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연기(緣起)를 안다는 것
1) 법을 아는 것과 붓다를 아는 것은 같은 뜻
니르와나(열반)라 하고, 붓다라고 해도 어떠한 기이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의 연쇄의 그물망에 의해서 서로 의지해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사물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니고, 제법의 연기하는 여실상을 체득한 경우 처음에 “깨달음을 연 사람”[각자覺者]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연기를 아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중론의 제24장(네 가지 성스런 진리의 고찰)의 최후의 게송(제40 게송)에서
“이 연기를 아는 자는 곧 고(苦) 집(集) 멸(滅)과 도(道)를 안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전부터 전해온 구절로 “연기를 아는 자는 곧 법을 안다”는 것을 바꾸어 썼던 것이다. 법이라고 하는 말을 “고 집 멸 도”라고 바꾸어 썼던 말이지만, 사제에 의해서 일체제법을 섭수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구사론 1권 3매 이하) 이와 같이 변형했다고 하더라도 지장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또한 이 “연기를 아는 자는 곧 법을 안다”의 뒤에 다시 “법을 보는 자는 곧 붓다를 본다”는 구절이 부가되는 때도 있다. 구마라지바는 이것을 예상해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경에서 설한다. 만약 인연법을 보는 자는 곧 능히 붓다를 보고, 고 집 멸 도를 보게 된다.
라고 여분의 말을 써서 번역하고 있고, 청목(靑目, 핑가라)의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일체법의 여러 가지 연으로부터(많은 연) 생기는 것을 안다면 이 사람은 곧 능히 부처의 법신(法身)을 본다. 지혜가 늘어나서 능히 사성제(四聖諦)의 고 집 멸 도를 안다. 사성제를 안다면 사과(四果)를 얻고 모든 고뇌를 멸한다. 이런 까닭에 마땅히 공(空)의 뜻을 파해서는 안된다.(대정장 30, p.348이하)
반야경에도 똑같이 설명하고 있다.(대정장 30, p.127이하) 따라서 “연기를 아는 것” “법을 아는 것” “붓다를 아는 것”의 세 가지는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의 상관관계(相關關係)에 의해 성립하고 있는 것. 연기는 상의성(相依性)의 의미이기 때문에 제법의 통일관계 곧 이러저러한 법을 성립시키는 근거를 의미하고 있다. 그래서 “연기를 안다”는 것은 이 통일 관계를 체득하는 것이다. “연기를”에 대해서 목적격(accusative)으로 말하지만 결코 연기를 객관화해서 포착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주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연기를 안다”는 “법은 아는 것” 이다. 이 경우 법은 연기의 이법을 의미한다면 전혀 문제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이 법을 후세에 사물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성질의 개념으로 보아도 지장이 없다. 왜냐하면 법은 각각 법으로서 성립해 있는 것은 완전히 상의(相依)에 의한 것이고 연기에서 떠나서 법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을 안다”고 말해도 설일체유부에서 상정했던 것처럼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법의 본체(법의 자성)를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뿌라상가빠다, p.559)
또한 붓다라고 하는 독립된 실재가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고 연기를 가리키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연기를 안다는 것”은 동시에 “붓다를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연기를 아는 것에 범부에서 각자(覺者)로
