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절대의 부정

인도에서 리그베다 이래 특히 우파니샤드에 이르러서는 절대자에 대해서 부정적으로만 파악된다고 설하고 있다. 이것은 불교에서도 반야경전에서 반복해서 설하고 있는데, 특히 나가르주나(용수)는 이 점을 중론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마음의 경지가 멸할 때에는 언어의 대상도 사라진다. 진리는 불생불멸이며, 실로 니르바나(열반)와 같다(중론 제18장 제7 게송)

 고대 서양의 철학자들은 실체를 어떤 의미로 승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구극의 실체는 개념작용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고하는 견해는 아주 오래되었다. 놀랍게도 나가르주나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지지 않는 시대에 나타나고 있다.
 신플라톤 학파와 크노시스 학파의 사상형태, 특별히 프로클로스와 다마스키우스와 같은 후대의 신 플라톤주의자들, 또는 그들이 크리스트교적인 형태를 취한 것으로 오리게네스나 디오니시우스 · 아레오파기타 등의 많은 저작들이 이러한 사상이 들어있다. 특히 후자의 신비신학은 반야심경의 크리스트교판이라고 까지 불린다.
 일리암 · 제임스가 지적한 사실이 있는데 디오니시우스 · 아레오파기타는 절대의 진리를 부정인 말로만 서술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유의 원인은 영혼도 아니고 지성도 아니며, 또한 설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절대자는 숫자로도 셀 수 없고, 순서도 없으며, 크지도 않다. 그 가운데에는 아주 작은 성분, 평등 불평등, 비슷하지도 비슷하지 않음도(반야경전의 문구에 있다)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떠한 서술로도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디오니시우스는 이러한 한정을 모두 부정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진리가 이러한 일들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러한 것들을 모두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이러한 일들의 위에 있지 않으면 안된다. 절대자를 인식하는 부정적 방법이 니콜라우스 · 구자누스 조르다노 · 부르노 등에 의해서 창도되었다는 것도 여기에 관련해서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구극의 원리로서 공에 대응하는 사상을 고대 중국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노자(老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는 항상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에 의해서 행해지지 않는 것도 없다.(노자 제37장)

 여기서 공(空)의 관념과 노장사상의 허무(虛無)와의 관계가 문제가 되지만 불교가 중국에 들어올 무렵 지도자는 공과 허무를 동일시했다고 생각된다. 
 다만 중국에 불교가 성행하게 되자 불교를 노장사상과 비교해서 설할 필요가 없어졌는데 불교도들 사이에서는 허무라고 하는 말은 저절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4) 부정의 논리

 중관파의 철학자들은 현상세계에 있어서 변화를 부정하여 진리는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이론을 서술하였다. 나가르주나는 중론의 모든 「귀경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주에서는 어떠한 것도 소멸하는 것이 없고, 어떠한 것도 저절로 생기는 것도 없고, 어떠한 것도 종말이 있는 것도 없으며, 어떠한 것도 항상 하는 것도 없으며 어떠한 것도 그 자신과 동일한 것도 없고, 어떠한 것도 그 자신과 나누어 별도의 것으로 있는 것도 없고, 어떠한 것도 (우리를 향하여)오는 것도 없고, (우리들에서)가는 것도 없다고 하는 연기의 희론에 대한 단절을 부처는 설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연기란 이미 서술한 것과 같이 상의해서 존재한다는 의미로 공과 같은 뜻이다(앞의 “공의 고찰, 연기를 의미하는 공” 참조). 그는 변화 그 자체를 부정했다. 본성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들이 슬퍼할 이유도 없을 뿐 아니라 기뻐할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교의 교도들은 반드시 그것과 똑같은 교설을 서술하였다. 왈필은 도를 무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경우에 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분명하게 설명한 것은 없다. 그런데 다른 주해에 의하면 “아무것도 없는 것”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환언한다면 지금 우리가 수학에서 제로라고 서술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도(道)는 무(無)라고 하기 때문에 제1원인 또는 유(有)의 세계에 있어서 사물의 최초 기동자로 아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반대로 그것은 사물을 그와 같이 나타나게 하는 내재적인 자연경향이므로 사물이 나타나는 모습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장재(張載, 1120-1077)는 무로써 해석되고 있는 불교의 교리에 반대했다. 거기에는 객관적인 우주의 실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기(vital force) 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중심적인 것으로 채용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그들이 고심해서 모으고 반성했던 경험적 사실에서 도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장재가 감관에 의한 지각이 지식의 근원에 있고 외계의 존재는 마음이 의식해서 있는 것으로 환원된다고 하는 의미로 인식론적 경험론자였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장재는 방법론에 관해서는 회의론자였다. 그가 말했던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 의심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것을 의심할 수 있다면 그는 진보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어떠한 명제도 그것이 진리라고 증명될 때 까지는 그 신빙성을 의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가르주나(용수)의 운동부정의 논리는 자주 제논의 운동부정론에 대비되지만 이점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서술하였으므로(“비교사상의 부정논리 고찰” 참조) 그것을 참조하기 바란다.
         
