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힌두교의 경전 바가바드 기타(Bhagavadgita, 거룩한 신의 노래라는 뜻)에서는 무집착의 행위를 강조한다. 여러 가지 선한 행위를 한다면 그에 따르는 좋은 보(報)가 있다고 하는 이러한 일을 생각하지 말고 집착을 떠나서 행동하라고 한다. 이런 류의 사상은 서양에서는 바울에 의해서 설해졌다. 곧 내면적인 세계에서 자유에 있는 것을 외면적으로 표시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부인이 있는 자는 없는 것처럼 하며, 슬피 우는 자는 슬퍼 울지 않는 것처럼 하며, 기뻐하는 사람은 기쁘지 않은 것처럼 하며, 상품을 산 사람은 사지 않은 것처럼 하며, 세상과 교섭이 있는 사람은 거기에 깊이 들어가지 않은 것처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어떤 모습을 갖춘 것은 (변해서)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고린도인의 첫 번째 편지7, pp.29-30)
크리스트교의 부정신학(否定神學)에서도 같은 모습의 내용을 말한 것을 볼 수 있다. 루돌프 웃토는 말한다. “이 부정신학이란 신앙과 감정을 소실시켜 무(無)에 돌아가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 속에는 오히려 가장 고귀한 헌신의 정신을 포함하고 있다. 크리소스톰이 가장 엄숙한 고백과 기도를 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은 부정적 속성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가 그것에 의해서 다시 보여주었던 것은 감정이나 체험은 개념적 사색보다도 아주 멀리 먼 곳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고, 형식에 있어서는 부정적인 개념은 상징(우리가 이데오그램이라고 부르는 것)이 되어, 예를 들어 절대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해도 역시 가장 적극적인데 있는 의미내용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크리소스톰의 예는 부정신학이 순수한 종교적 뿌리에서, 곧 신성한 것의 경험에서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을 동시에 보여준다.”(신성한 것의 관념)
디오니우스 아레오파기타의 부정적인 서술, 베르나르의 알지 못함, 로이스부르크의 “모든 애인들이 자기를 잊어버리는 희미한 침묵, 에크하르트와 베메의 사상은 이러한 선상에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에크하르트는 무(無)의 철학에 의하여 해탈을 목표로 하고 있다.
로이스부르크는 “신을 보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였다. “그의 정신은 아직 분화되어 있지 않고 구별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의 몸 이외에는 어떤 것도 느끼지 않는다.”라고…. 이 관념은 대승불교에 있어서 무분별지(無分別智, 구별하는 것이 없는 지식)에 대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행위의 기본적인 덕으로 자비 사랑과 절대자의 지식이 실질적으로는 같은 것이라고 하는 견해는 반드시 불교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지혜와 자비가 실질적으로는 똑같다고 하는 대승의 견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복잡한 논증에서도 들어있는 내용이다. 그곳에서는 “신은 그 본질에 있어서 선(善)이다”(신학대전 제1부), “신은 이른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동서)라고 한다.
이런 관념은 그 이후 서양인들의 사이에 정착하였다. 약간의 문인들에 의해서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와 같이 동서의 사이에는 대응 관계가 나타나고 있지만, 그러나 서양에 있어서 부정신학과 신비주의는 뭐라 해도 부수적인 것으로 있는 방계의 흐름에 지나지 않았다. 동아시아 남아시아에서는 적지 않지만 교의적으로는 주류로 되어 있다. 공관(空觀)에 의한 사상은 서양에서 널리 뿌리내리기가 가능하지 않지만, 동양에서는 대승불교를 통해서 일반화 되었다(정토진종의 교학에서 말하지만, 공의 이론을 기초로 하고 있다. 적지 않지만 교의상에서는 표면적으로는 기본사상으로 보여지고 있다). 여기에 동과 서가 중점을 두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Ⅲ. 나가르주나의 저작
1. 저작의 개관
1) 中論頌(Mūlamadhyamakakārikā) 나가르주나(용수)의 주저서 이다. 27장 449게송(한역에서는 445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Ⅱ부에서 자세히 밝혔듯이 공(空) 연기(緣起) 등 나가르주나의 가장 기본적인 사상을 서술하였다.
