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언어의 마술
유부에서 의미하는 유(有)는 니르와나(열반)에 관해서 말한다면 시간적 공간적 규정을 초월한 유임에도 불구하고, 나가르주나(용수)가 의미하는 유는 시간적 공간적 규정을 받는 현실적 존재이다. 따라서 나가르주나는 “유는 노사라고 하는 특질을 떠나 있지 않다”라고 하는가, “유는 유위로서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Sein, das Seiende, Existenz, existentia 등의 개념을 구별하는 것은 철학상 중요한 중요하면서도 매우 곤란한 문제이다. 다만 여기서는 니르와나를 존재를 이룬다고 하는 유(有)의 개념에 관해서 두 가지의 다른 해석이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문제에 관한 흥미있는 재료를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다음과 같은 제6시에는
또한 만일 니르와나가 유(존재 하는 것)라고 한다면 니르와나는 어째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일까(그렇다면 니르와나는 다른 것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유(有)도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 여기서 나가르주나는 upādā라고 하는 어근의 두 가지 의미를 이용해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래서 “의존한다”고 하는 의미와 “집착한다”고 하는 의미가 있다. 니르와나에 집착이 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된다. 니르와나는 집착하는 것이 없는 것이고, 곧 (다른 것에)의존하지 않는 것이라고 경에 설해지고 있다. 따라서 만약 니르와나가 “존재하는 것”(유)이라고 한다면 다른 것에 의해서 성립하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니르와나는 이 경우 상의설(相依說)에 입각해서 의론을 진전할 수 있기 때문에 언어의 마술을 행사하고 있다.
4) 경량부의 열반론에 대한 비판
{중론}에는 다음 제7게송과 제8게송에 의해서 니르와나(열반)는 무(無)라고 하는 설을 배격하고 있다. 이것은 {반야등론석} 및 근대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경부(사우트란티카파)의 니르와나론을 배척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경량부는 대승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고 있으며, 또한 이미 지적한 것처럼 {중론}에서는 경부와 공통적인 논법이 적지 않기 때문에 {중론}이 지금 여기서 경부의 설을 배척하고 있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중관학파는 비유비무의 중도 사구분별을 넘어서 제법실상을 설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니르와나(열반)를 유라고 하는 의견과 함께 무라고 하는 의견도 배척하지 않으면 안된다.
경량부는 니르와나를 무({뿌라상가빠다}, p.527)라고 해석하고, 혹은 “무만의 것”이라고도 말하는데({구사론}, 야소미트라주, p.221), 특히 “∼뿐”이라고 하는 제한을 두는 것은 니르와나를 실체시하는 생각을 막기 위해서라고 설명하고 있다. 경량부는 일반적으로 무위법을 실체시하는 설에 반대하고 있다({구사론} 6권 15매좌). 또한 {성실론}도 “니르와나를 무법이라고 이름한다”(6권 {대정장} 32권, p.281하)라고 말하기 때문에 똑같이 생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해석에 대해서 나가르주나는 다음과 같이 반대하고 있다.
만약 니르와나가 유(존재하는 것)가 아니라면 어째서 비유(무)가 니르와나인가. 유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비유(무)도 존재하지 않는다.(제25장 제7게송)
또한 만약 니르와나가 없는 것이라면 어째서 그의 니르와나는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인가. 왜냐하면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존재하는 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제25장 제8게송)
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의 무이다. 곧 무는 유를 전재하고 있다. 무는 유에 의지해서 시설되고 있다 가假로 설정되어 있는 ({뿌라상가빠다}, p.527) 무와 유와는 상관개념이다. 그러므로 이미 서술했듯이 니르와나에 유가 없다면 당연히 무도 존재할 수 없다. 형식논리학적 입장에서 말한다면, 만약 유가 아니라면 무로 있는 것이 가능하지만 상의설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부정된다면 다른 쪽도 부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또한 유와 무는 상관관계에 있기 때문에 만약 니르와나가 무라고 한다면 유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니르와나가 불수(不受) 곧 의존하지 않고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니르와나를 무로 해석하는 설도 상의설의 입장에서 배척되고 있다.
5) 현대인의 비약적인 논의
이상을 요약해서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스승(붓다)은 생존과 비생존을 버리고 떠날 것을 설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니르와나는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맞다.(제25장 제10게송)
여기서 나가르주나의 논의는 약간의 비약이 있다. 우리들은 생존에 집착해서 망령되게 집착하면서 조바심을 내서는 안된다. 그러나 또한 비생존(단멸)에 사로잡혀서 인생을 버리고 허무주의가 되어서도 안된다고 원시불교에서 설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니르와나는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라고 말해도 좋은가. 당연히 그것을 설했던 당시 나가르주나의 말을 들었던 당시의 인도인들은 그 말에 이상하다고 생각 했을 것이다. 그래서
유(bhāva)→생존 bhava
무abhāva→ 비생존 vibhava
무(abhāva)--비생존(단멸) (vibhava)
라고 하는데 이 말은 똑같은 어원에 유래하고 이와 같은 대응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에 있어서 라틴어의 Existentia라고 하는 독일어 Existenz와 동일한 어원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약간의 의미에 상위가 있는 것을 상기하라) 여기서도 나가르주나는 언어의 마술을 구사하고 있다.