 (5) 부정의 부정 -무입장의 입장

 나가르주나는 다시 나아가 주장한다. 공이라고 하는 원리 자체도 또한 부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곧 부정 그 자체가 부정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부정의 부정이 요구되는 것이다. 일반의 대중불교는 부정의 부정을 설한다.(“공 또한 공”) 나가르주나는 중론에서 말한다.

만약  무엇인가 혹은 불공인 사물이 존재한다면 공이라고 하는 혹은 사물이 존재한다. 그러나 불공인 것은 어떤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째서 공이라는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가(제13장 제7게송)

 그렇다하더라도 공이라고 하는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공 역시 공으로 있는 것이 아닌 것이 된다. 이 관념을 계승해서 중국의 천태종은 삼중의 진리(삼제)가 융화하는 것이 있다고 하는 원리를 그 기본적인 교의로 서술하였다. 이 원리에 의하면 (1)일체의 사물은 유론적인 실재를 가지고 있지 않은 곧 공이다(공제). (2) 그것은 일시적인 임시의 존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현상이다(가제). (3) 그것은 비실재로 있지만 일시적인 것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은 진리이다(중제). 존재하는 어떠한 사물도 이 세 가지의 관점에서 관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설한다.
 부정의 부정(이중의 부정)이라고 하는 사상은 서양에서는 마이스텔 에크하르트에 의해서 표명되었다(P·도이센 一般哲學史 제1권 제2편, p.129 참조).
 
