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중국과 일본에서의 중관사상

 나가르주나(용수)의 사상은 중국에 흘러와 전해졌다. 그것은 구마라집에 의해 번역된 것으로 나가르주나의 저작 중론 십이문론 및 아리야데바의 백론에 기초한 종파로서 성립되었다. 이 종파는 삼론종이라 부른다. 삼론종의 대성자는 가상대사 길장(吉藏, 549-623)이다. 그는 안식국(安息國) 출신의 고승이었으며, 화엄경과 법화경」사상을 따르면서 중국사상의 지반 위에 독특한 사상을 전개하였다.
 중국 삼론종은 구마라집법사가 삼론을 역출하여 그의 제자들이 성립한 구삼론학파가 중국 장안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학파는 제(齊)나라 때에 이르러 단절되었는데 양나라 때 고구려 출신의 승랑(僧朗)이 승조(僧肇)계통 삼론학을 연구하여 당시 성실론과 함께 연구되어 학문적 분리가 없었던 삼론학을 학적으로 분리하여 삼론학을 확립하였다. 승랑은 구삼론학을 연구하여 승전(僧詮)에 전하여 법랑(法朗) 길장으로 이어지는 신삼론학의 중요한 전승자가 되었다.  
 중국 삼론종의 전승에 대해서는 일본의 응연(凝然), 八宗講要(팔종강요) 권하에 다음과 같이 그 계보를 밝히고 있다.

○응연의 계보: 라집(羅什)-도생(道生)-담제(曇濟)-도랑(道朗)-승전(僧詮)-법랑(法朗)-길장(吉藏)

 그런데 이 계보에는 결정적으로 승랑(僧朗)을 도랑이라고 잘못 기술하고 있다. 이후 연구성과로 인하여 삼론종의 계보는 중국장안의 관하구설에서 섭산의 섭령상승으로 이루어지고, 다시 신삼론의 흥황상승이 전승되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삼론종의 전승계보: 관하구설(關河舊說):라집(羅什)-승예(僧叡)-담영(曇影)-승조(僧肇)-도랑(道朗)→섭령상승(攝嶺相承): 승랑(僧朗)-승전(僧詮)→흥황상승(興皇相承):법랑(法朗)-길장(吉藏).
 
 그러나 삼론종은 당나라 중엽 무렵에는 그 기운이 쇠퇴하였다.

 일본에서는 나가르주나의 전통이 역시 삼론종으로 전래되었다. 그것은 고구려 출신으로 길장의 제자였던 혜관(慧灌)이 625년(추고 33)에 일본에 와서 전해 주었다. 혜관은 원흥사(元興寺)에 있으면서 삼론학을 전파하였다. 혜관은 수나라 삼론종의 길장을 찾아가 삼론학을 배우고 귀국하여 일본으로 갔다. 추고(推古)천황의 명으로 원흥사에 머물고 있을 때 날이 매우 가물어 기우제를 지내게 했는데, 그는 청의(靑衣)를 입고 삼론학을 강의 하자 큰 비가 내렸다고 한다.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그를 승정(僧正)에 임명하였다. 백제의 관륵(觀勒)에 이어 일본 2대 승정이 되었으며 일본 삼론의 시조가 된다. 그의 제자로는 복량(福亮)과 지장(智藏) 등이 있었으나 헤이안시대(平安時代) 말에 밀교와 융합하면서 쇠퇴하였다. 〔혜관의 전기에 대한 자료는 삼국불법전통연기(三國佛法傳通緣起) 卷中, 원형석서(元亨釋書) 권1, 본조고승전(本朝高僧傳) 권1, 일본서기(日本書紀) 22, 삼국불법전통연기(三國佛法傳通緣起) 권중, 부상략기(扶桑略記) 제4, 승강보임초출(僧綱補任抄出) 권상에 들어 있다.〕
 또한 중국에서 성립했던 이상의 삼론에 다시대지도론을 더하여 교리의 기본으로 했던 사론종(四論宗)-이 종파도 후에는 삼론종에 융합되었다.-도 같은 용수 계통에 흘러들어가게 되었다.
 또 중론과 대지도론 등을 근본으로 하는 공(空)·가(假)·중(中)의 삼제원융 일심삼관을 근간으로 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는 천태종-지의에 의해 대성되었다-도 나가르주나의 사상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나가르주나가 저술한 십주비바사론의 정토교 관계부분은 후세 정토교의 중요한 지주가 되었고, 또 밀교도 화엄경 등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나가르주나의 사상이라는 연장선상에 있다고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나가르주나가 후세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큰 것이었다.  