산스크리트 Mūlamadhyamakakārikā는 '中道의 원리'라는 뜻이다. 용수는 붓다의 진의가 공사상에 들어있다고 보고, 대승반야공관이야 말로 근본불교정신인 '연기(緣起)·무아(無我)·중도(中道)'를 가장 바르게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중론송은 이 공관에 입각하여 엄격한 논리와 종교적 직관을 결합하여 궁극적 '공'(空)의 교리를 명쾌하게 제시한 뛰어난 저서이다. 나가르주나의 근본 철학은 반야(般若 Prajñāpāramitā)라는 가장 완전한 지혜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중론송에 이르러 반야부 경전들에서 설하고 제시하고 있는 '공'에 대한 다양한 통찰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450여 개의 게송(偈頌)으로 이루어진 중론송은 중도의 참된 뜻은 모든 집착을 떠나는 데에 있음을 밝히고 무상한 현상계뿐만 아니라 열반 그 자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현상적인 제법 내지 열반(涅槃)조차도 그 자체에 실체적인 것은 없다는 교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 저서는 일시적인 현상계와 열반 그 자체가 궁극적으로는 동일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그는 기존의 불교학 전통인 특히 상좌부 논장(論藏)의 분류법과 분석법을 논리적 극한에까지 끌어들여 철저한 공관에서 재검토하였다. 논장에서 밝히고 있는 제법의 존재에 대한 여러 가지 요소들, 인(因)·연(緣), 온(蘊) 처(處) 계(界)·육계(六界) 등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 개체나 구성요소들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 가령 생(生), 멸(滅), 거(去), 래(來), 작(作), 견(見), 염(染), 수(受), 취(取), 전도(顚倒) 고(苦)·낙(樂) 등에 대해서도 연기 무자성 공의 입장에서 보면 실체적(實體的)으로 항유(恒有)한다고 볼 수 없음을 증명해 내고자 하였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수행의 경지, 능력 등을 존재론적 무(無)가 됨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나가르주나의 논리체계는 오구문파(五求門破)나 양도론법(兩刀論法)과 같은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논리 이론으로, 불타(佛陀)의 진의를 알지 못한 채 교리 개념만을 집착·분별·회론하는 일부 아비달마 논사들의 잘못들을 파사(破邪)의 입장에서 현정(顯正)하고자 하였다. 오구문파란 일체의 모든 것들에 대해 다섯 가지의 관찰을 한다. 곧 “상호간 서로 같은 것인가”, “서로 다른 것인가”, “어느 하나는 다른 하나를 갖고 있는 것인가”, “어느 하나 안에 다른 하나가 있는 것인가”, “반대로 다른 하나에 그것이 있는 것인가” 를 추구해서 동일(同一), 별이(別異), 소유(所有), 상호(相互)간 서로에게 내재(內在)함을 모두 부정함으로서 그 실체적 존재성을 부정한다.
양도법이란 제법의 일어나는 현상을 공관을 통하여 고찰하여 그 주체(主體)의 인과(因果)관계나 능소(能所)관계가 서로가 동일(同一)하지도 합일(合一)되거나, 공존(共存)하지도 않으므로 같지도 함께하지도 다르지도 않음을 파악하는 것이다. 곧 제법의 현상은 불일(不一). 불상(不常), 불공(不共), 불합(不合)이고, 또한 서로는 전혀 관련성 없는 별개적 이체(異體)인 것들이라고도 할 수 없으므로, 불이(不異)·부단(不斷)·비무(非無)가 아닐 수 없다고 논증하는 방법이다.
서로를 동일(同一, 合一)하다고 하면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다른 것들[別異, 不合]이라 보면 단견(斷見)이 생기는 모순·오류·불합리(不合理)에 빠지고 만다는 등의 귀류논증법(歸謬論證法)을 종횡 구사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중론(中論)은 대승반야공관에 입각하여, 온갖 회론을 없애기 위해, 불생(不生)이나 불거(不去)인 까닭을 밝혀내는 그 특수 논중논리로써, 생(生), 멸(滅), 상(常), 단(斷), 일(一), 이(異), 래(來), 거(去), 유(有), 무(無) 등의 양극단을 초월한 불생불멸(不生不滅) 내지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中道) 실상(實相)세계에 참다운 진리성이 있음을 설파한 것이다. 곧 이와 같은 논증방법의 궁극적 목적은 불타의 가르침의 참된 정신인 중도를 바로 밝혀내고자 한 것이었다.
