물도 존재할 수 없다고 하고 설명하고 있다.(대정장 30권 p.18하)
그러므로 이러한 설명을 보면 그 기조가 되고 있는 것은 상호의존 상호규정의 개념이다. 중론에서는 이 문제에 관해서도 이와 같은 의미의 연기설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④ 공사상의 사적(史的) 고찰
㉮ 반야경의 성립과 공견의 전개
반야경 계열은 먼저 팔천송반야(32음절을 1송으로) 곧 소품반야경에서 2만 오천송반야 곧 대품반야경 그리고 십만송반야로 증광되었다. 이와 같이 소품반야로 시작하는 大經群이 먼저 성립되고 이어, 금강반야와 문수반야와 같은 개별적인 경들이 그 후에 성립된 것으로 본다.
반야경의 번역은 첫째,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 27권 구마라집 408년역(大品般若)이 있고, 둘째 408년역 동경 10권(小品般若)이 있다. 또한 반야사상을 요약한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摩訶般若波羅蜜大明呪經)(현장역은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과 금강반야바라밀경은 구마라집역본이다.
신역시대에는 반야부 총16회 600권으로 집대성하여 번역한 것이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혹은 반야경(般若經)) 현장(玄奘)역(7세기 중엽)이다. 이중에서 대품반야 소품반야 반야심경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의 4경이 가장 애독 연구되었고 현장번역 반야경으로 보면 대품반야는 제2회에, 소품반야는 제4회에, 반야심경은 제10회에, 금강경은 제9회에 해당한다.
금강반야의 경우 그 교리적 표현이 비교적 소박하고 ‘공(空)’이라는 말도 나타나지 않으므로 원시대승의 기준에 적합하지만, 이 경을 라집이 최초로 번역 했다든가 용수의 저작에도 보이지 않는 점으로 보아 늦게 성립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 ‘후오백세’의 구절도 원시대승보다 후기에 가까워 보인다. 8천송반야 등에서 반야경이 남쪽에서 일어나 서 북인도로 퍼져 나갔다고 하고 있는데, 금강반야도 남인도로 추정하려하고 있으나 증거는 불충분하다.
8천송에서 이만오천송은 초기 대승에 속함. 이만오천송은 팔천송의 「초품」을 26품(대품반야)으로 부연 확대하고 「촉루품」 뒤에 20품 정도를 추가했던 점이 특징이다. 초품확대된 내용은 ‘보살대사’를 논하고, ‘대승’을 논하며, ‘십지’에 대하여 언급하고, ‘십팔공’을 언급하고 다양한 삼매의 명칭을 열거하고 다라니문을 나열하고 그리고 일체의 법을 공으로써 부정한다. 후오백세(後五百世)언급(정법 오백년이 끝나감에 따라 이 경전이 성립한다).경과 밀착하여 보살도를 고양시킨 것이 수능엄삼매경 등의 문수계 경전이고, 유마경도 여기에 속한다. 보살의 계위는 초발심보살(初發心菩薩)-행도(行道)-불퇴전(不退轉)-일생보처(一生補處)의 4계위가 설해진다.
㉯ 반야경의 교리와 공사상
첫째, 위대한 갑옷으로 몸을 굳건히 하고 있는 대사(大士)는 유정(有情)의 대집단 유정의 대군집의 상수라는 의미에서 보살을 대사라고 한다. 보살은 수승한 지혜를 가지고 일체법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으며 중생을 부모 형제 내지는 자기 몸과 같이 보아 절대로 버리지 않으며 자기가 대신 고통을 받더라도 중생을 위하여 살며 그러므로 결국 성불할 수 있는 이들 중에서 상수가 된다.
“보살은 자성공법(自性空法) 중에 마땅히 집착하지 않아 경동(傾動)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보살은 일체법의 불이상을 알아 경동(傾動)하지 않기 때문에 보살이라 한다.”(대품반야 권4)
“보살은 어찌하여 마하살(대사)이라고 하는가. 이는 필정취 중에서 제일 상수가 되기 때문이다”(대품반야 권4)
둘째, 십선법(十善道: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양설 불악구 불기어 불탐욕 불진에 불사견)이 중시되는데, 재가중시로 불음주대신 구계(口戒)가 중시되며 수행으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중시한다.