이 “연기를 아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곧 공을 체득하는 것이라 하든가(대승연생론 대정장 32, p.482) 제법실상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뿌라상가빠다, p.559 그 외) 그래서 연기를 안다면 일체의 희론을 멸해버린다고도 설하고 있다(동서, p.11). 또한 이미 원시불교 성전 가운데 “연기를 안다면 전제 중제 후제(과거 현재 미래)에 관해서 어리석은 미혹에 빠지지 않는다”(잡아함경 제9권 12매 이하 등)라고 설하고 있으나 중론에서는 이것을 받아서 제27장(잘못된 견해의 고찰)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설명은 다른 점에 착안해서 제기한 것일지라도 결국은 같은 취지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연기설이 의미하는 실천이란 우리들의 현실 생존의 여실상에 있는 연기를 아는 것으로 미혹에 빠져 있는 범부를 변환시켜 각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연기를 바로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정각자(붓다)가 되는 데 있다고 하는 취지의 무상정등정각을 이루기 위해서 이 연기설이 설해졌다고 한다(도간경(稻幹經). 따라서 대승의 대반열반경(남본 25권, 30권)에서는 마침내 십이인연은 곧 불성이라고 설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등정각을 이루는 것이 니르와나(열반)이기 때문에, 연기를 아는 것이 곧 니르와나에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붓다팔리타는 연기의 가르침을 “일체의 희론을 멸한 니르와나의 도읍에 이르는 바르고 성스런 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붓다팔리타주, p.2)
3) 연기의 여실상을 아는 지혜
이 연기의 여실상을 아는 지혜가 <밝은 지혜>(prajňā 반야)이다.(깨달음의 수행 입문 빤지카, p.344) 대지도론에서는 제법실상을 아는 지혜가 반야바라밀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18권 대정장 25권, p.109상) 결국 연기를 아는 지혜를 의미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찬드라키르티(Candrakirti 月稱, 600∼650)는 자신의 저서 입중관론에서 “상의성의 진성을 아는 자는 반야에 머물기 때문에 멸도를 얻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혹은 “깊은 연기의 진성을 아는 보살은 반야바라밀 청정에 의해서 멸도를 얻는다”라고도 말하고 있다.
반야바라밀에 관해서는 예로부터 여러 곳에서 설명되고 있지만, 요컨대 제법이 서로 의지해서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 연기의 여실상을 아는 (깨달음) 지혜에 있다고 말하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에 의하면 중론의 게송 중에는 한 번도 반야라고 하는 말이 나타나지 않지만, 연기를 설하는 중론의 상세한 명칭으로 반야(prajňā)라고 하는 말이 포함되어 있는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4) 무명의 단멸과 연기의 역관(逆觀)
이 반야에 의해서 연기를 본다면 무명이 단멸한다. “이 연기의 여실하고 전도하지 않는 수습으로 무명이 끊어진다”(뿌라상가빠다, p.559)고 찬드라키르티는 말했다. 제법실상을 안다면 무명이 끊어진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동서, p.559) 이것도 똑같은 의미이다.
<십이연기 삼세양중인과 관계>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
과거 2인 현재 5과 현재 3인 미래 2과
무명이 끊어지기 위해서는 무명이 실유(實有)로 존재해서는 안된다. 만약 실유로 있다면 그것을 끊는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가르주나는 중론의 제23장(전도된 견해의 고찰)에 있어서 잘못된 견해 전도(顚倒)가 일반적으로 (실유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대지도론에서는 한층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곧 십이인연을 설한 후에 “또한 다음에 보살이 무명의 체(본질)를 구한다면 즉시 이것은 명(明)해진다. 이른바 제법실상을 이름 붙여서 실제(구극의 근거)로 한다”(90권 대정장 25, p.697상)라고 한다. 곧 무명이라하는 것은 명에 기초하고 있다. 무명이란 “제법실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깨달음의 수행 입문 빤지카, p.352)이다. 무명을 끊는다고 하는 것은 인간존재의 근원에의 복귀를 의미한다. 따라서 무명을 끊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연기의 역관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십이인연의 각 항목이 하나하나 멸하게 된다. 중론의 제2, 3장에서는 잘못된 견해(전도)를 논파한 후에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전도가 멸하기 때문에 무명이 멸한다. 무명이 멸할 때에 형성력(행) 등이 멸한다.(제23 게송)