청목이 주석한 중론이 번역된 이후 용수의 십이문론(十二門論) 및 그의 제자 제바(提婆)의 백론(百論)과 합하여 삼론(三論)이라 불려 삼론종이 성립되었다. 또한 천태종(天台宗)의 지의(智顗)는 중론을 기초로 '공(空)·가(假)·중(中)'의 삼제설(三諦說)을 세워 천태종의 관법체계로 삼았다.
이 저술에 대해서는 다수의 주석서가 있다. 무외(無畏)·불호(佛護)·청변(靑辨)·무착(無着)·안혜(安慧)·월칭(月稱) 등의 주석이 있으나, 월칭의 《Prasannapad》는 현존하는 유일한 산스크리트 원전이다.
여기서는 앞에서(3. 공의 논리) 주석서에 대해서 서술한 것을 참조할 수 있다.
a) 무외론(Akutobhayā, 無畏論)
간단한 주석으로 티베트의 전승에 의하면 나가르주나 자신의 주석이라고 한다. 티베트역만이 존재하고 산스크리트 원전은 일실되었다. 근래의 연구에 의하면 이것은 가장 오래된 주석으로 참고할 만한 가치가 크지만 주석이 그다지 세밀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저술은 나가르주나에 가탁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서장대장경(西藏大藏經)의 일부로 포함된 티베트본이 있는데, 이것은 'Akutobhaya(일체의 두려움에서 벗어남)'이라는 제목이 붙어져 있어 무외론(無畏論)이라고 한다.
b) 청목석(핑갈라 Pingala, 靑目釋)
4세기 전반 청목의 주석으로, 구마라집의 한역으로 남아 있다. 중론 4권, 동아시아 불교 전통에서는 오랫동안 거의 전적으로 의존해 온 주석서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중론은 대부분 한역본을 모본으로 한 번역서이다. 이 한역본은 청목이 주석한 범어본을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다소 가필하여 409년에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주석자인 청목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가 없고, 구마라집이 한역을 할 때 모본으로 썼던 청목의 범어본도 전해지지 않는다. 중국의 삼론종의 길장(吉藏)은 중관론소(中觀論疏) 20권을 저술하였다.
부인이 있는 자는 없는 것처럼 하며, 슬피 우는 자는 슬퍼 울지 않는 것처럼 하며, 기뻐하는 사람은 기쁘지 않은 것처럼 하며, 상품을 산 사람은 사지 않은 것처럼 하며, 세상과 교섭이 있는 사람은 거기에 깊이 들어가지 않은 것처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어떤 모습을 갖춘 것은 (변해서)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고린도인의 첫 번째 편지7, pp.29-30)
크리스트교의 부정신학(否定神學)에서도 같은 모습의 내용을 말한 것을 볼 수 있다. 루돌프 웃토는 말한다. “이 부정신학이란 신앙과 감정을 소실시켜 무(無)에 돌아가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 속에는 오히려 가장 고귀한 헌신의 정신을 포함하고 있다. 크리소스톰이 가장 엄숙한 고백과 기도를 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은 부정적 속성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가 그것에 의해서 다시 보여주었던 것은 감정이나 체험은 개념적 사색보다도 아주 멀리 먼 곳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고, 형식에 있어서는 부정적인 개념은 상징(우리가 이데오그램이라고 부르는 것)이 되어, 예를 들어 절대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해도 역시 가장 적극적인데 있는 의미내용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크리소스톰의 예는 부정신학이 순수한 종교적 뿌리에서, 곧 신성한 것의 경험에서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을 동시에 보여준다.”(신성한 것의 관념)
디오니우스 아레오파기타의 부정적인 서술, 베르나르의 알지 못함, 로이스부르크의 “모든 애인들이 자기를 잊어버리는 희미한 침묵, 에크하르트와 베메의 사상은 이러한 선상에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에크하르트는 무(無)의 철학에 의하여 해탈을 목표로 하고 있다.