팔천송반야에서는 육재일 십선도 사선 사무량심 사무색정 육신통 삼십칠보리분법(四念處 四正勤 四神足 五根 五力 七覺支 八正道)이 중시된다. 전통적인 계행이 언급되는데 이들은 모두 지혜의 완성에서 생기며 지혜의 완성으로 세상에 유포된다. 육바라밀 각 덕목은 6가지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가지지만, 지혜의 완성에 근거하여 인도되며 지혜의 완성으로 지향한다.
셋째, 불모(佛母)로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 중시된다.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수행은 육바라밀을 실천하는데 그 중에서 반야바라밀이 주가 된다.
반야바라밀은 부처의 본질이며 마치 어머니와 같이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를 낳는 것이며 반야바라밀이야말로 수투파나 사리보다 더욱 존중된다. 여래는 완전한 신체를 얻고 있기 때문에 여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일체지를 얻고 있기 때문에 여래라 불리는 것이다. 이 여래의 일체지는 반야바라밀의 소산이다.
부처의 32상을 갖춘 신체는 일체지의 선교방편이기 때문에 유정에 있어서는 caitya의 성질을 갖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신체는 공양되며 멸한 뒤에도 그 유골도 공양 찬탄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야바라밀을 공양하는 것은 수투파를 공양하는 것보다 훨씬 복덕이 크다.
“만약 보살이 마음이 법에 주하여 보사하면 사람이 어둠 속에 들어가 보는 바와 같고 만약 보살이 법에 주하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사람이 눈이 있어 햇빛이 밝게 비춰 여러 가지 색을 보는 것과 같다(금강경 제14)”
“보살 마하살은⋯ 마땅히 주하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느니라[應無所住 而生其心]” (금강경 제10)
“제가 부처님의 사리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리가 반야바라밀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반야바라밀이 아니었다면 어찌 우리가 사리를 공양하겠습니까”
넷째, 불타관[法身]으로는 부처의 물리적인 신체에 비하면 반야바라밀은 부처의 정신적 본질이고 동시에 공성(空性)의 절대적 진리이기도 하다. “실로 여래는 색신으로서 보아져서는 안되고 여래는 법신이다. 모든 것은 알려지지 않으며 보여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공하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이 가리키는 śūnya(공)는 특정한 형상이 없는 것[無相], 원할 것이 없는 것[無願] 열반, 깨달음의 세계[法界], 진여와 동일시된다.
* 금강반야경 사구게
<제5장>무릇 모습이 있는 것들은 모두 허망하다.[凡所有相 皆是虛妄]
<제26장> 만약 형체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이는 사도를 행하는 것이요. 여래를 보지 못할 것이다.[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제32장> 일체 유위법은 다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갯불과 같으니 마땅히 이렇게 볼지어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제17장>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낸다면 곧 이는 보살이 아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내는 그러한 법이 실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則非菩薩. 所以者何 須菩提 實無有法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
㉰ 반야바라밀의 수행계위
보살로서 육바라밀은 자리이타행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성불하는데 목적이 있다. 바라밀행을 하면 간혜지(乾慧地) 성지(性地) 팔인지(八人地) 견지(見地) 박지(薄地) 이욕지(離欲地) 이작지(已作地) 벽지불지(辟支佛地) 보살지(菩薩地)를 불지(佛地)에 오른다.
㉱ 반야경(般若經)의 공관(空觀)에 의하면 지혜가 있다면 공의 이치를 알고 공의 이치를 알면 곧 지혜를 앎이니 공과 반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원시불교는 아공(我空) 법공(法空), {대비바사론}에는 십공설(十空說), {능가경(楞伽經)}에는 7空, 대반야경(제44권)에는 20공설, 대품반야(제3권)에는 18공설, 대지도론 18공을 설하고 있다.
* 십팔공: 내공(우리의 주관인 육근은 인연으로 생긴 것이기에 자성이 없으므로 공하다), 외공(인식 대상이 되는 육경도 인연으로 생멸하니 공하다.) 內外空, 空空, 大空, 第一義空(열반의 모든 미망 집착을 여윔 불생불멸), 有爲空, 無爲空, 畢竟空, 無始空, 散空(유위법이 다하면 흩어짐), 性空(법성이 공함), 自相空(자상의 개별상), 諸法空, 不可得空, 無法空, 有法空, 無法有法空.
