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계박(繫縛)과 해탈(解脫)의 고찰
1. 만일 여러 가지가 형성된 것[諸行]이 윤회한다면 그런 것들은 상주하고 영원히 존재하여 윤회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무상(無常)한 것들은 윤회하지 않는다. 중생에 관해서도 이 관계는 같은 것이다.
2. 만약 개인존재(pudgala, 프드갈라)가 윤회한다고 한다면 다섯 가지 구성요소인 오온과 열두 영역인 십이처 십팔의 구성요소인 십팔계 중에서 다섯 가지로 구해도 그런 개인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 윤회한다고 하는가.
3. 개인존재를 구성하는 집착의 요소에서 다른 집착의 요소로 윤회하는 자는 정신이라든가 인간이라고 하는 신체가 없는 자가 되리라. 그러나 신체가 없고 또 집착의 요소[取]도 없는 者는 어떤 者이겠는가. 또 그것이 어떻게 윤회하겠는가.
4. 여러 가지로 형성된 것이 니르와나(열반)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중생이 열반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도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해도 성립하지 않는다.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 것들이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해도 성립하지 않는다. 중생에 있어서도 또한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해도 성립하지 않는다.
5. 여러 가지로 형성된 것들은 생멸(生滅)의 성질을 갖추고 있어서 속박되지도 않고 해탈하지도 않는다. 생기는 중생도 그것들과 같은 부류들에게도 속박되지도 않고 해탈되지도 않는다.
*제행(諸行)의 생멸하는 것들은 속박되지도 않고 해탈하지도 않는다. 중생도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속박되지도 않고 해탈하지도 않는다.
6. 만일 집착의 요소가 속박된다면 집착의 요소를 갖고 있는 주체는 속박되지 않는다. 집착의 요소가 없는 주체도 속박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하는 것이 속박되는 것이겠는가.
*오온의 몸을 보면 만일 집착의 요소인 오온이 속박된다면 오온의 요소로 이루어진 몸을 가진 주체로서 중생은 속박되지 않는다. 오온이 속박의 존재라면 몸도 속박의 존재로 두 개의 존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곧 몸이 없으면 오온도 없고 오온이 없으면 몸도 없게 된다. 몸이 없는 경우도 아예 속박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태에 속박이 존재하겠는가.
7. 만일 속박되는 자 보다도 이전에 속박이 존재한다면 속박은 뜻 그대로 기꺼이 속박되리라. 그런데 그런 속박은(속박되는 자에 앞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외의 것이라면 지금 현재 사라지는 것, 이미 사라진 것,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의 고찰에 의해 이미 설명하였다.
*만일 속박되는 자가 먼저 속박되어 있다면 응당 속박된 자를 (다시) 속박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속박이 먼저 있을 수는 없다. 나머지는 관거래품(觀去來品)의 대답과 같다는 것이다.
8. 요컨대, 속박된 자는 해탈하는 일이 없다. 속박되어 있지 않은 자도 해탈하지 않는다. (또) 속박되어 있는 중인 자가 해탈하는 것이라면 속박과 해탈이 동시에 있다고 하는 것이 된다.
*속박된 자는 해탈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속박되지 않은 자도 역시 해탈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속박이 없었기 때문이다.
9. 나는 집착하는 요소가 없게 되어 열반에 들게 될 것이다. “나에게 열반이 존재할 것이다”라고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집착이라고 하는 큰 편견이 일어난다.
*만일 모든 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열반을 획득하리라. 만일 이와 같이 말하는 사람이라면 도리어 받아들임에 속박된 것이 된다.
10. 무릇 열반이 있다고 상정하는 것도 없고 윤회가 없다고 부인하는 것도 없는 경우에는 어떠한 윤회, 어떠한 열반이 고려될 수 있을까.
*생사를 떠나서 따로 열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상의 뜻이 이러하니 어떻게 (생사와 열반을) 분별하겠는가.
제17장 업과 과보의 고찰[觀業品]
1. 자신을 억제하고 타인을 이익되게 하는 자비심은 곧 법으로 행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도 후세에 있어서도 과보를 받는 종자이다.
*사람은 능히 그 마음을 억누르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자비심이 있다. 이것은 현세와 내세의 과보를 초래하는 씨앗이다.
2. 행위(업)는 마음속에서 생각하는 것[思業]과 생각이 끝난 후의 업[思己業]이 있다고 말하고, 또한 그 행위는 여러 종류의 구별이 있다고 최고의 선인(仙人, 붓다)에 의해 설해졌다.
*최고의 선인(붓다)은 마음속에서 생각하는 업과 생각한 후의 업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또 그 업에는 갖가지 구별이 있다고 선언되었다.
3. 그 중에서 마음속에 생각이라고 설한 사업은 그것은 뜻에 관한[業] 것에 속한다고 전해진다. 그것에 대해서 마음속에 생각해서 표면에 나타나는 행위(사기업)라고 불리는 것은 신체에 관한 신업과 말하는 것에 관한 것으로 구업에 속한다.
4. ①말과 ②신체에 의한 동작과 ③無表라고 불리는 욕망에 물듦에서 아직 떠나지 않은 것과 또한 ④다른 갖가지 無表라고 불리는 욕망의 물듦에서 떠나 있는 것과
5. 또한 ⑤선한 과보를 누리는 공덕의 선행과, ⑥같은 모습에 악한 과보를 누리는 악덕의 악행과, 다시 ⑦마음속에서 생각나는 것과, 이런 것이 행위를 나타내는 일곱 가지라고 전해진다.