 (6) 실천의 기초에 대해

 이와 같은 부정의 논리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실천에 관해서는 일체의 집착이나 속박에서 떠나는 것을 생활목표로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허무론자 니힐리스트는 아니지만, 공론자라고 하는 이들은 이미 고대 인도에서도 문제시되었다.
 이에 대해서 대승불교도들은 답하기를, 공의 교의는 허무론을 설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지 않고 오히려 공은 여러 사물을 성립시키는 원리라고 생각되었다. 그것은 구극의 경지인 동시에 실천을 기초로 하여 쌓아가는 데 있다고 생각되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윤리적 가치를 성립시키는 진정한 기저가 되고 있다는 것을 대승불교는 주장하였다. 공의 중심에는 어떠한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사물이 그 가운데서 나온다. 그것은 거울과 같은 것이다. 거울 속에는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러한 까닭으로 여러 가지 사물을 비추어 나타내는 것이 가능하다(그래서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하는 표현이 성립한다. 대원경지는 마치 크고 둥근 거울에 모든 사물의 영상이 비치듯이 모든 진리를 환하게 관찰하는 지혜이다. 이 지혜는 모든 번뇌가 정화되어 발생하는 지혜로서 관찰하기 어려운 미세한 진리의 모습을 능히 관찰한다. 그러므로 이 지혜는 이타적인 지혜[菩提]로서 매우 미세하여 알기 어렵다. 그리고 모습[境相]에 우매하지 않고, 체성과 형상이 모두 청정하며 원만한 덕성을 지니게 되며 이러한 공덕을 중생과 보살들에게 베풀어주는 지혜이다.).
 종교적 직관의 지혜에 의한 인식은 거울이 대상을 비추는 것에 비유된다. 신성함을 비추는 도구로 거울을 비유하는데 사용한 것은 중국 인도 불교 그리이스 및 크리스트교에서 나타나는 일들이다. 대승불교 특히 유식설에서는 우리들의 존재의 구극원리로 있는 아뢰야식이 전변해서 얻어지는 지혜를 대원경지로 부르고 있다.(유식설에서는 전오식이 청정하면 성소작지로 전환하고, 제6의식이 청정하면 묘관찰지로 전환하며, 제7말나식은 평등성지로, 제8 아뢰야식은 대원경지로 전환한다)
 공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다. 여기에 대립하는 것은 없다. 공이 배척하고 대립하는 것은 어떠한 것도 없다. 실질에 대해서 말한다면 공의 참된 특질은 “어떠한 것도 없는 것”이라고 하는 동시에 존재의 충실성에 있다. 그것은 여러 가지 현상을 성립시키는 기저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공이다. 여러 가지 현상이 그 가운데서 나올 수 있다. 공을 체득하는 사람은 생명과 힘으로 모두 채워져 있어서 일체가 생명들이 살아가는 데 대해서 자비(maitri, karuņā)를 품게 한다. 자비란 공-여러 가지 사물을 포용하는 것-의 실천면에 있어서 동의어이다. 대승불교에 의하면 여러 가지 사물이 성립하는 근본적인 기초는 공이다. 때문에 공을 안다고 하는 것은 일체지(전지)라고 부른다.
 공은 수정의 옥과 같다. 그것은 그와 같이 비추어지는 것에 의해서만 나타나서 육안으로 보게 된다. 꽃을 앞에 놓으면 그 가운데 꽃이 나타난다. 허공을 앞에 놓으면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허공의 공허한 모습을 비추지 않음이 없다. 그 본체는 미지의 그대로 이다. 수정이 여러 가지 상을 비추는 것처럼 다양한 현상의 모습이 저절로 공 가운데 나타난다. 우리가 공을 체득해도 선한 행이 저절로 나타난다. 공의 실천은 활달한 경지에 행해진다. 거기에 속박되는 것이 없다. 이러한 점에서 새가 허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닌 다는 비유가 자주 사용된다.
 대승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실천을 기초로 삼는 것으로서 공관(空觀)이 제시되었다. 실천은 공관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된다. 금강경에서는 “참으로 주(住)하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한다. 보살은 무량 무수(無數) 무변(無邊)의 중생을 제도하지만, 자신이 중생을 제도하였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진실한 보살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구하는 자도 공(空)이고, 구해지는 중생도 공이다. 구해서 도달하는 경지도 공이다. 이 사상은 중국의 도교에도 계승되었다. “너는 너의 능력을 타인을 구하는 것을 자만해서는 안된다”(도사 제145측)
 당시의 힌두교(특히 바가바드기타에서는 행위의 결과가 목표로 하지 말고, 다만 의무이기 때문에 꼭 그 의무를 실천해야 한다고 설해서 적극적인 행위의 의의를 강조하였다. “힌두교의 신비설이 바라문교의 신비설과 실로 크게 구별되는 점은 -그래서 크리스트교의 신비설과도 구별되는 바가 있으나- 정적주의적(靜寂主義的)인 이상이 힌두교의 신비설에서 멀리 떠나 있다고 하는 것이다.”(슈바이처- 인도사상가의 세계관) 보통 서양사상은 활동을 강조하고 동양사상은 관념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시대에 관한 한 오히려 그 반대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