㉲명주공덕(明呪功德)을 강조하고, 수지(受持) 독송(讀誦) 서사(書寫) 해설(解說)을 설한다.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수지 독송하라. 네가 이것을 수지 독송하면 아수라가 생각을 내어 도리천으로 같이 듣고자 하면 그때에 너는 반야바라밀을 독송하라. 그러면 그 인연으로 아수라의 악심이 곧 멸하리라.⋯ 반야바라밀은 대명주(大明呪)며 무등등주(無等等呪)니라. 왜냐하면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 명주로 인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때문이니라”(소품반야)
“이는 대신주요 대명주요 무상주 무등등주이니 능히 일체의 고통을 제거하여 허망하지 아니하니라[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반야심경)
이와 같이 공견은 두 종류가 있을 뿐이고 이와 동시에 공견은 이 두 종류에 한정한다고 하는 점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만약 이외에 제3의 공견이 있어서 공을 갑이라고 하는 개념의 의미로 해석한다고 해도 공은 여러 가지 사물을 성립하기 위한 근거이기 때문에 공은 가장 근원적인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갑이라고 하는 개념은 내포보다는 적고 외연보다는 큰 개념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논리적 경과를 다듬어 가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유와 무의 대립에 부딪히게 된다. 갑과 갑이 아닌 것과의 대립보다도 유와 무의 대립 쪽이 한층 더 근저에 있다. 따라서 공을 갑이라고 하는 설명도 결국은 유 혹은 무라고 하는 집착하는 견해에 귀착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공견이 이 두 종류 외에 있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와 같이 공견에는 두 종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두 종류로 나누어지지 않고 공견이라고 하는 한 단어로 묶어서 취급하고 있다. 이것은 어째서 인가. 원래 둘 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하나로 보아 논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이것도 유와 무의 존재론적 대립의 특수한 구조에 의해서 쉽게 이해된다고 생각된다. 공을 유로 해석하는 견해와 공을 무로 해석하는 견해와의 본질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이 차이는 정해진 개념[被規定]에 있는 공속에서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규정적 개념에 있는 유 또는 무에서 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유와 무와의 본질적 차이는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만약 우리들이 무엇인가 해답을 준다면 그 해답은 더욱더 근본적인 존재의 모습으로서 유와 무의 대립에 의해서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
유와 무와의 차이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다시 유와 무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제1차의 유와 무와의 대립과 제2차의 유와 무와의 대립과의 문제에는 제1차 제2차라고 하는 이외에는 무엇인가 본질적인 차이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유와 무의 본질적 차이를 개념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따라서 공을 유로 해석하는 공견과 공을 무로 해석하는 공견을 개념적으로 정의하여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공관에서는 여기에 반해서 유와 무 사이에 간혹 공통점이 발견된다. 유와 무는 상호 대립하면서도 다시 공과 상대하고 있다. 공이란 유 무를 초월해서 상호의존 중도 등과 동의어이며, 대립을 떠난 입장이다. 이에 반해서 유와 무는 대립을 존속하는 입장이다. 공에 대해서 유 무나 초대립대 대립의 관계이다. 따라서 공을 유로 간주하는 것이나 공을 무로 보는 것이나 모두 본래 초대립적일 수밖에 없는 공을 대립의 입장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견이 2종류가 있음에도 2종류로 파악하지 않고 항상 공견이라고 하는 하나의 개념하에 이해되는 것이다. 공견이란 공이라고 하는 원리를 상정하는 사고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공이라고 하는 것 혹은 원리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가. 중론에 있어서 이미 기술한 제13장의 제7시가 가장 명료하게 설하고 있으나 여기에 대해서 핑가라의 주석에는 불공법과 공법과는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에 만약 불공법이 있다고 한다면 공법도 존재하겠지만 이미 불공법이 성립할 수 없음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그것과 상관관계가 있는 공법이라는 사물도 존재할 수 없다고 하고 설명하고 있다.(대정장 30권 p.18하)
그러므로 이러한 설명을 보면 그 기조가 되고 있는 것은 상호의존 상호규정의 개념이다. 중론에서는 이 문제에 관해서도 이와 같은 의미의 연기설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④ 공사상의 사적(史的) 고찰
㉮ 반야경의 성립과 공견의 전개
반야경 계열은 먼저 팔천송반야(32음절을 1송으로) 곧 소품반야경에서 2만 오천송반야 곧 대품반야경 그리고 십만송반야로 증광되었다. 이와 같이 소품반야로 시작하는 大經群이 먼저 성립되고 이어, 금강반야와 문수반야와 같은 개별적인 경들이 그 후에 성립된 것으로 본다.