6. 만약 그 행위(업)로 과보가 익을 때까지 존속하여 주한다면 그것은 상주한다고 부르게 된다. 또한 만약 행위(업)가 소멸해 버린다면 소멸한 존재가 어떻게 과보를 생하여 얻는다고 하겠는가.
*업이 (그대로) 머물러서 과보를 받는 것이라면 이 업은 상주하는 것이 된다. (반대로) 소멸한다면 업이 없어진 것이니 어떻게 과보를 생하겠는가.
7. 싹에서 시작하는 식물의 연속(상속)은 종자로부터 출현한다. 그것(=싹)으로부터 다시 열매가 출현한다. 그 연속은 종자가 없다면 출현하지 않는다.
*싹 따위가 상속하는 것이 모두 종자에서 생기는 것과 같이 그것(싹)으로부터 결실이 생기고 종자 없이는 상속도 없다.
8. 그런데 종자로부터 하나의 식물의 연속이 일어나고, 또 그 연속으로부터 과실이 생긴다. 먼저 종자가 있어서 그것에 기초하여 과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절되어 있는 것도 없고 또한 상주하는 것도 없다.
*종자로부터 상속이 있고 상속으로부터 과실이 있다. 종자가 먼저 있고 다음에 과실이 있으므로 종자와 과실의 관계가 단절된 것도 아니고 항상 된 것도 아니다.
9. 무릇 마음의 연속은 그 마음에서 나타난다. 그 연속에서 과보가 나타난다. 그 연속은 마음을 떠나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처럼 初心으로부터 心法이 상속하여 생한다. 그것으로부터 결과가 생하고 마음을 떠나서는 상속도 없다.
10. 그래서 마음으로부터 연속(상속)이 생기고, 그 연속으로부터 과보가 생긴다. 업이 선행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결과(과보)가 생기기 때문에 단절도 없고 상주도 없다.
*마음으로부터 상속이 존재하고 상속으로부터 결과가 존재한다. 업이 먼저 존재하고 나중에 그 과보가 있는 것이기에 (업과 과보의 관계가) 단절된 것도 아니고 항상 된 것도 아니다.
11. 열 가지의 희고 깨끗한 행위의 길[十白業道]은 법에 의한 행을 달성하는 수단이다. 금세와 후세에 있어서 법에 의한 행의 과보는 다섯 개의 욕락(欲樂)이다.
*능히 복덕을 성취시키는 것은 희고 청정한 행위의 길[十白業道]이다. 금세와 후세의 오욕락이 바로 이 희고 청정한 업의 과보이다.
12. 만일 이와 같은 분별이 존재한다면 많고도 큰 과실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분별은 이 점에 관해서는 가능하지 않다.
13. 다시 모든 부처님들과 혼자 깨달음을 연 사람(독각),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하는 사람(성문)들에 의해 칭송되었고, 이 경우에 적합한 견해를 나는 이제 설할 것이다.
*이제 또 다시 업에 순응하는 과보의 의미를 설명하리라. (그것은) 모든 부처님들과 벽지불 성문들이 칭찬하시고 찬탄하신 것이다.
14. 행위의 영향을 지니고 계속되는 윤회의 주체(부실법)는 채권(債券)과 같고, 행위(업)는 부채(負債)와 같은 것이다. 그 부실법(없어지지 않는 것)은 영역[界]에 관해서 말하면 네 종류(욕계 색계 무색계 무루계)이다. 또한 본성에 관해서 말하면 무기(無記)인데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15. 이것은 (견도위에서 끊어지는 견도소단) 단절에 대해서 말하면 네 가지의 진실한 진리(사제)를 관찰하는 단계(견도)에서 끊어지는 것은 아니고, 견도 이후 실로 반복 수습하는 단계[修道]에 의해서 끊어진다. 그러므로 없어지지 않는 것[=不失法]에 의해 갖가지 업의 과보가 생기는 것이다.
*업과 윤회는 사제의 관찰에 의해 끊는 바가 아니고, 오직 사유수(思惟修, 修道)로 끊어진다. 이런 부실법으로 모든 업이 그 과보를 갖게 된다.
16. 만일 그 부실법이 견도소단에 의해 끊어진다거나, 혹은 업의 이전에 의해 끊어진다면, 거기서는 업의 파괴라는 과실이 부수해서 일어나게 된다.
17. 그런데 마음으로부터 개인존재의 연속이 일어나고 또한 개인존재의 연속에서 과보가 일어나니, 과보는 업에 기반하여 있기 때문에 끊음도 없고 또한 항상 함도 없다.
*일체의 모든 행업은 비슷하건 비슷하지 않건 하나의 계에서 처음 몸을 받는 그 때에 그 과보가 홀로 생한다.
※법유(法有)의 입장에 서있는 사람은 이와 같이 주장하여 “항상 함도 아니고 끊음도 아니다[非常非斷]”라고 하는 불교의 근본적 입장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18. 그런데 이러한 부실법이라고 하는 원리(다르마)는 현재에서 두 가지 종류의 모든 업 하나하나에 대해서 하나하나 생긴다. 그래서 과보가 익을 때 까지 존속하기도 한다.
*이처럼 두 가지의 업은 현세에 그 과보를 받는다. 혹은 과보를 받고 나서도 그 업은 아직 존속한다고도 말한다.