제26장에서도,
무명이 멸할 때 여러 가지 형성됨(제행)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무명의 멸한다는 것은 앎에 의해서 (십이인연의) 수습(연속적 염상念想)으로부터 일어난다.(제11게송)
십이인연의 여러 항목들 속에서 이러 저러한 (앞의) 것들이 멸함에 따라서 이러 저러한 (뒤의) 것들이 생기지 않는다. 이와 같이하여 오직 고의 덩어리(괴로움의 개인의 존재)는 완전히 멸한다(제12게송)
라고 한다. 따라서 중론은 연기의 역관을 성립시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5) 최초기 불교에 대한 정통한 발전
여기에 문제가 있다. 연기를 앎으로 무명이 멸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만, 어째서 무명이 멸함으로해서 십이인연의 각항이 모두 멸한다고 할 수 있는가. 붓다는 무명을 단멸하기 때문에 노사도 없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으로서 붓다는 늙고 죽음에 이르렀다. 이 모순을 나가르주나는 어떻게 이해했을까. 중론에는 이 해답이 주어져 있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가 자연적 존재의 영역과 법의 영역과를 구별한다면 연기의 역관의 설명도 상당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적 존재의 영역은 필연성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각자로서 붓다라고 하더라도 전연 자유롭지 않다. 붓다도 배고픔과 목마름을 피할 수 없고, 늙어 죽음도 피할 수 없다. 붓다도 감기에 걸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의 영역에 있어서는 제법이 다 상관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요, 그 통일관계가 연기라고 불린다. 그 통일관계를 체득한다면 무명에 덮여있었던 모든 사상(事象)이 전연 별개로 나타난다.
따라서 각자의 입장에서 보았던 모든 사물의 현상은 범부의 입장에서 반영되어 있는 모든 사물의 현상의 모습이 아니다. 따라서 자연적 존재로서의 각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하더라도 십이인연의 각항이 모두 멸한다고 하는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이 “연기를 안다”는 것과 연기의 역관은 이미 최초기 불교에서 설해져 있다. 나가르주나는 이것을 이어받아 그 가능함을 상당히 논증하였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도 나가르주나의 불교는 의외 것은 다른 의미에서는 최초기의 불교의 정통을 발전시켰다고 이해할 수 있다.
1) 법을 아는 것과 붓다를 아는 것은 같은 뜻
니르와나(열반)라 하고, 붓다라고 해도 어떠한 기이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의 연쇄의 그물망에 의해서 서로 의지해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사물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니고, 제법의 연기하는 여실상을 체득한 경우 처음에 “깨달음을 연 사람”[각자覺者]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연기를 아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중론의 제24장(네 가지 성스런 진리의 고찰)의 최후의 게송(제40 게송)에서
“이 연기를 아는 자는 곧 고(苦) 집(集) 멸(滅)과 도(道)를 안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전부터 전해온 구절로 “연기를 아는 자는 곧 법을 안다”는 것을 바꾸어 썼던 것이다. 법이라고 하는 말을 “고 집 멸 도”라고 바꾸어 썼던 말이지만, 사제에 의해서 일체제법을 섭수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구사론 1권 3매 이하) 이와 같이 변형했다고 하더라도 지장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또한 이 “연기를 아는 자는 곧 법을 안다”의 뒤에 다시 “법을 보는 자는 곧 붓다를 본다”는 구절이 부가되는 때도 있다. 구마라지바는 이것을 예상해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경에서 설한다. 만약 인연법을 보는 자는 곧 능히 붓다를 보고, 고 집 멸 도를 보게 된다.