2) 비교사상에서 본 나가르주나

 (1) 중세의 신비사상
 대승불교의 공사상을 이론화 했던 나가르주나와 그 후 중관파의 사상은 세계불교사상사를 고대사상, 보편사상, 중세사상, 근대사상의 4단계로 구분할 때 중세사상에 위치한다[여기서 말하는 세계사상사에 대해서는 중촌원선집(中村元選集) 결정판 별권1 고대사상, p.3이하 참조. 4단계의 구분법에 대해서는 같은 책, p.40이하 참조].
 여기서 중세라고 하는 것은 대개 보편적 종교가 흥기한 이후 근대적 사유가 시작될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정치사적 사회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고대 말기의 세계국가 혹은 보편적 국가의 소실에서 근대국가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중간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서양으로 말하면 기독교가 대략 크리스트교가 흥기하고, 로마 고대 제국이 붕괴하고, 교권의 지배가 확립되고 이후에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기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동양제국에서도 연대적으로는 다소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의미의 중세를 한정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중세에서는 새롭게 형성되었던 사회적 기반 위에 종교의 권위가 확립되었다. 또한 성전이 정해지고 그것이 권위를 가지고 다음시대로 전해졌다. 그것이 주해되고 설명되어 신학과 교의학(敎義學)이 성립되어 중세의 주류가 되었다. 또한 일찍이 서양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 남아시아에서는 붓다고사(415-450년경), 북방불교(대승)에서는 바수반두(세친, 320-400년경)가 대체로 같은 시대에 속한다. 이 시대 이후 학파가 성립되었다. 인도에서는 바라문교의 전통에서는 이른바 육파철학, 불교의 경우에도 제철학파에서 근본의 원전들이 만들어지고, 이런 것 들이 후대학자들에 의해서 해석 부연되었다.
 중국에서는 후한 이후 이와 같은 경향이 나타나, 정현(鄭玄 127-200년)은 유학의 전적을 주해하였고, 왕필(王弼 226-249)은 노자(老子)를 각각 독자적인 입장에서 주석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대립하는 경향으로 서양에서는 부정신학(否定神學)이라고 불리는 조류가 성립하였다. 그러한 경향이 현저하게 나타난 결과는 그리스트교 신비주의의 원류로 되어 있는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지트에게로 귀착하는 디오니시우스 위서(僞書) 이다. 이 책의 저자는 신에 대해서 적극적인 언설로 이루어지는 긍정신학(肯定神學)이 제1의 도라고 하는데 대해서, 그것은 제2의 도라고 하는 고차적인 부정신학에 의해서 보완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여기에 의해서 초본질적인 빛의 속에 신비적으로 침잠해 있는 신과 합하는 황홀경에 들어가는 제3의 도가 열린다고 주장한다. 이 사상은 중세의 신비가(神秘家)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아시아에 있어서 그에 대응하는 것으로, 우리들은 공의 이론을 설했던 대승불교의 신비가들에게 눈을 향하지 않을 수 없다.

 (2) 공(空) 실체의 부정
 대승불교, 특히 나가르주나(용수)는 여러 가지 사물들이 상호 의존하여 성립한다고 하는 이론에 의해서 공의 관념을 이론적으로 기초하였다.
 이 실체를 부정하는 공 사상에 대해서 서양에서는 전면적인 실체부정은 나타나지 않았다. 없지는 않지만 일반화되지는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의 관념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지배해왔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이 점에서 럿셀의 실체(實體) 비판은 주목할만하다. 그는 서양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우세를 점하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의 관념을 가차 없이 비판했다고 할 수 있다.

 실체라고 하는 관념은 진면목에서 생각해본다면 여러 가지 난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개념이다. 실체란 제성질의 주어가 되는 것으로 그 모든 것의 성질에서 구별되는 어떠한 사물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제성질 등을 제거해 보면 실체라고 하는 것을 상상해 보아도 우리들은 거기에 어떠한 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문제를 다른 방법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실체를 다른 실체와 구별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성질의 차이는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실체의 논리에 의하면 제성질의 차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모든 실체들 사이에 수적인 다양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2가지의 실체는 그 자신이 어떻게 해도 구별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고, 다만 단순하게 2개가 아니면 안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우리는 그러한 것들이 2개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일까.
 실제로 실체란 여러 가지 일어나는 일을 묶어서 모은 편의적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 그것은 그 모든 생기(生起) 현상이 일어나 매달려있는 단순한 공상상의 열쇠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가 의지해야만 하는 코끼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 모든 사건의 발생도 실제로는 열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지리적인 지역이라고 하는 유사한 사례에 있어서는 (예를 들면) “프랑스”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언어적 편의이고, 그 지역의 여러 가지 부분을 초월해서 “프랑스”라고 불리는 것과 같이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동일한 것이 스미스씨에도 해당된다. 그것은 다수의 사건에 대한 하나의 집합적인 명칭이다. 만약 우리가 그것 이상의 것이다라고 해석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알아낼 수 없는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되고 따라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의 표현으로는 그 어떤 사물은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한 마디로 말하면 실체라고 하는 개념은 형이상학적인 오류이고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지는 문장의 구조를 세계의 구조에 까지 이행시키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西洋哲學史, 市井三郞역 상권, p.205)

 그가 실체라고 말한 관념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논의는 나가르주나나 아리야제바의 실체비판에 정확히 대응하는 것이다.
 헬레니즘시대 서양에 공(공성)에 대응하는 관념을 찾아보려고 하면 제법실상(사물의 실상)의 이명이라 할 수 있는 실제(實際 bhūtakoți)가 plērōma(full, perfect nature)에 상당하고, Kēnōma와 Philo의 vacuum 이 공성에 상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공에 대응하는 것을 서양 중세에서 구한다면 「신의 사막」, 로이스부르크(1293-1381년 경)의 「나태한 공허」, 에크하르트(1260-1327)가 말했던 「어떤 사람도 안정할 수 없는 조용한 광야」 「적나라한 기도」 「신에 이르려고 하는 솔직한 의지」―이는 완전한 자기복귀에 의해서 가능할 수 있으나―또한 로이스부르크나 타우라(1300-1361년경)가 말한 헤아릴 수 없는 심연(深淵) 등이 될 것이다. 이 심연은 자기부정과 자기멸각(自己滅却)에 전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에 의해서 환영받았다. 이것은 불교의 무아(無我)의 가르침에 상당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