6) 그 밖의 설에 대한 논파
{중론}애서는 다음에 니르와나(열반)를 역유역무(亦有亦無)라고 설하기도 비유비무(非有非無)라고 하는 설을 논파하고 있다. {반야등론}에 의하면 전자는 곧 독자부라고 하는 부파의 설을 논파하고, 후자는 수다라인(경전을 받드는 사람)의 설을 논파하고 있으나({대정장} 30권, p.129) 상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반드시 특정한 학파를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니르와나가 사구분별 유, 무, 유이면서 무, 유도 아니면서 무도 아닌 것을 떠나있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형태를 갖추어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의 경우는 {중론}이 부파의 니르와나론을 공격하는 것도 위에서 서술한 것과 같이 상의설의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7) 니르와나란
이와 같이 니르와나(열반)는 사구분별을 떠나 있기 때문에 니르와나는 일체의 희론을 적멸한 경지에 있다고 설하고 있다.
니르와나란 일체의 인식하여 알 수 있는 것 유소득(有所得)이 멸하고, 희론이 멸해서 수승한 경지이다.(제25장, 제24장 게송 전반. {뿌라상가빠다}, p.538 참조)
인식하여 아는 것이라고 번역한 유소득이란 무엇인가를 지각하고 그것이 실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희론이란 prapañaca라고 하는 말을 한역한 것인데, prapañaca라고 하는 말이 불전에서는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적 의론을 의미하며, 희론이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티베트역에는 prapañaca를 sporos pa(확장)라고 번역하고 있다. 인도철학 일반으로는 세계의 확장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어쨌든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니르와나는 일체의 희론(형이상학적 논의)를 떠나 있고, 일체의 분별을 여의고, 다시 여러 가지 대립을 초월해 있다. 따라서 니르와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부정적 언사를 가지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없애버리지도 않고 다시 얻는 것도 없고 부단(不斷) 불상(不詳) 불멸(不滅) 불생(不生)이다. 이것이 니르와나라고 설해진다.(제25게송 제3시)
이러한 제설명과 {중론}의 귀경서를 비교해 보아도 연기와 니르와나에 관해서 대략 같은 양상의 일이 서술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8) 윤회와 니르와나는 같은 것
그렇다면 서로 의존해서 성립하고 있는 제 사상과 니르와나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중론}을 보면,
만약 오온(개인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요소)을 취해서 혹은 인연에 연해서 생사 왕래하는 상태가 연을 취하지 않을 때에는 이것은 니르와나라고 설한다.[제25장 제9게송]
라고 설하기 때문에 상호에 서로 의지해서 여러 사상(事象)들이 생멸 변천하는 것을 범부의 입장에서 볼 경우 생사 왕래하는 상태 또는 윤회로 이름하고 있으며, 그 본래의 모습을 본다면 니르와나라고 한다. 사람들이 미혹되어 있는 상태가 생사윤회이다. 그것을 초월해 있는 입장에 섰을 때가 니르와나이다.
윤회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속박되어 있는 상태에서 ({뿌라산나빠다}, p.290) 있고, 해탈이란 사람이 자주적 입장을 얻은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윤회와 니르와나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고, “동등한 것”(동서, p.535)이고 양자는 본래 동일본질(일미)이다(동서, p.536).
윤회는 니르와나에 대하여 어떠한 구별도 없고, 니르와나는 윤회에 대해서 어떠한 구별도 없다.(제25장 19게송)
양자는 구별해서 생각하기 쉽지만 그 근저를 거슬러 올라가면 양자는 일치한다.
니르와나의 구극을 이루는 것은 곧 윤회의 구극이다. 양자의 사이에는 조그마한 미세한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제25장 제20게송)
이 사상은 중관학파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 일반 실천사상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예를 들어 {60송여리론} 제 5게송 {대정장}30권, p.254하 그 외).
인간의 현실과 이상과의 관계는 이와 같은 성질이 있기 때문에 니르와나라고 하는 독립된 경지가 실체로서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니르와나라고 하는 것이 실은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범부의 미망이다. 그러므로 {반야경}에서는 니르와나는 “꿈 꾸는 것” “환상”으로 비유하고 있다. (살원본 {팔천송반야}, p.160) 그와 동시에 윤회라고 하는 것도 또한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뿌라산나빠다}, p.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