로이스부르크는 “신을 보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였다. “그의 정신은 아직 분화되어 있지 않고 구별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의 몸 이외에는 어떤 것도 느끼지 않는다.”라고…. 이 관념은 대승불교에 있어서 무분별지(無分別智, 구별하는 것이 없는 지식)에 대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행위의 기본적인 덕으로 자비 사랑과 절대자의 지식이 실질적으로는 같은 것이라고 하는 견해는 반드시 불교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지혜와 자비가 실질적으로는 똑같다고 하는 대승의 견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복잡한 논증에서도 들어있는 내용이다. 그곳에서는 “신은 그 본질에 있어서 선(善)이다”(신학대전 제1부), “신은 이른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동서)라고 한다.
이런 관념은 그 이후 서양인들의 사이에 정착하였다. 약간의 문인들에 의해서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와 같이 동서의 사이에는 대응 관계가 나타나고 있지만, 그러나 서양에 있어서 부정신학과 신비주의는 뭐라 해도 부수적인 것으로 있는 방계의 흐름에 지나지 않았다. 동아시아 남아시아에서는 적지 않지만 교의적으로는 주류로 되어 있다. 공관(空觀)에 의한 사상은 서양에서 널리 뿌리내리기가 가능하지 않지만, 동양에서는 대승불교를 통해서 일반화 되었다(정토진종의 교학에서 말하지만, 공의 이론을 기초로 하고 있다. 적지 않지만 교의상에서는 표면적으로는 기본사상으로 보여지고 있다). 여기에 동과 서가 중점을 두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Ⅲ. 나가르주나의 저작
1. 저작의 개관
1) 中論頌(Mūlamadhyamakakārikā) 나가르주나(용수)의 주저서 이다. 27장 449게송(한역에서는 445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Ⅱ부에서 자세히 밝혔듯이 공(空) 연기(緣起) 등 나가르주나의 가장 기본적인 사상을 서술하였다.
산스크리트 Mūlamadhyamakakārikā는 '中道의 원리'라는 뜻이다. 용수는 붓다의 진의가 공사상에 들어있다고 보고, 대승반야공관이야 말로 근본불교정신인 '연기(緣起)·무아(無我)·중도(中道)'를 가장 바르게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중론송은 이 공관에 입각하여 엄격한 논리와 종교적 직관을 결합하여 궁극적 '공'(空)의 교리를 명쾌하게 제시한 뛰어난 저서이다. 나가르주나의 근본 철학은 반야(般若 Prajñāpāramitā)라는 가장 완전한 지혜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중론송에 이르러 반야부 경전들에서 설하고 제시하고 있는 '공'에 대한 다양한 통찰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450여 개의 게송(偈頌)으로 이루어진 중론송은 중도의 참된 뜻은 모든 집착을 떠나는 데에 있음을 밝히고 무상한 현상계뿐만 아니라 열반 그 자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현상적인 제법 내지 열반(涅槃)조차도 그 자체에 실체적인 것은 없다는 교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 저서는 일시적인 현상계와 열반 그 자체가 궁극적으로는 동일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그는 기존의 불교학 전통인 특히 상좌부 논장(論藏)의 분류법과 분석법을 논리적 극한에까지 끌어들여 철저한 공관에서 재검토하였다. 논장에서 밝히고 있는 제법의 존재에 대한 여러 가지 요소들, 인(因)·연(緣), 온(蘊) 처(處) 계(界)·육계(六界) 등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 개체나 구성요소들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 가령 생(生), 멸(滅), 거(去), 래(來), 작(作), 견(見), 염(染), 수(受), 취(取), 전도(顚倒) 고(苦)·낙(樂) 등에 대해서도 연기 무자성 공의 입장에서 보면 실체적(實體的)으로 항유(恒有)한다고 볼 수 없음을 증명해 내고자 하였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수행의 경지, 능력 등을 존재론적 무(無)가 됨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나가르주나의 논리체계는 오구문파(五求門破)나 양도론법(兩刀論法)과 같은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논리 이론으로, 불타(佛陀)의 진의를 알지 못한 채 교리 개념만을 집착·분별·회론하는 일부 아비달마 논사들의 잘못들을 파사(破邪)의 입장에서 현정(顯正)하고자 하였다. 오구문파란 일체의 모든 것들에 대해 다섯 가지의 관찰을 한다. 곧 “상호간 서로 같은 것인가”, “서로 다른 것인가”, “어느 하나는 다른 하나를 갖고 있는 것인가”, “어느 하나 안에 다른 하나가 있는 것인가”, “반대로 다른 하나에 그것이 있는 것인가” 를 추구해서 동일(同一), 별이(別異), 소유(所有), 상호(相互)간 서로에게 내재(內在)함을 모두 부정함으로서 그 실체적 존재성을 부정한다.