라고 여분의 말을 써서 번역하고 있고, 청목(靑目, 핑가라)의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일체법의 여러 가지 연으로부터(많은 연) 생기는 것을 안다면 이 사람은 곧 능히 부처의 법신(法身)을 본다. 지혜가 늘어나서 능히 사성제(四聖諦)의 고 집 멸 도를 안다. 사성제를 안다면 사과(四果)를 얻고 모든 고뇌를 멸한다. 이런 까닭에 마땅히 공(空)의 뜻을 파해서는 안된다.(대정장 30, p.348이하)
반야경에도 똑같이 설명하고 있다.(대정장 30, p.127이하) 따라서 “연기를 아는 것” “법을 아는 것” “붓다를 아는 것”의 세 가지는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의 상관관계(相關關係)에 의해 성립하고 있는 것. 연기는 상의성(相依性)의 의미이기 때문에 제법의 통일관계 곧 이러저러한 법을 성립시키는 근거를 의미하고 있다. 그래서 “연기를 안다”는 것은 이 통일 관계를 체득하는 것이다. “연기를”에 대해서 목적격(accusative)으로 말하지만 결코 연기를 객관화해서 포착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주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연기를 안다”는 “법은 아는 것” 이다. 이 경우 법은 연기의 이법을 의미한다면 전혀 문제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이 법을 후세에 사물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성질의 개념으로 보아도 지장이 없다. 왜냐하면 법은 각각 법으로서 성립해 있는 것은 완전히 상의(相依)에 의한 것이고 연기에서 떠나서 법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을 안다”고 말해도 설일체유부에서 상정했던 것처럼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법의 본체(법의 자성)를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뿌라상가빠다, p.559)
또한 붓다라고 하는 독립된 실재가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고 연기를 가리키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연기를 안다는 것”은 동시에 “붓다를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연기를 아는 것에 범부에서 각자(覺者)로
이 “연기를 아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곧 공을 체득하는 것이라 하든가(대승연생론 대정장 32, p.482) 제법실상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뿌라상가빠다, p.559 그 외) 그래서 연기를 안다면 일체의 희론을 멸해버린다고도 설하고 있다(동서, p.11). 또한 이미 원시불교 성전 가운데 “연기를 안다면 전제 중제 후제(과거 현재 미래)에 관해서 어리석은 미혹에 빠지지 않는다”(잡아함경 제9권 12매 이하 등)라고 설하고 있으나 중론에서는 이것을 받아서 제27장(잘못된 견해의 고찰)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설명은 다른 점에 착안해서 제기한 것일지라도 결국은 같은 취지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연기설이 의미하는 실천이란 우리들의 현실 생존의 여실상에 있는 연기를 아는 것으로 미혹에 빠져 있는 범부를 변환시켜 각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연기를 바로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정각자(붓다)가 되는 데 있다고 하는 취지의 무상정등정각을 이루기 위해서 이 연기설이 설해졌다고 한다(도간경(稻幹經). 따라서 대승의 대반열반경(남본 25권, 30권)에서는 마침내 십이인연은 곧 불성이라고 설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등정각을 이루는 것이 니르와나(열반)이기 때문에, 연기를 아는 것이 곧 니르와나에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붓다팔리타는 연기의 가르침을 “일체의 희론을 멸한 니르와나의 도읍에 이르는 바르고 성스런 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붓다팔리타주, p.2)
3) 연기의 여실상을 아는 지혜
이 연기의 여실상을 아는 지혜가 <밝은 지혜>(prajňā 반야)이다.(깨달음의 수행 입문 빤지카, p.344) 대지도론에서는 제법실상을 아는 지혜가 반야바라밀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18권 대정장 25권, p.109상) 결국 연기를 아는 지혜를 의미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찬드라키르티(Candrakirti 月稱, 600∼650)는 자신의 저서 입중관론에서 “상의성의 진성을 아는 자는 반야에 머물기 때문에 멸도를 얻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혹은 “깊은 연기의 진성을 아는 보살은 반야바라밀 청정에 의해서 멸도를 얻는다”라고도 말하고 있다.
반야바라밀에 관해서는 예로부터 여러 곳에서 설명되고 있지만, 요컨대 제법이 서로 의지해서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 연기의 여실상을 아는 (깨달음) 지혜에 있다고 말하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에 의하면 중론의 게송 중에는 한 번도 반야라고 하는 말이 나타나지 않지만, 연기를 설하는 중론의 상세한 명칭으로 반야(prajňā)라고 하는 말이 포함되어 있는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4) 무명의 단멸과 연기의 역관(逆觀)
이 반야에 의해서 연기를 본다면 무명이 단멸한다. “이 연기의 여실하고 전도하지 않는 수습으로 무명이 끊어진다”(뿌라상가빠다, p.559)고 찬드라키르티는 말했다. 제법실상을 안다면 무명이 끊어진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동서, p.559) 이것도 똑같은 의미이다.