반야경의 번역은 첫째,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 27권 구마라집 408년역(大品般若)이 있고, 둘째 408년역 동경 10권(小品般若)이 있다. 또한 반야사상을 요약한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摩訶般若波羅蜜大明呪經)(현장역은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과 금강반야바라밀경은 구마라집역본이다.
신역시대에는 반야부 총16회 600권으로 집대성하여 번역한 것이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혹은 반야경(般若經)) 현장(玄奘)역(7세기 중엽)이다. 이중에서 대품반야 소품반야 반야심경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의 4경이 가장 애독 연구되었고 현장번역 반야경으로 보면 대품반야는 제2회에, 소품반야는 제4회에, 반야심경은 제10회에, 금강경은 제9회에 해당한다.
금강반야의 경우 그 교리적 표현이 비교적 소박하고 ‘공(空)’이라는 말도 나타나지 않으므로 원시대승의 기준에 적합하지만, 이 경을 라집이 최초로 번역 했다든가 용수의 저작에도 보이지 않는 점으로 보아 늦게 성립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 ‘후오백세’의 구절도 원시대승보다 후기에 가까워 보인다. 8천송반야 등에서 반야경이 남쪽에서 일어나 서 북인도로 퍼져 나갔다고 하고 있는데, 금강반야도 남인도로 추정하려하고 있으나 증거는 불충분하다.
8천송에서 이만오천송은 초기 대승에 속함. 이만오천송은 팔천송의 「초품」을 26품(대품반야)으로 부연 확대하고 「촉루품」 뒤에 20품 정도를 추가했던 점이 특징이다. 초품확대된 내용은 ‘보살대사’를 논하고, ‘대승’을 논하며, ‘십지’에 대하여 언급하고, ‘십팔공’을 언급하고 다양한 삼매의 명칭을 열거하고 다라니문을 나열하고 그리고 일체의 법을 공으로써 부정한다. 후오백세(後五百世)언급(정법 오백년이 끝나감에 따라 이 경전이 성립한다).경과 밀착하여 보살도를 고양시킨 것이 수능엄삼매경 등의 문수계 경전이고, 유마경도 여기에 속한다. 보살의 계위는 초발심보살(初發心菩薩)-행도(行道)-불퇴전(不退轉)-일생보처(一生補處)의 4계위가 설해진다.
㉯ 반야경의 교리와 공사상
첫째, 위대한 갑옷으로 몸을 굳건히 하고 있는 대사(大士)는 유정(有情)의 대집단 유정의 대군집의 상수라는 의미에서 보살을 대사라고 한다. 보살은 수승한 지혜를 가지고 일체법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으며 중생을 부모 형제 내지는 자기 몸과 같이 보아 절대로 버리지 않으며 자기가 대신 고통을 받더라도 중생을 위하여 살며 그러므로 결국 성불할 수 있는 이들 중에서 상수가 된다.
“보살은 자성공법(自性空法) 중에 마땅히 집착하지 않아 경동(傾動)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보살은 일체법의 불이상을 알아 경동(傾動)하지 않기 때문에 보살이라 한다.”(대품반야 권4)
“보살은 어찌하여 마하살(대사)이라고 하는가. 이는 필정취 중에서 제일 상수가 되기 때문이다”(대품반야 권4)
둘째, 십선법(十善道: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양설 불악구 불기어 불탐욕 불진에 불사견)이 중시되는데, 재가중시로 불음주대신 구계(口戒)가 중시되며 수행으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중시한다.
팔천송반야에서는 육재일 십선도 사선 사무량심 사무색정 육신통 삼십칠보리분법(四念處 四正勤 四神足 五根 五力 七覺支 八正道)이 중시된다. 전통적인 계행이 언급되는데 이들은 모두 지혜의 완성에서 생기며 지혜의 완성으로 세상에 유포된다. 육바라밀 각 덕목은 6가지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가지지만, 지혜의 완성에 근거하여 인도되며 지혜의 완성으로 지향한다.
셋째, 불모(佛母)로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 중시된다.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수행은 육바라밀을 실천하는데 그 중에서 반야바라밀이 주가 된다.