양도법이란 제법의 일어나는 현상을 공관을 통하여 고찰하여 그 주체(主體)의 인과(因果)관계나 능소(能所)관계가 서로가 동일(同一)하지도 합일(合一)되거나, 공존(共存)하지도 않으므로 같지도 함께하지도 다르지도 않음을 파악하는 것이다. 곧 제법의 현상은 불일(不一). 불상(不常), 불공(不共), 불합(不合)이고, 또한 서로는 전혀 관련성 없는 별개적 이체(異體)인 것들이라고도 할 수 없으므로, 불이(不異)·부단(不斷)·비무(非無)가 아닐 수 없다고 논증하는 방법이다.
서로를 동일(同一, 合一)하다고 하면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다른 것들[別異, 不合]이라 보면 단견(斷見)이 생기는 모순·오류·불합리(不合理)에 빠지고 만다는 등의 귀류논증법(歸謬論證法)을 종횡 구사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중론(中論)은 대승반야공관에 입각하여, 온갖 회론을 없애기 위해, 불생(不生)이나 불거(不去)인 까닭을 밝혀내는 그 특수 논중논리로써, 생(生), 멸(滅), 상(常), 단(斷), 일(一), 이(異), 래(來), 거(去), 유(有), 무(無) 등의 양극단을 초월한 불생불멸(不生不滅) 내지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中道) 실상(實相)세계에 참다운 진리성이 있음을 설파한 것이다. 곧 이와 같은 논증방법의 궁극적 목적은 불타의 가르침의 참된 정신인 중도를 바로 밝혀내고자 한 것이었다.
청목이 주석한 중론이 번역된 이후 용수의 십이문론(十二門論) 및 그의 제자 제바(提婆)의 백론(百論)과 합하여 삼론(三論)이라 불려 삼론종이 성립되었다. 또한 천태종(天台宗)의 지의(智顗)는 중론을 기초로 '공(空)·가(假)·중(中)'의 삼제설(三諦說)을 세워 천태종의 관법체계로 삼았다.
이 저술에 대해서는 다수의 주석서가 있다. 무외(無畏)·불호(佛護)·청변(靑辨)·무착(無着)·안혜(安慧)·월칭(月稱) 등의 주석이 있으나, 월칭의 《Prasannapad》는 현존하는 유일한 산스크리트 원전이다.
여기서는 앞에서(3. 공의 논리) 주석서에 대해서 서술한 것을 참조할 수 있다.
a) 무외론(Akutobhayā, 無畏論)
간단한 주석으로 티베트의 전승에 의하면 나가르주나 자신의 주석이라고 한다. 티베트역만이 존재하고 산스크리트 원전은 일실되었다. 근래의 연구에 의하면 이것은 가장 오래된 주석으로 참고할 만한 가치가 크지만 주석이 그다지 세밀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저술은 나가르주나에 가탁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서장대장경(西藏大藏經)의 일부로 포함된 티베트본이 있는데, 이것은 'Akutobhaya(일체의 두려움에서 벗어남)'이라는 제목이 붙어져 있어 무외론(無畏論)이라고 한다.
b) 청목석(핑갈라 Pingala, 靑目釋)
4세기 전반 청목의 주석으로, 구마라집의 한역으로 남아 있다. 중론 4권, 동아시아 불교 전통에서는 오랫동안 거의 전적으로 의존해 온 주석서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중론은 대부분 한역본을 모본으로 한 번역서이다. 이 한역본은 청목이 주석한 범어본을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다소 가필하여 409년에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주석자인 청목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가 없고, 구마라집이 한역을 할 때 모본으로 썼던 청목의 범어본도 전해지지 않는다. 중국의 삼론종의 길장(吉藏)은 중관론소(中觀論疏) 20권을 저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