<십이연기 삼세양중인과 관계>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
과거 2인 현재 5과 현재 3인 미래 2과
무명이 끊어지기 위해서는 무명이 실유(實有)로 존재해서는 안된다. 만약 실유로 있다면 그것을 끊는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가르주나는 중론의 제23장(전도된 견해의 고찰)에 있어서 잘못된 견해 전도(顚倒)가 일반적으로 (실유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대지도론에서는 한층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곧 십이인연을 설한 후에 “또한 다음에 보살이 무명의 체(본질)를 구한다면 즉시 이것은 명(明)해진다. 이른바 제법실상을 이름 붙여서 실제(구극의 근거)로 한다”(90권 대정장 25, p.697상)라고 한다. 곧 무명이라하는 것은 명에 기초하고 있다. 무명이란 “제법실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깨달음의 수행 입문 빤지카, p.352)이다. 무명을 끊는다고 하는 것은 인간존재의 근원에의 복귀를 의미한다. 따라서 무명을 끊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연기의 역관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십이인연의 각 항목이 하나하나 멸하게 된다. 중론의 제2, 3장에서는 잘못된 견해(전도)를 논파한 후에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전도가 멸하기 때문에 무명이 멸한다. 무명이 멸할 때에 형성력(행) 등이 멸한다.(제23 게송)
제26장에서도,
무명이 멸할 때 여러 가지 형성됨(제행)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무명의 멸한다는 것은 앎에 의해서 (십이인연의) 수습(연속적 염상念想)으로부터 일어난다.(제11게송)
십이인연의 여러 항목들 속에서 이러 저러한 (앞의) 것들이 멸함에 따라서 이러 저러한 (뒤의) 것들이 생기지 않는다. 이와 같이하여 오직 고의 덩어리(괴로움의 개인의 존재)는 완전히 멸한다(제12게송)
라고 한다. 따라서 중론은 연기의 역관을 성립시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5) 최초기 불교에 대한 정통한 발전
여기에 문제가 있다. 연기를 앎으로 무명이 멸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만, 어째서 무명이 멸함으로해서 십이인연의 각항이 모두 멸한다고 할 수 있는가. 붓다는 무명을 단멸하기 때문에 노사도 없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으로서 붓다는 늙고 죽음에 이르렀다. 이 모순을 나가르주나는 어떻게 이해했을까. 중론에는 이 해답이 주어져 있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가 자연적 존재의 영역과 법의 영역과를 구별한다면 연기의 역관의 설명도 상당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적 존재의 영역은 필연성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각자로서 붓다라고 하더라도 전연 자유롭지 않다. 붓다도 배고픔과 목마름을 피할 수 없고, 늙어 죽음도 피할 수 없다. 붓다도 감기에 걸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의 영역에 있어서는 제법이 다 상관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요, 그 통일관계가 연기라고 불린다. 그 통일관계를 체득한다면 무명에 덮여있었던 모든 사상(事象)이 전연 별개로 나타난다.
따라서 각자의 입장에서 보았던 모든 사물의 현상은 범부의 입장에서 반영되어 있는 모든 사물의 현상의 모습이 아니다. 따라서 자연적 존재로서의 각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하더라도 십이인연의 각항이 모두 멸한다고 하는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이 “연기를 안다”는 것과 연기의 역관은 이미 최초기 불교에서 설해져 있다. 나가르주나는 이것을 이어받아 그 가능함을 상당히 논증하였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도 나가르주나의 불교는 의외 것은 다른 의미에서는 최초기의 불교의 정통을 발전시켰다고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