반야바라밀은 부처의 본질이며 마치 어머니와 같이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를 낳는 것이며 반야바라밀이야말로 수투파나 사리보다 더욱 존중된다. 여래는 완전한 신체를 얻고 있기 때문에 여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일체지를 얻고 있기 때문에 여래라 불리는 것이다. 이 여래의 일체지는 반야바라밀의 소산이다.
부처의 32상을 갖춘 신체는 일체지의 선교방편이기 때문에 유정에 있어서는 caitya의 성질을 갖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신체는 공양되며 멸한 뒤에도 그 유골도 공양 찬탄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야바라밀을 공양하는 것은 수투파를 공양하는 것보다 훨씬 복덕이 크다.
“만약 보살이 마음이 법에 주하여 보사하면 사람이 어둠 속에 들어가 보는 바와 같고 만약 보살이 법에 주하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사람이 눈이 있어 햇빛이 밝게 비춰 여러 가지 색을 보는 것과 같다(금강경 제14)”
“보살 마하살은⋯ 마땅히 주하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느니라[應無所住 而生其心]” (금강경 제10)
“제가 부처님의 사리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리가 반야바라밀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반야바라밀이 아니었다면 어찌 우리가 사리를 공양하겠습니까”
넷째, 불타관[法身]으로는 부처의 물리적인 신체에 비하면 반야바라밀은 부처의 정신적 본질이고 동시에 공성(空性)의 절대적 진리이기도 하다. “실로 여래는 색신으로서 보아져서는 안되고 여래는 법신이다. 모든 것은 알려지지 않으며 보여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공하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이 가리키는 śūnya(공)는 특정한 형상이 없는 것[無相], 원할 것이 없는 것[無願] 열반, 깨달음의 세계[法界], 진여와 동일시된다.
* 금강반야경 사구게
<제5장>무릇 모습이 있는 것들은 모두 허망하다.[凡所有相 皆是虛妄]
<제26장> 만약 형체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이는 사도를 행하는 것이요. 여래를 보지 못할 것이다.[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제32장> 일체 유위법은 다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갯불과 같으니 마땅히 이렇게 볼지어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제17장>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낸다면 곧 이는 보살이 아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내는 그러한 법이 실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則非菩薩. 所以者何 須菩提 實無有法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
㉰ 반야바라밀의 수행계위
보살로서 육바라밀은 자리이타행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성불하는데 목적이 있다. 바라밀행을 하면 간혜지(乾慧地) 성지(性地) 팔인지(八人地) 견지(見地) 박지(薄地) 이욕지(離欲地) 이작지(已作地) 벽지불지(辟支佛地) 보살지(菩薩地)를 불지(佛地)에 오른다.
㉱ 반야경(般若經)의 공관(空觀)에 의하면 지혜가 있다면 공의 이치를 알고 공의 이치를 알면 곧 지혜를 앎이니 공과 반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원시불교는 아공(我空) 법공(法空), {대비바사론}에는 십공설(十空說), {능가경(楞伽經)}에는 7空, 대반야경(제44권)에는 20공설, 대품반야(제3권)에는 18공설, 대지도론 18공을 설하고 있다.
* 십팔공: 내공(우리의 주관인 육근은 인연으로 생긴 것이기에 자성이 없으므로 공하다), 외공(인식 대상이 되는 육경도 인연으로 생멸하니 공하다.) 內外空, 空空, 大空, 第一義空(열반의 모든 미망 집착을 여윔 불생불멸), 有爲空, 無爲空, 畢竟空, 無始空, 散空(유위법이 다하면 흩어짐), 性空(법성이 공함), 自相空(자상의 개별상), 諸法空, 不可得空, 無法空, 有法空, 無法有法空.
㉲명주공덕(明呪功德)을 강조하고, 수지(受持) 독송(讀誦) 서사(書寫) 해설(解說)을 설한다.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수지 독송하라. 네가 이것을 수지 독송하면 아수라가 생각을 내어 도리천으로 같이 듣고자 하면 그때에 너는 반야바라밀을 독송하라. 그러면 그 인연으로 아수라의 악심이 곧 멸하리라.⋯ 반야바라밀은 대명주(大明呪)며 무등등주(無等等呪)니라. 왜냐하면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 명주로 인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때문이니라”(소품반야)
“이는 대신주요 대명주요 무상주 무등등주이니 능히 일체의 고통을 제거하여 허망하지 아니하니라[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반야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